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even Connor (2010) *The Matter of Air: Science and the Art of the Ethereal*. : Reaktion Books. > [!INFO] > Type:: [[]] > Title:: The Matter of Air: Science and the Art of the Ethereal > Author(s): [[Steven Connor]] > Year:: 2010 > Tags:: > DOI:: > Citekey:: connor_matter_2010 > ZoteroURI:: [Open in Zotero: The Matter of Air: Science and the Art of the Ethereal](zotero://select/items/@connor_matter_2010) > ReviewedDate:: [[2025-07-22]] > Related Note: 202507291538 ## Citation ```latex [@connor_matter_2010] ``` ## Summary 이 책 "The Matter of Air"는 d합니다. 저자는 공기가 단순한 물리적 실체를 넘어 문화적, 철학적, 은유적 존재로 진화해온 과정을 다룹니다. 이 책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공기의 변화하는 본성으로서 인간 존재의 거울:** 이 책은 수천 년 동안 공기가 인류의 삶, 의식, 그리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공기는 오랫동안 **영혼, 생명, 비물질적인 것**을 상징했으며, **'아무것도 아님에 가장 가까운 것'** 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근대의 도래와 함께 공기는 관찰, 실험, 사변의 대상이 되었고, '가스'와 같은 새로운 용어가 만들어지면서 그 기계적 힘과 화학적 성질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 **공기와 생각/신체의 유기적 결합:** 18세기 이후, 인간의 몸과 마음은 **공기역학적 또는 기계적 시스템**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생각 자체가 공기와 가스에 비유되는 물질적 과정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영향 기계(influencing machine)'와 같은 정신병적 망상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몸 내부의 발효 과정이나 소화 또한 공기 같은 물질로 정제되는 과정으로 인식되었고, 건강은 물질을 에테르적(공기 같은) 상태로 변환하는 능력과 연관되었습니다. - **근대 사회에서 공기의 상품화와 소비:** 19세기에는 가스 조명과 같은 기술 혁신을 통해 공기가 추상적인 물질이자 공공재로 변모했습니다. 샴페인, 탄산수와 같은 '거품'을 내는 음료는 **세속화된 '공기적 숭고함'과 '가벼움'의 이상**을 상징하게 됩니다. 가벼움을 소비하려는 욕망은 다이어트 식품이나 거품이 많은 세제 광고에서도 드러나며, 이는 겉으로는 활력과 사치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비만의 가벼움(obese levity)'** 이라는 역설을 낳습니다. - **공기의 '사멸(mortification)'과 포화:** 공기는 더 이상 무한하고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니라 **점점 더 인간 활동에 의해 점유되고 포화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통신, 운송, 그리고 특히 전쟁(예: 독가스, 공중 폭격)은 공기를 '죽이는 공기(air that kills)' 또는 '쓰레기의 저장소'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공기가 지닌 **무한함의 꿈을 위협하고, 공기를 '비물질적인 것의 물질화'가 아닌 '무(unbeing)'의 형태**로 만들고 있습니다. - **'간섭(interference)'의 보편적 조건:** 19세기 말부터 공기는 단순한 투명한 매개체가 아니라 **'혼합된 몸(mixed body)'이자 간섭과 잡음으로 특징지어지는 환경**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라디오 통신에서 '대기 잡음(atmospherics)'의 문제와 예술에서 '모호함(haze)'의 미학으로 나타나며, 현대 사회에서 정보의 과부하와 불확실성을 반영합니다. - **'절대적인 가벼움(Absolute Levity)'의 역설:** 과거에는 무게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지만, 현대에는 역설적으로 **'가벼움으로부터의 면제(remission from lightness)'** 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공기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비쿼티(ubiquity)를 가지면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이나 자아와 관계 맺기 어려워지는 존재론적 위기**를 겪게 됩니다. 공기는 더 이상 마법적인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의 편재성에 대한 공포'** 를 나타내며, 영혼에 대한 탐구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명백한 비존재'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변모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공기에 대한 인류의 인식이 단순히 과학적 지식의 축적을 넘어,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론적 질문과 문화적 상상을 끊임없이 재구성해왔음을 주장합니다 ## Annotation ### 인트로 공기에 대한 접근은 최소 세가지가 있음 1. 질문의 아레나: 대략 4세기동안 공기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있었음. 곧 살펴보겠지만, 16세기 후반 이후 공기를 둘러싼 활발한 활동은 때때로 인간과 공기의 관계의 역사에 관심을 둔 이들로 하여금 성급하고 절대적인 판단을 내리게 하기도 했다. “we have taken to the air in our tendency to take the air as an object of scientific, technical and philosophical concern.” (Connor, 2010, p. 9) 2. 생명체가 자연적 요소로 향하는 길: 고대에서는 꿈에서나 가능하던 occupy the air가 가능해짐. 비행기나 라디오 티비 시그널을 통해서. "수만 년 동안 인간이라는 존재가 땅에 속한, 땅에서 기어 다니는 겸손한(humilis) 존재, 곧 땅의 존재였고, 드물게 나무를 타거나 산꼭대기에 오르려는 미약한 욕망을 품었을 뿐이었다면, 지난 3~4세기 동안 우리는 공기를 거주지로 만들었다. 우리가 아직 ‘포스트휴먼’에는 다다르지 않았을지 몰라도, ‘포스트휴머스(posthumous, 사후의 존재)’인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10)". 3. 세번재 의미, 공기를 점유한다는 말의 세번째: "우리는 공기 속에 이토록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기 그 자체에 이토록 몰두하며 살아가면서, 점점 더 공기가 우리의 상태를 표현하는 매개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인간은 공기를 거울처럼, 영혼과 같이 공가와 닮아 있다고 믿어왔으나 동시에 공기 같은 존재로 전이된다는 생각을 의심해왔다. 공기성은 또한 망상, 하찮음, 광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하에서 “고체적인 모든 것이 공기 속으로 녹아내린다”고 선언했을 때, 그들은 예언적이었지만, 결코 그것을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 ==더 최근에 이르러 어떤 이들은 이러한 해체를 하나의 퇴행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체계에 있어 근본적인 진화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보인다—물론 그것은 우리가 ‘기초’나 ‘근본’이라는 말로 의미해온 바를 새롭게 사유해야 한다는 요구를 수반한다. > “[이] 체계의 ‘물질’은 적어도 베르그송 이후로 ‘상태’를 바꾸었다. 그것은 고체보다는 액체에 가깝고, 액체보다는 공기에 가깝고, 물질보다는 정보에 더 가깝다. 세계는 점점 더 연약하고, 무게 없고, 생동하고, 숨 쉬는 쪽으로 달아나고 있다. [@serres_conversations_1995, 121]” > > “[t]he system’s ‘matter’ has changed ‘phase’, at least since Bergson. It’s more liquid than solid, more airlike than liquid, more informational than material. The global is fleeing towards the fragile, the weightless, the living, the breathing.” (Connor, 2010, p. 11) [[Michel Serres|세르]]는 Atlas (1994) 책을 통해서 기상학의 난기류 속에서 하나의 은유를, 아니, 정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진정한 *마파문디(mappamundi, 중세식 세계지도 혹은 세계관의 은유)* 를 끌어낸다. 우리는 일종의 정보적 날씨 속에 살고 있으며, 이 세계에서 아틀라스는 영토이자, 더 나아가 *공기-토리(air-itory)* 가 된다. 단단한 물체의 물리학, 명확한 경계와 외곽선으로 정의되는 고체의 세계는, 열역학의 시대에조차 적합하지 않으며, 정보의 흐름으로 정의되는 오늘날의 세계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 The volatile, mixed elements form material supports for an information which is yet more volatile, and the mingling or modelling of which concurs, better still, with the formation of the Universe, which all this concreteness allows to grow. The logical message forms part of the flow of matter and is born of it: rise up, welcome storms . . . Aphrodite, naked and beautiful, appears from the waves, the Word emerges from the flesh of the world and, in return, creates it as World. > > 휘발성의 혼합된 요소들은, 그것보다 더 휘발적인 정보의 물질적 지지대를 이룬다. 이러한 혼합과 형상화는 우주의 형성과 더욱 밀접하게 맞물린다. 바로 이러한 구체성이 우주가 자라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메시지는 물질의 흐름 속 일부로 존재하며, 바로 그 흐름에서 태어난다. 솟아오르라, 폭풍을 맞이하라…… 아프로디테는 파도 속에서 나신으로, 아름다움으로 나타나고, 언어는 세계의 육체로부터 솟아오르며, 다시금 그것을 ‘세계’로 만들어낸다. Michel Serres, Atlas (Paris, 1994), p. 112 [author translation]. 슬로터다이크의 세 번째 권 _Schäume_(_거품들_)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 세계를 전체론적 관점이 아니라 ‘다중 구체론(polyspherology)’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다중 구체론은 ‘다초점적(multifocal), 다원적(multiperspectival), 이계층적(heterarchical)’ 방식으로, 서로 다른 구체들이 형성하는 복합적인 응집체로서의 세계를 사유한다. 미시 구체론(microspherology)의 지배적 은유가 ‘비눗방울’이고, 거시 구체론(macrospherology)의 지배적 은유가 ‘지구(글로브)’라면, 현대 세계의 다중 구체론적 조건을 가장 적확하고 유연하게 설명하는 은유는 ‘거품(foam)’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경우 ([@sloterdijk_foams_2016], [@sloterdijk_globes_2014], [@sloterdijk_bubbles_2011]) 시리즈의 세번째 책에서 이러한 논의를 공명시켰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존의 모든 자연 언어—이론적 담론을 포함한—는 무게와 고체 물질의 세계를 전제로 하여 발달해왔으며, 따라서 관계와 경량성의 세계에서의 경험을 표현하는 데에는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주장한다. “Because of their Marxist heritage, critical theorists succumb to the realistic temptation of interpreting the light as appearance and the heavy as essence.” [-@sloterdijk_against_2005] 그래서 그들은 옛 방식의 비판, 즉 ‘진짜의 무게’를 내세워 ‘겉모습의 가벼움’을 폭로하는 식의 실천을 반복한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생각하기에, 현대성의 풍요가 출현하면서 ‘무거운 것’이야말로 오히려 겉모습으로 전락했고, 이제 ‘본질적인 것’은 경량성, 공기, 분위기 속에 거주하게 되었다. > “철학적 슈퍼-비눗방울, 단일한 세계의 전(全)모나드(All-Monad)를 대신하여… 존재하는 것은 다우주적 응집체다. 이는 공간을 구성하는 세계-만들기의 조립체들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거품의 집합체로 설명될 수 있다.”(_Schäume_, 63–64) > > ‘In place of the philosophical super-soapbubble, of the All-Monad of the unitary world... there is a polycosmic agglomeration. This may be described as an assemblage of assemblages, a semi-opaque foam of world-making constructions of space’ (Schäume, 63–4).” (Connor, 2010, p. 12) 이 책에서 글쓴이의 주 관심사 "나는 과학적 이해가 공기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종류의 객체를 탄생시켰으며, 동시에 공기 자체를 또 하나의 새로운 객체로—어쩌면 ‘객체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으로—만들어왔는지에 관심을 두고자 한다. 그것은 가볍고, 휘발성이며, 가상적이고, 다용적인 방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4)" 이는 두 방식으로 이루어짐 1. the physics of the air (Torricelli, Galileo, Boyle’s law, 1662, temperature and volume (Charles’s law, 1787), pressure and temperature (Gay-Lussac’s law, 1809), all refined and unified by Avogadro’s law (1811) ), > 하지만 실제로는, 보일(Robert Boyle)과 그를 따르던 실험자들이 공기를 대상으로 한 운동학적 실험을 통해 추구한 것은 공기의 보편적 조건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보일 자신은 공기가 *에플루비아(effluvia)* 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1692년의 『공기에 대한 일반사(General History of the Air)』에서 관심을 둔 것은, 그가 “공기의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성분들”이라 부른 것이었다(전집, 권12, p.12). 그는 공기라는 말로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순수한 공기의 원소도, 또 다른 이들이 말하는 에테르적 혹은 천상적 물질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전집, 권12, p.12). ==이 사이에 과학적 공기 실험 이야기와 리스트가 나오지만 생략. ‘hermetic’ 관점임== --- **Ramification** > “Only in the seventeenth century do reports begin to appear of an inflammable gas that could be produced as a by-product of the process of coking, or distillation of coal.” (Connor, 2010, p. 27) “The word ‘gas’ entered only slowly into use among English chemical writers within a couple of decades.” (Connor, 2010, p. 28) > “The air is unique among the elements in having this affinity with nothingness, in signifying the being of non-being, the matter of the immaterial.” (Connor, 2010, p. 31) 다른 엘레멘트들과 다르게 공기는 그 범위도 넓고 “The air is unique among the elements in having this affinity with nothingness, in signifying the being of non-being, the matter of the immaterial.” (Connor, 2010, p. 31) 공기는 두 종류로 상상될 수 있는데, earthly air, 호흡되는 공기,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더 높은 공기 the ether. “The real air is, so to speak, always accompanied by an ideal or phantasmal air. No other element is divided in this way. Air is the thing that is nothing, the unbeing that is.” (Connor, 2010, p. 31) 이러한 의미에서, 공기는 단지 ‘거의 무(無)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사고의 공간이라는 특이한 종류의 무(無) 바로 옆에 자리한 것이다. > 공기에 대한 사유가 공기 자체와 얽히는 이 꼴은, 우리가 공기 속에 내재해 있다는 또 하나의 형태다. 이는 화학 혁명이나 과학 혁명보다도 오래되었고, 또 더 젊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공기는 사유 그 자체를 형상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원소, 혹은 물질의 상태로 여겨져 왔다. 공기가 점점 더 물질화됨에 따라, 그만큼 점점 더 사유의 육체가 되어갔다. 하지만, 사고의 즉시성을 상징하던 이미지였던 공기는, 점차 사고의 매개적 물질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바뀌었다. 세기가 흐르며 공기는 점점 더 사고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고, 이는 동시에 공기가 전기, 전파, 방사성 물질과 같은 또 다른 매개적 물질들의 천사적 군세가 머무는 장(場)이 되었기 때문이다. (31)“ As such, it is not just next degree to nothing, but next door to the peculiar kind of nothing that is the space of thought. The convolvement of air with the thought of air is another form of our implicatedness in the air. This is both older and younger than the chemical revolution, or the scientific revolution. Air has traditionally been thought of as the favoured element or state of matter through which to body forth the thought of thought. As air became more and more materialised, so it became more and more the body of thought. But, from being an image of the immediacy of thought, the air became an image of the mediate matter of thought. The air became ever more necessary to thought as it became in later centuries the arena of angelic hosts of other mediate matters, electricity, radiophony, radioactivity. (Connor, 2010, p. 31) 이렇게 공기는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노출이나 포획의 요소가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뒤섞임, 분리 불가능성의 요소가 되었다. 공기는 곧 매개(mediation) 그 자체가 되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거품들(Schäume)』(87쪽)에서 ‘표출(explicitation)’이라 부른, 자기 바깥으로의 극한적이고 황홀한 이탈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몰입 상태를 인식하고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 몰입으로부터 떠나면서도 그것을 다시 이어받으며, 우리는 세계 속으로 ‘몰입한다(immerge)’—자신의 몰입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솟아오르며(emerge), 그 안에 있고 동시에 그 바깥에 있는, 그리고 그 몰입에 대한 인식 안에도 있으면서 또 그 바깥에 있는, 그러한 상태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Michel Serres has also argued that the ‘there’ of human ‘being-there’ has always been more essentially air than earth. In an interview of 1995, he said that: ‘we are the dasein in the sky, not in the land. Do you see what I mean? We are wandering. We are nomads. This is not a new state of things. It is a very ancient state of things. I think the dasein is in the atmosphere.’ [-@serres_michel_2008] ” (Connor, 2010, p. 34) 공기를 원소elements나 물질substantce가 아닌 하나의 dimension으로 인식할때 종종 무한함, 경계 없음, 초월성의 관념을 실어나르곤 했다. 특히 [[Gaston Bachelard|가스통]], [[Luce Irigaray|Irigaray]]가 시적 철학적 상상력 안에서 가장 깊이 탐구한 두 사상가임. 이 두 사람 모두에게 공기는 무한성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인식 혹은 탐구 방향이 다름. [[Gaston Bachelard|바슐라르]]는 높이 [[Luce Irigaray|이리가레]]는 넓이 - [[Gaston Bachelard|바슐라르]]에게 공기는 상승에 대한 열망의 가벼움과 자유를 상징하며,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비행의 힘에 대한 환유. 바슐라르가 한 장 전체를 바친 니체는 가장 ‘공기적인’ 철학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_우위(über)_ 혹은 _높음_ 이라는 차원을 향한 사랑, 고도를 향한 사랑을 지녔기 때문이다. - 반면 [[Luce Irigaray|Irigaray]]는 하이데거를 비판하며, 그가 ‘공기를 잊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지적하는 ‘망각’은 고도보다는 *넓이(breadth)* 의 망각이다. 공기는 언제나 경계를 넘어서려는 것, _초과하는 것_ 을 의미한다. 바슐라르가 시적 공상 속의 공기에서 도피와 확장의 약속을 감지하고—공기란 그 속에서, 그를 통해 일어나는 비행을 의미하며, 공기 자체가 곧 비행이고, 비행 중인 것이라 본다면—이리가라이는 공기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공기는 결코 포획되거나 동일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어떤 동일화 시도조차 초과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공기와 동일화된다는 것은, 그것이 동일화될 수 있다는 전제 자체에 부속된 것일 뿐이다. 바슐라르와 이리가라이에게 공기는 장소도, 물질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향이며, 확장이며, 다방향적 가능성(multivectorial potential)이다. “Air is not a place, or a substance for Bachelard and Irigaray: it is a direction, an expansion, a multivectorial potential.” (Connor, 2010, p. 35) > “For many writers, the air signifies the wholly open, whether in the mode of yearning dream ([[Gaston Bachelard|Bachelard]]), or melancholy regret ([[Luce Irigaray|Irigaray]]), or of impassioned possibility ([[Michel Serres|Serres]]).” (Connor, 2010, p. 35). 많은 사유자들에게 공기는 완전히 열린 것, _전면적 개방성_ 을 상징한다. 그것은 바슐라르에게는 동경의 꿈의 형식으로, 이리가라이에게는 우울한 상실감의 형식으로, 세르에게는 열정적인 가능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책은 > 대신, 공기의 개방성에 대한 감각과 그것의 폐쇄성이 교차하거나 새로운 얽힘을 형성하는 몇몇 장면들과 장들을 따라가려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개방적이고, 더 투과되기 쉬우며, 더 상호 침투되고, 서로에게 더 쉽게 접근 가능하면서도,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더 격리되고, 더 고립되며, 더 은둔적이고, 더 암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1부가 공기의 동력적이고 작동적인 측면들—즉, 물리적·정신적으로 다양한 작업에 투입되는 공기—을 다룬다면, 2부는 19세기 후반, 공기가 존 틴달(John Tyndall)이 말한 “에테르의 격동(aetherial commotion)”의 장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조망. 19세기 말, 공기의 실제적·상상적 조건에 있어 놀라운 변화의 시작이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시적인 방식으로 공기는 일종의 빈 공간이자, ‘열림’이라는 개념 자체의 특권적 매개자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관념은 공기의 혼잡, 오염, 고갈 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충돌하게 되었다. 공기를 하나의 공허로—곧 개방성 자체의 특권적 매개로—이해하던 전통적이고 시적인 관념은, 이제 혼잡, 오염, 소진에 시달리는 공기의 ‘과밀함’이라는 감각과 경쟁하게 되었다. ### 아주 아름다운 공기역학 기계 (A Very Beautiful Pneumatic Machinery) 이 챕터는 19세기 초 정신병 환자들의 **'영향 기계(influencing machine)'** 에 대한 체계적인 망상과 초기 공기역학 과학의 관계를 탐구. **영향 기계(The Influencing Machine)**: 이 챕터는 빅토르 타우스크(Victor Tausk)가 명명한 **‘영향 기계’** 라는 개념으로 시작합니다. 이 기계는 환자의 생각과 감정을 파동이나 광선, 신비한 힘을 통해 통제하는 것으로 상상됩니다. 또한, 신체에서 운동 현상이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 심지어 농양이나 피부 발진 같은 신체 증상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타우스크는 영향 기계를 환자 자신의 몸, 특히 성기의 변형된 이미지로 보았고, 그 복잡성은 억제와 만족의 교대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를 정신분석학적 과정의 정교한 패러디로 보았으며, 이전 시대의 '나쁜 영혼'이나 '악마'와 같은 영적 존재가 이드, 자아, 초자아와 같은 비인격적인 힘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반영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초기 연구자들은 이 기계가 '공기, 에테르 또는 기타 비물질적 물질'을 기계적으로 조작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상정했으며, 이를 공기 역학이나 유체 역학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했습니다. #### 제임스 틸리 매튜스(James Tilly Matthews)의 에어룸(Air-Loom): 매튜스는 정부를 전복하려는 갱단이 **'에어룸'** 이라는 보이지 않는 기계를 사용하여 자신을 고문하고 생각을 통제한다고 망상했습니다. 독성 증기가 통을 통해 기계로 전달되면, 기계 내에서 미스터리한 증류 과정을 거쳐 **자기-메스머 유체(magnetic-mesmeric fluid)** 가 생성되고 저장됩니다. 이 유체는 돛 같은 장치를 통해 전송되며, **'자기 유체의 씨실(warp of magnetic-fluid)'** 을 형성하여 원격으로 대상을 조작합니다. 기계는 **'갑작스러운 죽음 압착(Sudden-death-squeezing)'** 또는 **'랍스터 깨기(Lobster-cracking)'** 와 같은 격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이는 자기 대기가 몸을 외부에서 압박하여 순환을 정체시키고 생명 운동을 방해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웃음 만들기(Laugh-making)'** 는 희석된 자기 유체를 생체에 주입하여 얼굴 근육을 웃는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스 뽑기(Gaz-plucking)'**: 이 기계는 심지어 매튜스의 위와 장에서 자기 유체를 뽑아내는 **'가스 뽑기'** 라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유체를 생산했습니다. **몸과 마음의 물질화**: 에어룸은 매튜스의 마음, 즉 사고 과정을 극적으로 물질화하는 기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이팅(Kiteing)'** 은 뇌 속에 특정 아이디어를 연처럼 띄워 다른 생각을 배제하고 고정시키는 방식이며, **'방광 채우기(Bladder-filling)'** 는 신경에 가스를 채워 뇌의 부분적 탈골을 유발하여 지적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공기와 기계의 역설**: 영향 기계는 무한히 침투하는 우주적 유체를 가둘 수 없는 '역설적인 줄무늬(paradoxical striation)'를 만듭니다. 이 유체와 기계의 가시성 및 조작 가능성은 매튜스가 박해자들에 저항할 힘을 주기도 합니다. 공기가 순수한 가능성에 가깝다면, 공기-기계는 그 가능성을 특정 잠재력과 프로토콜로 환원시킵니다. • **초기 '가스(Gas)' 용어의 등장**: 17세기 초 벨기에의 화학자 반 헬몬트(Van Helmont)는 '가스(gas)'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영국보다는 프랑스어로 생각됨) 그는 타는 물질에서 '야생의 기운(wild spirit)'이 나온다고 보았으며, 이는 용기에 가둘 수도, 보이는 물체로 환원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가스'라는 용어는 초기에는 '야만적(barbarously)'이거나 '의미가 정의되지 않은(no defined signification)' 것으로 여겨져 서서히 받아들여졌습니다. • **토마스 베도스(Thomas Beddoes)의 '공기역학적 기계'**: 베도스는 '인간과 유사한 동물의 운동은 매우 아름다운 공기역학적 기계에 의해 생성될 것'이며, '우리의 신경 및 근육 시스템은 일종의 증기 기관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존 퍼시벌(John Perceval)의 신체 기계화**: 정신병을 겪었던 존 퍼시벌은 자신의 몸이 마치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광기를 문자적 표현과 비유적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정의했지만, 호흡과 사고의 문자적 연관성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건강한 정신 상태가 호흡의 규제된 시스템과 동일하며, 사고의 기계적 수단에 의해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 신체와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 틸리 매튜스(James Tilly Matthews)의 에어룸(Air-Loom)**: . 매튜스는 1796년 하원에서 “반역자!”라고 외치며 체포된 후 베들렘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습니다. 정신과 의사 존 해슬럼(John Haslam)은 그의 망상을 **'에어룸(air-loom)'** 이라는 복잡한 기계로 기록했는데, 이는 매튜스의 정신과 신체에 다양한 고통을 가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기계는 '폭탄 터뜨리기(Bomb-Bursting)', '랍스터 깨기(Lobster-Cracking)', '뇌 늘리기(Lengthening the Brain)'와 같은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에어룸은 매튜스의 정신에 대한 반성이며, 정신적인 것을 물리적인 형태로, 특히 공기가 몸에 미치는 영향의 형태로 변환하는 기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 날리기(Kiteing)'는 특정 아이디어가 뇌 속에서 떠다니며 다른 생각을 방해하는 것을 의미하고, '방광 채우기(Bladder-filling)'는 신경에 기체를 채워 뇌의 부분적 탈구를 일으켜 지적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매튜스는 자신의 호흡을 통제하여 기계의 작용에 저항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자신을 의식적인 기계로 변모시켜 기계의 리듬에 맞서는 행위였습니다. **정신, 물질, 은유(Mind, Matter, Metaphor)**: 해슬럼은 광기에 걸린 사람들이 감각 기관, 특히 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정신에 고유한 언어가 없으며, 외부 대상에서 언어를 빌려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토마스 베도스(Thomas Beddoes)는 공기가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이며, 생각의 물질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과도한 산소 공급이 신경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산화탄소로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이후 '공기 역학(pneumatic)'이라는 단어는 정신적인 의미(영혼의 문제)와 실험 과학(기체의 성질 탐구)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화학 혁명(Chemical Revolution)**: 18세기 말의 기체 화학 발전은 공기와 생각의 오랜 연관성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베도스와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는 아산화질소(nitrous oxide, 웃음 가스)를 연구했으며, 이는 **'생각의 확장', 심지어 '우주가 순수한 생각으로 휘발되었다'는 인식**으로 이어졌습니다. 데이비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우주는 인상, 아이디어, 쾌락, 고통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화학 혁명은 헬몬트(Van Helmont)가 도입한 '가스(gas)'라는 용어의 사용을 확립하고, 이전에 사용되던 '공기형 유체(aeriform fluids)'나 '탄성 유체(elastic fluids)' 같은 용어를 대체했습니다. 이는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와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와 같은 과학자들의 '기체'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아산화질소는 **'공기다움(airiness)'** 의 원리를 구체화하여 [[Romanticism|낭만주의]] 시대의 영감, 상승력, 확산력과 연결되었습니다. **메스머리즘(Mesmerism)과 유체(Subtle Fluid)**: 프란츠 안톤 메스머(Franz Anton Mesmer)의 **'동물 자기(animal magnetism)'** 이론은 **미묘한 유체(subtle fluid)** 가 우주 전체에 스며들어 모든 생명체에 존재하며 질병을 유발하거나 치료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매튜스의 망상은 이러한 메스머의 유체와 관련된 이중적인 환상을 반영합니다.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소통'의 꿈을 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해자들이 이 유체의 힘을 집중하고 조준하여 차등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에 취약했습니다. **일(The Works)과 공기/기계(Air/Machine)**: 기계는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며, 영향 기계 또한 일의 경제에 얽혀 있습니다. 매튜스는 호흡을 조절하여 기계에 저항하려 했고, '랍스터 깨기'와 같은 고문에서는 자신, 조작자, 그리고 유체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드러났습니다. 기계는 매끄러운 공간을 **역설적으로 줄무늬로 만드는(striation of smoothness)** 역할을 합니다. 즉, 보편적인 유체를 담을 수 없는 용기인 셈입니다. 이 챕터는 **공기의 기계화(mechanization of air)** 가 생각의 구체화(corporealization of thought)를 두 배로 늘리고 돕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결과, 사고의 몸은 공기 몸, 즉 휘발성, 증기성, 공기 같은 물질의 기준 상태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삶의 에테르(Life-Ether)와 존 퍼시벌(John Perceval)**: 프리드리히 크라우스(Friedrich Krauss)는 19세기 초의 또 다른 정신질환자로, 매튜스의 후계자로 간주됩니다. 그는 '자기 기체(magnetic gas)'가 신경, 근육, 정맥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습니다. 존 퍼시벌(John Perceval)은 자신의 몸이 기계적으로 움직이거나 작용한다고 느꼈던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정신의 건강이 호흡의 조절에 크게 의존한다고 믿었으며, '영혼을 통제하려면 호흡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회복은 자신의 몸을 기계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형태를 띠었는데, 이는 병리학의 가장 끈질긴 측면으로 남았습니다. 이들은 사고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사고의 무한한 힘에 지나치게 접근하여 발생한 '과잉 의식의 위기(crisis of hyperconsciousness)'** 를 겪었습니다. 즉, 외부의 기계는 내부의 환상 기계에 대한 방어 기제이며, 스스로가 가진 무한한 사고의 힘을 부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요약하자면, 챕터 2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과학적 발견, 특히 기체 화학의 발전이 인간의 자기 인식과 사회적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룹니다. 공기는 단순히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 망상, 사회적 관계, 그리고 기술적 진보를 형상화하는 매개체이자 은유로서 기능했습니다. ### 사고의 전능성 (Omnipotence of Thoughts): 이 챕터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사고의 전능성’** 이라고 명명한 개념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환자였던 ‘쥐 남자(Rat Man)’가 만든 구절로, **생각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 자신의 생각을 세상과 혼동하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프로이트와 프레이저는 이러한 마법적 사고를 합리적이지만 **‘금이 간 합리성(cracked rationality)’** 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신비로운 존재의 변덕스러운 지배가 아닌, 불변하는 물리 법칙이 모든 생명체에 적용된다는 믿음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르네 스피츠(René Spitz)는 원시인이 주체와 객체 사이에 차이를 느끼지 못했으며, 마법적 사고는 신성한 존재를 강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생각이 자기 자신에게 강제적인 힘을 행사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반성적 마법적 사고(reflexive magical thinking)** 의 위기도 나타났습니다. 프로이트는 **‘섬뜩함([[uncanny]])’** 이라는 감정이 이러한 사고의 전능성 개념이 불쾌하게 되살아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과학적 세계관의 겸손한 태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마법적 사고는 흔히 생각이 지배력을 자유롭게 행사하기보다 **엄격하고 가차 없는 규제에 종속되는 습관, 의식, 강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는 힘, 수동성, 박해의 복잡하고 양가적인 결합에 기반합니다. ==챕터는 18세기부터 생각이 점차 **기계적인 용어로 자신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 **사고의 매개체로서의 공기(Air as a Matter of Thought)**: 인간은 자신의 사고를 직접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고를 객체화하기 위해 *물질적 기질(material substrate)이 필요*. 공기는 사고의 비물질적 작용을 위한 특권적인 기질이었다. 공기는 존재감 없이 힘을 가지며, 보이지 않지만 가시적인 효과를 낳는다. 사고와 마찬가지로 *공기는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next to nothing)’* 과 같아서, 물질이라기보다는 유사-물질(quasi-substance)[로 기능한다. 공기는 *사고의 형태(thought-form)* 이며, 상상력의 힘을 구체화하는 매개체. **공기화학의 발전과 ‘공기다움(Airiness)’의 재정의**: 18세기 말의 기체 화학 발전(블랙, 캐번디시, 라부아지에, 프리스틀리의 발견)은 *공기와 사고의 오랜 유대감을 더욱 실제적으로 만들었다. 산소는 막대한 치료적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져, *‘공기 목욕(air-baths)’* 과 같은 요법이 활발히 홍보되었다. 이는 낭만주의 시대의 *‘공기에 취한(inebriate of air)’* 이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표현처럼, *공기의 활력 증진 효과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환기 및 신선한 공기 숭배**가 확산되었으나, 동시에 **외풍에 대한 미신적인 두려움**도 만연. **호흡에 대한 강렬한 물신주의(fetishism of the breath)** 가 형성되었으며, 호흡은 신체의 건강과 부패를 나타내는 은유가 되었다. 메스머리즘, 영매술, 밀교는 영혼의 호흡과 관련된 호흡 규율을 발전시켰다. 19세기 후반에는 동양 종교와 신비주의 전통에서 ‘다섯 가지 호흡(prana, apana 등)’에 대한 지식이 확산. 아산화질소(웃음 가스)와 에테르의 흡입은 정신 상태를 변화시키는 물질로서, 정신 자체의 대체 이미지가 되었고, 공기가 지능을 획득하여 ‘사고하는 공기(thinking air)’가 되는 것을 예고했다.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는 아산화질소 흡입 후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우주는 인상, 아이디어, 쾌락, 고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고 외치며, 우주가 순수한 생각으로 휘발되었다는 인식을 표현했습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법적 힘은 공기 자체에서 공기가 전달하는 것(자기력, 전파, X-선, 방사능 등)으로 옮겨갔고, 공기는 *‘사고하는 존재(res cogitans)’* 처럼 여겨졌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아산화질소**: 윌리엄 제임스는 벤자민 폴 블러드(Benjamin Paul Blood)의 『마취적 계시와 철학의 요지(The Anaesthetic Revelation and the Gist of Philosophy)』를 읽고 아산화질소를 직접 실험했습니다. 아산화질소 흡입 후 제임스는 “헤겔주의가 결국 옳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확신”에 압도당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가스가 모든 이분법과 모순을 해소하고 “끊임없는 연속성이 존재의 본질”이라는 인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철학적으로 유용한 내용을 거의 남기지 못하고, 정신분열증 환자의 특성으로 여겨질 수 있는 ‘마법적인 말장난’에 불과했습니다. 제임스는 헤겔의 시스템을 “가능성의 산소가 질식되어 사라진 절대적인 덩어리(Absolute Block)”로 비판하며, 이는 자폐적이고 질식시키는 성격을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아산화질소로 인한 보편적 소통 경험도 특정 지점을 넘어서면 ==‘무의미한 무관심(meaningless indifferentism)’==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제임스는 헤겔의 **‘무호흡적 전능성(apnoiec omnipotence)’** 에 반대하며, 자신의 **실용주의(pragmatism)가 ‘다원성을 위한 여유 공간(elbow room or breathing space)’을 제공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벤자민 폴 블러드(Benjamin Paul Blood)의 ‘마취적 계시(Anaesthetic Revelation)’**: 블러드의 주장은 모든 구별과 가치 차이를 해소하는 것으로, 이는 일반적인 의식이나 ‘온전한 정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의 계시는 *“존재의 비밀은 지식 너머의 어두운 광대함이 아니라, 발아래, 간과되는 지식의 이쪽에 있다”* 는 심오하고 비마법적인 깨달음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호흡의 자동성에서 삶의 자명한 연속성을 보았으며, *“우리가 자발적으로 들이쉬는 모든 호흡은 우주적 의미에서 신성한 섭리에 대한 부적절한 간섭”*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세계를 수용하고, 세계와 사고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며, 헤겔의 사고의 전능성 시도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하여 윌리엄 제임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공기가 사고와 세계, 그리고 사고 자체 사이의 필수적이지만 가변적인 매개체임을 보여준다. ==마법적 사고는 두 가지 형태로 대립== 합니다: 모든 고체적인 것이 사고의 공기 속으로 녹아드는 **신비주의적 일원론**과, 공기 속에서 다원성과 불연속성의 원리를 보는 **다원주의적 사고**입니다. 궁극적으로, ==공기에 대한 마법적 사고는 우리의 사고와 맺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관계,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세상과 혼동하려는 유혹을 나타냅니다==. 이 챕터는 공기가 단순히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세계와 사유 방식, 그리고 광기와 정신분석학, 심지어 과학적 탐구에까지 깊이 얽혀 있는 다차원적인 개념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 아주 아름다운 공기역학 기계(Gasworks) 이 챕터는 19세기의 주요 기술 발전 중 하나인 가스 조명에 초점을 맞춰, 공기가 어떻게 '매개 물질(mediate matter)'로서의 새로운 개념을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 Britain was increasingly not just massy but gassy, and characterized not just by furnaces, turbines and sofas but also by the vapours, fumes and gases which provided the energy to make and move all this vast tonnage. (121) **1. 19세기의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결합**: 19세기 영국은 공장, 굴뚝, 교량 등 거대하고 육중한 물질들로 특징지어졌지만, 동시에 **‘육중함과 헤아릴 수 없음의 기묘한 협력(a strange collaboration of the ponderous and the imponderable)’** 이 존재했다. 가스는 이러한 육중한 물질들을 만들고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하며, 물질의 새로운 이해 방식을 제시했다. 랄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물질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물질 자체가 휘발성이기 때문에 궁극적이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2. 가스 탱크(Gasholder)의 상징성**: **가스 탱크**는 19세기 가스 조명의 주요 연료원이자 가스 산업의 가시적인 상징물로, 이 시대의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이분법을 상징합니다. 가스 탱크는 거대하지만 동시에 **‘공허함(vacuity)’** 에 의해 작동하며, 드럼의 움직임은 저장된 연료의 양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가스 생산의 물리적 작업과 가스에 대한 물질적 상상력을 동시에 구현하는 장치였습니다. **3. 가스 조명의 초기 발전과 ‘매개 물질’ 개념**: 1780년대부터 가연성 가스를 수집하고 운반하여 조명이나 난방에 사용하는 가능성이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머독(William Murdoch)은 1792년 자신의 집과 1798년 공장에 석탄 가스 조명을 설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가스 조명 시스템의 확립은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빈저(Friedrich Albert Winsor)와 같은 인물의 등장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가스를 단순히 운반 가능한 물질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통합되기 위한 대규모 물리적, 정치적 인프라가 필요한 **공공 서비스(public utility)** 로 인식하여 **‘매개 물질(mediate material)’** 로 만들었습니다. 빈저의 제안은 "어리석고 불운한 가스"라는 비난을 받으며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동시에 가스가 활력 증진 효과를 가진다는 18세기 말의 발견들과 연결되어 낭만적이고 철학적인 고양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4. 가스 조명의 ‘거리(Distance)’와 추상화**: 가스 조명은 촛불이나 램프보다 훨씬 덜 친밀한 광원이었으며, 연료가 현지에서 생산되지 않고 멀리서 공급된다는 점에서 **‘거리(distance)’의 원칙**을 도입했습니다. 가스 조명은 불꽃의 개념을 추상화하여, 빛을 확대하고 확산시키는 갓이나 서리 낀 유리를 사용하여 불꽃을 균일한 빛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이전에 근접하고 개별적이었던 것을 멀리 떨어지고 절대적이며 일반적인 것으로 바꾸는 일종의 **추상화 과정**이었습니다. 가스 계량기(gas meter)의 개발은 가스를 **‘추상적인 물질(abstract material)’** 로 만들었으며, 그 측정 단위인 ‘입방 피트(cubic foot)’는 소비자들에게 거의 경험적인 의미가 없었습니다. **5. 가스 조명과 시각, 노출**: 가스 조명은 극장 조명으로 일찍이 채택되어, 거리와 상점 등을 **‘전시와 진열의 장소(places of display and exhibition)’** (p. 131) 로 변화시켰습니다. 런던의 거리가 “무대”로 변모했다고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 Lynda Nead has said ‘[g]aslight turned the London streets into a stage’ [@nead_victorian_2011, 98]. 이는 사람들을 **‘끊임없는 감시(ceaseless surveillance)’** 와 **‘영원한 불빛(perpetual glare)’** 아래 두며, 모든 것을 단순히 **‘보여짐(shownness)’** 의 사실로 환원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 Later, she quotes another judgement on the exposure of the performer: ‘Men and women who are compelled by their vocation to move before the world in a perpetual glare of gaslight, and to submit to a surveillance which is ceaseless, and to a judgment which is seldom charitable, are sure to be suspected however innocent, and equally sure to be detected however cautious’ [@logan_mimic_1871, 415] 가스 조명은 촛불이나 전등과 달리 순식간에 켜고 끌 수 있어, 스위치 조작을 통해 반대되는 상태 간의 빠른 전환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초기에는 가스 조명이 낭만주의와 신비함을 없애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후 범죄, 미스터리, 수수께끼와 연관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가스는 자신이 비추는 대상을 **‘쇠약하게 만드는(emaciate)’** 것처럼 보였고, 시야에 나타나는 것 이상의 여분을 남기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가스 현미경(gas microscope)’** 과 같은 기술의 발전은 가스 조명이 사물을 더 선명하게 비출 뿐만 아니라, 사물 **‘안팎을 들여다보거나 심지어 꿰뚫어 볼 수 있는(see into or even through)’** 능력을 부여한다는 수사학적 상상을 부추겼습니다. **6. 가스와 인체, 매개**: 가스 연소는 추상화 과정에 저항하는 측면도 가졌습니다. 생산 및 유통 단계에서 밀폐되어야 할 가스가 그 밀폐를 넘어 효과를 발휘한다는 **감각적 역설**이 있었습니다. 일부 초기 가스 홍보자들은 가스(가연성 공기)가 **‘생명 공기(vital air)’보다 폐에 더 적합하며 우리의 일부를 이룬다(forms a part of ourselves)’** 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가스는 편재하며, **‘모든 곳에 스며들어(goes everywhere, dissolving and pervading)**, " The most important feature of the gas is that it goes everywhere, dissolving and pervading, making everything accessible even as it inhabits privacy. (p. 143)" 사적인 영역에 존재하면서도 모든 것을 접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황량한 집(Bleak House)』에서는 가스가 안개와 진흙과 함께 **‘확산되는 일련의 요소들(diffusive series of elements)’** 중 하나로 묘사되며, 이는 오염과 부패, 그리고 소설의 **‘폭발적 경제(explosive economy)’** 와 연결됩니다. 궁극적으로 가스는 단순한 **‘중개자(intermediary)’** 가 아니라, 두 주체 사이의 환경을 형성하고 번역하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창조하는 **‘매개자(mediator)’ ** 로 인식되었습니다. > Gas looming through the fog in divers places in the streets, much as the sun may, from the spongey fields, be seen to loom by husbandman and ploughboy. Most of the shops lighted two hours before their time – as the gas seems to know, for it has a haggard and unwilling look. (Charles Dickens, Bleak House, ed. Norman Page (Harmondsworth, 1972), pp. 49–50.) 디킨스(Dickens)에게 있어 가스는 어떤 ‘부패하지 않는 고자질쟁이(incorruptible tell-tale)’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속임(adulteration)’이야말로 가스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자 본질이기 때문이다. 가스의 두 가지 측면—세상을 밝히는 힘과 오염시키려는 성질—은 네모(Nemo)가 묻힌 공동묘지에 대한 묘사 속에서 기이하게 교차한다. 디킨스는 그 장소의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빛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두움을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해 빛을 부른다 (146). > “오라, 밤이여, 어둠이여, 이런 곳이라면 그대들은 아무리 일찍 와도,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지나치지 않다! 못생긴 집들의 창문들 속으로 비쳐드는 어설픈 불빛들아, 그리고 그 안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아, 최소한 이 두려운 풍경만은 닫힌 채로 너희 악행을 저질러라! (Dickens, Bleak House, p. 683.)” 철문 위에서 타고 있는 가스등은 간헐적인 빛만을 제공하며, 실체 없는 빛의 상태와 끈적하고 탁한 그리스 상태 사이를 마지못해 오간다. > “오라, 철문 위에서 음울하게 타고 있는 가스의 불꽃이여, 그 위에 중독된 공기는 마녀의 연고(witch-ointment)를 침전시킨다—만지면 끈적한 그것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여길 보라!’고 외쳐대는 것이 마땅하다. (Dickens, Bleak House, p. 683.)” 이 ‘마녀의 연고’라는 표현은 중세 및 근세 초기에 마녀들이 독성 허브와 삶은 아기 지방으로 만든 ‘비행 연고(flying ointment)’를 빗자루에 발라 하늘을 날았다는 믿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가스는 동시에 어둠을 밝히면서도, 그 ‘중독된 공기’ 속에 스며들어 끈적한 슬라임(slime) 형태로 응축된다. 즉, 공기와 점액질 사이를 오가는 그 전이가, 오염과 조명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가스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이 챕터는 19세기 가스 조명의 도입이 단순히 기술적인 발전을 넘어, 인간이 공기와 상호작용하고, 공간과 시각을 인지하며, 심지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 챕터 5: 운반되는 몸들의 전율: 에테르의 무게를 재다(Transported Shiver of Bodies: Weighing Ether) 이 챕터는 빛과 기타 힘의 전달 매개체로 상정되었던 **에테르**에 대한 19세기의 광범위한 상상과 과학적 논의가 **물질성(matter)과 비물질성(immateriality)의 경계를 어떻게 모호하게 만들었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 1. 에테르의 모순된 본질: '필요한 없음'과 '실질적인 있음'의 사이** 에테르는 19세기에 빛과 전자기파 등 복사 에너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상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었습니다. 에테르는 한편으로는 **'필요한 아무것도 없음(necessary nothing)'** 으로 간주되어, 빛과 같은 충동을 전달하는 능력 외에는 아무런 특성도 갖지 않는 매개체로 여겨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에테르가 정말로 **'무언가(something)'** 로서 고유한 질량(mass)과 무게(ponderability)를 가지는지, 유체처럼 작용하는지, 스펀지나 젤리, 거품과 같은 형태인지, 혹은 완전히 탄력적인지 아니면 거의 완전히 단단한지 등 그 **실질적인 존재론적 특성** 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무게와 가벼움 사이의 간섭**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 2. 톰슨의 와류 원자론(Vortex-Atom Theory) 1867년,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은 P. G. 테이트(P. G. Tait)의 연기 고리(smoke rings) 시연을 보고, 물속의 소용돌이에 대한 헤르만 헬름홀츠(Hermann Helmholtz)의 연구를 떠올렸습니다. 연기 고리가 **밀도와 저항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톰슨은 원자가 공기나 물이 아닌 **에테르 내에서의 소용돌이 또는 비틀림**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안했습니다. 이 이론은 에테르가 단순히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만들어지는 원초적 물질(ur-matter) 또는 준-물질(quasi-matter)** 로서 존재론적으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종교적으로는 원자가 스스로 발생할 수 없으며 창조 행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물질주의적으로는 자연 자체의 복잡성이 창조자를 상정할 필요를 없앤다는 주장을 모두 지지할 수 있었습니다. #### 3. 새로운 물리학의 비물질화 능력 올리버 로지(Oliver Lodge)와 같은 과학자들은 에테르가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핵심 원리로 작용한다고 믿으며, 심지어 **죽음 이후의 생존이나 죽은 자들과의 소통 가능성**까지 에테르를 통해 검증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는 새로운 물리학의 **비물질화 능력(dematerializing power)** 에 큰 충격을 받았는데, 물질은 단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는 것(thing of inconceivable tenuity)'** 이며, 의식의 모든 상태의 근저에는 파동의 진동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아서 발포어(Arthur Balfour)와 같은 보수 정치인조차 **'일상 경험의 물질(gross matter)'이 단지 전기 현상의 외양일 뿐**이며, 인류의 물질 세계에 대한 믿음이 **근본적으로 틀렸다(fundamentally wrong)**^[Arthur Balfour, Reflections Suggested By the New Theory of Matter (London, 1904), pp. 9, 21.] 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물질은 설명될 뿐만 아니라, 사라지게 설명된다(matter is not merely explained, but is explained away)"**^[Balfour, Reflections Suggested By the New Theory of Matter, p. 18.] 고 보았지만, 그럼에도 에테르가 없다면 물질의 전기 이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에테르를 우주의 근본적인 연속성 원리로 보았습니다. #### 4. '몸들의 전율(Shiver of Bodies)'과 감각의 에테르화 에테르는 단순히 빛과 충동을 수동적으로 통과시키는 매개체가 아니었습니다. 에테르 내에서의 **국지적인 움직임**을 통해 파동이 전달되었고, 이는 에테르가 **파동 전달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존 틴들(John Tyndall)의 **"운반되는 몸들의 전율(transported shiver of bodies)"** 이라는 표현은 몸들이 서로 접촉할 뿐만 아니라, 전기장처럼 존재를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This all-pervading substance takes up their [the stars’] molecular tremors, and conveys them with inconceivable rapidity to our organs of vision. It is the transported shiver of bodies countless millions of miles distant, which translates itself in human consciousness into the splendour of the firmament at night. (Fragments of Science, 4)” (Connor, 2010, p. 157) > “이 모든 곳에 스며 있는 물질은 [별들의] 분자 진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우리의 시각 기관으로 전달한다. 그것은 수천만 마일 떨어진 몸체들의 떨림이 우리에게로 옮겨진 것이며, 인간의 의식 속에서는 그것이 밤하늘의 찬란한 별빛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_과학의 파편들_, 4) (Connor, 2010, p. 157) 이러한 아이디어는 월터 페이터(Walter Pater)의 작품에서 **불안정한 인상과 주기적인 맥동**의 이미지로 나타나며, 데이비드 하틀리(David Hartley)의 신경 내 미묘한 유체 진동 이론과 같이 **인체 내의 에테르적 유체** 를 통해 감각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벤자민 워드 리차드슨(Benjamin Ward Richardson)은 이러한 신경 에테르가 **"우리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상호 소통의 끈(intercommunicating bond)"** 이라고 묘사했습니다. > “an intercommunicating bond which connects us with the outer world; which is apart from the grosser visible substances we call flesh, bone, brain, blood . . . which receives every vibration or motion from without, and lets the same vibrate into us, to be fixed or reflected back; and which conveys the impulse when we will an act and perform it.33” (Connor, 2010, p. 159)^[Richardson, ‘The Theory of a Nervous Ether’, pp. 368–9.] **5. 에테르 음용과 환각 경험: '공기적인 숭고함(Pneumatic Sublime)'** '에테르 마시기(ether-drinking)'는 1890년대 데카당트(decadents)와 보헤미안(bohemians)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이는 에테르라는 아이디어의 **도취감**과 같은 이름의 **화학 물질에 의한 실제적인 중독** 사이의 연결을 시사합니다. 메튜 터너(Matthew Turner)는 에테르를 **'가장 가볍고, 가장 휘발성이 높으며, 가장 인화성이 강한 액체(most light, most volatile, and most inflammable, of all known Liquids)'** 로 묘사하며, 정전기가 이를 인화시킬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19세기 말에 **아산화질소(nitrous oxide)** 흡입의 유행과 함께 에테르는 **'공기적인 숭고함(pneumatic sublime)'** 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었습니다. 아산화질소는 **"아주 아름다운 공기역학 기계(A Very Beautiful Pneumatic Machinery)"** 챕터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기체들은 정신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해 **정신 자체의 대체 이미지**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공기 전체가 일종의 **지성(intelligence)** 을 획득하여 **사유하는 공기(thinking air)** 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습니다.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는 아산화질소 흡입 후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우주는 인상, 아이디어, 쾌락,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벤자민 폴 블러드(Benjamin Paul Blood)의 『마취성 계시와 철학의 요점(The Anaesthetic Revelation and the Gist of Philosophy)』을 통해 이러한 마취성 가스의 철학적 효용성에 주목했으며, 가스가 모든 이분법과 모순을 **하나의 고차원적 통일성(higher unity)** 으로 용해시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임스는 이러한 환각이 실질적인 철학적 통찰로 이어지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 6. 에테르와 과학적 상상력의 알레고리 에테르는 직접 관찰하거나 병에 담아 분석할 수 없는 특성 때문에 **과학적 상상력 그 자체의 알레고리**가 되었습니다. 톰슨과 맥스웰(Maxwell) 같은 과학자들은 물리적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정신적 또는 물리적 모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존 틴들(John Tyndall)은 인간 지성에는 **"팽창력(power of expansion)" 또는 "창조력(power of creation)"** 이 있으며, 이는 공기 연구에서 에테르에 대한 개념으로 확장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에테르 이론은 **감각적 사실에서 초감각적 사실로 나아가는 상상력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 에테르의 혼잡과 대기 중의 소동(Atmospherical Commotion) 원래 에테르는 **'육화된 아무것도 아님(embodied nothing)'** 과 같았으나 “As originally conceived, the ether was a sort of embodied nothing, a form of matter as close to vacuity as it was possible to be.” (Connor, 2010, p. 170), 그 기능이 증가하면서 점점 더 **'혼잡해졌다(crowded)'** 고 여겨졌습니다. 틴들은 우주 공간이 열과 빛의 다양한 파동에 의해 **끊임없이 가로질러지며(continuously traversed)**, 이 파동들이 혼란 없이 섞여 공간의 '온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점차 사람들은 에테르에 **자신의 존재를 퍼뜨리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에테르적 격동(aethereal commotion)'** 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졌습니다. > Far from being inert, the ether ‘is never still’, wrote Tyndall. ‘To the conception of space being filled, we must therefore add the conception of its being in a state of incessant tremor’ (Fragments of Science, 8). His evocation of the state of ‘aethereal commotion’ (Fragments of Science, 8) in the midst of which we live on the surface of earth anticipates the sense that began to grow from the 1890s onwards that human beings were diffusing more and more of themselves into the ether. > > 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게도, 에테르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틴달은 썼다. “공간이 가득 차 있다는 개념에 더해, 우리는 그것이 끊임없는 떨림 상태에 있다는 개념 또한 더해야 한다”(_과학의 파편들_, 8). 우리가 지구의 표면 위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그가 묘사한 ‘에테르의 격동(aethereal commotion)’ 상태는, 1890년대 이후 점차 형성되기 시작한 하나의 감각을 예견한다—곧, 인간이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에테르 속으로 확산시키고 있다는 감각이다.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단편소설 **「무선(Wireless)」**은 이러한 다양한 에테르(화학적 에테르, 전자기적 에테르, 시적 에테르, 영적 에테르) 간의 **간섭(interference)**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야기 속 인물이 화학적 에테르를 마시고 무선 전송과 동시에 키츠(Keats)의 시를 무의식적으로 받아 쓰는 것은 이 모든 에테르 영역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공간을 상징합니다. 에테르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과거의 과학적 개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정신성(mentality of matter)과 정신의 물질성(materiality of mind)이 불가피하고 풍요로운 간섭 패턴을 형성하는 포화된 공간을 보여줍니다. 이는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존재와 인식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 챕터 6: 안개(Haze) 이 챕터는 안개(haze)라는 기상 현상이 단순한 자연 현상을 넘어, 모더니즘 예술과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떻게 '간섭(interference)'의 개념과 연결되는지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 1. 문화와 날씨의 상호작용 살만 루슈디(Salman Rushdie)의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에서는 **영국인의 도덕적 모호함이 기상학적으로 유발된다**고 묘사하며, 런던이 열대 도시로 변모할 경우 발생할 긍정적인 변화들을 나열합니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올랜도([[Orlando]])』는 4챕터 마지막쯤 기상학적 용어를 통해 18세기에서 19세기로의 역사적 전환을 묘사합니다. 이제 18세기의 여성으로 살아가는 올랜도는, 이전 세기의 ‘뒤엉킴과 혼성의 집합체(huddle and conglomeration)’를 회상한다: > 한겨울의 서늘한 밤, 도시 위로는 희뿌연 안개가 내려앉았고, 그녀의 사방으로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세인트 폴 대성당, 런던 타워, 웨스트민스터 사원, 도시의 교회들이 뿜어내는 뾰족탑과 돔들, 은행들의 매끄럽고 육중한 덩어리, 회당과 집회의장의 풍요롭고 유려한 곡선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북쪽에는 잘 다듬어진 햄스테드 언덕이 부드럽게 솟아 있었고, 서쪽으로는 메이페어의 거리들과 광장이 하나의 맑고도 또렷한 광휘 속에 빛나고 있었다. 이 고요하고 질서정연한 광경 위로 별들은 내려다보았다. 흐림 없이 맑은 하늘 속에서 별들은 반짝이며, 뚜렷하고, 단단하고, 긍정적인 빛으로 내려앉았다. 대기의 극도로 투명한 상태 속에서, 지붕선 하나하나, 굴뚝의 덮개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였고, 거리의 자갈들조차도 서로 구별되어 드러났다. 올랜도는 이 질서정연한 광경을,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런던의 불규칙하고 뒤엉킨 빈민가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는 맑고 질서정연한 하늘로 표현되지만, 자정의 종이 울리자 검은 구름이 런던을 뒤덮으며 혼돈스러운 19세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는 문화-역사적 현상과 기상학적 현상 간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회상은 마치 새로운 세기의 도래를 알리는 영화적 전환처럼 이어진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세인트 폴 대성당 뒤편에 작은 구름 하나가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러 퍼지기 시작한다: > “[…] 구름은 북쪽으로 번져갔다. 도시 위로 겹겹의 높이가 그것에 휩싸였다. 오직 메이페어만이 모든 불빛을 환히 밝힌 채, 그 대비 속에서 더욱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덟 번째 종소리가 울릴 무렵, 급히 흩어지는 구름 조각들이 피커딜리 위로 퍼졌다. 그것들은 덩어리져 놀라운 속도로 웨스트엔드를 향해 몰려오는 듯 보였다. 아홉 번째, 열 번째, 열한 번째 종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거대한 암흑이 런던 전역을 뒤덮었다. 자정, 열두 번째 종소리와 함께 어둠은 완전해졌다.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의 덩어리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모든 것이 어둠이었다; 모든 것이 의심이었다; 모든 것이 혼돈이었다. 18세기는 끝났고, 19세기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문화사적 병치와 기상학적 유비가 너무도 명확하게 읽힌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것들을 *감상적 오류(pathetic fallacy)* 의 사례로 만든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어쩌면 우리가 전혀 다른 질서 속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암시한다—미셸 세르가 『자연 계약(_The Natural Contract_)』에서 말했듯, “세계사가 문화로 들어오고, 세계문화가 역사로 들어온다: 이는 철학에서 전례 없는 전환이다. [@serres_natural_2008, 4]” 그렇다면 자연이 역사 안으로 들어온 이 사실은, 자연적 사실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가? #### 안개의 전통: 낭만주의적 광채와 불안정한 유동성** 모더니즘은 안개에 대한 두 가지 전통을 계승한다. 1. 첫째, **낭만주의적 안개**는 **매혹과 확산된 광채**를 의미하며, 아우라(aura)의 논리와 관련됩니다. 아우라는 신성한 존재로부터 발산되면서도 그 본질을 유지하는 "두 번째 피부"와 같아서, 빛의 확산과 가시적인 형태에서의 응집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 시에서 안개는 워즈워스(Wordsworth)의 확산된 정신을 담아내는 풍부함으로 묘사됩니다.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 「자연의 젊음(_The Youth of Nature_)」에서 *안개(haze)* 는 이러한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워즈워스의 퍼져 있는 정신을 온전히 간직하게 만든다: > 산들은 그 정상에서 우뚝 서 있고 > 맑은 6월의 밤에 또렷하건만, > 계곡은 안개로 잠겨 있다. > 라이달과 페어필드는 그 자리에 있고, > 그 그림자 속에 워즈워스는 죽은 채 누워 있다. > 그렇듯이,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러하리라.^[Matthew Arnold, Poems, ed. Kenneth Allott, 2nd edn., ed. Miriam Allott (London, 1979), pp. 259–60.] 1. 둘째, **증기(vaporous)의 전통**은 도깨비불이나 다른 대기 현상처럼 **인지가 땅에서 나오는 유해한 증기로 인해 위협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According to this tradition, perception is endangered by the exhalations from the ground, just as bodily health is.” (Connor, 2010, p. 179) 이는 꿈과 망상이 "순수하고 투명한 눈과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황폐한 집(Bleak House)』의 짙은 안개는 이러한 장소와 공간적 차이를 해체하는 안개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Dickens’s at the beginning of Bleak House, inherit the vaporous sensibility of the medieval and late modern world, for whom mists and fogs are held to be the unhealthy halitosis of the ground, constituting a funerary air, full of infection, as opposed to the ethereal lucidity of the upper air.” (Connor, 2010, p. 179) > Fog everywhere. Fog up the river, where it flows among green aits and meadows; fog down the river, where it rolls defiled among the tiers of shipping and the waterside pollutions of a great (and dirty) city. Fog on the Essex marshes, fog on the Kentish heights. Fog creeping into the cabooses of collier-brigs; fog lying out on the yards and hovering in the rigging of great ships; fog drooping on the gunwales of barges and small boats. Fog in the eyes and throats of ancient Greenwich pensioners, wheezing by the firesides of their wards; fog in the stem and bowl of the afternoon pipe of the wrathful skipper, down in his close cabin; fog cruelly pinching the toes and fingers of his shivering little ’prentice boy on deck. Chance people on the bridges peeping over the parapets into a nether sky of fog, with fog all round them, as if they were up in a balloon and hanging in the misty clouds.^[Charles Dickens, Bleak House, ed. Norman Page (Harmondsworth, 1972), p. 49.] #### 모더니즘과 안개: '모호함'에서 '간섭'으로 ==많은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명확한 정의를 추구하며 기체 형태에 대한 적대감==을 보였습니다.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수정처럼 단단한 가장자리와 윤곽"의 예술을 권장했습니다.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의 잡지 『블라스트!(Blast!)』 역시 영국 기후의 "모호함"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모더니즘 경향은 **안개를 '중간 상태' 또는 '배경 소음'과 관련된 특정한 행동**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안개는 점점 더 **인지 그 자체의 이미징에서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으며, 이는 모호함뿐만 아니라 **'간섭(interference)'의 현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시각적 노이즈의 일종으로, 인식과 등록의 조건을 그 본질에 내포합니다. 흡연은 "신경질적인 모더니즘(nebular modernism)"의 이미지로 자주 등장하며, 연기는 생각이 정의나 근거를 잃은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니체(Nietzsche)는 『삶을 위한 역사적 감각의 이점과 단점(On The Uses and Disadvantages of History for Life)』에서 삶에 필수적인 **'모호함(obnubilation)'의 필요성**, 즉 환상과 망각이 있어야만 생명력이 유지된다고 주장하며, 역사적 감각이 삶을 "대기 없는 별"처럼 만들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안개는 입자적이며 빛의 산란으로 인해 광학적 효과를 나타냅니다. ==이는 모더니즘의 "입자적 꿈", 즉 물질의 원자적 구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등록하고 융합하려는 열망을 구현==합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연작 그림(워털루 다리, 채링크로스 다리 등)은 안개나 안개가 시간을 정지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흘러가는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미셸 세르는 그의 글에서 자주 ‘장면화(scenography)’와 ‘윤곽화(ichnography)’라는 개념의 대비로 돌아간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이러한 안개 낀 시야를 설명합니다. 족적화는 "가능한 모든 윤곽의 총합"을 의미하며, 발자크(Balzac)의 『미지의 걸작(Le Chef d’oeuvre inconnu)』에서 화가가 여성의 본질을 "공기 같고 구름 같은" 것으로 묘사하듯이, ==예술이 배경 소음과 형태 없는 부분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반영==합니다. 미셸 세르는 그의 저작들에서 자주 ‘장면적 구성(scenography)’과 ‘윤곽적 구성(ichnography)’이라는 대비 개념로 돌아간다. 장면적 구성은 특정한 순간, 특정한 관점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외형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윤곽적 구성은 “가능한 모든 옆모습들의 총체, 모든 지평선들의 합계”다. 윤곽적 구성은 가능성의 장, 인식 가능하거나 생성 가능한 것들의 장이다. 그것은 현상학적 근원, ‘우물’이며,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의 변신 전체의 연쇄이고, 곧 프로테우스 그 자체이다. 이 구분은 세르가 자신의 저서 『제네시스』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발자크의 이야기 「미지의 걸작(Le Chef-d’œuvre inconnu)」에서 비롯된다. 이야기의 절정에서, 노화가 프렌호퍼는 두 친구에게 자신의 걸작을 보여준다. 그들이 본 것은 “혼란스러운 색채들의 덩어리, 수많은 기이한 선들로 가장자리가 둘러싸인 하나의 물감 벽”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주제의 해체, 그 해체야말로 자신이 의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그린 여성의 본질은 공기 같고, 흐릿하며, 구름 같다: > “그 캔버스엔 그런 깊이가 있어. 그 공기는 너무도 진실해서, 당신은 그것을 당신이 숨 쉬는 공기와 구별할 수조차 없지. 예술은 어디 있는가? 사라졌어, 사라지고 말았지! 이건 바로 한 젊은 여인의 형상들이야. 나는 그 몸을 완성해주는 듯한 선의 생기, 그 색채를 포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어떤 사물이 자기의 분위기 속에 놓일 때,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되는 그런 현상과 다르지 않아.” 세르는 이 이야기를, 헨리 제임스가 『카펫 위의 형상(The Figure in the Carpet)』에서 인용했고, 피카소 또한 깊이 감명받았던 이야기로 읽는다. 그에게 이 이야기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작용한다—==예술이 단순히 배경 소음에서 지각이 선택해내는 시각적 정보를 되풀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배경 소음 자체, 모든 지각과 모든 징표의 구성 요소인 무형성, 형상을 갖지 않은 상태까지도 재현하고자 하는 예술에 대한 알레고리== 말이다: > “작품은 윤곽, 순간 포착, 프로테우스적인 형상들(변화무쌍한 형상들)을 통해 솟아오른다. 그것은 파로스 섬 주변, 소란하고 뒤엉킨 바다—섬을 감싸는 교란과 혼돈—에서 솟는다. 거기엔 섬광과 소멸, 그리고 원-등대(protophare)의 점멸이 있다. 이러한 축적 없이, 이 알 수 없는 윤곽적 구조 없이는 어떤 윤곽도, 어떤 작품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때로, 이 윤곽적 구조를 드러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우리 안에, 어두운 곳 어딘가에, 마치 분비하듯 은밀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으로 숨겨진 틈 안에, 베일 아래. 마치 팔레트처럼. [@serres_genesis_1995, 18-19]” > > The work, through profiles, snapshots, Protean shapes, emerges from the perturbation, from the noisy turbulent sea around the island of Pharos, flashes, occultations, of the protophare. Without this pile-up, without this unknowable ichnography, there are no profiles, no work. It is necessary to dare to unveil the ichnography, at times, the one we always carry with us, in the dark, and as though secreted, in a receded nook, under a veil. Like a palette.25 19세기 말 사진술과 심령술의 연관성은 안개가 사진의 흐릿함과 영적 에너지의 겔화 사이의 유사성을 나타냅니다. X선은 육체의 베일을 꿰뚫어 보지만, 동시에 스펙트럼적 안개나 플라즈마로 육체를 용해시켜 "형태가 불안정하고, 길고, 창백하고, 불분명하며, 땅에서 내뿜는 증기 같은" 형태를 만듭니다. 콘래드(Conrad)의 작품은 안개(mist)의 다양한 의미들 사이를 오간다. 때로 안개는 명료한 배경을 나타내며, 그 속에서 세부가 갑자기, 정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암흑의 심연(Heart of Darkness)』 서두의 다음 장면이 그 예이다. > “하루가 고요하고도 정묘하게 빛나는 광휘 속에서 저물어가고 있었다. 물은 평화롭게 빛났고, 하늘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자비로운 빛의 광대함을 드러냈다. 에식스 늪지 위의 안개조차 마치 반투명하고 빛나는 직물처럼 내륙의 숲 언덕에서부터 늘어져 내려와 낮은 해안선을 투명한 겹겹의 옷자락으로 감싸고 있었다.” ^[Conrad, The Nigger of the ‘Narcissus’, p. 4.] 그러나 이야기 후반부에서는 콩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에 내려앉는 흰 안개가 비물질성을 체현한다. > “해가 떠오를 때, 따뜻하고 축축한 흰 안개가 밤보다 더 눈부시게 시야를 가렸다. 그것은 흩어지거나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단단한 물체처럼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서 있었다. 아마 여덟 시나 아홉 시쯤, 그 안개가 마치 셔터가 들어 올려지듯 걷혔다. 우리는 솟구쳐 오르는 나무들의 숲, 빽빽하고 거대한 정글, 그 위에 매달린 듯한 작고 타오르는 태양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 모든 것이 완벽히 고요했다 — 그리고 다시 흰 셔터가 부드럽게, 마치 기름칠된 홈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Conrad, The Nigger of the ‘Narcissus’, p. 40.] #### 대기적 간섭과 새로운 공기의 인식 존 틴들(John Tyndall)은 대기 오염에 관심을 가지며 공기가 끊임없이 다양한 종류의 충동과 복사에 의해 **"계속적으로 가로질러지는" 공간**임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대기 과학은 대기가 오염과 불규칙성뿐만 아니라, **분포, 소통, 간섭으로 구성된 "궁극적인 혼합체"** 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안개 그 자체가 간섭 현상인데, 미세한 물방울에 의한 빛의 산란으로 광학적 효과가 발생하며, 이는 빛과 물질의 복합적인 간섭을 나타냅니다. 전자 임펄스와 복사로 채워진 공기는 상상 속의 명료함을 손상시키고, 장애물과 간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습니다. 현대 예술은 이러한 대기적 현상을 일반화된 방식으로 탐구하며, 공기의 공간을 "교차와 통로의 공간"으로 점유합니다. 우스만 하크(Usman Haque)의 **'스카이 이어(Sky Ear)'** 설치물은 헬륨 풍선과 휴대폰을 사용하여 공기 중의 전자기장 변동을 6 ultra-bright LEDs의 색감와 소리로 전환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었습니다. ![[0409SK75.jpg]]그의 또 다른 프로젝트인 **'플로터블(Floatables)'** 은 데이터를 교환하는 세상 속에서 일시적인 사적인 공간을 제공하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공간이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적 공간이 되면서, 간섭의 개념은 공기 공간을 청각화합니다.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의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에서 안개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는 안개 자체가 소리를 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청각적 간섭을 보여줍니다. 이 챕터는 안개와 대기 현상이 단순히 시각적인 방해물이 아니라, 19세기 말부터 모더니즘에 걸쳐 **물질과 비물질, 내면과 외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간섭'의 원리**로 작용했음을 강조합니다. 공기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상호작용의 복잡한 중심 공간이 되었으며, 이는 과학, 예술, 철학 전반에 걸쳐 새로운 탐구와 표현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 대기 현상(Atmospherics) 이 챕터는 무선 통신의 발전과 함께 '대기 현상(Atmospherics)'이 단순한 방해물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소통 방식에 깊이 관여하는 복잡한 '간섭(interference)' 현상으로 어떻게 인식되기 시작했는지를 탐구합니다. #### 절대적 소통의 유토피아와 '대기 현상'의 출현 초기 라디오 기술은 **절대적인 소통과 보편적인 접촉**을 꿈꾸게 했습니다. 1912년 잡지 『더 마르코니그래프(The Marconigraph)』는 **SS 밀티아데스(Miltiades)호가 항해 내내 무선 통신이 끊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찬양하는 시**를 게재하며, "이제 사람이 가는 곳이라면 불타는 사막이든 극지방의 눈이든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토피아적 이상에도 불구하고, **‘대기 현상’이라는 ‘윙윙거리는 파리’가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무선 통신을 방해하는 정전기 노이즈, 즉 '잡음(static)' 현상을 의미합니다. #### 2. 대기 현상의 특성과 '간섭'의 진화 • 1923년 『와이어리스 월드(Wireless World)』에서는 1906년부터 1918년 사이에 100건이 넘는 간섭 방지 장치 특허가 출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기 현상으로 인한 간섭이 여전히 무선 전신술의 '가장 큰 미해결 문제'** 라고 언급했습니다. 대기 현상으로 인한 소음은 다양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비단 치마가 스치는 소리, 베이컨이 뜨거운 팬에 떨어지는 소리, 증기가 새는 소리, 채찍 소리, 새들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소리, 심지어는 **"종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 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초기에는 이러한 노이즈를 외부에서 들어오는 '악마적 방해'로 여겼으나, 점차 **인간 자체가 대기 간섭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대기 중 전자기장에는 **"그들만의 언어"** 가 있다고 인식되며, "클릭(clicks)", "그라인더(grinders)", "히스(hisses)", "크래시(crashes)", "피즐리(fizzly)"와 같은 **대기 잡음에 대한 음운론적 분류 체계**가 시도되었습니다. #### '재밍(Jamming)'의 등장과 공기의 군사화 의도적인 신호 방해, 즉 '재밍'은 1903년 마르코니(Marconi) 시스템 시연회에서 네빌 마스켈라인(Nevil Maskelyne)이 '더러운 파장(dirty waves)'을 사용하여 마르코니의 통신을 방해한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마르코니 시스템 방해 사건**: 1903년 왕립 연구소(Royal Institution)에서 마르코니(Marconi) 시스템 시연회 중, 네빌 마스켈라인(Nevil Maskelyne)이 "더러운 파장(dirty waves)"을 사용하여 '쥐(rats)'라는 단어와 라임을 반복적으로 전송하여 마르코니의 통신을 방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과학적 폭력(scientific hooliganism)"으로 비난받았습니다.이러한 재밍은 점차 확산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직적인 전쟁 수단**이 되었고, 소음 연구는 군사 기술의 중요한 영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재밍'이라는 용어는 원래는 우발적인 대기 현상을 지칭하기도 했지만, 점차 인간의 의도적인 신호 방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전파가 혼잡해지면서 인간의 활동도 비의도적인 간섭의 새로운 원천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시지 기계의 작동이나 전차의 바퀴에서 발생하는 불꽃이 라디오 수신에 영향을 미쳤다는 불만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밍'의 의미가 좁혀지면서, 소음 연구는 군사 기술의 중요한 영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전쟁 중 통신 환경 연구는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의 정보 수학 이론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 공기의 시간 (The Time of the Air) 1933년 발표된 마리네티(Filippo Marinetti)의 선언문 「라 라디아(La Radia)」에서 그는 라디오가 단지 공간적 거리를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의 구분마저도 소멸시킬 것이라 예언했다. 전 세계가 라디오 시간이라는 ‘영원히 역동적인 현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과거도 미래도 없는, 시간도 공간도 없는” 상태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다.^[F. T. Marinetti and Pino Masnata, ‘La Radia’, in Wireless Imagination: Sound, Radio and the Avant-Garde, ed. Douglas Kahn and Gregory Whitehead (Cambridge, ma, and London, 1992), p. 267.] #### '돌파구(Breakthrough)'와 공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공기는 '잃어버린 소리들의 연옥' 또는 '공중의 묘지'** 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시세로(Cicero)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같은 과거의 목소리들을 무선 통신을 통해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The Music of the Spheres’ in the Daily Chronicle of 10 December 1927 proposed that ‘the eloquence of Cicero and Demosthenes may be recaptured for all to hear’^[Quoted in Albert Glinsky, Theremin: Ether Music and Espionage (Urbana and Chicago, 2000), p. 71. References hereafter to Theremin in text.], 그리고 심령술사들이 라디오 정적(static)을 통해 죽은 자의 목소리(Electronic Voice Phenomena, EVP)를 들으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 Did voices walk the air, released from death, > Hers might be heard when, very late at night, > I turn the wireless on and catch no sound > But atmospheric cracklings, moans, and thuds. > Hers might be heard, associate with this ground > Whereon her house once stood. > > "목소리들이 공기를 걷는다면, 죽음에서 풀려나, > > 그녀의 목소리도 들릴 수 있으리라. > > 매우 늦은 밤, 무심코 라디오를 켰을 때 > >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만 대기의 잡음, > > 신음, 쿵쿵거림만이 들릴 때— > > 그녀의 목소리도 들릴 수 있으리라, > > 한때 그녀의 집이 서 있던 이 땅과 연루된 채." ^[Siegfried Sassoon, Collected Poems, 1908–1956 (London, 1984), p. 238.] 사순(Siegfried Sassoon)은 라디오의 수신과 조율(picking up and tuning in)에 관한 언어를 문학적으로 전유하며, 기존의 전치사(in 혹은 through)를 대신해 _on the dark_ 라는 기묘하면서도 적절한 표현을 창안한다. 이 표현은 어둠을 단순한 ‘매개’가 아니라, 마치 하나의 _프로그램_ 이나 _방송국_ 처럼 제시한다. 즉, 어둠이 정보를 통과시키는 통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송출하는 발신지로 상상되는 것이다. > "...만약 내가 어둠 위에서(on the dark) 날카로운 노르만 프랑스어를 들었고, > 그 발화와 영원의 사이에 서 있었다면! > 만약 내가 그렇게 조율되어 있었다면, > 매틸다 여왕이 말을 타고, 등을 웅크린 채 > 바스락대는 눈 위를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을 텐데!"^[Sassoon, Collected Poems, pp. 238–9.] 사순은 여기서 어둠을 통해가 아니라 ‘어둠 위에서’ 망자의 언어를 ‘수신’하고, 시간과 존재의 경계(utterance and eternity) 사이에 서 있는 상상 속 화자의 자리를 형상화한다. 라디오는 **전기(electricity)가 가스(gas)를 '압도'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공기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넘어서야 할 저항"** 이자 **"통과해야 할 매개체"** 로 인식됩니다. 역설적으로, **잡음 자체가 신호가 될 수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소리를 배경에서 벗어나 전경으로 가져오려는 노력은 전파 천문학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우주에 대한 이해에 큰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전파는 폭발하는 별이나 은하계의 중심부와 같이 변화무쌍한 천체들을 포착하며, 이러한 현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습니다 초기 라디오 청취는 수동적인 '수신'이 아니라, **아마추어 무선사('햄')들이 주도하는 고되고 적극적인 '간섭'과 '해석'의 작업**이었습니다. 그들은 코일, 전선, 배터리 등 복잡한 장비를 설계하고 조립하며, **보이지 않는 전파를 '노동 집약적인 상상'** 으로 파악했습니다. 모스 부호(Morse code transmissions)조차도 단순한 점과 선의 나열을 넘어, **운율과 소음이 결합된 '음색적 아우라'** 를 통해 발신자의 성격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서투른 오퍼레이터의 모스 부호는 "말 그대로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어 특정 성격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 Yet it has come to pass that out of the manner of rendering this simple code has been evolved a means of communicating thought and feeling rivaling in flexibility and scope the human voice . . . A telegrapher’s Morse, then, is as distinctive as his face, his tones, or his handwriting; and as difficult to counterfeit as his voice or writing.^[L. C. Hall, ‘Telegraph Talk and Talkers: Human Character and Emotions an Old Telegrapher Reads on the Wire’, McClure’s Magazine, xviii (1902), p. 227.](219) > >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이 단순한 부호 체계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사유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연성과 표현 범위에 있어서 인간의 목소리에 필적할 만큼 강력한 소통 방식이 되었다...==즉, 전신 기사의 모스 부호(Morse)는 그의 얼굴, 목소리, 필체만큼이나 고유하며, 그 목소리나 글씨체를 흉내 내는 것만큼이나 모방하기 어렵다.== (62) 홀(Hall)은 자신이 알고 지낸 어느 지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그 사람을 단지 모스 통신 호출 부호인 **C. G.** 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의 성격과 기질은 그가 보내는 모스 부호의 방식 속에 분명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는 C. G.가 병원에서 임종을 앞두었을 때, 마지막까지도 홀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애썼다고 회상한다. 그 과정에서 내면의 독백과 외부로의 전달 시도 사이에는 ‘목소리의 전환’이라는 형태로 그 차이가 드러났다고 한다: > “그가 메시지를 두드릴 때는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공간 너머로 보내려는 사람처럼, 긴장된 반속삭임의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메시지 사이사이, 스스로와 대화할 때는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hall_telegraph_1902, 227] #### '경청의 작업(The Work of Listening)' **초기 라디오는 힘든 경청 작업**: 초기 라디오는 단순한 수신이 아니었습니다. **"힘들고, 주의 깊고, 창의적인 경청의 작업"** 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수동적인 '수신(reception)'이라기보다는 **능동적인 '가로채기(interception)'** 에 가까웠습니다. 청취자는 항상 찾고자 하는 소리들을 포착하기 위해 **"상호적인 압력(reciprocal pressure)"** 을 가했습니다. 1910년대에 라디오의 발전을 이끈 것은 바로 **"햄(hams), 아마추어(amateurs), 그리고 취미가들(hobbyists)"** 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술 저널을 자신들의 목격담, 발견, 추측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는 파동 형태의 비물질적인 문화를 **"노동 집약적인 수동적 상상력(laborious manual imagining)"** 으로 구성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초기 라디오 장비는 **"거추장스럽고, 신비로우며, 좌절감을 주면서도 매혹적"** 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코일, 전선, 배터리, 크리스털, 초크, 콘덴서, 커패시터, 코히러, 다이오드, 트라이오드 등 다양한 부품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여러 방식으로 **"구성하고 결합"**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라디오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장비를 **"설계하고, 조립하고, 테스트하고, 조정하고, 재작업"**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취 자체가 일종의 연구 개발(R&D)"** 이었습니다. **라디오 역할의 변화와 아마추어의 주변화**: 나중에 라디오 송신이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대와 1920년대부터 방송사 같은 공식 기관에 의해 장악되면서, 아마추어들은 **"일종의 주변 현상, 즉 간섭의 한 형태"** 가 되었습니다. 이는 축음기가 생산과 수신이 반복적으로 바뀌던 교류(alternating current)에서 생산은 한쪽에 집중되고 수신은 청취자(이자 구매자)에게 집중되는 직류(direct current)로 변모한 것과 유사하게, 송신과 수신의 역할이 **점차 양극화**되는 경험을 가져왔습니다. 방송 음악에 대한 비평이 정착되면서, 라디오 수신의 불안정한 조건이 음악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불평이 흔하게 제기되었습니다. '대기음(atmospherics)'이라는 단어는 때때로 송신되는 음악의 내용에까지 확대되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비평가는 쇤베르크(Schönberg)의 실내악 방송이 "대기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언급하며, "매체와 음악 형식의 흐림"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소음의 음악화(Theremin)**: 라디오는 단순히 마이크나 전화처럼 소리를 증폭하거나 향상시키지 않았습니다. 라디오는 어떤 종류의 진동이라도 소리로 변환될 수 있는 새로운, 혼합된 감각에 속했습니다. 이러한 상호 변환의 한 측면은 **물질의 음향화(sonification)** 였고, 다른 측면은 소리 자체의 조작 가능성과 변형 가능성이었습니다. 레온 테레민(Leon Theremin)의 **테레민(theremin)** 악기는 **"라디오의 정전기(static)로 음악을 만드는 러시아인"** 으로 묘사되었으며, 이는 **"제어된 정전기(controlled static)"** 기술로 설명되었습니다. 이는 '대기음'이 단순히 방해물이 아니라, **음악의 일부**로 변모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모스 부호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전신 기사의 **"개성적인 '목소리'나 '음색적인 아우라'"** 를 담았고, 때로는 **"간섭 현상"** 을 일으키는 소리 자체로 특정 성격의 특징적인 신호가 될 수 있다고 설명되었습니다. 이는 '경청의 작업' 섹션에서 다루는 초기 라디오 청취의 능동적이고 해석적인 특성, 그리고 소음과 신호의 경계가 모호했던 '대기음'의 시대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즉, 모스 부호가 이미 소리의 '간섭'과 '개성'을 보여주며 이후 라디오 시대의 '경청'과 '대기음'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마련한 것입니다. #### Etherphonics > It was during the 1930s that film and radio technicians began the practice of capturing and manipulating ‘room-tone’ and environmental backgrounds, using what became known as ‘atmosphere microphones’ in order to gather these bottled atmospherics.” (Connor, 2010, p. 224) 라디오는 단순히 마이크나 전화처럼 소리를 증폭하거나 향상시키는 것을 넘어섰습니다. 라디오는 **어떤 종류의 진동이라도 소리로 변환될 수 있는 새로운, 혼합된 감각에 속했습니다**. 이러한 상호 변환의 한 측면은 **물질의 음향화(sonification)** 였고, 다른 측면은 소리 자체의 조작 가능성과 변형 가능성이었습니다. 레프(Lev), 후에 레온 테레민(Leon Theremin)으로 알려진 그는 인체를 자동으로 감지하는 장치를 개발하던 러시아의 전파 과학자였다. 그는 가스를 포함한 조율된 회로에 손을 집어넣자, 회로의 정전용량이 변화하면서 생성되는 음의 높이(pitch)가 바뀐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에서, **공중에서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라는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1920년경, 그는 이 장치를 ‘에테르폰(etherphone)’이라 부르며 작동 가능한 최초의 모델을 완성했다. 이 악기는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 테레민(Theremin)으로 불리게 된다. 테레민 악기는 **"라디오의 정전기(static)로 음악을 만드는 러시아인"** 으로 묘사되었으며, 이는 **"제어된 정전기(controlled static)"** 기술로 설명되었습니다. 이 악기는 사이의 악기, 즉 주파수 사이를 조율하며 ‘스테이션 사이를 서핑하듯’ 연주할 수 있는 음악적 장치였다. 아직 아무도 채우지 않은, 지도화되지 않은 자유롭고 무정형한 ‘라디오-음악의 공간(radiomusical space)’, 그 음향적 공백 속을 탐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악기는 **"무선 통신 소음(radio static)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며, 잡음과 음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초기 청중들은 테레민의 민감한 특성 때문에 종종 "놀랍도록 기괴한 소음"을 듣곤 했습니다. 이후 테레민은 **눈의 움직임만으로**, 혹은 심지어 순수한 사고(thought)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실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공상은 이미 무선 전신(wireless telegraphy)의 초기 실험들 속에서 가능성으로 떠오른 바 있다. 그리고도 테레민이 만들어낸 음악은, 몸을 회로에서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몸을 회로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생겨난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전부 간섭(interference)이었다. 《더 타임스(The Times)》에 실린 테레민의 파리 공연 리뷰는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 그들은 테레민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면서, **진공관 라디오(Valve set)** 사용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현상—특정 조건에서 발생하는 전기 진동으로 인해 생기는 **“울림(howling)”**—을 언급했다. 테레민은 한편으로는 **그 어떤 악기로도 얻기 힘든 순수하고 에테르적인 톤**을 낼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직거림(cracklings)’, ‘윙윙거림(buzzings)’, ‘삑삑거림(bleats)’, ‘쌕쌕거림(wheezes)’**이 단지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로도 튀어나올 수 있었다. 《타임(Time)》지는 테레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the Russian who makes music out of radio static’, while Samuel Hoffman, one of the later exponents of the theremin, himself described his technique as ‘controlled static’ > > “라디오 잡음에서 음악을 만들어내는 러시아인”. 후대의 테레민 연주자 사무엘 호프만(Samuel Hoffman) 역시 자신의 연주 기법을 ‘제어된 잡음(controlled static)’이라 불렀다 (Theremin, 146, 279 인용, Glinsky, Albert, Theremin: Ether Music and Espionage (Urbana, and Chicago, il, 2000)). #### 대기 현상의 메시지화와 '소리화(Sonification)' 라디오는 단지 amplify or enhance하는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진동을 소리로 전환하는 **'소리화(sonification)'** 의 새로운 감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테레민이 만들어내는 음악은 회로에서 신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회로에 도입하는 것의 결과**였으며, 이는 **"모든 것이 간섭"** 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초기 관객들은 악기의 민감성 때문에 "경악할 정도로 기괴한 소음"을 낼 수 있다고 언급했으나, 동시에 "다른 어떤 악기로도 달성하기 어려운 천상의 순수한 음색"을 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소음이 음악의 일부로 변모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러나, 테레민 자신의 거대한 포부와 바레즈(Edgard Varèse)와 같은 선구자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 악기는 점차 **음악적 스펙트럼의 아주 좁은 영역에 격리**되었다. 히치콕의 영화 *<스펠바운드(Spellbound)>* 같은 작품에서 테레민이 쓰인 후, 이 악기는 기묘함, 정신적 불안, 심리적 이상을 나타내는 신호로 고정되었고, 1950년대부터는 외계적 감각, 비지구적 힘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테레민은 음악이 지구 너머의 신비와 매혹을 탐색하기 시작하던 시대에 태어났지만, 동시에 그러한 가능성들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내린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디지털 기술과 소리 예술**: 디지털 기술은 이러한 매체 간 상호작용(intermediality)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오늘날의 사운드 아티스트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 행동, 상태 및 이벤트를 사용하여 소리를 생성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드레아 폴리(Andrea Polli)의 '대기음/날씨 작업(Atmospherics/Weatherworks)' 프로젝트는 폭풍, 사이클론과 같은 극적인 기상 데이터를 소리화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습니다. 이는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소리, 예를 들어 50,000피트 상공의 바람 소리를 들으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며, 듣는 것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욕구, 즉 미세한 소리나 평소에는 인지되지 않는 배경 노이즈까지 포착하려는 시도와 연결되어 **"근접한 거리(proximal distance)"** 의 경험을 제공합니다. 소음에 대한 우리의 허용치가 커지고 소음이 신호로 처리될수록, 소음은 점차 **"우리를 위한 분위기(an atmosphere for us)"** 가 됩니다. 이는 일종의 **"자폐적인 단절(autistic insulation)"** 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영역'을 인간의 주파수 범위로 축소하는 위험을 내포합니다 이 섹션은 초기 무선 통신 시대에 소리가 단순히 정보 전달의 수단을 넘어, 인간의 감각과 지각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며, 소음과 신호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예술적, 철학적 탐구의 장을 열었음을 보여줍니다. 총체적인 정보는 극단적으로 총체적인 소음과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의미와 혼돈 간의 이러한 교차는 우리가 소유하고 표현하는 지능의 본질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티데스 퀸틸리아누스(Aristides Quintilianus)의 음악적 비유는 인간의 몸이 영혼이 공기를 통해 떨어지면서 증가하는 습도와 혼합물로 인해 만들어지는 **대기음(atmospherics)** 과 같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대기 현상은 의미와 혼돈 사이의 끊임없는 교차를 보여주며, 인간은 신호와 잡음, 정보와 대기 현상 사이의 차이를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변압기(transformer)'와 같은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이는 초기 무선 통신사들처럼 인간이 항상 경청의 한가운데 있으며, 소음과 신호의 차이를 반복적으로 재창조하는 **변압기(transformer)** 와 같다고 제시합니다. ### 제8장: 'A Grave in the Air (공중의 무덤)' 이 장은 공기가 단순한 물리적 요소가 아니라, 죽음, 전쟁, 의사소통,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취약성과 역설을 담아내는 복합적인 은유이자 현실 공간임을 심도 있게 탐구합니다. #### Dying into Air (공중으로 죽어 들어가다) 이 섹션은 죽음과 공기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이해를 제시합니다: **고대 장례 의식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크레온의 칙령에 따라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이 땅에 묻히지 않고 공기에 노출되자, 이는 **공기 오염**으로 이어집니다. 테이레시아스는 오염된 공기가 연기를 막고, 시체에서 나온 담즙이 공중으로 흩뿌려져 숨쉬기 어렵게 만들고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한다고 묘사합니다. 이는 죽은 자와 공기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보여줍니다. 크레온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시신을 다시 드러낸 뒤 그 악취를 피하고 도망친 장의인을 감시하기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위로 물러난다. 그 순간, **먼지 폭풍(dust-storm)** 이 몰아친다: >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덮쳤다. > 평원 전체에 먼지를 몰아올리며, > 슬픔을 하늘 끝까지 솟구치게 했다. > 낮게 드리운 숲을 공포로 휘몰아치며 > 하늘 전체(에테르)를 가득 메웠다 _(en d’emestôthê megas aithêr)._ > 우리는 눈을 감고 > 신들로부터 내려온 이 재앙에 맞서 버텼다.”^[Sophocles, Antigone, trans. Paul Woodruff (Indianapolis, 2001), ll. 418–22, p. 18.]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공기 중에 방치하는 것은 공기의 오염(pollution)을 초래하며, 그 공기는 곧 먼지로 가득하거나 질식할 듯한 상태가 된다. 이러한 관념은 이후 테이레시아스(Teiresias)의 증언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는 맹렬히 울부짖는 새들의 비명을 듣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려 하지만 실패한다. 앞서의 장면에서는 공간의 수축(contraction of expanse)이 나타났다면, 이번에는 **‘높이(height)’의 실패**, 즉 하늘로 향하는 신성한 연결의 단절이 드러난다: > “내가 불태우는 제물을 바치려 했지. > 제단은 한때 높게 타올랐지만, 내 제물에는 > 불꽃 하나 붙지 않았어. > 잿불은 꺼져버렸고, > 넓적다리뼈에서는 즙이 흘러나와 뚝뚝 떨어지고, >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침 튀기듯 뿜어댔어. > 방광이 터지며 하늘 위로 쓸개즙을 뿜어냈지 > _(kai metarsioi cholai diespeironto)_. > 지방의 껍질은 물먹은 뼈에서 떨어져 나갔어.”^[Sophocles, Antigone, ll. 1005–11, pp. 43–4.] > “The pattern is clear: what should go up in holy smoke (the fat that was sacred to the gods) fails and slides heavily downwards: instead, the gall and the dust rise into the air, making it impossible to breathe, and impossible to make out a meaning, though it is augury enough of the vitiation of the air.” (Connor, 2010, p. 231) **현대 화장(火葬)과 공기의 융합**: 필립 풀먼(Philip Pullman)이 그의 의붓아버지를 화장하여 불꽃놀이 로켓에 담아 하늘로 흩뿌린 사례는 시체를 공기 속으로 흩뿌려 "변화무쌍함 속으로의 승화(apotheosis into mutability)"시키는 황홀한 경험으로 묘사됩니다. 육체가 재로 변하고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또 다른 더 밝은 삶의 유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관념과 연결됩니다. 티모시 리리, 진 로든베리, 헌터 S. 톰슨 등 다른 이들도 유골을 우주 궤도로 보내거나 불꽃놀이에 섞어 흩뿌리는 '공중 매장'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이들은 죽음 후에도 공기와 육체가 합일되는 황홀하고 승리적인 경험을 추구했습니다. > ‘We couldn’t decide,’ says Pullman. ‘What should we do with the ashes? Bury him at sea, scatter him over the hills? No particular reason to do either . . .’ ‘I thought,’ Pullman continues, his tones level, telling the tale of the ashes, ‘wouldn’t it be a good idea to send him up in a rocket, in a firework? And the others all thought, yeah, what a good idea. So my sister – who knows absolutely everyone who’s anyone – found a firework-maker in Edinburgh, and said, “Can you help?” and he said “Yes.” > For the quantity of ashes, the firework-maker made up a consignment of 40 rockets, dispensing ashes by spoon into each firework. ‘And you know,’ says Pullman, ‘it was great. We said a few words and then lit the rockets, and up they went, and it was the most wonderful display, and the sky was full of dad, full of stars.’ [@rabinovitch_his_2003] > > “뭘 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어요,” 풀먼(Pullman)은 말한다. “유골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바다에 뿌릴까, 언덕 위에 흩뿌릴까? 딱히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는 담담한 어조로 유골에 얽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때 문득 생각했죠. ‘그를 로켓에 실어서, 불꽃놀이처럼 하늘로 보내는 건 어때?’ 그리고 다들 ‘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하고요. 제 여동생은 – 그야말로 유명인사들과 다 아는 사이인데 – 에든버러에 불꽃놀이 제작자를 수소문해서 ‘도와주실 수 있나요?’ 하고 물었고, 그분은 ‘예’라고 했죠.” > > 유골의 양에 맞춰 불꽃 제작자는 총 40개의 로켓을 만들어, 각 불꽃에 숟가락으로 유골을 담아 넣었다. “그리고 말이죠,” 풀먼은 말한다. “정말 멋졌어요. 몇 마디 말을 나눈 다음, 로켓에 불을 붙였죠. 로켓이 솟아오르고, 정말 멋진 불꽃놀이가 펼쳐졌고, 하늘 전체가 아버지로 가득했어요. 별들로 가득했죠.” #### Cremation's in the Air (화장이 공중에 있다) 이 섹션은 화장 관행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공기와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다룹니다: • **낭만주의적 열망의 구현**: 낭만주의 시대에는 공중으로 죽어 들어가 공기의 정화된 상태에 도달하려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셸리(Shelley)의 화장 사례는 현대 화장의 시작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셸리의 화장은 다소 어설펐지만, 그 육체가 재로 변하고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것은 "또 다른 더 밝은 삶의 유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관념과 연결됩니다. 불꽃놀이를 통해 유골을 흩뿌리는 풀먼과 톰슨의 사례는 이러한 열망의 현대적 구현입니다. **매장과 화장의 대조**: 매장은 시신을 보존하고 시간을 멈추려는 환상(시간의 영향을 저지하는 듯한 환상)을 제공하는 반면, 화장은 부패 과정을 가속화합니다. 1840년대 위생 개혁가들은 매장된 시체에서 나오는 유독 가스가 공기와 물을 오염시킨다고 우려했습니다. 특히 "시체성 발산물(cadaveric emanations)"에 대한 우려가 컸으며, 이는 "미아스마 이론(miasma theory)"과 연결됩니다. 헨리 톰슨 경(Sir Henry Thompson)은 매장 시 발생하는 가스 오염의 위험을 강조하며, 공기가 오염을 정화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시체가 공기와 접촉하면 오염이 확산될 것이라는 전통적인 불안감도 존재했습니다. 화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성 증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2차 화로, 여과 시스템 등이 개발되었습니다. 또한, 유골의 순수성(다른 물질과 섞이지 않음)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초기 화장론자들은 유골을 흩뿌려 자연의 순환 과정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장려했지만, 화장이 대중화되면서 유골을 유골함에 보관하거나 묘지에 묻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는 장례업자들이 화장을 통해 수입 손실을 보전하려는 경제적 동기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 A Question of Time (시간의 문제) 이 섹션은 화장이 '시간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특히 효율성과 근대성의 관점에서 다룹니다: **효율성과 근대성**: 화장은 안전하고, 위생적이며,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홍보되었습니다. 톰슨은 화장이 묻는 데 수년이 걸리는 "무해한 결과"를 한 시간 만에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질병을 속도로 물리치는 "근대적인 죽음의 방식"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매장이 귀중한 물질을 무기한으로 순환에서 제외시키는 반면, 화장은 자연의 경제적 목적, 즉 "좋은 이자와 빠른 회수"를 촉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리주의적, 심지어 경제학적 언어는 필립 홀랜드(Philip Holland)와 같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종교적, 문화적 맥락**: 일부 화장론자들은 화장이 가톨릭의 육체 부활에 대한 미신을 불태워 없애는 방법으로 보았으며, 이는 고대의 비기독교적 전통(노르딕 또는 헬레니즘)으로의 회귀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닥터 윌리엄 프라이스(Dr William Price)의 아들 화장 사건은 화장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신지학(Theosophy)과 같은 새로운 영적, 이단 종교들이 시체 소각이 포함된 동양 종교(불교, 힌두교, 시크교)에 영향을 받아 화장을 수용했습니다. 티베트의 '하늘 매장(sky burial)'이나 파르시족의 '침묵의 탑(Towers of Silence)' 같은 이색적인 관행도 화장 개혁과 연결되었습니다. #### An Air That Kills (죽음을 가져오는 공기) 이 섹션은 공기가 어떻게 생명을 주는 동시에 죽음을 가져올 수 있는 매체가 되었는지, 특히 전쟁의 맥락에서 다룹니다: **공기의 점유와 군사화**: 낭만주의의 공기 동화 욕망이 무한함을 추구했다면, 화장 운동은 공기를 점유하고 자본화하려는 반대 과정이었습니다. 공중전력의 발전은 공중으로 죽어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고 심지어 매력적으로 만들었으며, 더 많은 인구에게 "공중에서 오는 죽음"의 전망을 현실화했습니다. 특히 **독가스**의 개발은 공기를 육체적인 전쟁 도구이자 심리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매스 미디어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독가스의 양면성**: 독가스는 고대부터 알려진 치명적인 공기 오염 물질(유황, 비소 연기)의 계보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기술 발전과 산업 생산의 정점(염소 가스, 겨자 가스, 치클론 B 등)에 있는 현대적인 무기입니다. 독가스는 공기와의 근본적인 양면성, 즉 공기가 생명을 주고 동시에 유독할 수 있다는 점을 구현합니다. 이는 물리적 피해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공포, 광기)을 유발하며, 희생자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사용자의 도덕성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매개체로서의 가스**: 가스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일종의 **소통 방식**입니다. 창이나 미사일처럼 명확한 '칼날'이나 '전선'이 없어 확산되고 침투하며, "공기처럼 구름처럼" 적과 싸우게 만듭니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가스를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중개자(intermediary)'가 아닌, 새로운 환경을 생성하는 '매개자(mediator)'로 묘사합니다. 방독면은 전쟁의 "전선"이 더 이상 명확하지 않게 된 현실을 상징합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가스가 '인도적인' 사형 방법으로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의 가스 사용(유대인 학살)은 가스가 생물학적 해충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방식과 연결되며, 희생자를 "비인간적인 존재"로 낙인찍는 잔혹한 논리를 보여줍니다. #### Slum of Fire (불의 슬럼) 이 섹션은 제2차 세계대전의 공중 폭격이 공기의 개념과 인간의 경험에 미친 영향을 다룹니다: **공중 폭격의 현실**: 공중 폭격은 공중과 지상의 위치와 조건을 뒤바꾸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시인들은 여전히 비행과 공중의 광활함을 통해 지상의 오염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현실은 민간인 폭격으로 인한 지상의 지옥이었습니다. 함부르크, 쾰른, 드레스덴 등의 도시 폭격은 "이전에 묘사되지 않은 새로운 표면의 기상학"을 만들어냈습니다. 불폭풍은 산소를 격렬하게 빨아들여 공기가 허리케인처럼 움직이고 질식하게 만들었습니다. H.D.와 T.S. 엘리엇(T.S. Eliot)의 시는 공중 폭격으로 인해 공기가 무거운 안개로 변하고 땅이 공기처럼 불안정해지는 경험을 묘사합니다. 엘리엇은 이를 "공기의 죽음(death of air)"으로 표현합니다. T. S. 엘리엇(T. S. Eliot)은 1942년 「리틀 기딩(Little Gidding)」에서 공습의 경험을 소환하며, 공기의 질식감을 강조한다. 이 구절은 마치 2001년 세계무역센터 붕괴를 목격한 이들이 느낀 **질식할 듯한 악취**, 즉 단단한 구조물이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도 숨을 막히게 하는 **냄새로 환원된** 그 공포와 구토감까지도 예감하는 듯한 묘사다: > “공중에 떠 있는 먼지는 > 이야기가 끝난 장소를 표시한다. > 들이마신 먼지는 곧 집이었다 — > 벽, 벽판, 그리고 그 속의 쥐. > 희망의 죽음과 절망의 죽음, > 이것은 공기의 죽음이다.”^[T. S. Eliot, The Complete Poems and Plays of T. S. Eliot (London, 1969), p. 192.] **포화된 공기**: 공기는 더 이상 무한하고 순수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통신, 신호, 잔해로 가득 차 포화된 공간이 되었습니다. 폴 첼란(Paul Celan)의 시 "죽음의 푸가(Todesfuge)"는 "공중의 무덤"이라는 개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공중의 무덤을 삽질한다"는 구절은 유대인들이 연기로 사라지는 비극적인 현실을 암시하며, 자유롭게 흩어지는 것이 가장 유독한 선물이 되는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마틴 에이미스(Martin Amis)는 폭발이 "혼란스러운 공기를 빨아들이고" 연기를 다시 살로 굽는 연금술을 상상하며, "공기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항하는 전쟁을 묘사합니다. #### Exhaust (배기) 이 섹션은 폐기물, 오염, 그리고 공기가 더 이상 무한한 '쓰레기통'이 아닌, 유한하고 위협적인 공간이 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폐기물과 죽음**: "공중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오물로 변한다"는 연상을 불러일으키며, 이는 폐기물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명상과 연결됩니다. 현대 공기의 오염을 묘사하는 "오염(pollution)"이라는 단어는 폴리네이케스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고대 단어입니다. **공기의 유한성 인식**: 공기는 오랫동안 무한하고 소진되지 않는 "선물(gratuity)"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폐기물을 영구히 시야에서 제거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치명적으로 얽히면서, 공기는 "밀도 높고 시끄러운 공간", 오염되고 교란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루스 이리가레(Luce Irigaray)는 공기의 무한하고 끝없이 열린 성격을 강조하지만, 이는 인간이 폐기물을 공기 중에 무한히 버릴 수 있다는 환상과 연결되어 비판받습니다. 점차 공기는 "희박한 공기"가 되어, 더 이상 무한한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우리가 피할 수 없이 존재하는 "불확실성 그 자체"를 나타내게 됩니다. **'배기(Exhaust)'의 의미 변화**: 'exhaust'는 원래 '고갈시키다', '뽑아내다'라는 의미였으나, 19세기 말부터는 '배출물'이나 '배기가스'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공기 자체가 '고갈되는' 상태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로버트 바(Robert Barr)의 소설 '런던의 운명(The Doom of London)'과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독의 벨트(The Poison Belt)'는 치명적인 안개나 우주 독가스가 공기를 오염시켜 인류를 위협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사라진 공기의 마법**: 이전 시대에는 기적, 환상, 계시의 장소였던 공기가 이제는 "박탈되고(disenchanted)" "식민화"되었습니다. 공기는 더 이상 '초월'이 아닌 '사이'를 의미하게 되었고, 인간의 통신과 파편으로 포화되었습니다. 풀먼은 하늘이 "아빠로 가득 찼다"고 환호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공기의 활력을 불어넣는 공허함을 "고갈"시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공기를 점령했지만, 그것에 완전히 적응하거나 거주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기의 죽음(mortification of the air)"** 을 구성합니다. > “The air, the (un)place of miracle, vision, epiphany, apocalypse and apotheosis for previous epochs, has been disenchanted in our epoch of air. Air has largely lost its qualities, its values and powers, has become ‘thin air’ – uniform, abstract, horizontal, indifferent, insipid, qualityless. Air is the in-between, the milieu or mid-place, space, the media age’s universal medium. Air is no longer the beyond, but the between. It has also been colonized. The reduction of air to the condition of space, medium or interval – to airtime – has been produced by, and itself produces, a saturation of the air by the human. The air, which had always before represented the enclosing openness that gave us our location, the space that subtended our place, has become inundated with our traffic, our signals, our detritus. As Vladimir proclaims in Waiting for Godot, ‘the air is full of our cries’.101 Philip Pullman exulted to see the sky ‘full of dad’; but the air has been exhausted of its invigorating vacuity by being filled with us. Without ever being able to habituate ourselves to the air, or fully to inhabit it, we have nevertheless brought the air under occupation. The air has been finitized, unothered. But it is precisely this that constitutes the menace, the mortification of the air.” (Connor, 2010, p. 281) > > 공기—기적, 환시, 계시, 묵시, 신격화의 (비)장소였던 공기—는 이제 우리 시대의 공기 속에서 마력을 잃었다. 공기는 그 고유한 성질과 가치, 힘을 대부분 상실했고, ‘희박한 공기’가 되었다 — 균일하고, 추상적이며, 수평적이고, 무관심하고, 싱겁고, 성질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공기는 사이, 중간지대, 공간이며, 미디어 시대의 보편적인 매개물이다. 공기는 더 이상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사이’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공기는 식민화되었다. 공기를 단지 공간, 매개물, 간격—즉, 방송 시간(airtime)의 상태로 환원시키는 과정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동시에 그것은 인간으로 공기를 포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전까지 공기는 항상 우리가 위치를 부여받는 포괄적 개방성을 상징해왔고, 우리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받쳐주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공기는 우리의 교통, 신호, 잔해로 넘쳐흐른다. 『고도를 기다리며』 에서 블라디미르가 외치듯, “공기엔 우리의 울부짖음이 가득해.” 필립 풀먼은 하늘이 “아빠로 가득 찼다”며 기뻐했지만, 그 공기는 우리로 채워짐으로써 생기를 주는 비어 있음으로서의 힘을 소진해버렸다. 우리는 결코 공기에 익숙해지거나, 완전히 그것을 거주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를 점유해버렸다. 공기는 유한화되었고, 타자성을 잃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야말로 공기의 위협, 공기의 수난(mortification)을 구성하는 것이다. ### 9장 Air's Exaltation (공기의 승화) **3부: 절대적인 가벼움 (Absolute Levity)** 의 첫 번째 챕터입니다. 이 챕터는 주로 공기와 인간의 관계에서 **폭발**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상상되고 변화해왔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책은 공기를 통한 정신 활동의 상상과 그 역설적인 발현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이끌어온 the material imagination이라는 개념은, 인간은 세상을 자기 자신을 위해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세상이라 여긴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물론 이 세계, 곧 물질과 과정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단순히 인간이 흡수할 수 있는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상상되어야 하며, 물질적인 방식으로 상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과 세계를 상상하는 모든 방식에는 물질적 유추가 개입하기 때문이다(예컨대 ‘동화’라는 개념처럼). 나는 이 책에서, ==정신의 작용들과 그 작용들을 상상하는 방식 사이에는, 그리고 그것들과 공기에 대한 상상 사이에는 특별히 강한 친화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직감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 적어도 상상이라는 행위가 전통적으로 매우 공기와 같은 것으로 여겨져 왔다는 점만으로도 말이다. > “But the air is not all arias, auras and aromas. Our long and compound dream of air also includes danger, death, decision and unpredictability.” (Connor, 2010, p. 285)” (Connor, 2010, p. 285) **폭발의 본질과 역사적 배경** 그러나 폭발의 흔적은 그 갑작스럽고 파국적인 외부화를 통해 드러난다. 그것은 순전한 충동이 격렬하게 열린 공간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사무엘 스터미는 『선원의 잡지』(1669)에서 화약이 발사체를 추진하는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발사는 공기(air)의 고양 또는 소금피터(saltpeter)로 인해 발생한 바람(wind)에 의해 앞으로 밀려 나간다.” ‘Exaltation’은 원래 ‘들어 올림’을 뜻하지만, 여기서 스터미는 이 단어 속에 ‘ex-saltation’—곧 ‘튀어오름’이라는 의미 또한 들려주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있어, 대부분의 무기—그리고 사고들—이 단순히 신체를 훼손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증기처럼 증발시킬 수 있는 시대에, 폭발은 단지 무언가를 공기 중으로 날려버리는 힘일 뿐 아니라, 그것을 ‘희박한 공기(thin air)’의 상태로 변형시키는 힘, 다시 말해 공기의 상태로 격렬하게 동화시키는 힘을 상징하게 되었다. 폭발은 공기의 격렬한 발작으로 묘사되며, 이는 순수한 충동을 열린 공간으로 맹렬하게 내던지는 행위입니다. **화약의 기원**: 화약은 9세기경 중국 연금술사들이 발견했으며, 원래는 군사적 목적보다는 **불꽃놀이와 같은 축제 목적**으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화약은 초석(질산칼륨), 황, 숯으로 구성되며, 연소 시 많은 양의 뜨거운 가스를 빠르게 발생시켜 폭발력을 만듭니다. 식물의 씨앗이 터져나가는 **개열(dehiscence)** 현상이 폭발과 생식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은유로 제시됩니다. 이는 급진적이고 재생적인 풍요로움을 의미합니다. **수류탄(grenade)** 이라는 단어는 **석류(pomegranate)** 에서 유래했는데, 석류의 풍부한 씨앗과 수류탄의 파괴력이 연결됩니다. **'폭발하다(explode)'의 의미 변화**: 17세기에는 주로 의견을 논박하거나 배제하는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폭발의 실제 경험이 반영되면서 문자적인 의미로 변화했습니다. 또한 폭발은 시신이나 흔적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궁극적인 형태로 상상됩니다. 이는 존재의 시간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 “Although the airy associations of explosions, through expressions like ‘blowing up’, ‘blowing away’ and ‘blowing out’, are clear enough in the early explosive era, the words ‘explode’ and ‘exploding’ are used almost entirely in metaphorical senses throughout the seventeenth century, to mean refuting or discrediting of opinion.” (Connor, 2010, p. 290) **몸속의 폭발: 경련성 병리학 (Spasmodick Pathologie)**: 인간의 몸은 폭발의 대상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폭발의 원천이자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토머스 윌리스(Thomas Willis)는 근육 활동을 화약 폭발과 유사하게 설명하며, '정신적인 염-황 입자(Spirituous Saline particles)'와 '초석-유황 입자(nitrous-sulphureous particles)'가 결합하여 폭발을 일으킨다고 보았습니다. **염초(Saltpetre)의 역할**: 화약의 주요 성분인 초석은 공기 중과 인체 내에 존재하는 활력소로 여겨졌습니다. 염초는 천식과 협심증 치료에도 사용되었으며, 그 수요 증가는 심지어 인간의 소변과 분변에서 질산염을 추출하는 방법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자연발화**: 인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가스의 발화로 인한 자연발화 이야기도 폭발적 상상력의 일부였으나, 대부분의 이야기는 느린 연소로 묘사되었습니다. 찰스 브록든 브라운(Charles Brockden Brown)의 _Wieland_ 는 예외적으로 실제 폭발을 묘사했습니다. #### 10분의 1초 (The Tenth of a Second) **신형 폭발물**: 1847년 발견된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e)과 같은 신형 폭발물은 산업(광업, 도로 및 철도 건설)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폭발이 민간인의 삶에서도 흔한 현상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다이너마이트의 시대를 다룬 작품들 가운데 진정으로 ‘폭발적’인 소설은 조지프 콘래드의 『비밀요원(The Secret Agent)』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은 그 형식 자체가 폭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기이하고 참혹한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주인공 버락 씨(Mr. Verloc)가 폭탄을 설치하도록 이용한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 스티비(Stevie)가, 그린위치 천문대 근처에서 폭탄을 운반하던 중 실수로 스스로 폭사하고 마는 사건이다. 이 폭발은 소설의 중심이자 핵심인데, 흥미롭게도 실제로 그 폭발 장면은 묘사되거나 보여지지 않는다.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의 소설 비밀 요원(*The Secret Agent*)은 '폭발된 세상'을 바로 묘사하며, 사물이 합쳐지거나 분리되는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다룹니다. 콘래드는 런던을 "기름진 진흙과 축축한 회반죽의 거대한 무한대"로 묘사하며, 원자화된 물질의 응집으로 인한 억압적인 분위기를 나타냅니다. 이 소설은 때때로 『블리크 하우스』의 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즉, 혼탁하고 얽혀 있는 현실을 폭발이라는 형태의 해방을 통해 정화할 필요가 있는 세계다. 물질 세계는 방해가 되는 관성으로 가득하다. ‘후텁지근한 정적 muggy stillness’(『비밀요원』, 138), 움직임과 구분의 출현을 막는 무게와 덩어리감이 곳곳에 존재한다. 예컨대 경찰 부국장이 바라보는 버락의 거리 묘사에서 그러한 물질적 중압감은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 “the van and horses, merged into one mass, seemed something alive a square-backed black monster blocking half the street, with sudden iron-shod stampings, fierce jingles, and heavy, blowing sighs. The harshly festive, ill-omened glare of a large and prosperous publichouse faced the other end of Brett Street across a wide road. This barrier of blazing lights, opposing the shadows gathered about the humble abode of Mr Verloc’s domestic happiness, seemed to drive the obscurity of the street back upon itself, make it more sullen, brooding, and sinister. (Secret Agent, 127)” (Connor, 2010, p. 303) > > “수레와 말이 한 덩어리로 뒤엉켜 살아 있는 무언가처럼 보였고, 그 네모난 등은 거리의 절반을 막아서는 검은 괴물처럼 느껴졌다. 쇠로 덧댄 말굽이 갑자기 바닥을 내리치고, 요란한 방울 소리가 울리고, 거칠고 무거운 숨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거리 맞은편, 브렛가 끝에는 크고 번창한 술집의 요란한 조명이 뿜어내는 불길하고 축제적인 빛이 버락 씨의 소박한 가정의 행복이 자리한 어두운 공간을 맞은편에서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이 빛의 장벽은 거리의 어둠을 그 자체로 되돌려 보내는 것처럼, 그 어둠을 더욱 음울하고, 우울하고, 불길하게 만들었다.” (『비밀요원』, 127)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10분의 1초의 다이너마이트'**: 이것은 발터 벤야민이 폭발적 감수성에 대해 보여준 열광적인 환대와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 “Our taverns and our metropolitan streets, our offices and furnished rooms, our railroad stations and our factories appeared to have us locked up hopelessly. Then came the film and burst this prisonworld asunder by the dynamite of the tenth of a second, so that now, in the midst of its far-flung ruins and debris, we calmly and adventurously go traveling.” (Connor, 2010, p. 304)“ > > 우리의 선술집과 대도시의 거리들, 사무실과 가구가 갖춰진 방들, 기차역과 공장들은 우리를 절망적으로 가두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다 영화가 나타나, 1/10초의 다이너마이트로 이 감옥 같은 세계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이제 우리는 그 폐허와 파편 속 한가운데에서, 차분하면서도 모험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benjamin_illuminations_1986, 236](52) 그는 영화가 클로즈업이나 슬로모션과 같은 기술을 통해 이전에 보이지 않던 세부 사항들을 드러내며 "감옥 같은 세계를 산산조각 낸다"고 설명합니다. 그에게 이 기법들은 이전까지 인간의 시야로는 포착되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만든다. 해부학이나 건축학에서 말하는 ‘익스플로디드 뷰(exploded view)’는 구조물의 여러 층위가 서로 분리되고 거리감을 두어 배열되어, 각각을 독립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만든다. 이때의 폭발은 탈맥락화(disembedding), 탈복잡화(disintrication), 펼쳐짐(unfolding)을 의미한다. 폭발과 다양한 신체나 과정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일 사이에는 강한 연관이 존재한다. 폭발은 평소에는 너무 감춰져 있거나 지나치게 압축되어 있어 볼 수 없는 과정들에 대해, 시선이 접근하고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한두 명의 저자들이 벤야민이 언급한 ‘공간의 폭발(explosion of space)’ 개념에 주목한 바 있지만, 그의 인상적인 은유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남아 있다. 그러나 사실 폭발과 영화의 '광학적 무의식(optical unconscious)' 사이에는 단순한 은유 이상의 관계가 존재한다. **현대 예술과 기술 속의 폭발**: 영화에 대한 하나의 유형학은 접촉이나 촉감의 스펙트럼을 따라 구상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한쪽 끝에는 키스가 있을 것이고, 그 선은 뺨을 때리는 일이나 주먹질을 지나 폭발에까지 이를 것이다. 폭발은 인터넷에 의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유튜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검색 카테고리 중 하나가 바로 ‘폭발’이다. 사용자들은 열광적으로 네바다 사막에서 터지는 화염구, 폭죽 공장의 폭발, 그리고 온갖 종류의 수제 폭발 장치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내려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가들은 폭발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과제에 매료되었다. 영화는, 어쩌면 폭발을 ‘보이게 하고, 읽히게 하며, 반복 가능하게 하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되돌릴 수 있게 하려는’ 은밀한 소명을 지닌 듯한 예술이었다. 폭발은 현대 예술에서 변형과 분해의 매혹적인 주제이자 아날로그가 됩니다. 영화 속 폭발은 단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진입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문자 그대로 그러한데, 초기 셀룰로이드 필름 자체가 화학적으로 매우 불안정하여 자연 발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발은 결코 순수한 개시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폭발은 항상 균형의 복구, 즉 에너지 부채의 청산, 억눌린 압력이 갑작스럽게 방출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폭발은 결국 모든 것이 와해되고 일관성을 잃고 구별되지 않은 파편 상태로 회귀하려는 경향의 국지적 가속이며, 그 와중에도 그 자체가 확산과는 정반대인 집중의 형태, 힘과 시간의 밀집된 증가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폭발은 확산의 한 지점(punctual moment)이다. **9/11 테러**: 세계 무역 센터 빌딩 붕괴는 건물이 공기에 의해 "패배"하고 먼지와 연기 구름으로 변하는 "공중에서의 폭발"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폭발적 감수성 속에 살고 있다. 즉, 파국의 리듬에 친숙해져 있다. 자연의 경련적 병리학은 문화 속으로 이식되었고, 문화는 자신의 경련적 리듬—호황과 불황, 각종 폭발적 팽창(인구 폭발, 정보 폭발, 규제 해체의 ‘빅뱅’ 등)—을 따르게 되었다. > 하지만 이 리듬들은 분석되고, 조율되고, 조정되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내연기관이다. 내연기관은 여러 번의 폭발을 부드럽고 순한 진동으로 조율함으로써, 파국을 유용한 에너지로 전환시키고, 충격을 회전으로 바꾼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1/10초의 다이너마이트가 만들어낸 전반적 효과에 중독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폭로(explosure)’—모든 것이 보이고, 소통되고, 분석 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우리의 세계는 산산조각 난 것이 아니라, 테라바이트 단위로 폭파된 것이다. “But these rhythms have been analysed, channelled and coordinated, in a process typified by the internal combustion engine, which smoothes and tunes multiple explosions into a docile hum, turning catastrophe to use, rotating impact into trajectory.” (Connor, 2010, p. 308) 그러나 건물이 폭발할 때, 그것은 땅에 의해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에 의해 패배하는 것이다. 한순간에 먼지와 연기로 변한 건물은, 그 안의 내면 공간이 스스로를 삼켜버린 탁한 팽창력에 의해 흡수당한다. 그 전에는 선과 형태가 이어졌던 자리에는 이제 오직 미세한 파편만이 남는다. 건물이 산산조각 날 때, 벽과 그 안에 갇혀 있던 공기는 서로 충돌하고 붕괴되며, 먼지로 가득한 공기, 공기로 채워진 먼지를 만들어낸다. 굴뚝을 폭파하는 장면에서도 이런 효과가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은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의 두 타워 붕괴에서 훨씬 더 극적으로 전시되었다. 이는 드레스덴 폭격, 히로시마 원폭과 같은 이전의 "기화" 현상과 연결됩니다. 이 사건은 물질 세계의 기초가 사라지고, 공중 공간이 인간의 비극적인 행동으로 가득 채워지는 현대적 조건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9/11 테러의 모든 요소는 이처럼 지면의 해체 혹은 초월이라는 이상한 해체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건물은 항공기의 공격을 받았고, 그 항공기는 그 표적을 다시 공기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듯했다. 죽은 이들 가운데 다수는, 붕괴하는 타워 안에서 타오르는 공기를 들이마시며 죽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뛰어내리기를 선택했다. 요약하자면, 9장 "Air's Exaltation"은 폭발이라는 현상을 통해 공기가 단순한 매질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 신체적 경험, 기술 발전, 사회적 변화, 그리고 존재론적 상태에 깊이 얽혀 있는 '승화된' 또는 '숭고한' 물질로서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를 다룹니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빅뱅 이론은, 폭발이 단지 해체가 아니라 바로 그 복잡성과 형식 자체라는 이미지를 가장 포괄적으로 뒷받침해준다. 최근의 은하 측정 결과는, 가장 먼 은하들이 단지 멀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가속해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더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빨리 달아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그것이 19세기 동안 우세했던 ‘성운 응결 이론(coagulating nebulae)’과는 정반대라는 사실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빅뱅의 낙진이나 잔여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 한가운데에 있다. 우리는 그것의 펼쳐짐, 그 발작적인 형식에 의해 사로잡힌 존재다" (310). ### 10장 'The Fizziness Business'의 주요 내용입니다. 가벼움을 소비하는 즐거움과 거품의 오랜 꿈, 그리고 팝 문화 시대에 새롭게 부각된 '존재의 견딜 만한 가벼움'이라는 이상을 탐구. 인간이 어떻게 공기를 자신의 몸과 생각, 그리고 문화적 경험과 통합시키려 노력해왔는지를 '가벼움'이라는 관념을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 달콤한 공기 한 모금 (A Mouthful of Sweet Air) 이 장은 햄릿의 대사 "나는 공기를 먹는다 / 약속으로 가득 찬 ‘I eat the air / Promise-crammed’"을 인용하며 시작됩니다. 이는 카멜레온이 공기로부터 영양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과 연결되며, 존재의 가벼움을 소비하고 공허함으로 자신을 채우려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밀턴의 『실락원』에서 라파엘 천사가 육체적 영양분이 결국 정신으로 승화하여 비행할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을 통해, 음식을 통해 '날개 달린 물질'을 섭취하려는 야망이 제시됩니다. "지난 20년 동안, 무겁고 ‘배부른’ 음식들을 가볍게 보이도록 표현하려는 욕망은 사탕, 케이크, 푸딩 등의 디자인과 마케팅에서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음식이 실질적이면서도 동시에 가볍기를 바라는 욕망은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다." (312). 음식이 가벼워야 한다는 욕망은 오래된 역사적 배경을 가지며, 섬세함(delicacy)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계적(거품 내기) 또는 화학적(탄산화) 방식으로 공기가 음식에 주입되는 방식을 탐구합니다. “But delicacy is a matter not just of taste, but of consistency, not just of refinement, but of weight, or rather, lightness.” (Connor, 2010, p. 312) 하지만 가장 마법 같은 음식은 발효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언급됩니다. #### 효모 (Leaven) 발효는 물질 내부의 에너지가 넘쳐흐르거나 번식하는 과정으로, 물질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발효는 변형(transmutation)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기독교에서 빵과 포도주, 그리고 미드나 만나와 같은 다른 종교의 발효 음료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핀란드 칼레발라의 맥주 양조 신화도 벌이 꿀을 가져와 발효를 돕는 이야기로 이와 연결됩니다. 발효의 양면성(부패와 변형)이 강조되는데, 이는 효모(leaven)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핀란드의 대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에서 맥주의 원초적 양조에 관한 이야기에서 벌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제20편에서는, 웅장한 결혼식을 위해 맥주를 준비하는 임무를 맡은 여성 오스모타르(Osmotar)가 홉, 보리, 물을 섞어 보지만 발효시키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호소를 한다. 이는 존 마틴 크로퍼드(John Martin Crawford)가 『하이아와타(Hiawatha)』의 리듬으로 번역한 것이다: > What will bring the effervescence, > Who will add the needed factor, > That the beer may foam and sparkle, > May ferment and be delightful?^[The Kalevala: The Epic Poem of Finland, trans. John Martin Crawford, 2 vols (New York, 1888), vol. i, p. 305.]” (Connor, 2010, p. 316) > 무엇이 거품을 일으켜줄까, > 무엇이 필요한 요소를 더해줄까, > 맥주가 거품을 일고 반짝이며 > 발효되어 기쁨을 줄 수 있으려면? (7) 발효의 과정은 매우 양가적이다. 많은 문화에서 발효는 부패와 변화라는 대립되는 개념을 동시에 아우른다. 발효되는 우유, 과일, 설탕은 썩음(rot)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치즈, 와인, 맥주와 같은 귀중한 새로운 산물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양가성은 기독교가 ‘누룩(yeast)’에 대해 갖는 태도에 응축되어 있다. 대체로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누룩에 대한 의심, 특히 빵에 첨가된 누룩에 대한 금기를 계승한다. 장 솔레(Jean Soler)가 지적했듯이, 누룩은 그것이 첨가되는 물질의 본성을 변화시키며, 그러므로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누룩은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띠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 13장 20–21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가복음의 비유처럼 '은혜의 정신 활동'이나 '신앙의 고양'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발효는 변화(transmutation)의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점은 기독교에서 빵과 포도주가 차지하는 중심적인 의미를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리그베다』 제9권의 소마(soma)와 같이 다른 종교들에서 발효 음식과 음료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문화에서 최초의 발효 알코올 음료는 벌꿀을 물에 섞고 며칠 동안 발효시켜 만든 ‘미드(mead)’였을 가능성이 높다. 벌꿀 자체도 일종의 ‘공기성’을 지닌다. 벌꿀을 만드는 벌들은 오랫동안 ‘자연 발생’(예컨대 소의 피에서)으로 생겨난다고 믿어졌는데, 이는 발효 과정과 일종의 평행 구조를 이룬다. 『사무엘상』 14장에는 전투로 지치고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이 기적처럼 땅에 흘러내리는 꿀을 발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땅의 모든 백성이 수풀에 이르렀고, 수풀에 꿀이 있더라. 백성이 수풀에 들어갔더니, 꿀이 떨어지는지라” (사무엘상 14:25–26). 이 장면은 벌꿀을,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방랑하던 40년 동안 먹은 만나(manna)와 연결짓는 듯하다. > “아침에 이슬이 진 바깥에 내려 있었고, 이슬이 걷힌 뒤에는 광야의 지면 위에 서리같이 가는 둥근 것이 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으니, 그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음이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16:13–15) 알프레드 오스틴(Alfred Austin) 또한 누룩의 비유를 종교적 신앙의 고양 효과를 설명하는 데 활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Man needs some leaven for his daily life, > That else were sad to heaviness, some barm > By whose fermenting may his fancy rise > Beyond the level of confining fact; > And for the lightening of simple souls > There’s no such yeast as faith. > 사람은 일상의 삶을 위해 > 어떤 누룩을 필요로 한다, > 그렇지 않다면 삶은 무겁고 슬플 것이다. > 그의 상상력을 현실의 벽 너머로 > 끌어올릴 수 있는 발효제— > 순수한 영혼을 가볍게 하는 데에는 > 신앙만한 누룩이 없다.^[Alfred Austin, Prince Lucifer (New York, 1887), p. 118.] 좀 더 놀라운 해석은 1855년 앨프리드 제너(Alfred Jenour)가 「누룩의 비유에 대한 해석(The Parable of the Leaven Explained)」이라는 글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는 이 비유를 기독교가 세계에 전파된다는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누룩이 ‘부패와 타락으로 이끄는 물질’이라고 주장하며 반박한다. 제너는 이렇게 주장한다: > “이 단어는 언제나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부패한 원칙을 나타내며, 자신이 영향을 미치는 대상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키는 힘을 갖는다.”^[Jenour, The Parable of the Leaven Explained and Applied, pp. 5–6.] 연금술 전통에서 발효는 물질이 변화하는 모든 활발한 화학 반응을 지칭하며, 물질이 더 미묘하거나 공기 같은 상태로 정제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발효의 시각적, 청각적 효과(따뜻해지고, 쉬쉬 소리를 내고, 거품이 일고, 부피가 늘어나는 것)는 내부 원리의 생산을 암시했습니다. 발효는 본래 끓거나 지글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격렬한 화학 반응 전반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ferment는 라틴어 _fevere_, 즉 ‘끓다’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발효는 물질적인 사물들이 변형을 겪는 과정을 통칭하는 이름이었다. 1715년에 익명으로 출간된 『자연의 주요 현상들에 대한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Enquiry Into Some of the Most Considerable Phenomena’s of Nature)』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 Fermentation, is that Operation of Nature, which takes place in all natural Productions, in Nutrition, Multiplication, Translation and Reduction of Every Species, and likewise, to improve, and heighten their proper Qualities, and multiply their respective Virtues. This is perform’d by the vital Spirit of the Universe (diffus’d through every Part and Member of the same) by means of an innate Ferment that is proper to every differing Member, of every differing Species, which God in his Projection and Creation of the Deep placed in the very Foundation of every seminal Virtue. > > “발효는 자연의 작용으로, 모든 자연 생성물 속에서—영양, 증식, 전이, 환원, 그리고 각각의 본래적 성질을 향상시키고 고양시키며 그 미덕을 배가시키는—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생명적 정기가 각 부분과 구성원 안에 스며들어 작용한 결과이며, 이는 서로 다른 종의 각각의 구성원이 지닌 고유의 내재적 발효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신은 세계를 구상하고 창조할 때 모든 씨앗의 미덕 안에 이것을 심어놓았다.”^[Anon., Philosophical Enquiry Into Some of the Most Considerable Phenomena’s of Nature . . . The Whole Conformable to the Doctrine of Fermentation (London, 1715), pp. 141–2.] • **혼합 (Concoction)** > “It was well known that fermentation of bread or alcoholic drinks could be retarded by keeping them out of the air. Exposed to the air, by contrast, the decomposing matter was quickened by invisible agencies, which were sometimes thought of as airborne ferments (insofar as this doctrine anticipates the discovery of the microscopic spores responsible for fermentation, it is prescient).” (Connor, 2010, p. 319) 공기가 난자를 수정시키는 "공기 같은 임신" 개념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액에 생명의 열과 형태를 부여하는 "프네우마(pneuma)"가 주입된다고 본 것처럼, 생식과 공기의 관련성에 대한 오랜 믿음이 제시됩니다. 소화는 연금술의 변화 개념과 유사하게 '일련의 가열 또는 요리' 과정으로 이해되었으며, 음식을 더 순수하고 공기 같은 구성 요소로 정제하는 과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육체적 노력에 대한 연료 공급이 아닌, 물질의 희석에 초점을 맞춥니다. “It is the notion of cooking that brings together these material processes in the world and the human body.” (Connor, 2010, p. 320) 건강에 좋은 음식은 무거운 물질을 에테르적(공기 같은) 물질로 변환하고 끈적임이나 막힘을 방지하는 음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좋은 공기'는 정신 활동으로 정제되는 공기를 의미하며, '나쁜 공기'(가령 방귀)는 막힘과 연관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향기는 식이 요법에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장미, 사향, 큐베브(후추과 향신료), 캐모마일의 향은 머리를 맑게 해준다고 여겨졌고, 세이지, 겨자, 후추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들은 밤공기가 차고 습하며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하여 창문을 닫고 자는 것을 권장했다. 『영국인의 의사(The Englishmans Docter, 1607)』에서는 ‘혼란스러운 두뇌(Mazed Braines)’가 “뒤쪽에 통풍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30) 악몽이나 광기는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음식에서 올라오는 부패한 기운이나, 동물령(animal spirits)으로 정제되지 못하고 과도하게 가열되어 검게 탄 ‘황담(choler)’의 증기로 인한 결과로 여겨졌다. 발효가 광기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졌다는 점은, ‘barmy’라는 단어에서도 드러난다. 이 단어는 맥주나 발효액 위에 생기는 거품을 의미하는 ‘barm’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신 나간’이라는 뜻을 지닌다. 앤드루 보어드(Andrew Boorde)의 영향력 있는 저작 『건강의 개요(Breviary of Health)』에서는 ‘뇌의 팽창(inflation of the brain)’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한다: > “그 원인은 피부의 모공이 정상 경로를 벗어나 열릴 때, 미세한 바람(subtyll wynde)이 내부로 유입되어 팽창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혹은 모공이 열릴 때 뇌에서 내려오는 한기가 뇌의 뇌실(ventricles)로 되튀어 다시 팽창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증상(peryculus passion)이며, 생명의 위협(ieopardy of death)을 초래한다.” (31) 이처럼 부패하고 전염성 있는 공기는 널리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반대로 향기로운 냄새와 좋은 공기는 적극적으로 추구되고 보호되었다. 남풍은 건강에 해로운 것으로, 북풍과 동풍은 가장 온화한 것으로 여겨졌다. 흐리거나 바람이 부는 날 외출하지 말라는 권고도 있었다. 흐린 날에는 공기가 지나치게 정체되고, 바람 부는 날에는 공기가 지나치게 동요되기 때문이다.^[Huggett, Mirror of Health, p. 51.] **덩어리 (Mass)** 빵, 케이크와 같은 구운 음식은 공기와 가벼움의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대지와 공기의 혼합물'인 환상적인 몸을 형성합니다. 빵은 일상 음식에서 신성한 음식(성찬례의 변화된 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인간의 육체와 유사하게 의인화되었습니다. “The distinction between sacred and profane bread is reduplicated within the category of the profane itself, in the distinction between the coarser wholemeal, brown or black breads, and the refined white breads that grew increasingly popular from the late medieval period onwards.” (Connor, 2010, p. 324). 정제된 흰 빵은 가벼움과 연관되었으며, 19세기에는 탄산염과 산성염을 사용하여 이산화탄소를 생성하는 '자가-팽창 밀가루'와 압력으로 이산화탄소를 주입하는 '탄산 빵'과 같은 **화학적 발효 방식**이 개발되었습니다. T. S. 엘리엇은 '에어레이티드 브레드 컴퍼니(Aerated Bread Company, ABCs)'라는 이름을 현대 삶의 '공허하고 세속적인 가벼움'을 풍자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강장제 (Tonic)** 18세기 말, 물에 거품을 주입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탄산수는 처음에는 약용으로 판매되었습니다. 슈웹스(Schweppes)는 1850년대에 키니네를 함유한 토닉 워터를 판매하며 '공기적 숭고함(pneumatic sublime)'과 **다양한 가스의 치유 및 활력 부여 능력**에 대한 믿음에 호소했습니다. 'exhilarate(활기 띠게 하다)'라는 단어는 '웃음 가스'의 명성으로 인해 호흡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습니다. 칸트의 맥주 거품에 대한 농담은 'fizz(거품)' 개념과 유머의 연결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철학은 웃음과 ‘탄산(fizz)’의 역사 사이에 보다 구체적인 연결고리를 제공해준다. 내가 알기로, 칸트(Kant)의 저작 전체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농담이 바로 그것이다. 그 농담은 다음과 같다: > [A]n Indian at an Englishman’s table in Surat, saw a bottle of ale opened, and all the beer turned into froth and flowing out. The repeated exclamations of the Indian showed his great astonishment. 'Well, what is so wonderful in that?’ asked the Englishman. ‘Oh, I’m not surprised myself,’ said the Indian, ‘at its getting out, but at how you ever managed to get it all in.’^[Immanuel Kant, The Critique of Judgement, trans. James Creed Meredith (Oxford, 1957), pp. 199–200.] > > “수랏(Surat)에서 한 인디언이 영국인의 식탁에 초대되어 맥주병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병이 열리자 맥주는 모두 거품으로 변해 흘러넘쳤고, 인디언은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영국인이 물었다. ‘아니, 그게 뭐가 그리 신기하오?’ 그러자 인디언이 대답했다. ‘나도 맥주가 흘러나오는 건 놀랍지 않소. 하지만 어떻게 그걸 다 병 안에 넣었는지가 놀라울 따름이오.’” (39) **팝 (Pop)** 아동 문학(로빈 킹스랜드의 『거품 사업』)은 가벼움에 의해 힘을 얻거나 위협받는 신체의 가능성에 대한 매혹을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는 무게의 반대가 아닌 '밀도의 감소'로서의 가벼움을 추구하며, 보디빌딩이나 에어로빅처럼 신체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가벼움'을 추구합니다. 다이어트 음식(예: 님블 빵)은 공기 함유량을 강조하여 체중 증가 없이 '가벼움'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제공합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세탁 세제 속 거품을 분석하며, **거품이 단순한 활력을 넘어 '사치'와 '마법'의 원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거품은 "작은 부피의 원인에서 거대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정신의 힘과 연결됩니다. 연금술의 '상승' 개념은 현대 광고에서는 '편안함과 안락함'의 이미지로 변모했으며, 발효는 화학적 또는 영적 변화를 감추는 역할을 합니다. 'pop'이라는 단어는 탄산음료의 이름에서 출발하여 팝 음악, 팝 아트와 같은 '대중적' 현상과 연결됩니다. **샴페인**은 현대 세계의 가벼움과 경박함에 대한 수용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 탄산은 '세속화된 공기적 행복'을 의미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가벼움'의 소비는 비만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가벼운 몸'을 이상화하면서도 실제로는 '욕망'에 탐닉하는 현대인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음식과 음료는 신체를 '세계와의 교류'의 장으로 만들며, 우리의 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꿈 작업'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탄산화된 몸'의 꿈은 몸이 비물질적이고 영적인 것을 내면화하는 방식입니다. **절대적인 가벼움 (Absolute Levity)** 18세기 화학자들은 연소 시 물질이 무게를 얻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절대적인 가벼움(absolute levity)'이라는 개념(음의 무게, 플로지스톤)을 사용했습니다. 이 개념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이상적인 가벼운 몸'이라는 세속적인 이상이 차지했습니다. 과거가 무게로부터의 탈출을 추구했다면, 우리는 오히려 가벼움으로부터의 구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의 가벼움은 '비만적 가벼움(obese levity)'이라는 모순을 낳으며, 몬티 파이튼의 크레오소트 씨 풍자처럼 가벼움이 우리를 압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부트스트래핑(bootstrapping)'이라는 개념은 '외부 입력 없이 형태가 나타나거나 스스로 변형될 가능성'을 의미하며, 현대의 자기-형성적 에너지와 가벼움의 추구를 나타냅니다. 과거의 비물질적 상상(실프, 렙톤 등)이 현실화된 현대 사회에서, 예술가들은 '영혼의 물질적 형태'를 탐구하는 새로운 소명을 가집니다. 이 챕터는 과거가 '무게로부터의 탈출'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가벼움으로부터의 면제'를 추구하는 역설적 상황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가벼움은 역설적으로 '너무 무거운 것(top-heavy)'이 되었고, 무게와 가벼움이 대립할 수 있는 척도를 잃었습니다. 영혼은 전통적으로 '친밀한 타자성'으로 여겨졌으나, 현대에는 인간이 '무정형, 비시간적, 무한정'하게 되어 스스로의 영혼과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기는 과거에는 '정신 활동의 마법적 욕망'을 상징했지만, 이제는 '생각의 유비쿼티(ubiquity)에 대한 공포'를 나타냅니다. 정신에 대한 탐구는 이제 우리가 '피할 수 없이 명백한 비존재(unbeing)'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 됩니다. 이 장은 공기, 가벼움, 소비, 그리고 인간의 존재론적 상태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며, 현대 사회에서 가벼움이 단순한 물리적 특성을 넘어 문화적, 심리적,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낭만주의와, 여전히 그것에 의해 널리 지탱되고 있는 사유의 형식들에 있어, 상상력의 번쩍이는 눈과 흩날리는 머리칼은 과학의 건조한 눈과 대립하면서도 치유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의 가장 비물질적인 상상들이 현실화된 세계 속에서, 그리고 쿼크와 렙톤이 실프(sylph)와 요정(sprites)을 대체하며 물리학이 진정한 ‘요정의 과학(faërie)’이 된 세계에서, 예술가, 작가, 그리고 다른 유형의 ‘비전가’들은 새로운 소명을 갖게 되었다. 마리나 워너(Marina Warner)가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에서 영혼의 물질적 형상들을 탐구하며 말했듯이, “물질적 의미에서, 영은 실제로 전달되고 있으며, 그 매체는 여기, 지금 존재한다. [@warner_phantasmagoria_2006, 381]" (334-5) > “I am not myself certain that the immaterialization of the world leaves the function of these traditions of figuring the immaterial unchanged, and so wonder whether Phantasmagoria might not rather help us see beyond, or look differently at its own conclusions. ‘[M]odernity did not by any means put an end to the quest for spirit’, Warner affirms at the beginning of her own expedition [@warner_phantasmagoria_2006, 10].” (Connor, 2010, p. 335) > > 나는 세계의 비물질화가 이러한 전통들이 감당하던 역할을 변화시키지 않았다고는 확신할 수 없으며, 오히려 『판타스마고리아』가 우리로 하여금 그 자신의 결론 너머를 보도록, 혹은 그것을 다르게 보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워너는 자신의 여정을 시작하며 이렇게 단언한다. “근대성은 영혼에 대한 탐구를 결코 끝내지 않았다.”(56)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근대성은 그 탐구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 “The soul used to be thought of as an intimate alterity inhabiting the self. Although one’s soul was one’s essential being, it tended, for just that reason, to be regarded as separate, withdrawn or inaccessible. The soul was in a sense the externalized form of one’s innerness, a kind of essence on elastic.” (Connor, 2010, p. 335) “For this reason, one’s soul was not one’s own; it was owed to God, or eternity, and at risk from Satanic predation. The soul is the name for the condition of not owning what you essentially are.” (Connor, 2010, p. 335) > > 영혼은 한때 자아 속에 거주하는 친밀한 타자성으로 여겨졌다. 영혼은 자신의 본질적 존재였지만, 바로 그 이유로 종종 분리되고 감춰지며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내면이 외부화된 형상이며, 마치 탄력 있는 끈에 매달린 본질과도 같았다. 이 때문에 영혼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신이나 영원의 소유였으며, 악마적 침탈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혼이란, 당신이 본질적으로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상태’의 이름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점점 더 자신이 지닌 ‘불확정성(indetermination)’ 자체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영혼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영혼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영혼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친밀하면서도 불가해한 어떤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영혼은 완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 되었고, 그 결과 우리 안으로 사라졌으며, 우리는 그 안으로 녹아들었다. 우리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초과(self-exceeding)’가 되어야 하며,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말한 ‘존재하다’(exist)라는 타동적 의미를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Jean-Paul Sartre, Being and Nothingness: An Essay on Phenomenological Ontology, trans. Hazel E. Barnes (London, 1984), p. 329.]" > “The fascination with the forms of the airy and the insubstantial that is evidenced in the conspicuous preoccupation with ethereal and nebular states and conditions smoke, fog, haze, cloud – in contemporary art^[Steven Connor, ‘Next to Nothing’, Tate Etc, 12 (2008), pp. 82–93.] may be regarded as a poignant attempt to reestablish the kind of distance from images of the extruded soul that would allow it to be thought, felt, seen and dreamed or something transcendent.” (Connor, 2010, p. 336) > 현대 예술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에테르적이거나 성운 같은 상태들—연기, 안개, 흐릿함, 구름—에 대한 집착은, 추출된 영혼의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다시 회복하려는 안타까운 시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 영혼을 다시금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꿈꾸고,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Related ```dataview LIST FROM [[@connor_matter_2010]] and -"Plans" and -"resour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