# Gaston Bachelard (1994) *The Poetics of Space*. : Beacon Press. > [!INFO] > Type:: [[]] > Title:: The Poetics of Space > Author(s): [[Gaston Bachelard]] > Year:: 1994 > Tags:: > DOI:: > Citekey:: bachelard_poetics_1994 > ZoteroURI:: [Open in Zotero: The Poetics of Space](zotero://select/items/@bachelard_poetics_1994) > ReviewedDate:: [[2024-03-05]] ## Citation ```latex [@bachelard_poetics_1994] ``` ## Summary ## Annotation ### 서론 (Introduction) **1. 철학적 전환과 시적 이미지의 현상학적 접근** 바슐라르는 자신의 사유를 과학 철학의 근본적인 주제들로부터 발전시켜왔고, 현대 과학의 능동적이고 성장하는 합리주의의 주요 노선을 밀접하게 따랐던 철학자입니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습득한 모든 지식과 철학적 연구 습관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는 문화적 과거가 중요하지 않으며, 사유를 구성하고 조직하는 오랜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대신, 이미지가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수용해야 하며, “이미지의 새로운 것에 대한 황홀경(the very ecstasy of the newness of the image)” 속에서 시학의 철학이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적 이미지는 “정신 표면에 갑작스러운 돌출(a sudden salience on the surface of the psyche)”이며, 그 심리적 원인들은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습니다. > “The poetic image is a sudden salience on the surface of the psyche, the lesser psychological causes of which have not been sufficiently investigated.” (Bachelard, 1994, p. xv) 바슐라르는 어떤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것도 시학 철학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원리'나 '기초'라는 개념은 시의 본질적인 심리적 현실성과 참신성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유에 적용되는 철학적 반성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기존의 아이디어 체계에 통합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과 달리, 시학의 철학은 시적 행위가 "과거가 없으며(no past)", 적어도 그것의 준비와 출현을 추적할 수 있는 최근 과거가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새로운 시적 이미지가 무의식 깊이 잠재된 원형과 관계를 맺는 경우에도, 이 관계는 엄밀히 말해 인과적이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시적 이미지는 "내적인 추동에 종속되지 않으며(is not subject to an inner thrust)", 과거의 메아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지의 찬란함을 통해 먼 과거가 메아리치며, 이 메아리가 얼마나 깊이 울려 퍼지고 사라질지는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 참신성과 활동성 때문에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실체와 역동성을 가지며, "직접적인 존재론(“it is referable to a direct ontology” (Bachelard, 1994, p. xvi))"에 의존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존재론이 바로 그가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바슐라르는 시적 이미지의 존재를 측정하는 진정한 척도를 민코프스키(Minkowski)가 미묘하게 분석한 "반향(reverberation)"에서 찾습니다. 이 반향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존재의 울림(sonority of being)"을 가집니다. 시인은 존재의 문턱에서 말하며, 따라서 이미지의 존재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민코프스키의 현상학적 방식대로 그 반향을 경험해야 합니다. **2. 심리학적 및 정신분석학적 설명의 한계와 현상학의 필요성** 시적 이미지가 인과율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이 언급하는 원인들은 새로운 이미지의 예상치 못한 본질이나 그것이 창조 과정과 무관한 정신에 미치는 매력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이미지의 과거를 독자에게 부여하지 않지만, 그 이미지는 즉시 독자 안에 뿌리내립니다. 특이한 이미지의 소통 가능성은 "위대한 존재론적 의미(great ontological significance)"를 지닌 사실입니다. 바슐라르는 자신의 이전 연구들에서 상상력을 다룰 때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려 했으며, 과학 철학자로서의 습관에 따라 개인적인 해석 없이 이미지들을 다루려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신중한(prudent)' 태도가 상상력의 형이상학을 확립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The "prudent" attitude itself is a refusal to obey the immediate dynamics of the image.” (Bachelard, 1994, p. xviii) '신중함' 자체가 이미지의 즉각적인 역동성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태도라고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합리주의자로서 "지적인 습관을 버리는 것"이 작은 일상의 위기, 즉 사유의 분열을 의미했지만, 상상력의 현상학이라는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지적 습관을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이성주의자에게 그것은 일종의 사소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위기, 다시 말해 자기 사고 속의 분열을 구성한다." 이는 때로 매우 특이한 이미지가 어떻게 준비 없이 전 심리(psyche)의 응축처럼 보이고, 상식의 장벽과 훈련된 사유 체계를 넘어 다른 마음과 가슴에 반응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미지의 "초주관성(transsubjectivity)"은 주관적 참조의 습관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오직 현상학, 즉 개별 의식 속에 이미지가 나타나는 순간을 고찰하는 것만이 이미지의 주관성을 회복하고 그 충만함, 힘, 그리고 초주관성을 측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시적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변화적(variational)이며, 개념처럼 구성적(constitutive)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주관성과 초주관성은 한 번에 결정될 수 없습니다. > “These subjectivities and transsubjectivities cannot be determined once and for all, for the poetic image is essentially variational, and not, as in the case of the concept, constitutive.” (Bachelard, 1994, p. xix) 바슐라르는 시의 철학은 "정신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the mind)"이 아니라 "영혼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the soul)"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To specify exactly what a phenomenology of the image can be, to specify that the image comes *before* thought, we should have to say that poetry, rather than being a phenomenology of the mind, is a phenomenology of the soul. We should then have to collect documentation on the subject of the *dreaming consciousness*.” (Bachelard, 1994, p. xx) 그는 '영혼(soul)'과 '정신(mind)'이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를 현대 프랑스 철학과 심리학이 간과한다고 지적하며, 시의 철학은 이러한 어휘의 모든 힘을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영혼과 연결된 의식은 정신 현상과 연결된 의식보다 더 이완되고 덜 의도적입니다. 시에서 발현되는 힘들은 지식의 회로를 통과하지 않으며, 영감과 재능의 변증법은 영혼과 정신이라는 두 극을 고려할 때 명확해집니다. 바슐라르는 시적 몽상(revery)을 영혼의 현상학으로 집중적으로 연구할 계획을 밝힙니다. 몽상은 꿈과 자주 혼동되지만, 시적 몽상은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영혼을 위한 시적 즐거움을 준비합니다. 그는 피에르-장 주베(Pierre-Jean Jouve)의 "시는 형태를 개시하는 영혼이다(Poetry is a soul inaugurating a form)"라는 말을 인용하며, 여기서 영혼이 최고의 힘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개시한다고 설명합니다. **3. 시적 이미지의 수용과 그 존재론적 의미** 시적 이미지의 현상학적 탐구는 예술 작품을 수용하는 우리의 감정적 공명(resonances)을 넘어설 것을 요구합니다. 바슐라르는 "공명(resonances)"과 "반향(repercussions)"이라는 현상학적 이중성을 감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명은 우리의 삶의 다양한 차원에 흩어져 나타나는 반면, 반향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더 깊이 탐구하도록 초대합니다. 공명 속에서 우리는 시를 듣지만, 반향 속에서 우리는 시를 말하며, 그것은 우리 자신이 됩니다. 반향은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며, 마치 시인의 존재가 우리 자신의 존재인 것 같습니다. 공명의 다중성은 반향의 존재적 통일성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모든 열정적인 시 애호가들이 잘 아는 인상이라고 설명하며, 시가 우리 존재를 완전히 사로잡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의 장악력은 "공명-반향 이중성(resonance-reverberation doublet)"의 현상학적 특징을 지닙니다. 시적 이미지는 그 참신함으로 언어적 메커니즘 전체를 움직이게 하며, 우리를 말하는 존재의 근원(origin of the speaking being)에 위치시킵니다. 인과율을 넘어선 이 반향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순수하게 솟아나는 시적 힘을 느낍니다. 이미지는 표면을 흔들기 전에 깊이를 건드립니다. 이는 독서 경험에도 해당하며, 시를 읽으며 접한 이미지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 우리 안에 뿌리내립니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마치 우리가 그것을 창조했을 수도 있었다는 인상, 즉 우리가 그것을 창조했어야만 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미지는 우리 언어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우리를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표현하는 존재로 만듭니다. 즉, 그것은 동시에 표현의 생성(becoming of expression)이자 우리 존재의 생성(becoming of our being)이 됩니다. 여기서 "표현이 존재를 창조한다(expression creates being)". 이러한 관점은 바슐라르가 지향하는 존재론의 수준을 정의합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특수한 인간적 요소가 로고스(logos)라고 믿습니다. 시적 이미지는 로고스에서 비롯되며 "개인적으로 혁신적(personally innovating)"입니다. ==객관적인 비판적 태도는 "반향"을 질식시키고 원초적인 시적 현상이 시작되는 깊이를 원칙적으로 거부합니다.== 심리학자는 공명에 귀먹어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려 하고, 정신분석학자는 이미지를 지성화하여 해석의 실타래 속에서 반향을 잃습니다. 시적 이미지는 결코 인과율에 의해 준비되지 않습니다. 특히 문학적 의미에서의 문화나 심리적 의미에서의 지각은 이미지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바슐라르는 시적 이미지의 본질적인 참신함이 "말하는 존재의 창조성(the speaking being's creativeness)"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이 창조성을 통해 상상하는 의식이 매우 단순하지만 순수하게 "기원(an origin)"임을 증명한다고 강조합니다. > “I always come then to the same conclusion: the essential newness of the poetic image poses the problem of the speaking being's creativeness. Through this creativeness the imagining' consciousness proves to be, very simply but very purely, an origin. In a study of the imagination, a phe nomenology of the poetic imagination must concentrate on bringing out this quality of origin in various poetic images.” (Bachelard, 1994, p. xxiv) **4. 연구의 범위와 토포-분석(Topo-analysis)** 바슐라르는 자신의 연구를 순수 상상력에서 비롯된 "시적 이미지 그 자체의 기원(poetic image at its origin)"에 한정합니다. 이는 수많은 이미지의 집합체로서의 시의 구성 문제를 제쳐두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광범위한 프로젝트가 자신이 제시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관찰의 순수성을 해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진정한 현상학자는 "체계적으로 겸손"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독자가 읽은 이미지와 동일한 수준의 시인이 되게 하는 현상학적 독서 능력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자만심(taint of pride)"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행복한 공간(felicitous space)”의 매우 단순한 이미지들을 검토 대상으로 삼아, 공간의 인간적 가치, 즉 우리가 붙잡을 수 있고, 역경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공간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그는 이러한 탐구를 "토포필리아(topophilia)"라고 부릅니다. 상상력에 의해 포착된 공간은 측량사의 측정과 추정의 대상인 무관심한 공간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긍정성에서가 아니라 상상력의 모든 편향과 함께 "살아진(lived in)" 공간입니다. 특히, 그것은 거의 항상 "매력(attraction)"을 행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호하는 한계 내에서 존재를 집중시키기 때문입니다. 바슐라르는 이 책의 장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자신의 탐구 방향을 제시합니다. - **1장. 집: 지하실에서 다락방까지. 오두막의 의미 (The House. From Cellar to Garret. The Significance of the Hut)**: 친밀한 내부 공간의 가치를 현상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있어 집은 특권적인 존재입니다. 집은 분산된 이미지들을 제공하는 동시에 이미지들의 총체를 형성합니다. 집의 이미지는 "심리적 통합의 진정한 원리(a veritable principle of psychological integration)"를 제공하며, 기술 심리학, 심층 심리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현상학은 집과 함께 바슐라르가 "토포-분석(topo-analysis)"이라 명명한 학설의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집이 꿈을 꾸고 상상하는 데 필요한 안식처이며, 인간성의 은유임을 발견합니다. 특히 집의 수직성을 지하실과 다락방의 극성(polarity)으로 분석하며, 지하실은 무의식의 영역, 다락방은 합리적 사고의 영역으로 대비시킵니다. - **2장. 집과 우주 (House and Universe)**: 집은 겨울에 의해 포위될 때 그 친밀성이 증대된다고 말하며, 집과 외부 세계(우주) 간의 역동적인 관계를 탐구합니다. 폭풍우에 휩싸인 집의 저항은 인간의 용기와 동일시됩니다. - **3장. 서랍, 궤짝, 옷장 (Drawers, Chests and Wardrobes)**: 이 장에서는 비밀을 숨기는 장소로서의 사물들, 즉 서랍, 궤짝, 옷장 뒤에 숨겨진 심리적 의미와 친밀한 몽상의 세계를 탐구합니다. 특히 베르그송(Bergson)의 "서랍 은유"를 비판하며 이미지와 은유의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이미지가 존재를 부여하는 순수한 상상력의 산물임을 주장합니다. - **4장. 둥지 (Nests)**: 둥지는 새들에게 안식처이자 생명을 주는 집이며, 인간의 "원시성(primitiveness)"을 드러내는 원초적인 이미지로 제시됩니다. 둥지 이미지는 따뜻한 보금자리, 즉 안식처의 원시적 본질과 연결됩니다. - **5장. 조개껍질 (Shells)**: 조개껍질은 둥지와 유사하게, 물리적 친밀성을 상상하는 대상이자 은신처의 이미지입니다. 또한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동적인 보호막이자, 내면의 생명이 외부로 분출하는 동적인 잠재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됩니다. - **6장. 구석 (Corners)**: 집안의 모든 구석, 방의 모든 모서리는 상상력에 있어 고독의 상징이며, 방이나 집의 씨앗이 됩니다. 구석에 틀어박히는 행위는 내면적 친밀성과 안식의 욕구를 반영합니다. - **7장. 소형 (Miniature)**: 동화 속의 미니어처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가 응축되고 풍요로워지는 상상력의 영역으로 제시됩니다. 작은 것에서 위대함을 경험하는 '소형'의 현상학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합니다. - **8장. 내밀한 광대함 (Intimate Immensity)**: 광대함은 몽상의 철학적 범주이며, 인간 내부의 무한한 공간과 외부 세계의 광대함이 상응합니다. 특히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학에서 'vast'라는 단어가 어떻게 친밀한 공간의 무한함을 나타내는지를 분석합니다. - **9장. 외부와 내부의 변증법 (The Dialectics of Outside and Inside)**: 외부와 내부는 단순히 기하학적 대립이 아닌, 인간 존재의 복잡한 경험을 반영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친밀성과 소외, 보호와 개방 사이를 오가며, 언어의 표현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합니다. - **10장. 둥근 모양의 현상학 (The Phenomenology of Roundness)**: 이 장에서는 '존재는 둥글다(being is round)'는 철학적 명제를 탐구하며, 둥근 형태가 어떻게 존재의 통일성, 집중, 평온함과 연결되는지를 다룹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공간 이미지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심리학적 설명을 넘어선 상상력의 본질적인 창조성과 그 존재론적 의미를 밝히고자 합니다. 그의 작업은 문학적 텍스트를 통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과 우주적 경험 사이의 섬세한 상호작용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제1장은 "집. 지하실에서 다락방까지. 오두막의 의미" **1. 집: 친밀한 공간 현상학의 특권적 존재** 바슐라르는 집을 "친밀한 내부 공간의 가치를 현상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특권적인 존재"로 규정합니다. 그는 집이 분산된 이미지들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이미지들의 총체를 구성한다고 설명하며, 상상력이 현실의 가치를 증폭시키고 집을 중심으로 이미지들을 집중시킨다고 주장합니다. 핵심 질문은 우리가 머물렀던 모든 집의 기억과 꿈꿨던 집들을 넘어, 보호받는 친밀함의 이미지들이 지닌 비범한 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본질적인 친밀하고 구체적인 본질을 분리할 수 있는가입니다. 바슐라르에게 있어 집은 단순히 묘사되거나 안락함을 위해 분석될 "대상"이 아닙니다. 현상학자, 정신분석학자, 심리학자(이들의 중요성은 순서대로 감소한다고 명시됨)는 집의 사실이나 인상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거주하는 본원적 기능과 연결된 "원초적인 미덕"에 도달해야 합니다. 모든 주거지에서 현상학자의 첫 임무는 "원초적인 껍질(original shell)"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2. 집: '세계의 모퉁이'이자 '첫 번째 우주'** 선택된 장소에 대한 애착의 깊은 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미묘한 차이들을 심리적 현상의 "초기 개요(first rough outlines)"로 간주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 공간에 어떻게 거주하며, "세계의 모퉁이"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집은 "우리의 첫 번째 우주이자, 모든 의미에서 진정한 코스모스"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주거지라도 친밀하게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슐라르는 추상적인 '세계 의식적' 철학자들이 집을 알기 전에 우주를, 안식처를 알기 전에 먼 지평선을 아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미지들을 현상학적으로 연구하면 "거주하는 공간의 가치, 즉 자아를 보호하는 비자아(the non-I that protects the I)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얻게 됩니다". 모든 진정으로 거주된 공간은 '고향'의 본질을 지니며, 인간이 아주 작은 피난처를 찾을 때마다 상상력은 "만질 수 없는 그림자들의 벽"을 세우고, 보호의 환상으로 위안을 얻습니다. 전체 과거가 새로운 집에 깃들고, 기억과 상상력은 상호적인 심화 작용을 합니다. 꿈을 통해 삶의 다양한 거주지들이 서로 스며들어 과거의 보물들을 간직하며, 우리는 "정지된 유년기(Motionless Childhood)"의 땅으로 여행합니다. "우리는 고정(fixations), 즉 행복의 고정을 살아갑니다(We live fixations, fixations of happiness)". 집은 "몽상을 보호하고, 몽상가를 보호하며, 평화롭게 꿈꿀 수 있게 해줍니다". 몽상은 "자기 가치화의 특권"을 가지며, 집은 "인류의 생각, 기억, 꿈을 통합하는 가장 위대한 힘 중 하나"이며, 몽상이 이러한 통합의 결속 원리입니다. 집은 인간을 "하늘의 폭풍우와 삶의 폭풍우"로부터 지켜주고 "육체이자 영혼"이며, "인간의 첫 번째 세계"입니다. 인간은 "세계에 던져지기" 전에 "집이라는 요람에 놓여 있습니다(man is laid in the cradle of the house)". 우리가 태어난 집을 꿈꿀 때, 우리는 "원초적인 따뜻함(original warmth)", "재료적 낙원의 잘 조절된 물질(well-tempered matter of the material paradise)"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몽상은 우리를 다시 그곳으로 이끌고, 시인은 집이 유년기를 "그 팔 안에" 붙잡아 둔다고 말합니다. **3. 위상분석(Topoanalysis): 친밀한 삶의 장소에 대한 체계적인 심리 연구** 집 덕분에 우리의 많은 기억이 '집에 깃들어' 있으며, 특히 지하실과 다락방, 구석과 복도 같은 공간이 기억의 안식처 역할을 합니다. 바슐라르는 정신분석학의 보조 도구로 "위상분석(topoanalysis)"이라는 용어를 제안하는데, 이는 "친밀한 삶의 장소에 대한 체계적인 심리 연구"를 의미합니다. 기억으로 구성된 과거의 극장에서 "무대 설정은 인물들을 그들의 지배적인 역할에 붙잡아 둡니다". 우리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존재의 안정된 공간에서의 "고정(fixations)"만을 압니다. "공간은 압축된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space contains compressed time)". 자신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중요한 기억들을 탈사회화(desocialize)"하고 "고독과 동일시되는 장소에서 가졌던 몽상의 평면"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 연구에서는 몽상이 꿈보다 유용합니다. 위상분석은 방의 크기, 다락방의 혼란, 구석의 따뜻함, 빛, 침묵 등 공간적 세부사항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서는 공간이 전부인데, 시간은 기억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멈추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움직이지 않고(motionless)", 공간에 단단히 고정될수록 더 견고해집니다. 친밀함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날짜의 확정보다 "친밀함의 공간에서의 지역화(localization)"가 더 시급합니다. 열정은 고독 속에서 "끓고 또 끓으며(simmer and re-simmer)", 고독했던 과거의 모든 공간은 우리 안에 지워지지 않게 남아있습니다. 비록 현재에는 사라지고 미래의 모든 약속과 무관해졌을지라도, 그 공간은 "창조적(creative)"입니다. 예를 들어, 다락방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웠을지라도, 몽상을 통해 다시 포착된 기억 속에서는 "작고 크고, 따뜻하고 시원하며, 항상 위안을 주는(small and large, warm and cool, always comforting)" 공간이 됩니다. 바슐라르는 무의식이 "행복의 공간에 잘 그리고 행복하게 자리 잡고 있다(well and happily housed, in the space of its happiness)"고 덧붙입니다. 정신분석학이 인간을 무의식의 거처 밖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 반해, 위상분석은 "내면적 존재에게 외면적 운명을 부여"해야 함을 인정합니다. 도로와 길의 이미지를 통해 "외향주의적 위상분석"의 가능성을 탐구하는데, 조지 샌드는 길을 "활동적이고 다양한 삶의 상징이자 이미지"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았던 그림들로 우주를 덮으며, 이는 정확할 필요 없이 "우리의 내면 공간의 방식에 따라 조율되기만 하면 됩니다". 바슐라르의 연구는 "친밀함의 영역, 즉 심리적 무게가 지배적인 영역"에 집중합니다. 모든 친밀한 공간은 매력을 통해 정의되며, 그 존재는 '안녕(well-being)'입니다. 따라서 위상분석은 "공간애(topophilia)"의 흔적을 지닙니다. **4. 꿈의 집의 특성: 일시적이고 깊이 있는 존재** 집의 지나친 그림 같음은 친밀함을 숨길 수 있으며, 기억의 집들은 묘사에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깊이의 문학, 즉 시"에 속하며, 그림자를 간직해야 합니다. 유년기 집의 비밀을 객관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몽상의 문턱에 서서 과거 속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orient)"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포도 냄새가 나는 다락방 찬장에 대한 묘사는 독자가 자신의 "유일한 찬장, 유일한 냄새"를 상상하도록 "독자에게 유예된 독서 상태를 유도"함으로써 친밀함의 가치를 전달합니다. 시인의 말을 들을 때 독자의 영혼은 공명하며, 민코프스키가 분석한 '반향(reverberation)'처럼 존재에 근원의 에너지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방을 쓰거나(write a room)", "방을 읽거나(read a room)", 또는 "집을 읽는(read a house)"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시인의 방을 읽는 대신 자신의 과거 속 공간을 떠올립니다. 기억의 집은 심리적으로 복잡하며, 친밀함의 가치는 분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집은 물리적으로 우리 안에 새겨져 "유기적인 습관들의 집합"을 이룹니다. 오래된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섬세하고 초기적인 몸짓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우리는 특정 집에 거주하는 기능의 '도표'이며, 다른 모든 집은 기본 테마의 변형에 불과합니다. 시의 위대한 기능은 "우리의 꿈의 상황을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집은 '고향'의 구현일 뿐만 아니라 '꿈'의 구현입니다. 그 모든 구석은 몽상의 안식처였습니다. 각자에게는 "실제 과거의 저편 그림자 속에 숨겨진 몽환적 집, 즉 꿈-기억의 집"이 존재하며, 바슐라르는 이를 "우리가 태어난 집의 지하실(crypt of the house that we were born in)"이라고 부릅니다. 유년기는 "현실보다 위대합니다". 꿈은 우리가 태어난 집에 대한 애착을 느끼는 데 생각보다 강력하며, 아이의 고독과 지루함의 순간들이 몽환적 집을 구성하는 데 중요합니다. 시를 읽는 것은 "본질적으로 몽상을 하는 것"입니다. **5. 수직성: 지하실과 다락방** 집은 "수직적인 존재"로 상상되며, 위로 솟아오르고 그 수직성에 따라 스스로를 차별화합니다. 또한 "집중된 존재"로 상상되며, 우리의 중심성 의식에 호소합니다. 수직성은 지하실과 다락방의 극성으로 보장되며, 이는 상상력의 현상학에 두 가지 매우 다른 관점을 제공합니다. 지붕의 합리성과 지하실의 비합리성을 대비할 수 있습니다. 지붕은 비와 태양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하며, 그 기울기는 기후를 나타냅니다. 반면 지하실은 "집의 어두운 존재(dark entity)", "지하의 힘"에 참여하며, 그곳에서 꿈꿀 때 우리는 "깊이의 비합리성과 조화를 이룹니다". 바슐라르는 C. G. 융이 지하실과 다락방의 이중 이미지를 사용하여 집 안의 두려움을 분석한 예를 인용합니다. 지하실(무의식)을 마주하는 대신 다락방에서 용기의 알리바이를 찾는 "신중한 남자"의 비유입니다. 다락방의 두려움은 쉽게 "합리화"될 수 있지만, 지하실에서는 "밤낮으로 어둠이 지배"하며 합리화가 어렵고 불확실합니다. 무의식은 "문명화될 수 없으며", 지하실로 내려갈 때 촛불을 듭니다. 현상학자는 이미지를 "과장"해야 하며, 에드거 앨런 포의 이야기들은 "유년기 두려움의 실현"입니다. 지하실은 "파묻힌 광기, 벽에 갇힌 비극"이 되며, 범죄 지하실 이야기는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깁니다. 앙리 보스코의 소설에서 '울트라 지하실(ultra-cellars)'은 주변 지하실을 지배하려는 도시 거주자의 꿈처럼 나타납니다. 『골동품상(L'Antiquaire)』의 지하실은 "네 개의 문이 열리는 아치형 원형 홀"이며, 이는 지하 세계의 비밀스러운 성역입니다. 독자는 꿈을 통해 이곳을 탐험하며, 고통과 지하 궁전의 경이로움을 경험합니다. 보스코의 지하실은 "운명이 엮이는 직조기" 역할을 합니다. > “Just here, a phenomenological analysis will prove to be effective. But what does the phe nomenological attitude advise? It asks us to produce within ourselves a reading pride that will give us the illusion of participating in the work of the author of the book.” (Bachelard, 1994, p. 21) “현상학적 인 태도가 우리들에게 조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들에게 요구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바로 책의 창조자의 작업에 참여한다는 환각을 줄 독서의 오만을 우리들 내부에 심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한 작품을 처음 읽을 때에는 거의 취해질 수 없다 최초의 독서는 너무 큰 수 동성을 지니게 된다 그 경우 독자는 아직도 약간은 어린아이, 독서가 마 음을 즐겁게 할 뿐인 어린아이인 것이다 그러나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이 나 읽혀지자마자 곧 되읽혀져야 한다 스케치라고 할 최초의 독서 다음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할 독서가 이루어진다.” (Bachelard, 2003, p. 100) 보스코의 또 다른 묘사에서는 '우주의 뿌리를 가진 집'이 바위에서 푸른 하늘의 탑까지 솟아나는 "돌 식물"로 나타납니다. 『골동품상』에서 지하실로 내려간 영웅은 "거대한 물줄기"를 발견하며, 이는 "우주적 두려움(cosmic fear)"을 불러일으키고 "원시적 상황으로 되돌려진 인간의 위대한 전설"을 반영합니다. 현실과 꿈이 하나가 되어 집은 산과 물의 운명과 연결된 "자연적 존재"가 됩니다. 이 몽상은 독자에게 안식감을 주며, 시간은 정지되어 더 깊은 심리적 탐색에 유리합니다. 지하실은 나선형 계단을 통해 탑으로 이어지며, 탑은 "완전히 둥글고" "아치형 천장"을 가진 친밀함의 공간입니다. "꽃은 언제나 아몬드 안에 있다(The flower is always in the almond)"는 모토는 집과 침실의 잊을 수 없는 친밀함을 상징합니다. 이 집은 땅에서 하늘까지 뻗어 "인간 존재의 수직성"을 보여줍니다. 꿈의 집 위상분석은 세 단(지하실, 1층, 다락방) 또는 네 단(1층과 다락방 사이에 한 층 추가)까지만 헤아릴 수 있습니다. 계단은 지하실로 (항상 아래로), 침실로 (오르내림), 다락방으로 (항상 위로, 더 가파르고 원시적이며, "더 평화로운 고독"으로 향함) 구별됩니다. 정신분석학은 꿈의 해석에 전체적인 상징주의를 요구하여 몽상과 기억의 복합성을 간과합니다. 반면 몽상의 현상학은 기억과 상상력의 복합성을 풀어내며, 상징의 미분화에 민감해집니다. 파리의 아파트와 같은 "몽환적으로 불완전한 주거지"는 "수평성(horizontality)"만 지니고 뿌리나 지하실이 없습니다. 고층 건물은 하늘과의 수직적 관계를 상실하게 합니다. 도시 주택은 "우주성(cosmicity)"이 부족하고 외부 세계의 폭풍에 둔감합니다. 바슐라르는 도시 소음을 바다 소리로 바꾸어 상상하며, 이를 통해 "추상적-구체적 몽상"을 경험합니다. 꾸르베가 파리를 바다처럼 그린 것처럼, 이미지는 소리를 "자연화"하고 덜 적대적으로 만듭니다. **6. 친밀함의 집중: 오두막, 둥지, 그리고 모퉁이** 방이 많은 집에서는 단순함의 중심을 찾아야 합니다. 보들레르는 궁전에는 "친밀함을 위한 공간이 없다(no place for intimacy)"고 말합니다. 단순함은 때때로 너무 합리적으로 강조되지만, 몽상의 강력한 원천이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피난처의 원시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앙리 바슐랭의 유년기 집은 단순했지만, 숲 속 오두막에서 사는 상상을 통해 고독을 강화시켰습니다. 이 "오두막 꿈"은 실제 집의 중심에서 실현되며, 선사 시대의 "둥근 집, 원시적 오두막"에 대한 연결고리를 제공합니다. 오두막은 "거주 기능의 핵심 뿌리(tap-root of the function of inhabiting)"이며 전설의 중심입니다. 은둔자의 오두막은 "집중된 고독"의 상징이며, "명상과 기도의 우주"를 형성합니다. > “위대한 이미지들이란 역사와 선역사(朱匯史)55)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추억 인 동시에 전설인 법이다” (Bachelard, 2003, p. 115) 위대한 이미지들은 역사와 선사시대를 모두 가지며, "기억과 전설의 혼합체"입니다. “Great images have both a history and a prehistory; they are always a blend of memory and legend, with the result that we never experience an image directly.” (Bachelard, 1994, p. 33) 시는 "유년기 표현에 대한 향수"를 제공하며, 원초적인 이미지들은 "다시 상상하게 하는 초대"이자 "인간 존재의 존재 확실성이 집중된 영역"을 되돌려줍니다. 오두막 그림들은 상상력의 현상학을 위한 교과서가 될 수 있습니다. “시 적 몽상은 졸음 속의 그것과는 반대로 결코 잠들지 않는 것이다” (Bachelard, 2003, p. 120)” (Bachelard, 2003, p. 119-20) 창문의 등불은 "집의 눈"이자 "오랜 기다림의 상징"입니다. 이 빛을 통해 집은 "인간처럼 보고", 밤에 눈을 뜬 것처럼 됩니다. 집은 때때로 "풀 속의 반딧불이"처럼 빛나거나, "땅의 별자리"를 형성하는 "풀의 별"로 불립니다. 릴케의 "먼 오두막의 불 켜진 창문" 이미지는 고독을 상징하며, 독자를 고독에 최면을 걸린 것처럼 만듭니다. ### 2장: 집과 우주 (House and Universe)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 『공간의 시학』 2장 "집과 우주"는 1장의 "집: 지하실에서 다락까지"에서 다룬 친밀한 공간으로서의 집이라는 주제를 확장하여, 집이 외부 세계, 즉 우주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상상력과 꿈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이 장은 단순히 물리적인 구조물을 넘어, 친밀성과 광대함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조화시키는 상상력의 본질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둡니다. **1. 겨울에 둘러싸인 집의 시학: 친밀성의 강화** 바슐라르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집에 부여하는 특별한 친밀성을 강조합니다. 보들레르는 그의 『인공낙원』에서 웰스의 한 오두막집을 묘사하며 "Isn't it true that a pleasant house makes winter more poetic, and doesn't winter add to the poetry of a house? The white cottage sat at the end of a little valley, shut in by rather high mountains; and it seemed to be swathed in shrubs." (즐거운 집이 겨울을 더 시적으로 만들고, 겨울이 집에 시를 더해주지 않는가? 하얀 오두막은 꽤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계곡 끝에 앉아 있었고, 관목들로 감싸인 듯했다.) 라고 기술합니다. 이 인용문에서 밑줄 친 단어들은 안식의 상상력에 속하며, 독자가 집의 보호받는 중심에 거주하는 평온함을 느끼게 합니다. 보들레르는 또한 몽상가들이 혹독한 겨울을 좋아한다고 언급하며, "Every year they ask the sky to send down as much snow, hail and frost as it can contain. What they really need are Canadian or Russian winters. Their own nests will be all the warmer, all the downier, all the better beloved . . . " (매년 그들은 하늘에 가능한 한 많은 눈과 우박, 서리를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캐나다나 러시아의 겨울이다. 그들 자신의 둥지는 훨씬 더 따뜻하고, 부드럽고, 더 사랑스러울 것이다...) 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집이 폭풍우로부터 보호받을 때 그 가치가 증대된다는 점을 시사하며, 눈이 외부 세계를 단순화하여 내면의 친밀함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앙리 바슐랭의 글처럼, 오래된 집에서 겨울밤에 듣는 이야기는 고대 전설에 깊이 연결되어, 천 년 전의 이미지까지 통합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2. 집과 우주의 역동적 변증법: 저항과 확장의 상상력** 바슐라르는 집과 우주의 관계를 정적이지 않고 역동적인 변증법으로 묘사합니다. 릴케의 시는 도시에서는 허리케인이 더 위협적이지만, 시골의 외딴집은 폭풍에 의해 "단련된다"고 표현하며, 오히려 폭풍우 속에서 밖에 있기를 갈망하는 역설적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는 거주 기능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면서도, 우주적 규모의 역동성을 내포합니다. 앙리 보스코의 소설 『말리크루아(Malicroix)』에 등장하는 "라 레두스(La Redousse)"라는 집은 이러한 역동성을 "긍정적인 면"으로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폭풍에 포위된 이 초라한 집은 놀라운 인내력을 발휘하며, 작가는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의 절대적인 침묵을 묘사함으로써 공간의 광대함을 암시합니다. 집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폭풍에 맞서 싸우고, "She was all I had to keep and sustain me. We were alone." (그녀는 나를 붙잡고 지탱해 주는 전부였다. 우리는 홀로였다.)와 같이 모성적인 보호막이 됩니다. 이 집은 단순히 피난처가 아니라, 내부의 용기와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요새(redoubt)"로 변모합니다. 거주자는 외부의 거친 세상에 맞설 영웅적인 인간적인 미덕을 집에서 찾습니다. 바슐라르는 이 과정을 통해 "An experienced house is not an inert box. Inhabited space transcends geometrical space." (경험된 집은 비활성적인 상자가 아니다. 거주된 공간은 기하학적 공간을 초월한다.)고 주장하며, 집이 친밀성과 안락함을 응축하고 방어하는 공간으로서 즉각적으로 인간적인 차원으로 전이됨을 강조합니다. **3. 과거의 집과 문학적 이미지: 꿈의 기하학** 바슐라르는 과거의 집들이 어떻게 "꿈의 기하학" 속에서 나타나는지를 탐구합니다. 오래된 판화 속 집처럼, 객관적인 묘사가 아닌 상상력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집은 독자에게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작가가 단순히 묘사하는 것을 넘어 "방을 읽는다"거나 "집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게 합니다. 앙드레 라퐁의 시에서 "A poor secret house, as in an old print, That only lives in me, where sometimes I return To sit down and forget the gray day and the rain." (오래된 판화처럼, 내 안에서만 살아 숨 쉬는 가난하고 비밀스러운 집, 가끔 나는 회색빛 날과 비를 잊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간다.)라는 구절은 독자가 작가의 상상력에 동참하여 자신만의 기억 속 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4. 확장과 수축의 집: 투명한 벽과 비현실의 유영** 일부 작가들은 집의 벽이 확장되거나 수축하는 상상력을 통해 물리적 공간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조르주 스피리다키의 "투명한 집"은 "Its walls contract and expand as I desire. At times, I draw them close about me like protective armor . . . But at others, I let the walls of my house blossom out in their own space, which is infinitely extensible." (그 벽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수축하고 확장된다. 때로는 보호 갑옷처럼 나를 감싸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때에는 내 집의 벽들이 무한히 확장되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꽃피게 놔둔다.) 라고 묘사됩니다. 이는 집이 때로는 밀실처럼 수축하고, 때로는 우주처럼 확장되는 '정신적인 갑옷'이자 '세계'임을 보여줍니다. 르네 카젤의 시에서 나타나는 "갈매기들로 떨리는 거대한 우주적 집"처럼, 바람이 집의 중심에서 뻗어나가고 갈매기가 창문으로 날아가는 이미지는 시인이 우주에 거주하거나, 우주가 그의 집에 거주하는 역동적인 관계를 보여줍니다. 에리히 노이만은 모든 강하게 지상적인 존재(집)가 공중적, 천상적 세계의 매력에 이끌린다는 개념을 제시하며, 뿌리 깊은 집이라도 바람에 민감한 가지나 나뭇잎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다락방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상상력은 집의 물리적 형태를 넘어, 시인이 "초고도(super-height)"에 거주하게 하며, 물리적인 집과 우주적 존재 사이의 관계를 심화시킵니다. 장 라로쉬의 "내 마음 속에 서 있는 집 / 나의 침묵의 대성당"이나 루이 기욤의 "바람의 집(Maison de Vent)"은 이러한 무중력의 집, 꿈의 집이 시간의 숨결 위에서 움직이며 기억의 돌로 지어지고 결국 숨결에 지워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슐라르는 "a dreamer of houses sees them everywhere, and anything can act as a germ to set him dreaming about them." (집을 꿈꾸는 자는 어디에서나 집을 본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에게 집을 꿈꾸게 하는 씨앗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심지어 모란이나 성배도 거주지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5. 잃어버린 집에 대한 향수와 내면의 재구성** 잃어버린 집에 대한 향수는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넘어섭니다. 릴케는 "Oh longing for places that were not Cherished enough in that fleeting hour How I long to make good from far The forgotten gesture, the additional act." (오, 흘러가는 시간에 충분히 소중히 여겨지지 않았던 장소들에 대한 갈망이여, 얼마나 멀리서라도 잊혀진 몸짓, 추가적인 행위를 보상하고 싶은가!) 라고 표현하며, 과거의 집에 대한 회한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가 그 집에서 충분히 꿈꾸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아쉽게 다가옵니다. 꿈을 통해 기억을 재구성하며, 과거의 집은 '내면의 친밀함'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되찾습니다. 릴케는 잃어버린 집이 "not a building, but is quite dissolved and distributed inside me: here one room, there another, and here a bit of corridor which, however, does not connect the two rooms, but is conserved in me in fragmentary form." (건물이 아니라, 내 안에 완전히 용해되고 분포되어 있다: 여기 한 방, 저기 다른 방, 그리고 여기 복도 조각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두 방을 연결하지 않고, 파편적인 형태로 내 안에 보존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윌리엄 고옌의 『숨결의 집(House of Breath)』은 집이 마치 "가장 취약한 숨결의 거미줄 위에 세워진 듯" 보이며, 상상력, 기억, 인식이 서로의 기능을 교환하여 현실과 비현실이 융합되는 경험을 제시합니다. 피에르 세게르의 "내 목소리 속에 담긴 낯선 집 / 바람이 거주하는"이라는 이미지는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인 집의 가치를 더욱 강조하며, 기억 속의 집이 어떻게 "메아리의 기하학"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6. 미래의 집과 일상의 창조성** 미래에 지어질 꿈의 집은 결코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지 않으며, 오히려 영원한 "비영구적 상태(impermanence)"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꿈의 소유물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시인 뒤시(Ducis)가 상상 속에서 자신만의 시골집과 포도밭을 소유하며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Housed everywhere but nowhere shut in" (어디에나 거주하지만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 몽상가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집안일과 같은 일상 활동 또한 창조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바슐라르는 기계적인 몸짓에 의식을 부여할 때 새로운 인상이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앙리 보스코의 하녀 시도인(Sidoine)의 이야기는 "This vocation for happiness, so far from prejudicing her practical life, nurtured its action. When she washed a sheet or a tablecloth, when she polished a brass candlestick, little movements of joy mounted from the depths of her heart, enlivening her household tasks." (행복을 향한 이러한 소명은 그녀의 실용적인 삶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그 행위를 길러주었다. 그녀가 시트나 식탁보를 닦을 때, 놋쇠 촛대를 닦을 때, 작은 기쁨의 움직임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그녀의 집안일을 활기차게 만들었다.)고 묘사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초자연적인 이미지를 발견하고 작업을 통해 존재의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릴케가 청소하는 여인 없이 가구를 닦으며 느꼈던 "magnificently alone" (훌륭하게 홀로)라는 감정은 가장 평범한 행동 속에서도 진정한 창조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Georges Spyddoki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집은 투명하다. 그러나 유리로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차라리 수증기 의 성질을 띤 것이라고나 할까 그 벽들은 내가 바라는 데 따라 압축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한다 때로 나는 그 벽들을, 바깥을 차단하는 갑옷처럼 내 주위로 바짝 당겨 붙인다.......그러나 또 때로는 내 집의 그 벽들을 무한한 신장성(伸張生) 자체라고나 할, 그들의 고유한 공간에서 한껏 피어나도록 내버 려두기도 한다' (조르주 스피리다키, (명석한 죽음 Mort lucide), Seghers, P35.)” (Bachelard, 2003, p. 139) **7. 집 그림과 심리적 상태: 토포분석의 실제** 바슐라르는 프랑수아즈 민코프스카(Françoise Minkowska)의 아동 주택 그림 연구를 인용하여 집이 "심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강력한 상징임을 보여줍니다. 행복한 아이들은 "아늑하고, 보호받으며, 깊이 뿌리내린 기초 위에 잘 지어진" 집을 그리며,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등 내부의 온기를 표현합니다. 반면, 불행한 아이들은 "좁고, 차갑고, 닫힌" 집을 그리며, 그들의 고통이 집의 경직성과 움직이지 않는 연기, 곧게 선 나무들로 표현됩니다. 특히 "문 손잡이(door-knob)"는 "거주된" 집의 기능적 중요성을 나타내는 운동감각적(kinesthetic) 표식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문 손잡이가 여는 기능(opening)을 닫는 기능(closing)보다 우선시한다는 점을 통해 집과 친밀성의 심리학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문 손잡이는 집이 환영하고 접근 가능한 공간임을 나타내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지표인 것입니다. ### 제3장 "서랍, 궤, 옷장" 본 장은 앙리 베르그송이 '서랍'이라는 단어를 경멸적인 은유로 사용한 방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시작하여, 비밀스러운 공간이 인간의 내면에 미치는 영향과 시적 이미지가 지닌 존재론적 풍요로움을 상세히 논합니다. **I. 베르그송의 '서랍' 은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바슐라르는 위대한 작가가 특정 단어를 경멸적으로 사용할 때 "가벼운 충격, 다소 온화한 언어학적 고통(a slight shock, a certain mild, philological pain)"을 느낀다고 언급하며,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서랍(drawer)'이라는 단어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베르그송은 개념을 지식을 분류하는 서랍에 비유하며, 이는 경험된 지식의 개성을 없애는 "기성복(ready-made garments)"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개념적 분류가 회상의 "옷장(wardrobe of recollections)"에 기억을 분류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기억은 회상들을 서랍에 분류하거나 장부에 기입하는 능력이 아니다. 서랍도 장부도 존재하지 않는다(Memory, as I have tried to prove, is not the faculty for classifying recollections in a drawer, or writing them down in a register. Neither register nor drawer exists…)"고 명시합니다. 또한 새로운 대상을 접할 때 이전에 확립된 범주에 끼워 넣으려는 시도를 비판하며, 이는 지식을 '기성품 서랍'에 넣어버리는 행위로 묘사합니다. “베르그송은 서랍의 메타포 및 기타 예컨 대 ‘기성복' 과 같은 몇몇 메타포들을, 개념의 철학의 불충분성을 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개념들은 지식들을 분류하는 데에 사용되는 서랍들이고, 체험된 지식들을 비개인화하는 기성복들이다. 범주들의 장에 각각의 개념은 제 서랍을 가지고 있는 것이댜” (Bachelard, 2003, p. 171) >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메타포들은 넘칠 듯이 많으나. 필경 이미지들은 아주 드물다. 그에게 있어서 상상력이란 전적으로 메타포적인 것에 지나 지 않는 것 같다 메타포란 표현하기 어려운 인상에 구체적인 형태를 주 기 위해 있는 것이다” (Bachelard, 2003, p. 170) “Although there is a superabundance of metaphor in Bergson's writings, in the last analysis, his images are rare. It is as though, for him, imagination were entirely meta phorical.” (Bachelard, 1994, p. 74) 바슐라르는 이러한 베르그송의 '서랍' 은유가 "이미지의 자발성마저 잃어버리는(loses even the spontaneousness of the image (76))" 경직된 은유의 한 예시라고 설명합니다. 은유(metaphor)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상에 구체적인 실체를 부여(gives concrete substance to an impression that is difficult to express (74))"하지만, 이는 그것과 구별되는 심리적 존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반면, 이미지(image)는 "절대적 상상력의 산물(product of absolute imagination)"이며, 그 존재 전체를 상상력에 빚지고 있습니다. 이미지는 "존재의 현상(phenomenon of being)"이자 "말하는 존재의 특정한 현상 중 하나(one of the specific phenomena of the speaking creature)"입니다. 따라서 은유는 현상학적으로 연구될 가치가 없으며, 일회성으로 사용되어야 할 "조작된 이미지(fabricated image)"라고 비판합니다. 베르그송의 '서랍' 은유는 "원시적 논쟁 도구(crude polemical instrument)"로 변질되어 논쟁을 기계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미지는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하며, 상상력의 순수한 산물로서 우리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합니다. > “이상의 개략적인 언급은, 메타포란 우발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사상으로 만들 때에는 위험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 주 는 데에만 목적이 있다 메타포는 거짓된 이미지인 것이다 그것은 말의 몽상 가운데서 형성되는, 표현을 창조하는 이미지의 직접적인 힘을 가지 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Bachelard, 2003, p. 173) > > “These rapid remarks are intended to show that a metaphor should be no more than an accident of expression, and that it is dangerous to make a thought of it. A metaphor is a false image, since it does not possess the direct virtue of an image formed in spoken revery.” (Bachelard, 1994, p. 112-3)” **II. 앙리 보스코의 서랍장: 은유의 역전과 존재의 구체화** 바슐라르는 앙리 보스코(Henri Bosco)의 소설 『카레-브누아 씨의 시골 생활 (Monsieur Carre-Benoit a la campagne)』에 등장하는 서랍장 이야기를 통해 베르그송의 서랍 은유를 역전시킨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합니다. 보스코의 주인공 카레-브누아 씨는 자신의 "단단한 참나무 파일 캐비닛(solid oak filing cabinet)"에 깊은 애정을 느끼며, 이를 "인간 정신의 기초(the foundations of the human mind)"라고 여깁니다. 이 캐비닛은 그의 기억과 지능을 대신하며,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분류하고 언제든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합니다. 이는 은유가 단순한 비유를 넘어, 인간의 성격을 특징짓는 실재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역전이 지식인들이 정보를 비축하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소유의 철학(philosophy of having)"을 시사한다고 보았습니다. **III. 비밀스러운 공간의 시학: 서랍, 궤, 옷장** 바슐라르는 이제 은유에 대한 논의를 넘어, 서랍, 궤, 옷장과 같은 '숨겨진 곳'에 대한 긍정적인 현상학적 연구로 나아갑니다. 베르그송은 기억이 "회상의 옷장(wardrobe of recollections)"으로 취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시인 샤를 페귀(Charles Peguy)는 "기억의 선반과 옷장의 사원(Aux rayons de memoire et aux temples de l'armoires)"이라는 구절로 기억을 옷장에 비유하며, 이미지가 사상보다 더 강렬하게 존재를 부여함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옷장은 "일상적인 가구(everyday piece of furniture)"가 아니며, 매일 열리지 않아 비밀을 지키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열쇠가 문에 있지 않다(the key is not on the door)"는 것은 옷장이 타인에게 쉽게 공개되지 않는 비밀스러움을 의미합니다 . 랭보(Rimbaud)의 시에서 "열쇠 없는 옷장(L'armoire etait sans clefs!)"은 열쇠가 없어 더 많은 비밀과 약속을 담고 있는, 희망의 시각을 제시하는 공간으로 나타납니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은 여기에 "심지어 펼칠 수 있는 달빛(Il y a meme des rayons de lune que je peux depl;er)"이 담겨 있다고 덧붙이며, 이미지를 "합리적인 마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과장(exaggeration)의 지점"으로 이끕니다. 이러한 과장은 살아있는 이미지의 정점이며, 환상적인 상상력으로 풍부한 축복을 시각화합니다. 주부들이 옷장을 애정으로 돌보는 것은 이러한 옷장의 친밀한 가치와 빛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옷장을 여는 것은 "하얀색의 사건(event of whiteness)"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묘사됩니다. **IV. 작은 상자들: 비밀과 친밀성의 심리학** 작은 상자들, 즉 궤(chests)와 보석함(caskets)은 "비밀의 필요성, 숨겨진 장소에 대한 직관적 감각(need for secrecy, of an intuitive sense of hiding places)"의 증인으로 제시됩니다. 자물쇠는 단순한 물리적 경계를 넘어 "심리적 문턱(psychological threshold)"이며, 장식된 자물쇠는 "불성실에 대한 도전(defies indiscretion)"을 나타냅니다. 이는 밤바라 족의 악어, 도마뱀, 거북이 형상이나 도곤족의 첫 남녀 형상으로 장식된 자물쇠처럼, 생명의 힘이나 인간의 힘을 상징합니다. 더 중요한 비밀은 안쪽 상자에 숨겨지고, 덜 중요한 비밀은 바깥 상자에 넣어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복잡주의적(complexualistic)" 가구 작업이 존재한다고 언급됩니다. 프란츠 헬렌스(Franz Hellens)의 소설에서 딸에게 일본 칠기 상자를 선물하는 아버지는 상자의 기하학적 형태와 비밀 유지 심리 사이의 "상동성(homology)"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폐쇄적인 인간 존재(pent-up soul)"는 상징을 통해 소통하며, 상자가 열리는 긍정적인 순간에 기쁨을 느낍니다. **V. 상자의 열림: 발견의 차이와 친밀성의 무한함** 바슐라르는 상자를 "읽는(reading)"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릴케(Rilke)가 "잘 닫힌 상자(well-closed box)"에서 느낀 기쁨을 인용합니다. 릴케는 닫힌 상자가 "욕망(desire)"을 가졌다고 말하며, 이는 "모든 냄비에는 뚜껑이 있다(Every pot has its cover)"는 낙천적인 속담과 연결됩니다. 조심스러운 닫힘은 조심스러운 열림을 요구합니다. 릴케의 편지에서 그는 17세기 자물쇠의 복잡한 구조를 통해 "형용할 수 없는 경험(ineffable experience)"을 표현하는데, 이는 "한 번에 하나의 쉽게 돌릴 수 있는 열쇠가 이 모든 방어 및 억제 장치를 가장 중심 지점에서 당겨낸다(a single, easily turned key pulled this entire apparatus of defense and deterrence from its most central point)"는 식으로 묘사됩니다. 자물쇠와 열쇠는 풍부한 정신분석학적 문헌의 주제이지만, 바슐라르는 성적 상징에 집중하는 것이 친밀성의 꿈의 깊이를 가린다고 비판합니다. 시는 정신분석학을 넘어 존재하며, 꿈에서 백일몽으로 나아가고, 복잡한 콤플렉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시인은 세상 속에서 사물을 통해 우주적 풍요로움을 응축하며, 보석함 속의 보석들은 과거, 권력, 운명을 이야기하며 열쇠와 자물쇠의 단순한 의미를 초월합니다. 이러한 순수한 회상, 오직 자신에게 속한 이미지는 소통되지 않으며, 그 핵심은 "절대적인 보석함(absolute casket)" 속에 안전하게 보관됩니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은 "발견의 첫 번째 미분(first differential of discovery)"이 됩니다. 바깥은 한 순간에 지워지고, "새로움과 놀라움의 분위기(atmosphere of novelty and surprise)"가 지배하며, 새로운 차원인 "친밀성의 차원(dimension of intimacy)"이 열립니다. 친밀함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에게 이 차원은 무한합니다. 장-피에르 리샤르(Jean-Pierre Richard)의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소설 『황금 벌레(The Gold Bug)』 분석을 인용하며, 바슐라르는 상자 속 보석들이 단순한 재산 목록이 아니라 "상상적 대상이 되어 가설과 꿈을 생성하며, 무한한 다른 보물들로 깊어지고 스스로를 벗어난다(an imaginary object, generating hypotheses and dreams, it deepens and escapes from itself toward an infinite number of other treasures)"고 설명합니다. 리샤르의 "우리는 보석함의 바닥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We shall never reach the bottom of the casket)"라는 통찰은 친밀한 차원의 무한한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합니다. 때때로 사랑스럽게 만들어진 보석함은 끊임없이 변하는 내부 시각을 지니고, 열면 그 안에 집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샤를 크로스(Charles Cros)의 산문시에서 시인은 캐비닛 제작자의 작업을 이어받아 상상 속 존재를 창조합니다. 자개 상자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잔치(clandestine festivity)"를 상상하며, 시인은 "작은 미뉴에트(tiny minuets)"를 듣고, "복잡한 얽힘의 그물(complicated web of entanglements)"을 짐작합니다. 상자를 닫으면 밤의 세계가 움직이고, 내면과 외부의 역전이 일어나 대상과 반영이 뒤바뀝니다. 이러한 과장은 살아있는 이미지의 정점이며, "확인하는 것은 이미지를 죽이는 것(to verify images kills them)"이므로, 경험보다 상상하는 것이 항상 더 풍요롭다고 말합니다. **VI. 비밀스러운 자아** 비밀의 작용은 "사물을 숨기는 자(the hider of things)"에서 "자신을 숨기는 자(the hider of self)"에게로 지속적으로 이동합니다. 쥘 쉬페르비엘(Jules Supervielle)의 시처럼, "자신을 매장하는 자는 자신과 함께 매장한다(He who buries a treasure buries himself with it)"는 생각은 비밀이 무덤과 같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조 부스케(Joe Bousquet)는 "아무도 내가 변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누가 나를 보는가? 나는 나 자신의 은신처다(No one sees me changing. But who sees me? I am my own hiding-place)"라고 말하며, 모든 친밀함은 숨겨진 채로 존재함을 강조합니다. 바슐라르는 인간과 사물 속의 숨겨진 것을 탐구하기 위해 "우주적 정신분석학(cosmic psychoanalysis)"과 "물질의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 of matter)"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가장 단순한 것들이 심리적으로 복잡할 수 있으며, 이 "최상급의 영역(superlative element)"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현실을 넘어 상상적인 것에 귀 기울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 제4장 「둥지(Nests)」 제4장은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됩니다. 위고는 노트르담의 콰지모도를 묘사하며 대성당이 "알, 둥지, 집, 고향, 그리고 우주"였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시 인은 수다한 이미지들로써 우리들에게 갖가지 은신처의 은익의 힘을 민감 히 느끼게 한다” (Bachelard, 2003, p. 192) 이는 둥지가 주거의 기능과 존재의 형태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슐라르는 이 이미지를 통해 시인이 다양한 피난처의 힘을 인지시키지만, 동시에 위고가 "쓸데없이 비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한 말을 불러옴으로 상상력의 본질을 역설합니다. > “은신처의 느낌을 가지는 존재는 육체적으로 스스로의 내부로 수축하 고, 은둔하고, 웅크리고, 스스로를 숨기고 감춘다 모든 은둔의 역동성을 나타낼 동사들 전부를 사전 속의 풍부한 어휘에서 찾아낸다면, 그것들은 동물적인 움직임의 이미지들, 근육 속에 새겨져 있는 웅크리는 움직임의 이미지들을 보여 줄 것이다.” (Bachelard, 2003, p. 192) “If we were to look among the wealth of our vocabulary for verbs that express the dynamics of retreat, we should find images based on animal movements of withdrawal, movements that are engraved in our muscles. How psychology would deepen if we could know the psychology of each muscleI And what a quantity of animal beings there are in the being of a manl” (Bachelard, 1994, p. 91) **I. 원초적 안락함의 발견** **안녕(安寧)과 원시적 피난처의 인식** 둥지는 가장 명백하게 "살아있는" 피난처의 이미지 중 하나로 제시됩니다.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콰지모도의 "알, 둥지, 집, 고향, 우주"로 묘사하며, 하나의 존재가 여러 은신처의 뒤틀린 형태를 어떻게 취하는지 보여줍니다. 이는 다양한 피난처의 힘을 인지하게 합니다. 화가 블라맹크는 집 안에서 느끼는 안녕감이 "완전히 동물적인" 것이라고 표현하며, 난로 앞에서 느끼는 평온함을 "구멍 속의 쥐, 굴 속의 토끼, 마구간의 소"가 느끼는 만족감과 동일시합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인식이 피난처의 원시성으로 회귀하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둥지는 종종 "완벽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이는 인간의 경이감을 자아냅니다. 암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é)는 동물들이 둥지를 짓는 솜씨가 "모든 석공, 목수, 건축가를 능가한다"고 극찬하며, 인간은 새 둥지 외에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속담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광은 과학적 비평에 의해 때때로 식습니다. 아서 랜즈버러 톰슨(Arthur Landsborough Thomson)은 독수리 둥지가 때로는 불안정하게 지어져 스스로의 무게로 무너진다고 지적하며, 이는 둥지의 완벽성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깨뜨립니다. 바슐라르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 속의 둥지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둥지를 바라볼 때 느끼는 "순진한 경이감(naive wonder)"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가을에 빈 둥지를 발견했을 때의 실망감이나, 둥지 속에 알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기쁨은 둥지 이미지가 지닌 "우주적 상황의 증거"로서의 중요성을 드러냅니다. 특히 투스넬(Toussenel)은 "혼자서 처음 발견한 새 둥지에 대한 기억이 라틴어 경시대회에서 1등을 한 것보다 더 깊이 새겨져 있다"고 고백하며, 이는 둥지 이미지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원초적 흥미와 감동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르켄(Lequenne)의 예시에서도 새 둥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 즉 둥지가 인간적 친밀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 드러납니다. **II. 둥지의 완벽함과 과학적 관점의 대비** 둥지의 완벽함에 대한 인식은 오랫동안 인간의 경이로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앙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e)는 동물들이 둥지를 짓는 솜씨가 인간의 건축 기술을 능가한다고 찬탄하며, "인간은 새 둥지 외에는 모든 것을 지을 수 있다(men can do everything except build a bird's nest)"는 속담을 인용합니다. 이는 둥지에 대한 이상적인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아서 랜즈버러 톰슨(Arthur Landsborough Thomson)의 과학적 관점을 제시하며, 둥지가 종종 "제대로 시작되지 않거나 때로는 엉성하게 만들어진다(often barely started, and at times, botched)"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검독수리 둥지는 너무 커져 스스로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가치에 대한 논란(controversy over values)"이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상상력의 영역에서는 단순히 과학적 사실을 넘어서는 가치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독자께서 지적하신 '반대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은 둥지의 불완전성을 드러내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경험은 둥지를 완벽함과 경이로움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바슐라르는 후자의 주관적 경험에 주목합니다. **III. 인간화된 둥지 이미지의 현상학적 의미** 바슐라르는 둥지 이미지를 인간화하는 것이 때로는 "유치한(childish)"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예를 들어, 연인들이 "아늑한 작은 둥지(cosy 'little nest')"를 약속하는 것은 현실의 둥지와 비교하면 우스꽝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살아있는(lived)" 둥지 이미지의 "초기적인 미덕(initial virtues)"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현상학의 주요 기능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둥지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둥지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순진한 경이로움(naive wonder)"을 재포착하는 것입니다. 가을에 빈 둥지를 뒤늦게 발견했을 때의 실망감, 또는 후투티 새 둥지의 전설처럼 둥지가 지닌 불가시성의 상상력은 둥지 이미지가 단순한 사실을 넘어선 깊은 의미를 지님을 보여줍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거주하는 둥지(living, inhabited nest)"를 발견했을 때의 경험은 "설명할 수 없는 기쁨(emotion of such indescribable delight)"을 불러일으키며, 이는 인간에게 "원초적인 흥미(primal interests)"를 제공합니다. 투세넬(Toussenel)의 경우, 첫 둥지 발견은 라틴어 시험에서의 1등보다 더 깊이 기억되며 직업 의식으로 이어졌습니다. 르켄(Lequenne)의 "떨림(trembling)"은 둥지에 대한 "여성적인 의미(feminine significance)"를 깨닫게 합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둥지와 집을 확장된 이미지로 연결합니다. 그는 딱따구리가 나무 전체를 자신의 집으로 삼는 것을 "오랫동안 버려졌던 집에 돌아온 가족의 즐거움"에 비유하며, 나무가 새에게 있어 "이미 피난처"가 됨을 강조합니다. 바슐라르는 이를 통해 "확대(expanded)"된 둥지/집의 이미지가 단순히 비유를 넘어 "이미지의 충만함(fullness of image)"을 제공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파리 아파트에서 이웃의 못 박는 소리를 딱따구리 소리로 상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경험을 언급하며, 이러한 "자연화(naturalize)"를 통해 외부의 방해를 내면화된 안락함으로 전환시키는 상상력의 힘을 보여줍니다. **V. 둥지-오두막집의 연결** 바슐라르는 둥지와 오두막집 이미지가 지닌 "단순함의 분위기(atmosphere of simplicity)"를 강조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짚으로 만든 오두막집을 "작은 굴뚝새 둥지(a wren's nest)"에 비유한 것은 이러한 연결을 잘 보여줍니다. 굴뚝새 둥지가 "매우 둥근 공 모양(very round ball)"으로 지어진다는 아베 빈셀로(Abbe Vincelot)의 묘사는 오두막집이 둥지의 특성을 지닐 때 더욱 아늑하고 동화 같은 공간이 됨을 시사합니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가 상상력을 통해 얼마나 풍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VI. 되돌아옴과 잃어버린 친밀감** 둥지-집은 "결코 젊지 않은(never young)" 이미지로, 새가 둥지로 돌아오듯, 인간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염원을 상징합니다. 이는 인간의 삶에서 "되돌아옴(returning)"의 위대한 리듬을 나타내며, 부재를 극복하는 꿈을 통해 친밀한 충성심을 강화합니다. 장 코베르(Jean Caubere)의 시 「따뜻한 둥지(Le nid tiede)」는 "고요한 둥지(calm nest)"와 "오래된 집(old home)"의 이미지를 연결하며, 잃어버린 친밀감의 큰 이미지로서의 집을 노래합니다. 이러한 시는 사실을 변화시키며, 우리가 이미지를 사랑할 때 그것이 단순히 사실의 복사본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VII. 신체의 구현으로서의 둥지** 쥘 미슐레(Jules Michelet)는 새가 "도구 없이 일하는 일꾼"이며, "도구는 바로 새의 몸, 즉 가슴"이라고 묘사합니다. 새는 끊임없이 돌면서 가슴으로 벽을 눌러 둥지의 원형 형태를 만들고, 이는 "둥지의 형태가 내부에서 명령된다(The form of the nest is commanded by the inside)"는 생각을 제시합니다. 둥지는 새의 "바로 그 인격(very person)"이며, 물리적으로 힘겹게 만들어진 친밀함의 형태입니다. 이러한 미슐레의 둥지 이미지는 "옷-집(garment-house)"에 대한 꿈으로 이어지며, 각자가 자신의 몸에 맞춰 맞춤 제작된 집을 가지는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베르그송(Bergson)이 비판한 "기성복(ready-made clothes)"과 대조됩니다. 미슐레의 묘사는 물질적 상상력의 귀중한 기록이며, 건조한 재료로 부드러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제비 둥지의 끈적한 물질과 신비로운 특성에 대한 언급은 둥지 이미지가 지닌 상징적 깊이를 더욱 강조합니다. **VIII. 둥지와 우주적 신뢰** 둥지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precarious thing)"이지만, 역설적으로 "안정감에 대한 공상(daydreaming of security)"을 불러일으킵니다. 바슐라르는 우리가 꿈을 꿀 때 "현상학자로서 새의 본능을 순진하게 다시 경험한다(phenomenologists without realizing it. In a sort of naive way, we relive the instinct of the bird)"고 설명합니다. 둥지는 "세상의 평화에 참여하며(participates in the peace of the vegetable world)," "우주적 신뢰(cosmic confidence)"의 기원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바슐라르는 "세상은 인류의 둥지이다(the world is the nest of mankind)"라는 파스퇴르(Pasternak)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인간을 붙들어 주는 "거대한 힘(immense power)"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파스퇴르의 "제비처럼 세상을 건설하는 본능(the instinct with the help of which, like the swallow, we construct the world)"이라는 말은 세상이 "거대한 둥지, 흙과 하늘, 죽음과 삶, 그리고 두 종류의 시간의 집합체(an enormous nest, an agglomerate of earth and sky, of death and life, and of two sorts of time)"임을 시사합니다. 이 이미지는 인류의 둥지, 즉 세상은 "결코 완성되지 않으며(never finished)", 상상력이 이를 계속 이어나가는 데 도움을 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둥지」 장은 둥지라는 단순한 형태를 통해 인간의 친밀한 존재 방식, 원초적인 안전에 대한 욕구, 상상력을 통한 우주와의 교감 등 깊이 있는 현상학적 통찰을 제공하며, 외부 세계의 객관적 사실을 넘어선 내면적이고 시적인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제5장 "껍질(Shells)" **I. 껍질: 완벽함과 미학적 대상** 껍질은 본질적으로 "분명하고, 단단하며, 확실한" 개념에 해당하며, 시인조차도 이를 단순하게 묘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완벽한 형태를 지닙니다. 폴 발레리(Paul Valéry)는 껍질을 "일반적인 무질서에서 벗어난 특권적인 형태"로 보았으며, "눈에는 더 명료하지만, 마음에는 더 신비로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껍질이 단순히 내부 물질을 보호하는 기능을 넘어, 그 자체로 미학적 완전성을 지닌 대상임을 강조합니다. 발레리는 조개가 껍질을 "분비한다(exudes)"고 표현하며, 이는 껍질이 외부에 의해 조각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생성"되는 신비로운 형성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합니다. 껍질은 건축가가 외부에서 집을 짓는 것과 달리, 생명체가 내부에서 자기 몸을 위해 집을 짓는, 본질적인 건축 행위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움과 완벽함은 때로 주관적인 체험을 방해할 수 있으며, 바슐라르는 내면의 친밀한 사색을 위해서는 외부적 아름다움의 매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II. 껍질: 놀라움과 빈 공간의 상상력** 둥지와 마찬가지로, 껍질에 대한 순진한 경이감은 중요한 현상학적 출발점이 됩니다. 생명체가 돌과 같은 단단한 물질 안에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비어 있는 껍질이 "은신처에 대한 몽상(day-dreams of refuge)"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빈 껍질은 과거의 삶을 담고 있었기에, 새로운 친밀감을 위한 상상적 공간이 됩니다. **III. 껍질: 과장과 역설적 출현** 껍질의 가장 흥미로운 상상적 측면은 그 내부에서 놀라운 생명체가 출현한다는 과장된 이미지입니다. 위르기스 발트루사이티스(Jurgis Baltrusaitis)의 저서 『환상적인 중세(Le moyen âge fantastique)』에서는 "토끼, 새, 사슴, 또는 개"와 같은 예기치 않은 동물들이 껍질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는 마술사의 모자에서 무언가가 나오는 것처럼, 상상력 속에서 거대한 것이 작은 것에서 나올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또한 껍질에서 나오는 생명체는 종종 "혼합된 생명체(mixed creature)"의 형태를 띠는데, 이는 동물의 진화가 압축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상상력의 자유로움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발트루사이티스의 작품에는 "수염 난 인간의 머리와 토끼 귀를 가졌으며 주교관을 쓴 네 발 달린 달팽이"와 같은 기괴한 형상이 등장합니다. 칼 구스타프 융(C. G. Jung)의 책 『심리학과 연금술(Psychologie und Alchemie)』에 나오는 멜루지나(Melusines)의 그림들도 이러한 역설을 잘 보여줍니다. 물에서 솟아나는 낭만적인 멜루지나가 아니라, 삶의 원리가 나오는 돌의 꿈을 형성하는 연금술의 상징으로서의 멜루지나는 비늘투성이의 꼬리-껍질에서 인간의 형상이 나오는 모습을 통해 하등한 생명체가 고등한 생명체로 "나오는" 역동성을 시사합니다. 껍질은 "비활성화된 껍데기(lifeless shell)"에서 과하게 흥분된 생명체가 튀어나오는 폭력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IV. 껍질: 공격성과 지연된 역동성** 껍질 이미지는 단순히 은신처의 의미를 넘어 공격성을 내포하기도 합니다. 실제 달팽이가 껍질에서 게으르게 기어 나오는 것과 달리, 상상 속의 달팽이는 "경이로움과 호기심"을 자극하며, 두려움을 유발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숨는 것"과 "드러내는 것"의 변증법 속에서 껍질 속의 생명체는 "탈출구"를 준비합니다. 이는 억압된 존재가 폭발적인 동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늑대가 껍질 속에 숨어 있다가 공격하는 모습처럼 "지연된 공격성(postponed aggressiveness)"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V. 껍질: 형태의 발생과 물질적 상상력** 18세기 사상가 J. B. 로비네(J. B. Robinet)는 모든 형태가 껍질의 발생론(shell ontogenesis)을 가지며, 삶의 주된 노력이 껍질을 만드는 것이라는 꿈같은 이론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화석을 삶의 조각, 즉 "인간을 만드는 법을 배우는 자연의 시도"로 보았으며, 인간 신체의 각 기관조차도 껍질들의 집합체로 간주했습니다. 로비네의 관점에서 껍질은 단순히 외피가 아니라, 생명력이 스며들어 형태를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물질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바슐라르가 강조하는 "물질적 상상력(material imagination)"의 귀중한 사례로, 외부가 거칠고 내부가 부드러운 껍질의 역설이 어떻게 조개와 같은 물컹한 생명체의 "마찰"을 통해 매끄러운 진주층으로 형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껍질이 단지 피난처가 아니라, 내부의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형성되는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VI. 껍질: 부활의 알레고리** 껍질은 고대부터 부활과 신체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카롤링거 시대의 무덤에서 달팽이 껍질이 발견되는 것은 "인간이 깨어날 무덤의 알레고리"로 해석되며, 고대인들은 껍질을 몸과 영혼이 통합된 인간 존재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겨울잠을 자다가 봄에 다시 나타나는 달팽이의 이미지는 부활과 재생의 강렬한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상상 속의 "부활"이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몽상의 융합(coalescence of reveries)"을 통해 형성된 "상상의 현실(facts of the imagination)"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비판적 사고를 넘어, 순진한 경이로움 속에서 삶의 본질을 이해하게 합니다. **VII. 껍질: 단순함과 평범함의 재발견** 껍질 이미지는 종종 너무나 평범하여 그 상상적 가치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달팽이는 작은 집을 짓고 그것을 가지고 다닌다"와 같은 흔한 비유는 상상력을 억누르지만, 바슐라르는 이러한 평범함 속에서도 심오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로비네가 달팽이가 몸을 비틀면서 "나선형 계단"을 만든다고 상상한 것처럼, 껍질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선 역동적인 건축 과정을 품고 있습니다. **VIII. 껍질: 베르나르 팔리시의 껍질-요새** 16세기 학자이자 도예가인 베르나르 팔리시(Bernard Palissy)는 껍질 이미지를 통해 자신만의 건축적 몽상을 발전시킵니다. 그는 전쟁의 위험에 직면하여 "요새 도시(fortress city)"를 설계하며, 자연 속에서 가장 견고하고 지혜로운 건축물을 찾았습니다. 그는 달팽이가 자신의 타액으로 집과 요새를 짓는 것을 관찰하며, 특히 뿔고둥(murex) 껍질의 나선형 구조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하는 완벽한 형태임을 깨닫습니다. 그의 요새 도시는 중앙의 광장을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감아 올라가는 거대한 달팽이 형태를 띠며, 모든 문과 창문이 안쪽을 향하여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되는 구조입니다. 이는 껍질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위대한 정신이 거주했던 이미지"임을 보여줍니다. 팔리시는 또한 "방(chambers)"이라는 개념을 통해 껍질의 친밀한 가치를 극대화합니다. 그의 방은 겉은 거친 굴 껍질 같지만, 안은 껍질 내부처럼 매끄럽게 유약으로 코팅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면의 광택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만지는 감각을 통해 친밀한 공간을 체험하게 합니다. 네 번째 방은 집, 껍질, 동굴을 통합한 형태로, "비틀리고 울퉁불퉁한" 천장과 "나선형" 내부를 통해 더욱 깊은 친밀감을 제공합니다. 흙으로 덮여 "지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 방은 땅속 깊이 박힌 바위의 껍질 속에서 사는 듯한 감각적 친밀감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상상력은 껍질이 인간 존재의 깊은 피난처이자,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화하는 내면의 풍경임을 드러냅니다. **IX. 껍질: 거북이와 은둔의 역설** 거북이는 "걷는 집을 가진 동물"로서 껍질의 개념을 의인화하는 좋은 예시가 됩니다. 이탈리아 시인 주세페 웅가레티(Giuseppe Ungaretti)의 우화에서 늑대가 거북이를 공격하지만, 거북이는 껍질 속으로 몸을 숨겨 늑대를 굶주리게 만듭니다. 웅가레티는 이 우화에서 늑대를 "호감 가는" 존재로, 거북이를 "증오스러운" 존재로 묘사하며, 상상력 속에서 동정심의 역전을 이끌어냅니다. 이는 은둔하는 존재의 "불가사의한 얼굴(impenetrable physiognomy)"이 외부의 공격성을 역설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힘을 가짐을 보여줍니다. **X. 껍질: 위장과 우주적 신뢰** 껍질은 위장(dissimulation)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생명체가 자신의 색깔이나 형태로 주변 환경에 녹아들어 숨는 것은 "안녕감의 최고점(culmination of tranquility)"을 의미합니다. 시인 노엘 아르노(Noel Arnaud)는 존재가 유사성 속에서 위장을 추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껍질이 단순히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신뢰와 연결됩니다. 달팽이 껍질의 경이로움은 우리가 껍질 속 생명체의 삶과 공감하고, 그 존재의 원시성을 체험할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는 인간이 세상을 "제비처럼, 땅과 하늘, 죽음과 삶, 그리고 두 가지 시간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둥지"로 건설한다고 묘사합니다. 이는 껍질 이미지가 우주적 규모로 확장되어 인간이 세상에 대한 본능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피난처를 끊임없이 건설하고 형성해 나간다는 바슐라르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 제6장 "코너(Corners)" **I. 코너: 친밀함의 원초적 상징** 코너는 물리적으로는 집의 일부이지만, 상상력 속에서는 은둔과 고독의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바슐라르는 코너를 "고독의 상징이자 방 또는 집의 싹"으로 정의하며, 사람이 코너에 움츠려 들 때 경험하는 육체적 수축 자체가 특정한 내면적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물리적 행위는 친밀감을 형성하며, 마치 동물이 굴이나 둥지에서 편안함을 느끼듯 인간에게 원초적인 안녕감을 선사합니다. 코너는 단순히 숨는 장소가 아니라, 삶을 거부하고 억제하며 심지어 숨기는 "부정성(negativism)"의 흔적을 지니기도 합니다. 이 공간에서는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되고, 자신의 생각과 함께하는 침묵만이 존재합니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ard)는 "공간을 닫아라! 캥거루 주머니를 닫아라! 그 안은 따뜻하다!"("Fermez l'espace! Fermez la poche du Kangourou! Il y fait chaud!")라고 말하며, 코너가 제공하는 따뜻하고 밀폐된 친밀감을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코너는 때로는 "가장 보잘것없는 피난처"로 여겨질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이미지가 가장 광대한 꿈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II. 코너: 정지(Immobility)와 존재의 방(Chamber of Being)** 코너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 중 하나인 "정지"를 보장하는 피난처입니다. 그것은 "확실한 장소, 나의 부동성 옆에 있는 장소"이며, "반쯤 열린 상자, 벽의 일부이자 문"과 같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외부와 내부의 변증법을 잘 보여줍니다. 코너에서 느끼는 평화로움은 부동의 감각을 만들어내고, 이는 상상적인 방을 형성하여 우리가 그 안에 숨어 있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림자는 벽이 되고, 가구는 장벽이 되며, 걸려 있는 천은 지붕이 됩니다. 피에르 알베르-비로(Pierre Albert-Birot)는 "나는 내가 있는 공간이다"(“Je suis l'espace où je suis”)라고 노래하며, 릴케(Rilke) 또한 그의 작품 『나 없는 삶(Mein Leben ohne mich)』에서 램프가 켜진 방이 자신에게 거의 만져질 듯 나타났을 때, 자신이 "이미 그 방의 코너였다"라고 묘사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코너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이 자리하는 "존재의 방(chamber of being)"임을 명확히 합니다. **III. 코너에서 벗어남: 자기 발견의 변증법** 코너에서의 존재는 자기 발견의 역설적인 경험으로 이어집니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리처드 휴즈(Richard Hughes)의 『자메이카의 거센 바람(A High Wind in Jamaica)』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한 어린 소녀 에밀리(Emily)는 배의 구석에서 "집 놀이"를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갑판 뒤쪽으로 걸어가던 중 "문득 자신이 자기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바슐라르는 이를 "출현의 코기토(cogito of emergence)"라고 부르며, 내면으로 움츠러드는 존재가 외부로 폭발하며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러한 "코너의 몽상"을 "아이들의 놀이" 범주로 분류하여 외부적 현실을 강조하더라도, 시인들은 코너 속에서 경험하는 내면의 삶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우주적 상상력을 더욱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IV. 코너: 기억과 몽상의 심연** 코너는 기억과 몽상이 응축되는 공간으로, 특히 과거의 고독과 지루함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리투아니아 시인 O. V. 드 밀로슈(O. V. de Milosz)의 소설 『연애 입문(L'amoureuse initiation)』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떠나 있을 때 "벽난로와 떡갈나무 상자 사이의 작고 어두운 코너"에 숨어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이 코너는 그가 "슬프게 행복하고", "홀로 만족하며", "기다리는" 장소입니다. 밀로슈에게 있어 코너는 단순히 비어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위대한 코너와 구멍의 몽상가들에게는 아무것도 비어있지 않다". 그에게는 "명상하는 거미," "겁에 질린 무당벌레," "쥐구멍의 개선문," "낡은 태피스트리," "발뒤꿈치가 대리석에 부딪히는 갉아먹는 소리," "재채기의 가루 같은 소리," 그리고 "빗자루에 의해 잊힌 코너들의 모든 오래된 먼지의 영혼"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몽상들은 과거의 아주 먼 곳까지, 심지어 기억 너머의 "미정의 과거"까지 다다르며, 사라진 어린 시절의 집이 "몽상의 비옥한 토양" 속에서 시적으로 살아나게 합니다. 밀로슈의 표현처럼 "이 모든 것들은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결코 존재한 적도 없다. 과거는 그들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었다. . . . 이미 너 자신은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깊은 사색은 코너가 단순히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은밀한 부분, 시간과 기억이 응축되는 장소임을 보여줍니다. **V. 코너 속의 미시적 우주** 시인들은 코너의 미세한 디테일 속에서 광대한 우주를 발견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영감이 부족할 때 오래된 벽의 균열을 응시하라고 조언했으며, 이는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우주의 지도를 상상하게 합니다. 피에르 알베르-비로(Pierre Albert-Birot)는 "나는 장식적인 그림이 되었다 / 감상적인 소용돌이 / 나선형의 감겨짐 / 흑백으로 조직된 표면 / 그리고 나는 내가 숨 쉬는 소리를 막 들었다 / 정말 그림인가 / 정말 나인가"(“Et voici que je suis devenu un dessin d'ornement / Volutes sentimentales / Enroulement des spirales / Surface organisée en noir et blanc / Et pourtant je viens de m'entendre respirer / Est-ce bien un dessin / Est-ce bien moi”)라고 노래하며, 자신이 그려진 그림의 한 부분이 되어 그 안에서 호흡하는 경험을 묘사합니다. 이는 코너가 단순한 선이 아니라, 존재의 역동성과 생명력이 깃든 상상적 공간임을 보여줍니다. 코너와 관련된 상상력은 또한 언어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바슐라르는 단어들이 "작은 집(little houses)"과 같아서 각각 지하실과 다락방을 지니고 있다고 비유합니다. "상식은 1층에 산다"고 말하며 일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단어의 집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단계적으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며, 모호한 어원의 먼 복도에서 길을 잃고 단어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보물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언어의 공간적 비유는 시인의 삶이 언어 속에서 상상력을 통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행위임을 드러냅니다. 또한 그는 곡선이 "따뜻하다"거나 "둥지 같은 힘을 지닌다"고 말하며, 각진 코너가 "차가운"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상상력이 어떻게 감각적, 정서적 의미를 형태에 부여하는지 보여줍니다. ### 제7장 "미니어처(Miniature)" 바슐라르는 미니어처가 단순히 물리적 크기의 축소를 넘어,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사물과 존재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이 장은 미니어처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소유'하고, '심화'하며, 심지어는 '재창조'하는지를 다양한 문학적 사례를 통해 보여줍니다. **I. 미니어처: 심리적 객관성과 상상력의 지배**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종종 동화 속 미니어처를 단순한 환상이나 작가의 유희로 치부하며, 그것에 상응하는 심리적 실재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이러한 미니어처 이미지들이 "진정한 심리적 객관성"을 지니는 "가상의 대상"이라고 역설합니다. 기하학적 유사성만으로는 미니어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며, 상상력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부조리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샤를 노디에(Charles Nodier)의 _콩알 보물(Trésor des fèves)_ 속 주인공이 콩알만 한 요정의 마차에 "여섯 리트론의 콩"을 어깨에 메고 들어가는 장면은 이러한 부조리함과 더불어, 작은 공간 안에서 거대한 세계를 발견하는 "관점의 역전"을 보여줍니다. 노디에는 이를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종이 인형 집에 빗대어 설명하며 합리화하려 하지만, 바슐라르는 이는 진정한 상상적 경험을 왜곡하는 것이라 비판합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한 수감자가 감옥 벽에 그린 풍경화 속 작은 기차를 통해 현실을 탈출하는 이야기는 미니어처가 "자유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수감자는 자신을 아주 작게 만들어 그림 속 기차에 올라타고 터널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는 기하학적 모순을 초월하며, 재현(Representation)이 상상력(Imagination)에 지배당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슐라르는 "세계를 미니어처화할수록, 더 잘 소유하게 된다"고 주장하며, 미니어처는 가치를 응축하고 풍요롭게 하는 역동적인 사고의 영역이라고 강조합니다. **II. 씨앗: 미니어처 우주와 생명력의 응축** 미니어처의 가치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시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의 사과 씨앗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는 사과 씨앗을 "그 자체가 작은 우주"이며, "작은 세계의 작은 태양"이라고 말합니다. "This apple is a little universe in itself, the seed of which, being hotter than the other parts, gives out the conserving heat of its globe; and this germ, in my opinion, is the little sun of this little world, that warms and feeds the vegetative salt of this little mass." ("이 사과는 그 자체가 작은 우주이며, 씨앗은 다른 부분보다 뜨거워서 그 구체의 보존열을 발산한다. 그리고 이 싹은 내 생각에 이 작은 세계의 작은 태양으로, 이 작은 덩어리의 식물성 염분을 따뜻하게 하고 먹인다.") 이러한 상상력은 관찰 정신과는 정반대의 길을 따릅니다. 씨앗은 단순히 열매 안에 보호된 것이 아니라, 생명력과 열기를 생성하는 근원적인 "가치"가 됩니다. 이러한 "과장된 이미지"는 느린 독서를 통해 무한한 가치들의 합일을 경험하게 하며, 미니어처는 인간을 꿈꾸게 합니다. 제라르 드 네르발(Gérard de Nerval)이 "인간의 상상력은 이 세상이든 다른 세상이든 사실이 아닌 것을 결코 발명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상상력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시라노의 사과 이미지와 달리, 보어(Bohr)의 행성 원자 모델과 같은 과학적 사유의 이미지는 수학적 사고의 합성적 구성물에 불과하며, 내재된 열기를 지니지 않습니다. **III. 꽃: 미니어처 속의 가정과 심리적 이미지** 식물학자들의 묘사에서도 미니어처의 심리적 깊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1851년의 *기독교 식물학 사전(Dictionnaire de botanique chrétienne)* 에 실린 독일 스타키스(stachys) 꽃에 대한 묘사는 꽃을 마치 인간의 가정처럼 친밀하게 표현합니다. "네 개의 수술은 작은 덧문으로 된 작은 틈새에 서서 서로에게 아주 우호적이며, 작고 푹신한 오두막에서 안락하고 따뜻하게 지낸다. 작은 암술은 존경스럽게도 그들의 발치에 남아있지만, 너무 작아서 그들에게 말을 걸려면 그들이 무릎을 굽혀야 한다." "The four stamens stand erect and on excellent terms with one an­other in the sort of little niche formed by the lower lip, where they remain snug and warm in little padded case­mates. The little pistil remains respectfully at their feet, but since it is very small, in order to speak to it, they, in turn, must bend their knees. These little women are very important, and those that appear to be the humblest, often assume great authority in their homes. The four seeds remain at the bottom of the chalice, where they are grown, the way, in India, children swing in a hammock. Each stamen recognizes its own handiwork, and there can be no jealousy. (154)" 이 묘사는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넘어, 꽃 속에서 "미니어처화된 부부 생활"과 "부드러운 따뜻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차가운 논리의 변증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차원이라는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작은 것에서 큰 것이 나타나는 상상력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같은 사전의 _페리윙클(Periwinkle)_ 항목에서는 "독자여, 페리윙클을 자세히 연구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디테일이 어떻게 대상의 크기를 증가시키는지 보게 될 것이다"라고 조언하며, 작은 것을 통해 대상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확대경을 든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순수한 현상학자"가 됩니다. **IV. 풍경 속의 알: 현실을 변형하는 상상력** 앙드레 피에르 드 망디아르그(André Pieyre de Mandiargues)의 산문시 "풍경 속의 알(The egg in the landscape)"은 창문 유리의 미세한 변형을 통해 외부 세계 전체가 유연하고 변형 가능한 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핵"이나 "난자"와 같은 상상적 중심은 현실을 재구성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며, 리만(Riemann)의 곡면 공간에 대한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 "확대경"이 되어 대상을 확장시키고, 피에르 알베르-비로(Pierre Albert-Birot)의 시처럼 자신을 장식적인 그림으로 만들면서도 "숨 쉬는 소리"를 듣는 생명력을 부여합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문학적 마술"이 단순히 눈속임이 아니라, 우리를 꿈꾸게 하고 상상력의 자율성을 경험하게 하는 "가상의 약"과 같다고 말합니다. **V. 미니어처 장인 정신과 위고의 미시 우주** 중세 미니어처 예술가들의 "인내심"과 같은 "미니어처화하는 상상력"은 평화롭고 조용한 공간에서 천천히 세계를 응축하는 행위입니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라인(Le Rhin)* 에서 화자는 작은 풀밭을 "또 하나의 세계"로 묘사하며, "갑옷처럼 단단한 딱정벌레," "이탈리아 소나무를 흉내 내는 솔방울," "힘겹게 기어오르는 뚱뚱한 벌" 등 미세한 생명들로 가득 찬 미시 우주를 그려냅니다. "In Freiberg I forgot for a long time the vast landscape spread out before me, in my preoccupation with the plot of grass on which I was seated, atop a wild little knoll on the hill. Here, too, was an entire world. Beetles were advancing slowly under deep fibres of vegetation; parasol-shaped hem­lock flowers imitated the pines of Italy . . . , a poor, wet bumble-bee, in black and yellow velvet, was laboriously climbing up a thorny branch, while thick clouds of gnats kept the daylight from him; a blue-bell trembled in the wind, and an entire nation of aphids had taken to shelter under its enormous tent . . . I watched an earthworm that resembled an antediluvian python, come out of the mud and writhe heavenward, breathing in the air. Who knows, perhaps it, too, in this microscopic universe, has its Her­cules to kill it and its Cuvier to describe it. In short, this universe is as large as the other one."("프라이베르크에서 나는 한참 동안 내 앞에 펼쳐진 광활한 풍경을 잊은 채, 언덕 위의 작은 야생 언덕에 앉아 있던 풀밭에 몰두했다. 여기에도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 딱정벌레들은 식물의 깊은 섬유질 아래에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고, 파라솔 모양의 독미나리 꽃은 이탈리아의 소나무를 흉내 내고 있었다… 검고 노란 벨벳 옷을 입은 불쌍하고 젖은 뒤영벌은 가시 돋친 가지를 힘겹게 기어오르고 있었고, 빽빽한 각다귀 구름이 그에게서 햇빛을 가렸다. 방울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진딧물 한 무리는 그 거대한 천막 아래에 피난처를 삼았다… 나는 대홍수 이전의 비단뱀을 닮은 지렁이가 진흙에서 기어 나와 하늘을 향해 몸부림치며 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 누가 알겠는가, 아마도 이 미시 우주에도 그를 죽일 헤라클레스와 그를 묘사할 큐비에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우주도 다른 우주만큼이나 크다.") 이처럼 미니어처는 세계가 단순히 "비-자아(non-I)"의 광활함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응축되고 지배되는 "지배된 세계"임을 깨닫게 하며, "작은 위험"으로 세계 의식을 경험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신선함"을 선사합니다. 토마스 하디(Thomas Hardy)나 J. P. 야콥센(J. P. Jacobsen)의 소설에서 이끼 한 줌이 소나무 숲이 되는 것처럼, 섬세한 관찰은 인간 내면의 섬세한 드라마와 연결됩니다. 이는 동화 속의 평범한 난쟁이가 아닌, "원초적인 힘"의 서식지가 되는 우주적 시학입니다. 그러나 상상력은 반대 방향으로 똑같은 확신으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소나무가 이끼가 되지는 않습니다. **VI. 엄지동자(Petit Poucet): 축소의 역동성과 해방** 동화 속 엄지동자(Petit Poucet) 이야기는 미니어처의 "추론적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엄지동자의 "작음"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라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는 작은 크기 덕분에 영리하고 재치 있게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며, 이는 "미니어처의 역동성"과 "원초적인 힘"의 서식지가 됩니다. 말의 귀에 들어가 쟁기를 끄는 농부를 지휘하는 엄지동자는 "결정의 중심"이자 "소리의 미니어처"가 됩니다. 이 작은 존재가 말을 하면, 말과 쟁기와 사람은 순종해야 합니다. 엄지동자 전설은 하늘의 "북두칠성(Grand Chariot)"과도 연결됩니다. 바슐라르는 이미지들이 작음에서 큼으로, 큼에서 작음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시적인 공간에 이중의 삶을 부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꿈의 공간이 지니는 자유로움을 나타내며, 심리 분석적인 해석(예: 북두칠성이 랭보의 어머니의 이미지라는 주장)을 넘어서는 "이미지의 직접적인 미덕"과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북두칠성 여관"은 단순히 가혹한 어머니의 집이 아니라, "하늘 위의 집"이자 "꿈꾸는 자가 항해의 주인이 되는" 안전한 피난처이며, 궁극적인 승화를 구현합니다. **VII. 거대함과 미니어처의 상호 관계** 미시우주와 거시우주의 상관관계는 노엘 뷔로(Noel Bureau)의 시 "그는 풀잎 뒤에 누워 하늘을 넓혔다"(“Il se couchait derrière le brin d'herbe / Pour agrandir le ciel.”)에서 잘 드러납니다. 쥘 쉬페르비엘(Jules Supervielle)의 *인력(Gravitations)* 에서는 가족 식탁이 "공중 식탁"이 되고, 램프-태양 이미지는 응축과 팽창을 결합합니다. 이는 보들레르(Baudelaire)가 고야의 석판화를 "미니어처 속의 광대한 그림"이라고 부르거나, 마크 보(Marc Baud)에 대해 "작은 것 안에 크게 창조할 줄 안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클로델(Claudel)은 "성단(星團)의 차가운 주름 속에 아직 어색한 태양들로 가득 찬 둥지"를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 보아도 같은 것을 본다고 표현하며, 거대함과 작음의 양립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조 부스케(Joe Bousquet)는 "나는 거리가 부여하는 작은 차원에 뛰어든다"고 말하며, 멀리 있는 마을들이 눈에는 고향이 되고, 서로 다른 것들이 미니어처 속에서 화해하며 "소유"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종탑 위에서 바라본 작은 인간들은 "파리만 한 크기"로 보이며, 이는 "높은 고독"의 꿈을 상징합니다. 이미지는 크기를 변화시키며 확장되고, 높아지거나 증식하는데, 이는 존재의 최소한의 크기("miniature of being")에 대한 물음을 제기합니다. **VIII. 소리 미니어처와 초감각적 지각** 미니어처는 시각적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감각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후각이나 청각은 시각보다 더 흥미로운데, 이는 시각이 드라마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향수나 미세한 냄새가 상상력의 세계 전체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소리 미니어처"가 환각이나 심리적 역동성과는 다른 순수한 상상력의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작품에서는 죽은 여인이 무덤 속에서 죽음을 거부하며, 미세한 소리들이 재앙을 예고하는 "예감의 존재론"을 형성합니다. 르네-기 카두(René-Guy Cadou)의 "병풍의 꽃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On entend gazouiller les fleurs du paravent.”)나 클로드 비제(Claude Vigée)가 "어린 개암나무가 푸르러지는 소리를 듣는다"(“J'écoute Un jeune noisetier Verdir.”)는 표현처럼, 시인들은 자연 속에서 말하지 않는 것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심리적 참조 없이도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표현의 현실"이며, 조건화된 승화를 넘어선 "절대적인 승화"를 보여줍니다.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는 아편을 피우며 "색깔의 소리를 들었다"고 썼는데, 이는 상상력이 어떻게 과장을 통해 우리를 "초월적으로 듣게" 하는지 보여줍니다. 랭보(Rimbaud)의 "곰팡이 핀 벽감들이 기어가는 소리를 들었다"(“Il écoutait grouiller les galeux espaliers”)처럼 형태 자체가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페리클레 파토키(Pericle Patocchi)의 "멀리서 나는 대지의 샘들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Au loin j'entendais prier les sources de la terre”)나 밀로슈(Milosz)의 "침묵의 냄새는 너무나 오래되었다"(“L'odeur du silence est si vieille”)는 시구는 침묵이 공간의 광대함 속에서 시간과 기억의 깊이를 표현하는 소리 미니어처의 극적인 예시입니다. 바슐라르는 자신을 "형용사의 철학자 “a philosopher of adjectives” (Bachelard, 1994, p. 180)"라고 칭하며, 작은 것에서 깊이를 발견하고, 큰 것에서 무한한 확장을 보는 변증법적 사유를 강조합니다. **XI. 언어의 집: 단어 속의 미니어처** 바슐라르는 단어 자체를 "작은 집(little houses)"에 비유하며, 각 단어에는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상식은 1층에 살며" 일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단어의 집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단계적으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며, 모호한 어원의 먼 복도에서 길을 잃고 단어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보물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언어의 공간적 비유는 시인의 삶이 언어를 통해 상상력을 펼치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행위임을 드러냅니다. 곡선이 "따뜻하고 둥지 같은 힘"을 지닌다는 그의 언급은 상상력이 형태에 감각적, 정서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을 통해 미니어처가 단순히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상상력이 만나는 심오한 현상학적 영역임을 명확히 합니다. 작은 것 속에서 무한한 우주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의 감각과 기억, 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문학적 탐구를 통해 밝혀내고자 합니다. ### 8장 "친밀한 광대함(Intimate Immensity) 장은 광대함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객관적인 공간의 크기를 넘어, 인간 내면의 친밀한 경험과 상상력 속에서 어떻게 확장되고 심화되는지를 현상학적으로 탐구합니다. 8장 "친밀한 광대함"은 광대함이 단순히 외부 세계의 물리적 크기를 넘어선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경험이며, 사색과 상상력을 통해 인간 존재가 확장되고 심화되는 방식을 현상학적으로 탐구합니다.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바슐라르는 숲, 밤, 심지어 단어 하나하나에서도 이러한 '내면의 광대함'을 발견하며, 이를 통해 인간이 세계와 친밀하게 소통하고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재정립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외부 세계의 광대함은 내면의 깊이와 상응하며, 이는 인간이 상상력을 통해 자신을 초월하고 세계를 재창조하는 근원적인 힘을 지님을 역설합니다. **8. 친밀한 광대함 (Intimate Immensity)** 가스통 바슐라르는 8장 "친밀한 광대함"에서 광대함(immensity)이라는 개념을 철학적 사색의 범주로 제시하며, 이는 외부 세계의 크기를 측정하는 것을 넘어선 내면적 경험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상상력을 통해 광대함의 이미지가 어떻게 무한히 확장되고 심화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인간 존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분석합니다. **I. 사색의 철학적 범주로서의 광대함** 바슐라르는 광대함이 단순히 시선이 닿는 넓은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색의 철학적 범주(philosophical category of daydream)"라고 정의합니다. 사색(daydream)은 본성상 웅장함을 관조하며, 이러한 관조는 즉각적인 현실 세계를 넘어 무한의 흔적을 지닌 다른 세계로 사색자를 이끌어갑니다. 이는 단순한 기억의 작용이 아니라, 상상력 그 자체가 광대함의 이미지를 무한히 확장시키는 능력에 기인합니다. 사색은 가까운 대상에서 벗어나 즉시 "어딘가 다른 곳(elsewhere)"의 공간으로 달아나는 '근원적인 관조(original contemplation)'입니다. 이 '다른 곳'이 자연의 배경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광대해집니다. 광대함의 현상학은 어떠한 현상에 얽매이지 않고, 이미지를 형성하는 생산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상상하는 의식(imagining consciousness)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춥니다. 즉, 광대함의 이미지를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순수한 상상력의 순수한 존재(pure being of pure imagination)'를 내면에서 실현하게 되며, 이는 인간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는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이러한 사색 속에서 우리는 세계 속에 '던져진(cast into the world)' 것이 아니라, 꿈을 꾸기 전의 세계를 초월함으로써 세계를 '여는(open the world)' 존재가 됩니다. 바슐라르는 내면의 광대함이 고요한 사색의 역동적인 특징 중 하나이며, 이는 "움직이지 않는 인간의 움직임(the movement of motionless man)"이라고 표현합니다. 피에르 알베르 비로(Pierre Albert-Bireau)는 이러한 내면의 광대함을 다음과 같이 응축된 시구로 표현합니다: "Et je me cree d'un trait de plume Maitre du Monde Homme illimite." (그리고 나는 한 획의 펜으로 나 자신을 창조한다 / 세상의 주인 / 무한한 인간.) **II. 숲의 광대함** 외부 세계에 대한 표현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종종 이러한 내면의 광대함입니다. 예를 들어, 숲의 광대함은 지리적 정보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인상들의 총체에서 기원합니다. 숲 속을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깊이(going deeper and deeper)'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는 불안한 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르코와 테레즈 브로스(Marcault and Therese Brosse)는 숲을 "진정한 심리적 초월(veritable psychological transcendents)"로 묘사합니다. 숲은 눈에는 가려져 있지만 행동에는 투명하며, 숨겨진 웅장함과 깊이를 표현합니다. 피에르-장 주브(Pierre-Jean Jouve)의 "경건한 숲(Pious forest)"은 "무한히 닫혀 있고, 곧은 분홍빛 오래된 줄기로 빽빽하며 / 무한히 좁아지고, 더 낡고 회색빛을 띠며 / 광대하고 깊은 이끼 낀 침대, 벨벳의 울음"과 같이 그 자체의 경계 안에 무한함을 축적합니다. 이는 인간의 역사를 초월한 숲의 근원적인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피에르 게갱(Pierre Gueguen)은 '깊은 숲'(브로셀리앙드 숲)을 "고요한 대지, 삼십 리그의 초록빛 속에 응축된 그 거대한 침묵 때문에"라고 묘사하며 초월적인 고요함을 전달합니다. 숲의 소리나 움직임조차 그 침묵과 고요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쥘 쉬페르비엘(Jules Supervielle)은 "우리 자신이라는 숲의 섬세한 거주자들(Habitants delicats des forets de nous-memes)"이라고 노래하며 내면의 평화를 표현합니다. 르네 메나르(Rene Menard)는 자신의 '친밀한 숲'을 통해 "나는 거대한 밀도를 살고... 숲 속에서 나는 온전한 나 자신이다. 모든 것이 내 마음 속에서 가능하며, 도덕률과 도시로부터 두껍게 우거진 거리가 나를 분리한다"고 말합니다. 바슐라르는 숲의 '조상적인(ancestral)'이라는 형용사에 대해서는 경계합니다. 이러한 표현이 단순한 수사학적 상투구로 전락하여 깊이 있는 상상력과 심층 심리학의 직접적인 본성을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숲은 과거의 영역에 존재하며, 개인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숲의 존재와 연결될 때 백년 전의 과거로까지 확장될 수 있습니다. **III. 밤의 광대함과 자기 인식** 이러한 사색이 인간을 사로잡을 때, 세부 사항은 희미해지고 모든 그림 같은 풍경은 사라지며, 시간은 무심하게 흐르고 공간은 끝없이 펼쳐집니다. 밀로슈(Milosz)의 『사랑의 입문(L'amoureuse initiation)』에서 그는 '공간의 경이로움의 정원'을 관조하며 "내 존재의 가장 깊고 은밀한 영역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았고, "별자리들은 모두 당신의 것이고, 당신 안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는 사랑이 없는 우주에서의 고독을 역설적으로 광대함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밀로슈는 또한 "오, 공간이여, 물을 가르는 자여; 내 기쁜 친구여, 내가 얼마나 사랑으로 너를 느끼는가!"라고 외치며 미소함(infinitesimal)과 광대함(immense)이 하나의 순간에 결합되는 초월적 경험을 보여줍니다. 이는 공간의 황홀경이 모든 경계를 넘어 확장되며, "모든 것은 빛과 온유함과 지혜 속에 잠겨 있었으니; 비현실적인 공기 속에서 거리는 거리를 유혹했다. 나의 사랑은 우주를 감쌌다"고 표현됩니다. 이 섹션은 '스펙터클 콤플렉스(spectacle complex)'를 해체하고, 친밀함과 광대함 사이의 깊은 관계를 강조합니다. **IV. 보들레르의 'Vast'라는 단어** 바슐라르는 보들레르(Baudelaire)의 작품에서 'vaste'(광대한)라는 단어가 갖는 특별한 의미에 주목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객관적인 공간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보들레르에게 있어 내면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되는 경험을 나타내는 주요한 단어입니다. 'vaste'는 '행복한 폭(felicitous amplitude)'에 대한 끌림을 나타내며, 보들레르의 글에서 이 단어의 사용 빈도와 의미는 그것이 단순한 객관적 의미를 넘어선 '친밀한 공명(intimate resonances)'을 가짐을 보여줍니다. 'Vast'는 광대한 여가, 광대한 시골의 침묵, 새로운 명료함으로 가득 찬 광대한 도덕 세계, 기억의 광대한 캔버스, 광대한 생각에 억압된 인간, 심지어 '광대한 동물'이나 '광대한 집단적 존재'와 같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보들레르에게 'vaste'는 광대한 세계와 광대한 생각을 통합하는 형이상학적 논증이며, 특히 친밀한 공간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용합니다. 보들레르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음악을 통해 광대함의 세 가지 상태를 묘사합니다. 첫째, 로엔그린 전주곡에서 영혼이 '무한한 공간'에 잠기고 성스러운 잔을 든 천사들이 나타나며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황홀경. 둘째, 리스트(Liszt)의 글에서 '몽롱한 에테르'가 넓고 잠잠한 선율의 장을 덮으며 투명한 음악 세계의 확장을 묘사. 셋째, 보들레르 자신의 노트에서 '중력의 힘에서 해방된 느낌', '높은 곳에 스며드는 비상한 관능'을 통해 '그 자체 외에 다른 배경이 없는 광대함(immensity with no other setting than itself)'을 경험합니다. 이 '그 자체 외에 다른 배경이 없는 광대함'은 내면의 친밀함이 확장됨에 따라 웅장함이 증대되는 현상학적 핵심을 이룹니다. 이는 사색 속에서 걱정과 생각, 심지어 꿈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바슐라르는 'vast'라는 단어가 보들레르에게 단순한 차원을 넘어선 '발성적 가치(vocal value)'를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 단어는 말하는 이의 숨결 위에서 천천히 고요하게 발음되어야 하며, 고요함, 평화, 평온을 환기시키고 존재의 은밀한 깊이에서 울리는 메아리를 전달합니다. 이는 인간의 고뇌로부터 해방되어 무한한 공간을 열고 우주적으로 호흡하게 하는 '치유적' 효과를 가집니다. 막스 피카르(Max Picard)의 언급("Das W in Welle bewegt die Welle im Wort mit, das H in Hauch lasst den Hauch aufsteigen, das t in fest und hart, macht fest und hart.")처럼, 중요한 단어들은 음성 현상과 로고스 현상이 조화를 이루는 극단적인 감수성의 지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V. 경험적 광대함과 그 한계 (테느의 사례)** 바슐라르는 보들레르의 시학에서 광대함이 객관적인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후, '경험적' 광대함의 예시로 테느(Taine)의 『피레네 여행(Voyage aux Pyrenees)』 구절을 대조합니다. 테느가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 그는 실망하여 바다를 파리의 시골에서 본 사탕무 밭, 양배추 조각, 보리밭과 비교하고 먼 항해선은 비둘기처럼 보였다고 묘사합니다. 테느는 이러한 '인공적인 연상'으로 인해 '광대함의 느낌'을 회복하는 데 3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바슐라르는 이를 '형편없는 문학'으로 비판하며, 진정한 상상력의 부재를 지적합니다. **VI. 나무와 내면 공간** 시인들은 우리가 내면에서 '보는 기쁨'을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릴케(Rilke)는 나무를 바라보며 "우리 밖에 있는 공간은 사물을 침범하고 번역한다: 만약 당신이 나무의 존재를 이루고 싶다면, 그것을 당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 내면 공간으로 감싸라. 제약으로 그것을 둘러싸라. 그것은 무한하며, 당신의 포기 속에서 질서 잡힐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나무가 된다"고 썼습니다. 이는 나무가 단순히 외부의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 공간과 결합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나무는 늘 웅장함을 지향하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확대시키는 운명을 지닙니다. 릴케는 "새들은 우리를 통해 침묵하며 날아간다. 오, 나는 성장하기를 갈망하며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내 안의 나무가 자라난다"고 표현하며, 외부의 나무와 내면의 존재가 함께 성장하는 상상적 경험을 강조합니다. 시적 공간은 깊은 친밀함에서 무한한 확장으로 나아가며, 'ex-'로 시작하는 단어들의 현상학에 속합니다. 조 보스케(Joe Bousquet)는 나무의 친밀한 공간을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공간은 벌집 안의 꿀처럼 그 안에 있다 “"Space is nowhere. Space is inside it like honey in a hive."” (Bachelard, 1994, p. 202)"고 묘사합니다. 이 '꿀-공간(honey-space)' 또는 '공간-꿀(space-honey)'의 이미지는 내포와 외연의 변증법을 초월하며, 나무에 '무한한 것들의 확장'을 부여합니다. 릴케는 "모든 인간을 통해 독특한 공간, 친밀한 공간이 세계를 향해 열린다…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수 있고 무수한 존재들로 자신을 둘러싸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라고 말하며, 개별 존재가 우주 공간의 중심이 되는 라이프니츠적 '공존(coexistence)' 사상을 시적으로 구현합니다. **VII. 평원과 사막의 내면적 강렬함** 광대함과 친밀함의 변증법은 평원과 사막과 같은 광대한 자연에서도 드러납니다. 릴케에게 "평원은 우리를 고양시키는 감정"으로, 세계 속 우리의 상황을 부드럽게 만드는 힘을 지닙니다. 반면 앙리 보스코(Henri Bosco)는 평원을 "나는 항상 다른 곳, 떠다니고 유동적인 다른 곳에 있다"고 묘사하며, 사색의 일관성 없음을 광대한 공간에 투영합니다. 필리프 디올레(Philippe Diole)의 사막 경험은 "경험된 사막의 광대함이 내면의 강렬함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에서 현상학적으로 중요합니다. 사막은 '내면 공간(inner space)'으로 병합되어 이미지의 다양성을 통일합니다. 디올레의 심해 다이빙 경험은 그에게 '절대적인 깊이(absolute depth)'와 '무한한 물의 일차원 공간'을 선사했고, 사막에서도 그는 상상 속에서 사막 풍경을 물로 채워 '발명된 잠수(invented immersion)'를 통해 건조한 세계를 인간화합니다. 이는 단순히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바꾸는(change our nature)' 행위이며, 공간이 존재의 친구임을 보여줍니다. **VIII. 토끼의 시선과 고요한 평원** 가브리엘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는 평온한 평원에서 떨고 있는 토끼의 시선을 묘사하며, 그 시선이 "온 우주에 평화를 부여하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토끼의 커다란 촉촉한 눈은 "여름 저녁의 연못처럼 아름답고, 갈대가 물에 잠겨 하늘 전체를 비추고 변형시킨다"고 하여, 연못이 풍경의 눈이며, 반사된 풍경의 아름다움이 우주적 나르시시즘의 근원임을 드러냅니다. 쥘 레스퀴르(Jules Lescure)는 "나는 잎의 고요함 속에 산다, 여름은 자란다(J'habite la tranquillite des feuilles, l'ete grandit)"라고 표현하며, 살아 숨 쉬는 고요한 잎사귀와 가장 겸손한 눈에서 발견되는 고요한 시선이 광대함의 장인이 되어 세계와 여름을 성장시킨다고 말합니다. 시는 고요의 파장을 내보내며, 상상 속의 고요는 존재의 발현이 됩니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심리학자들이 일시적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인상에도 광대함을 부여하며,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광대함 속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 9장 "안과 밖의 변증법(The Dialectics of Outside and Inside)"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 『공간의 시학』 9장은 "안과 밖(Outside and Inside)"이라는 근원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인간의 상상력과 실존에 미치는 심오한 영향을 탐구합니다. 이 장은 단순한 물리적 경계를 넘어, 존재의 본질적인 특성과 감정적 경험을 형성하는 데 있어 안과 밖의 변증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문학적 사례를 통해 섬세하게 파헤칩니다. **I. 안과 밖의 형이상학적 함의와 신화적 기원** 바슐라르는 안과 밖의 구분이 단순한 기하학적 나눔을 넘어선다고 주장합니다. 논리학자들이 겹치거나 서로 배제하는 원을 그리는 것처럼, 안과 밖은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처럼 모든 것을 결정하며 존재와 비존재의 형이상학적 기반이 됩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사고에 공간성을 부여하며, 만약 형이상학자들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면 무엇을 생각했을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는 "안과 밖의 첫 번째 신화"를 언급하며, 형식적인 대립을 넘어선 소외(alienation)와 적대감(hostility)을 내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기하학적 대립이 공격성을 띠게 되며, 형식이 평온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쪽(This side)"과 "저쪽(beyond)"이라는 표현들은 이러한 안과 밖의 변증법의 희미한 반복이며, 모든 것, 심지어 무한도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바슐라르는 존재를 탐구하기 위해 "지리적" 표현이 아닌, 존재의 다양한 경험을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II. 언어와 존재의 공간성: 고정되지 않은 변증법** 바슐라르는 현대 철학의 언어적 특성을 "기하학적 암화(geometrical cancerization of the linguistic tissue)"라고 비판하며, 인위적인 문법이 부사(adverbs)와 동사(verbs)를 결합하여 "과도한 성장(excrescences)"을 만들어낸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하이픈(hyphens)으로 연결된 "être-là (being-there)"와 같은 단어들은 외부적 특성과 내부적 특성을 뒤섞으며, 철학적 언어가 응집되는 언어가 되어버린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종종 단어의 "내밀한 유대감(intimate ties)"을 느슨하게 만들거나, 접두사와 접미사가 제 기능을 잃고 자체적으로 의미를 가지려 하여 단어의 균형을 깨뜨립니다. 예를 들어, "être-là"에서 존재(being)와 거기(there) 중 어느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모호해지며, "거기(there)"가 너무 강하게 발화될 경우 내밀한 존재(intimate being)를 외재화된(exteriorized) 장소로 밀어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존재를 연구할 때는 이러한 언어적 급함을 피하고, 존재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 존재론적 일탈(ontological deviations)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존재 안에서 모든 것은 "우회적이고, 순환적이며, 반복적"입니다. 인간 존재의 나선형적(spiraled) 특성을 강조하며, 바깥에서 보면 잘 정의된 중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중심에 도달하지 못하는 "고정되지 않은 존재(unsettled being)"임을 설명합니다. 이는 장 타르디외(Jean Tardieu)의 시에서 잘 나타납니다: > "Pour avancer je tourne sur moi-meme Cyclone par l'immobile habite. Mais au-dedans, plus de frontieres!" (나아가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을 맴돈다. 고정된 것에 거하는 사이클론. 그러나 안에는, 더 이상 경계가 없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언어적 응집체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형이상학은 현대 언어의 극단적인 유동성(extreme mobility)을 활용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는 시인들이 늘 그러했듯이, 모국어의 동질성(homogeneity)을 유지하면서도 현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통찰력을 포용하는 담론적(discursive) 형이상학을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시각은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전달하지만, 존재는 스스로를 보지 않고 아마도 스스로에게 귀 기울일 것입니다. 존재의 중심에 가까이 다가갈 때도 우리는 그 견고함을 확신할 수 없으며, 종종 존재는 외부에서 닫혀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III. 상상의 극단성: 안과 밖의 공포와 해방** 기하학적 표현의 관점에서 안과 밖의 변증법은 경계가 장벽으로 강화된 기하학주의에 의해 지지됩니다. 그러나 시인의 과감함을 따르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직관(definitive intuitions)"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안과 밖의 두 용어는 형이상학적 인류학에서 대칭적이지 않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내부를 구체적으로, 외부를 광대하게 만드는 것"이 상상력의 인류학의 첫 번째 과제인데, 구체적인 것과 광대한 것 사이의 대립은 진정한 대립이 아니며, 비대칭성은 작은 접촉에도 드러납니다. 상상력에 의해 경험되는 안과 밖은 단순한 상호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앙리 미쇼(Henri Michaux)의 산문시 「그림자들에 휩싸인 공간(L' espace aux ombres)」은 이러한 "끔찍한 안-밖(horrible en dedans-en dehors)"을 묘사합니다: > "L'espace, mais vous ne pouvez concevoir, cet horrible en dedans-en dehors qu'est le vrai espace. > Certaines (ombres) surtout se bandant une derniere fois, font un effort desespere pour "etre dans leur seule unite." Mal leur en prend. J'en rencontrai une. > Detruite par chatiment, elle n'etait plus qu'un bruit, mais enorme. > Un monde immense l'entendait encore, mais elle n'etait plus, devenue seulement et uniquement un bruit, qui allait rouler encore des siecles mais destine a s' eteindre completement, comme si elle n'avait jamais été." > (공간, 그러나 당신은 진정한 공간인 그 끔찍한 안-밖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어떤 (그림자들)은 특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힘을 모아 "자신들의 유일한 통일성 안에 존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은 후회한다. 나는 그중 하나를 만났다. > 처벌로 파괴된 그것은 더 이상 소음, 거대한 소음에 불과했다. > 거대한 세계가 여전히 그것을 듣고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그리고 오직 소음이 되어 수 세기 동안 계속 울려 퍼지겠지만, 마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질 운명이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존재-거기(being-there)"를 잃고, 의미 없는 소음, 혼란스러운 웅얼거림으로 전락한 존재를 묘사합니다. 존재는 자신이 만들어낸 악의적인 의도(evil intention)의 메아리에 불과해지며, 이러한 "끔찍한 안-밖"은 내밀한 공간의 명료함을 잃고 외부 공간은 가능성의 원료인 공허를 잃어버립니다. 두려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며, 피난처를 찾을 수 없는 공간은 "끔찍한 외부-내부"가 됩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이미지를 "실험적 광기(experimental folly)"의 한 조각으로 받아들이며, 과장(exaggeration)이 상상력의 본질적인 현상임을 강조합니다. 정신분석학이 환원(reduction)의 방향을 따르는 것과 달리, 현상학은 이미지의 "심리적 긍정성(psychic positivity)"을 탐구하며, 이를 통해 존재의 내적 교란을 자각하게 됩니다. 릴케(Rilke)는 "예술 작품은 항상 위험에 직면하고, 인간이 갈 수 없는 지점까지 경험의 끝까지 간 자들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며, 이러한 극단성이 작품의 본질임을 시사합니다. 쥘 쉬페르비엘(Jules Supervielle) 또한 "너무 많은 공간이 너무 적은 공간보다 우리를 훨씬 더 질식시킨다(Trop d'espace nous étouffe beaucoup plus que s'il n'y en avait pas assez)" 고 말하며, 안과 밖의 공간이 서로 어지럼증을 교환하는 역설적 상황을 표현합니다. **IV. 화석화된 은유와 열린 존재: 언어의 움직임** 바슐라르는 언어 활동의 자유로운 표현을 회복하기 위해 "화석화된 은유(fossilized metaphors)"의 사용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열림(open)"과 "닫힘(closed)"이 은유적 역할을 할 때, 그 은유를 경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부드럽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시적 언어는 의미를 통해 "둘러싸고(encloses)" 동시에 시적 표현을 통해 "열립니다(opens up)". 그는 인간 존재를 "반쯤 열린 존재(half-open being)"로 정의하며, 존재의 표면에서 안과 밖의 움직임이 수없이 많고, 자주 역전되며, 망설임으로 가득하다고 설명합니다. **V. 문의 상상력: 망설임과 개방성** 문(door)은 "반쯤 열린 것의 온전한 우주(an entire cosmos of the Half-open)"를 상징합니다. 문은 존재의 궁극적인 깊이를 열고자 하는 유혹과 모든 내성적인 존재를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원초적 이미지입니다. 닫힌 문과 열린 문은 두 가지 유형의 공상을 날카롭게 분류합니다. > "La porte me flaire, elle hésite." > (문이 나를 냄새 맡고, 망설인다.) 장 펠르랭(Jean Pellerin)의 이 구절은 사물에 심리적 특성이 얼마나 많이 전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문턱은 신성한 것(sacred thing)으로 여겨지며, 미셸 바롤트(Michel Barrault)는 "문턱을 아버지의 집에서 오고 가는 기하학적 장소"로 정의합니다: "Je me surprends a definir le seuil Comme etant le lieu geometrique Des arrivees et des departs Dans la Maison du pere." (나는 문턱을 정의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 아버지의 집에서 오고 가는 기하학적 장소로.) 문은 망설임, 유혹, 욕망, 안전, 환영, 존경 등 다양한 이미지와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우리가 문을 열고 닫는 모든 행동은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the Great)의 전설처럼, 오른팔로 문을 열고 왼팔로 문을 닫는 쌍둥이 이야기는 문이 양방향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라몽 고메스 데 라 세르나(Ramon Gomez de la Serna)는 "시골로 열린 문들은 세상의 등 뒤에서 자유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Doors that open on the countryside seem to confer freedom behind the world's back)"고 말하며, 문이 고독과 외부 세계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매개체가 됨을 암시합니다. **VI. 내밀한 공간의 역전: 존재를 담는 방과 머리** 바슐라르는 은유적 표현에서 "안에(in)"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사람들이 그 의미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합리적인 언어로 번역하려는 경향을 비판합니다. 그는 정신의 병리학적 측면에서 벗어나 순수하고 자유로운 상상력, 즉 유기적 자극과 무관한 해방적 상상력의 이미지를 논의하고자 합니다.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의 시에서 이러한 이미지의 역전이 나타납니다: > "Une lente humilite penetre dans la chambre Qui habite en moi dans la paume du repos" > (느린 겸손이 방으로 스며든다 / 내 안의 휴식의 손바닥에 거하는 방으로) 이 이미지는 방이 우리 안에 거하며, 방의 친밀감이 우리의 친밀감이 되는 "상상 속의 거주(daydream of inhabiting)"를 보여줍니다. 방은 우리를 더 이상 제한하지 않으며, 우리의 과거의 모든 방들이 이 하나의 방 안에 들어맞는다고 바슐라르는 설명합니다. 또 다른 차라의 시는 더욱 수수께끼 같지만, 공간적 역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Le marche du soleil est entre dans la chambre Et la chambre dans la tete bourdonnante." (태양의 시장이 내 방으로 들어왔고 / 방은 윙윙거리는 내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이 시는 태양의 첫 광선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그 광선이 벌들을 데려와 방이 "웅웅거리는(buzzing)" 벌집이 되는 이미지를 통해, 방이 꿈꾸는 사람의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초현실적인 경험을 묘사합니다. 현상학자는 이러한 "과장된(exaggerated)"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이를 증폭시킴으로써 순수한 이미지의 초현실적인 작용을 경험할 수 있다고 바슐라르는 주장합니다. 피에르-장 주브(Pierre-Jean Jouve)는 자신의 은밀한 존재를 "가장 내밀한 세포(intimate cell)"에 위치시키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 "La cellule de moi-meme emplit d'etonnement La muraille peinte a la chaux de mon secret." > (나 자신의 세포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다 / 내 비밀의 회칠한 벽.) 이 방은 시인이 글을 쓰는 고요한 공간으로, 이미지 덕분에 거주 가능해지며, 비밀스러운 존재는 강한 벽보다 회칠한 벽의 "하얀색(whiteness)"으로 더 잘 보호받는다고 느낍니다. 이는 높여진(heightened) 품질이 시적 이미지를 지배하는 방식의 한 예시입니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작품에서도 이와 유사한 역전된 친밀감이 나타납니다: "About this room, which was plunged in utter darkness, I knew everything, I had entered into it, I bore it within me, I made it live, with a life that is not life, but which is stronger than life, and which no force in the world can vanquish." (완전히 어둠에 잠긴 이 방에 대해 나는 모든 것을 알았다. 나는 그 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 방을 내 안에 품었으며, 생명이 아닌 생명, 그러나 생명보다 강하고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생명으로 그것을 살게 했다.) 이 구절은 방이 단순히 묘사되는 대상이 아니라, 작가가 그 안에 들어가고, 그 방을 자신 안에 품고, 그 방에 생명을 부여하는 "내면의 방(inner room)"이 됨을 보여줍니다. 릴케(Rilke) 또한 좁은 공간에서 평온함을 느끼는 역설을 표현하며, 외부의 무한함이 내면으로 스며들어 존재의 모세혈관에서 솟아오르는 경험을 묘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슐라르는 발자크(Balzac)의 『루이 랑베르(Louis Lambert)』의 초기 버전과 최종 버전의 변화를 언급하며, "공간을 자신의 전진 앞에 물러나게 했다(he made space withdraw before his advance)"라는 표현이 "그는 공간을 자신의 뒤에 남겨두었다(He left space, as he said, behind him)"로 수정된 것을 지적합니다. 이 변화는 공간에 대한 존재의 힘이 약화되고, "존경할 만한(admirable)" 힘을 잃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슐라르는 초기 버전의 표현이 사유하는 존재가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도록 모든 공간을 외부에 두는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고 강조하며 9장을 마무리합니다. ### 10장 둥긂의 현상학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 챕터 10 「둥긂의 현상학(The Phenomenology of Roundness)」에서 둥근 형태가 단순한 기하학적 개념을 넘어 인간 존재의 내면과 상상력에 미치는 심오한 영향을 탐구합니다. 이 장은 둥긂이 지닌 형이상학적 진리, 그리고 그 진리가 시적 상상력을 통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상세하게 고찰하며, 객관적인 관찰이나 심리 분석을 넘어서는 현상학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I. 핵심 사상: “존재는 둥글다(Being is Round)”** 바슐라르는 형이상학자들이 간결하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시인에 비유하며,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진리에 관하여(Von der Wahrheit)』에 나오는 명제 "Jedes Dasein scheint in sich rund."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둥근 것처럼 보인다.)를 이 장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는 이 명제가 증명을 거쳐야 할 진리라고 보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서로 다른 사상 배경을 가진 인물들의 발언을 제시합니다: • 빈센트 반 고흐(Van Gogh)는 "Life is probably round." (삶은 아마도 둥글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 조 부스케(Joe Bousquet)는 반 고흐의 문장을 알지 못했음에도 "He had been told that life was beautiful. No! Life is round." (그는 삶이 아름답다고 들었다. 아니다! 삶은 둥글다.)라고 기록했습니다. • 라 퐁텐(La Fontaine)은 "A walnut makes me quite round." (호두가 나를 아주 둥글게 만든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다양한 출처의 텍스트들이 둥긂의 현상학적 문제를 명확하게 제시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둥긂의 이미지가 외부 세계의 지식과 무관하게 내면적인 데이터를 보존해야 하며, 삽화의 생생한 색상이 이미지의 본래 빛을 잃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평균적인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지각으로 정당화할 수 없으며, 단순히 "tout rond"(솔직하고 꾸밈없는)과 같은 은유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존재의 둥긂은 가장 순수한 현상학적 사색에서만 직접적인 진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세계를 지우고 과거를 지니지 않으며, 어떠한 이전 경험에서도 파생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메타심리학적인 것이며, 우리에게 고독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고 즉시 완성되는 것은 놀라운 현상학적 특성으로, 우리에게 현상학적 태도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그 갑작스러움에 몰입할 때, 우리는 오직 그 표현의 존재 안에 온전히 머무르게 되며, 삶의 둥긂 속에 살게 됩니다. ==이는 마치 호두가 껍데기 안에서 둥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자, 화가, 시인, 그리고 우화 작가들은 순수 현상학의 기록을 제공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 존재를 그 중심으로 모으는 방법을 배우고, 그 변주를 통해 문서를 더욱 섬세하게 만듭니다. **II. 현상학적 접근의 정교화** 바슐라르는 야스퍼스의 "둥근 것처럼 보인다(scheint in sich rund)"는 표현에서 '처럼 보인다(scheint)'를 제거하고 "das Dasein ist rund"(존재는 둥글다)로 단순화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는 '존재'와 '외관'의 이중성을 제거하고, 존재가 그 즉각성 속에서 경험되어야 한다는 현상학적 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완전한 성찰은 관찰하는 존재와 관찰되는 존재로 나뉘지만, 현상학은 모든 매개 기능과 부가 기능을 제거해야 합니다. 존재의 둥긂 이미지는 우리가 스스로를 결집하고, 초기 존재 구성을 부여하며, 내면에서 우리의 존재를 친밀하게 확인하도록 돕습니다. 왜냐하면 내부에서 경험되고 외부의 모든 특성을 제거한 존재는 둥글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이나 파르메니데스의 '구체(sphere)'를 인용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철학적 문화는 너무 잘 조화된 개념들을 도입하여 현상학자가 처음부터 세부적으로 검토하고 재검토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구체'는 너무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에 그 원초성을 잃었으며, 기하학적 완벽성으로 이미지를 풍요롭게 하려는 유혹에 저항하기 어렵습니다.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의 소설에서 젊은 변호사가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으며 구체를 손가락으로 돌리는 모습은, 둥긂의 모든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사례로 언급됩니다. 기하학자의 구체는 본질적으로 비어있으며, 현상학적 둥긂 연구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III. 탈철학화와 탈심리분석화** 바슐라르는 이러한 초기 논평들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탈철학화'와 '탈심리분석화'를 통해 문화적 매력을 피하고 과학적 사고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얻은 신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말합니다. 철학은 우리를 빨리 성숙시키고 확고한 상태로 굳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이미지가 존재에게 주는 충격을 경험하기 위해 '탈철학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나이에 있을 때는 어떻게 또는 왜 상상하는지 말할 수 없지만, 상상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상상하지 않게 됩니다. 즉, 스스로를 '미성숙'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둥긂, 특히 견고한 둥긂 이미지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에서 정신분석학적 설명(예: 모든 둥근 것이 애무를 유발한다는 주장)을 강조할 수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대체로 타당하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으며, 특히 존재론적 결정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형이상학자가 존재는 둥글다고 말할 때, 그는 모든 심리적 결정을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과거의 꿈과 생각을 제거하며, 존재의 현재성을 경험하도록 초대합니다. 정신분석학자는 표현의 존재 자체에 내재된 현재성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귀성은 현상학자의 주의를 끌고, 형이상학자와 시인이 제안하는 존재의 관점으로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격려합니다. **IV. "새는 거의 완전히 구형이다(A bird is almost completely spherical)" (미셸레)** 바슐라르는 심리학적 또는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벗어난 이미지의 예시로 미셸레(Michelet)의 구절을 제시합니다: "a bird is almost completely spherical." (새는 거의 완전히 구형이다.) 바슐라드는 이 구절에서 '거의(almost)'를 제거하여, 야스퍼스의 '둥근 존재' 원리에 명확히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미셸레에게 새는 "견고한 둥긂"이자 "둥근 생명"이며, "살아있는 집중의 숭고하고 신성한 정점"입니다. 이는 "최고의 통일성을 지니며, 집중의 과잉은 새의 위대한 개인적 힘을 구성하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개별성과 고립, 사회적 약함을 내포한다"고 설명됩니다. 미셸레는 새의 '우주적 상황'을 포착하여, 모든 면에서 보호되고 살아있는 공 안에 갇힌 생명의 중심화로 이해합니다. 형태, 색깔, 움직임 등 다른 모든 이미지는 '절대적인 새', 즉 둥근 생명의 존재 앞에서 상대적이 됩니다. 이러한 '존재 이미지'는 문학 비평이나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우주적 상상력의 철학이 정립된다면 그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릴케(Rilke) 또한 미셸레의 글을 몰랐을지라도 "This round bird-call / Rests in the instant that engenders it / Huge as the sky above the withered forest / Docilely things take their place in this call / In it the entire landscape seems to rest." (이 둥근 새소리 / 그것을 낳는 순간에 쉬는 / 시든 숲 위 하늘처럼 거대한 / 모든 것이 이 부름 속에 순순히 자리 잡고 / 그 안에서 온 풍경이 쉬는 듯하다.)라고 썼습니다. 이는 시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반응하며 둥긂의 원초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둥긂'이라는 단어 자체의 발음적 가치도 언급하며, 철학자가 "Das Dasein ist rund. Being is round." (존재는 둥글다.) 라고 선언하며 강의를 시작할 때 느끼는 기쁨을 표현합니다. **V. 호두나무 (릴케)** 바슐라드는 보다 단순하고 구체적인 둥긂의 예시로 릴케의 시 「Arbre toujours au milieu」(항상 중앙에 있는 나무)를 인용합니다. 이 시에서 나무는 세상의 중심에 서서 "천국의 큰 돔(Heaven's great dome)"을 맛봅니다. 릴케는 단순히 전설적인 이그드라실(Yggdrasill) 나무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둥근 존재의 상상력이 지닌 고유한 법칙을 따릅니다: 나무가 "자랑스럽게 둥글어져(proudly rounded)" 있기 때문에 "천국의 큰 돔"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둥근 존재 주변에 세계가 둥글게 존재한다(The world is round around the round being)"는 것입니다. 시의 구절마다 나무는 성장하며 존재를 확장합니다. 나무는 살아있고, 사색하며, 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One day it will see God / And so, to be sure, / It develops its being in roundness / And holds out ripe arms to Him. / Tree that perhaps / Thinks innerly / Tree that dominates self / Slowly giving itself / The form that eliminates / Hazards of wind!" (어느 날 신을 볼 것이고 / 그래서, 확실히, / 그것은 둥긂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전시키고 / 그에게 익은 팔을 내민다. / 어쩌면 / 내면에서 생각하는 나무 / 자신을 지배하는 나무 / 천천히 자신에게 / 바람의 위험을 제거하는 형태를 부여한다!) 바슐라르는 릴케의 이 나무 이미지가 둥긂 속에 자리 잡고 동시에 그 안에서 발전하는 존재의 현상학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라고 평가합니다. 릴케의 나무는 형태의 우연성과 변덕스러운 이동으로부터 승리한 둥긂을 초록색 구체들 속에 전파합니다. 여기에서 '되어감(becoming)'은 무수한 형태와 잎사귀를 지니지만, '존재(being)'는 어떠한 분산도 겪지 않습니다. 바슐라드는 이 릴케의 나무를 "구체적 형이상학(concrete metaphysics)" 앨범의 중요한 챕터로 기록하고자 합니다. ### Related ```dataview LIST FROM [[@bachelard_poetics_1994]] and -"Plans" and -"resour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