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illes Deleuze, Melissa McMuhan (1998) *The Brain Is the Screen: Interview with Gilles Deleuze on "The Time-Image"*. : . > [!INFO] > Type:: [[article]] > Title:: The Brain Is the Screen: Interview with Gilles Deleuze on "The Time-Image" > Author(s): [[Gilles Deleuze, Melissa McMuhan]] > Year:: 1998 > Tags:: > DOI:: > Citekey:: deleuze_brain_1998 > ZoteroURI:: [Open in Zotero: The Brain Is the Screen: Interview with Gilles Deleuze on "The Time-Image"](zotero://select/items/@deleuze_brain_1998) > ReviewedDate:: [[2024-04-05]] ## Citation ```latex [@deleuze_brain_1998] ``` ## Summary ## Annotation ### 시네마와 뇌 - [?] 가장 첫번째 질문은 어떻게 시네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어떻게 철학에 의미가 있는 domain으로 생각하게 되었는가? 전쟁전엔 애들을 시네마에 혼자보내놓는 경우가 많았음. 전쟁후에는 철학을 배우는 학생으로 "I liked authors who demanded that movement be introduced into thought, "true" movement ( they denounced the Hegelian dialectic as an abstract movement) (48)" 진짜 움직임과 변증법적 추상움직임 여기서 아마 추상 움직임은 [[Montage|몽타주]]를 사용한 움직임을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들뢰즈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Henri Bergson|베르그송]]도 영화에는 진짜 움직임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감독들이 진짜 움직임이란 개념을 시네마에서 말했기 떄문일 것이고 > 영화는 behavior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행동과 동시에) 영적인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의외의 능력, 즉 기괴한 무언가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영적 삶은 영화에서 항상 막다른 골목이었던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냉철한 결단, 절대적 결단(엔테테인먼트), 존재 선택의 영역입니다. > > “It's that something bizarre struck me in cinema: its unexpected ability to show not behavior but spiritual life (at the same time as aberrant behaviors). Spiritual life is not the dream or the fantasy, which have always been dead-ends for cinema, rather it's the domain of cold decision, of absolute determination (entetement), of a choiceof existence.” (48) →이 마지막 문장에서는 푸코가 좀 들린다 [[파레시아]] 또한 여기서 들뢰즈가 spiritual란 단어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시네마가 spiritual life를 (진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는 ability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보통 영적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분명 서양 철학사에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는 사고의 방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들뢰즈는 시네마가 spiritual life를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놀랐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철학과 시네마의 관계를 연구했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spiritual life는 이성적안 결정, 절대적인 결정, 존재 선택의 영역이다. 바로 여기서 시간과 연결되는 데 이는 말라부가 읽었던 헤겔이 modern nature of human subjectivity를 신성한 주관성에 따라 모델화한 것과 연결되는 것 처럼 보인다. ([Crockett, 2010, p. xii](zotero://select/library/items/RNS9P9RW)) 그렇기에 들뢰즈가 여기서 말하는 시네마가 spiritual life를 보이는데 숙련된 것은 시네마가 aesthetic existence의 선택을 함으로 해서 가능해 진다. 여기서 예시로 든것이 [[Carl Theodor Dreyer]], [[Josef von Sternberg]], [[Robert Bresson]], [[Roberto Rossellini]], [[Éric Rohmer]]. 이중에서 [[Éric Rohmer]]는 시네마를 "study of spheres of existence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aesthetic, ethical, religious existence"에 해당한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시네마가 movement만 이미지화한 것이 아니라 also puts it into the spirit (48) > ==영적인 삶은 정신의 움직임입니다. 철학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철학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합니다. (48)== “In short, cinema not only puts movement into the image, it also puts it into the spirit.” 이 문장에서 유추할때 사실 들뢰즈가 time-image라고 말했던 것은 오히려 spirit-image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저(미학적, 윤리적, 종교적인 것의)합은 뇌다. 뇌는 스크린이다 Their unity is the brain. The brain is the screen (48). 그렇기 때문에 molecular biology가 언어학이나 정신분석학보다 시네마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 "뇌의 회로와 연결 고리에는 자극, 과립 또는 이를 추적하는 피질이 미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극장이 아니라 과립으로 몸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 > “The circuits and links of the brain do not pre-exist the stimuli, granules or corpuscles which trace them. The cinema is not a theatre; it composes bodies out of granules.” (Deleuze and McMuhan, 1998, p. 48) 시네마는 움직임을 이미지와 정신 안으로 넣는다. 즉 움직이는 이미지의 Unity가 바로 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두뇌의 분자적 연결은 자극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 > 다시 말하지만, 좋든 나쁘든 마찬가지입니다. 화면, 즉 우리 자신은 창의적인 두뇌만큼이나 바보의 작고 결핍된 두뇌가 될 수 있습니다. 비디오 클립을 보세요: 새로운 속도, 새로운 링크, 재링크에 힘을 쏟았지만, 그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이미 비참한 틱과 왜곡, 기존 방식으로 배포된 컷으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시네마의 경우 지속적으로 자기 움직임으로 이미지를 표현하기 때문에, 뇌의 회로를 추적하고 역추적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역시 이 지점이 바로 내가 말라부의 plasticity를 연결하는 지점이다. 말라부가 이야기하는 뇌와 subjectivity처럼 시네마는 끊임 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시네마 또한 갑작스런 Identity의 변화가 생길 수 있는가? 가장 커다란 증거 중 하나는 그 프레임을 볼 수 있다. 들뢰즈는 위 문장에서 말하는 "bad"에 해당하는 영화를 특히 violence and sexuality 로 lower brain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 a mixture of gratuitous cruelty and organised stupidity. 이 문장이 가장 흥미롭다. 어떻게 보면 에이젠슈테인이 말하는 Lower, deep, 엑스터시가 일어나는 그 지점을 들뢰즈는 "bad"라는 단어를 사용해 설명한다. #### 철학과 시네마 > “The encounter between two disciplines doesn't happen when one of them sets about reflecting on the other, ==but when one realizes that it must resolve for itself and with its own means a problem which is similar to that which is also posed in another. == > 두 분야 간의 만남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반성하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른 쪽에서도 제기되는 것과 유사한 문제를 의미한다==.”([Deleuze and McMuhan, 1998, p. 49](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이 문장에서 들뢰즈가 시네마를 접근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들뢰즈는 시네마의 "problem"을 해결하기 위해 시네마를 분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문제"이고 철학자인 들뢰즈는 철학과 시네마에서 공통으로 혹은 유사하게 제기된 문제를 "스스로"해결하기 위해 시네마를 접근한다. 이러한 문제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상황에서 나올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They are the same shudders in quite different terrains.” (Deleuze and McMuhan, 1998, p. 49) 들뢰즈는 Godard가 *Passion* 에서 페인팅을 맞딱드렸을 때와 Prénom Carmen에서 음악을 마주했을 때를 예시로 든다. 이러한 예시를 보면 들뢰즈는 철학과 예술이라는 분리를 거부하는 것 처럼 들린다. 즉 철학과 예술이 아니라 같은 창조적 실행이라는 점에서 철학과 시네마, 철학과 페인팅, 철학과 음악 등등을 논의하는 것이다. > "다른 예술에서 시작과 끝이 없는 작품(오브르)은 없습니다. 제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성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 문제가 영화에서 답을 찾게 되고==, 그 자체가 다른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모든 작업은 릴레이 시스템 속에 삽입됩니다." > > “There is no work (oeuvre) which does not have its beginning and end in other arts. I was able to write on cinema, not by rightof reflection,but when philosophical problems led me to seek answers in cinema, which itself then relaunched other problems. ==Any work is inserted in a system of relays.”== (Deleuze and McMuhan, 1998, p. 49) ### Classification > 다른 글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the taxonomy, the love of classification” ([Deleuze and McMuhan, 1998, p. 50](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5&annotation=4N6HIXU5)) 철학 안에서 분류법 범주화는 필수적인 것인가? 인터뷰에서 들뢰즈는 분류를 즐긴다고 이야기 한다. 끝에 오는 것이면서도 불가결 indispensable의 준비 작업이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mobile). 범주화는 보기에 매우 달라보이는 것들을 모으는 것으로, 그것은 개념의 형성물 formation이다. 중요한 것은 분류법은 언제나 징후학이라는 것이다. **분류되는 것은 이벤트로 나타난 것에서 개념을 뽑아내기 위한 징후이지 그것의 추상적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언어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신호물질로서이다. > “It is not as a language that we must understand cinema, but as a signaletic material.” ([Deleuze and McMuhan, 1998, p. 50](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5&annotation=TBJNF8YQ)) 영화를 신호물질로 이해한다. 즉 범주화를 통해서 영화가 구성되어지는 것이 아닌 영화에서의 분산물로 범주화가 되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stimuli로 이해한다.(**어떻게 stimuli면서 동시에 두뇌일 수 있지?**) 이 바로 이 지점이 Malabou의 관점과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순서가 조금 더 필요한 것 같다. 시네마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스크린, 즉 이미지의 총합을 만들어 내는 것의 자극 물질이다. 그 자체로 Material적인 것이다. 각각의 작업이 그 자체로 있을 수 있게 하는 지점은 Malabou의 분열로 엮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빛의 분류 들뢰즈는 시네마 책에서 시네마의 빛, 물리적 환경으로서 빛의 범주화, 특히 흰색을 주는 구성, 미국 시네마 혹은 Antonioni의 뉴튼식의 빛을 분류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괴테의 빛, 어둠과 충돌하여 어둠에서 사물을 끌어내는 분해할 수 없는 힘이 있다. (Expressionism, Ford와 Welles도 이 쪽에 위치하니 앞의 것이 미국식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또 다른 빛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어둠과의 대립으로 정의되지 않는 흰색과 대립하는, 흰색을 근본적 불투명도로 여기는 빛이 있다. (이것은 괴테의 또 다른 측면으로 대표적으로 Sternberg)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빛으로는 더 이상 구성이나 대립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교체 교대로서의 빛이 있다. 이는 달 모양의 형상에 의해 번갈아 정의된다 (전쟁 전의 프랑스 학파인 Epstein과 Grémillon의 빛으로, 아마도 오늘날엔 Revette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화가 Sonia Delaunay의 작업과 닮아 있다). > 예를 들어 저는 영화에서 빛을 분류하려고 시도합니다. 구성된 물리적 환경으로서의 빛이 있고, 그 구성이 미국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뉴턴적 빛인 흰색을 주는 빛이 있으며, 아마도 안토니오니의 다른 방식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과 충돌하여 사물을 끌어내는 불변의 힘으로서의 괴테적 빛(표현주의이지만 포드와 웰즈도 이 쪽에 속하지 않나요?)이 있습니다. → 그리고 더이상 범주화가 되지 않는 빛이 있다. 이 빛은 오직 alternation으로만 정의가 가능하다 → 예시로 전후 프랑스학교, [[Jean Epstein|Epstein]] [[Jean Grémillon]], [[Jacques Rivette]] → 이들의 작업은 [[Robert Delaunay]]와 결을 같이 한다. ### 공간의 분류 시네마에서도 이러한 이러한 열린 공간 분류가 가능하다. ==유기적 공간 혹은 둘러싼 (encompassing)== 공간(서양적 공간, 그리고 Kurosawa 또한 이러한 거대한 넓이를 둘서쌈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우주의 실용적 선들 the functional lines of the universe== (Neo-Western 그리고 [[Kenji Mizoguchi]]의 경우가 있다) ==평평한 공간==의 [[Joseph Losey]], 테라스와 낭떠러지 혹은 고원들, 그러한 공간들의 연구는 [[Joseph Losey]]로 하여금 일본의 공간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또한 ==단속적인 disconnected spaces(끊어진 것이 아닌 연결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Robert Bresson|Bresson]], 연결이 끊긴 공간들이 있다. 이러한 공간 안에서 연결은 불안정하며 Bresson이 특이 이러한 공간 연출을 사용한다. 다음으로 ==빈 공간 (empty spaces)==이 있다. [[Yasujiro Ozu]]와 [[Michelangelo Antonioni|Antonioni]]에게서 볼 수 있다. ==층서적 공간 (stratigraphic)== 은 무엇이 그 공간을 덮는가로 시작해 그 공간이 읽는 것으로 향하는 공간이 있다 ([[Jean-Marie Straub]]), 그리고 또한 [[Alain Resnais|Resnais]]의 위상적 (topological) 공간이 있을 수 있다. 공간은 만드는 이의 수만큼 있을 수 있다. 공간과 빛은 서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얽힐 수 있다. 이 모든 경우 이러한 분류는 명암이나 공간적 사인의 분류가 영화에만 국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역, 과학, 예술, 뉴턴이나 Delaunay를 지시한다. 이러한 지시는 다른 순서, 다른 문맥, 관계, 다른 구분으로 분류한다. ### 작가 커머셜과 창의적인 작업의 차이가 있다면 커머셜은 상품을 드러내고 대중의 기대에 부합에 반응한다. 하지만 아트는 반대로 기대되지 않은, 알아차리지 못한, 그리고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 > “"Auteur" is a function which refers to the work of art(and in other conditions to a crime).”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7&annotation=EG3RV92W)) > “It is difficult to make a work of art( une oeuvre), but it's easy to find criteria.”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7&annotation=NDAENADX)) > “A work of art is always a creation of new spaces-times (it's not a matter of telling a story in a determined space and time, the rhythms, light, spaces-times must become the true characters themselves).”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7&annotation=YE55MS6F)) > “A work of art is a new syntax, which is much more important than vocabulary and carves out a foreign language within language.”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7&annotation=NJVJWYHQ)) > “Syntax, in the cinema, are the links and re-linkings of images,but also the relations between sound and visual image (there is an intimate link between these two aspects).”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7&annotation=F7DKW7R6)) ### 시간 이미지 들뢰즈 이전 시네마의 영화학 (Filmological) 분석은 언제나 현재 앞에 이루어진다는 주장으로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들뢰즈는 시네마토그래픽 이미지는 현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 “What is in the present is what the image "represents," but not the image itself.” ([Deleuze and McMuhan, 1998, p. 53](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8&annotation=QXZWVJ3W)) 현재에 있는 것은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 자체가 현재인 것은 아니다. 이미지는 시간 관계의 collection이다. > “It makes the time relations which are irreducible to the present sensible, visible.” ([Deleuze and McMuhan, 1998, p. 53](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8&annotation=TP48VPBT)) 이러한 시간 관계는 현재 감각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 시간관계는 이미지 안의 duration의 공존으로 완성되어 스크린된 이미지와는 전혀 같지 않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현재와 싱크 되는 지점에서 나온 것 같은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네마에 대한 작업은 퍼포먼스와 텔레비전 작업과 다른 대화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한 관점은 순수하게 스크린 이전에 속에 있다. 그는 말한다. 만약 스크린 상에 표현된 것에 멈춰 있으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자전거이며 산이고 차 혹은 인간이며 공간을 통해 여행하는 것이다. ([Deleuze and McMuhan, 1998, p. 53](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하지만 난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시간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시간을 subjectivisation, 변화로만 읽는 것이 아닌 시간 자체가 여행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공간과 시간이 함께 여행한다고 생각하면 시간과 공간의 카테고리가 나뉘지 않은 시네마가 가능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 “This has nothing to do with the flashback or with a memory, because a memory is only a former present, whereas the characterin the imageliterally plunges into the past, or emerges from the past.” ([Deleuze and McMuhan, 1998, p. 54](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9&annotation=3VP7CXU4)) > 일반적으로, 공간이 "유클리드"가 되는 것을 멈추는 순간, 유클리드가 아닌 공간이 만들어지면, 공간은 더 이상 시간의 관계를 불러 일으키는 그 자체의 특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 > “As a general rule, as soon as a space ceases to be "Euclidean," as soon as there is a creation of spaces, in the style of Ozu, Antonioni, Bresson, space no longer accounts for its own characteristics which call forth relations of time.” (Deleuze and McMuhan, 1998, p. 54)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유클리드적 공간이 멈추는 순간,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공간은 스스로의 특성, 즉 시간의 관계를 발생시키는 공간의 특성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 “Cinema doesn't reproduce bodies; it produces them from granules, which are granules of time.” ([Deleuze and McMuhan, 1998, p. 54](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pdf](zotero://open-pdf/library/items/82J98X84?page=9&annotation=PGES2NNJ)) <h3>시네마와 뇌</h3> “It's that some­ thing bizarre struck me in cinema: its unexpected ability to show not behavior but spiritual life (at the same time as aberrant behaviors).” (Deleuze and McMuhan, 1998, p. 48) “It's that some­ thing bizarre struck me in cinema: its unexpected ability to show not behavior but spiritual life (at the same time as aberrant behaviors).” (Deleuze and McMuhan, 1998, p. 48) “Spiritual life is not the dream or the fantasy, which have always been dead-ends for cinema, rather it's the domain of cold decision, of absolute determination (entetement), of a choiceof existence.” (Deleuze and McMuhan, 1998, p. 48) 가장 처음부터 나오는 spiritual이란 단어는 주목할 만하다. 보통 영적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분명 서양 철학사에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는 사고의 방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들뢰즈는 시네마가 spiritual life를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놀랐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철학과 시네마의 관계를 연구했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spiritual life는 이성적안 결정, 절대적인 결정, 존재 선택의 영역이다. 바로 여기서 시간과 연결되는 데 이는 말라부가 읽었던 헤겔이 modern nature of human subjectivity를 신성한 주관성에 따라 모델화한 것과 연결되는 것 처럼 보인다. (Crockett, 2010, p. xii) 그렇기에 들뢰즈가 여기서 말하는 시네마가 spiritual life를 보이는데 숙련된 것은 시네마가 aesthetic existence의 선택을 함으로 해서 가능해 진다. “Their unity is the brain. The brain is the screen. I don't believe linguistics or psychoanalysis are of great help for the cinema.” (Deleuze and McMuhan, 1998, p. 48) “In short, cinema not only puts movement into the image, it also puts it into the spirit.” (Deleuze and McMuhan, 1998, p. 48) 시네마는 움직임을 이미지와 정신 안으로 넣는다. 즉 움직이는 이미지의 Unity가 바로 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두뇌의 분자적 연결은 자극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 “It's curious the way Rohmer assigns to cinema the study of spheres of existence, aesthetic existence” (Deleuze and McMuhan, 1998, p. 48) “The cinema is not a theatre; it composes bodies out of granules.” (Deleuze and McMuhan, 1998, p. 49) 시네마의 경우 지속적으로 자기 움직임으로 이미지를 표현하기 때문에, 뇌의 회로를 추적하고 역추적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역시 이 지점이 바로 내가 말라부의 plasticity를 연결하는 지점이다. 말라부가 이야기하는 뇌와 subjectivity처럼 시네마는 끊임 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시네마 또한 갑작스런 Identity의 변화가 생길 수 있는가? 가장 커다란 증거 중 하나는 그 프레임을 볼 수 있다. <h3>철학과 시네마</h3> “The encounter between two disciplines doesn't happen when one of them sets about reflecting on the other,but when one realizes that it must resolve for itself and with its own means a problem which is similar to that which is also posed in another. 두 분야 간의 만남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반성하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른 쪽에서도 제기되는 것과 유사한 문제를 의미한다.”(Deleuze and McMuhan, 1998, p. 49) 이 문장은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두 개의 학문이 만나는 것은 Reflection을 하지 않고 철학을 위해서 철학의 의미로 답을 찾기 위해 시네마에서 제안된 문제의 유사한 문제를 의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들뢰즈는 Godard가 <i>Passion </i>에서 페인팅을 맞딱드렸을 때와 Prénom Carmen에서 음악을 마주했을 때를 예시로 든다. 이러한 예시를 보면 들뢰즈는 철학과 예술이라는 분리를 거부하는 것 처럼 들린다. 즉 철학과 예술이 아니라 같은 창조적 실행이라는 점에서 철학과 시네마, 철학과 페인팅, 철학과 음악 등등을 논의하는 것이다. “the taxonomy, the love of classification” (Deleuze and McMuhan, 1998, p. 50) 철학 안에서 분류법 범주화는 필수적인 것인가? 인터뷰에서 들뢰즈는 분류를 즐긴다고 이야기 한다. 끝에 오는 것이면서도 불가결 indispensable의 준비 작업이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mobile). 범주화는 보기에 매우 달라보이는 것들을 모으는 것으로, 그것은 개념의 형성물 formation이다. 중요한 것은 분류법은 언제나 징후학이라는 것이다. <b>분류되는 것은 이벤트로 나타난 것에서 개념을 뽑아내기 위한 징후이지 그것의 추상적 본질이 아니다.</b> 그러므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언어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신호물질로서이다. “It is not as a language that we must understand cinema, but as a signaletic material.” (Deleuze and McMuhan, 1998, p. 50) 영화를 신호물질로 이해한다. 영화를 stimuli로 이해한다. 바로 이 지점이 Malabou의 관점과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순서가 조금 더 필요한 것 같다. 시네마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스크린, 즉 이미지의 총합을 만들어 내는 것의 자극 물질이다. 그 자체로 Material적인 것이다. 각각의 작업이 그 자체로 있을 수 있게 하는 지점은 Malabou의 분열로 엮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h4>빛의 분류</h4> 들뢰즈는 시네마 책에서 시네마의 빛, 물리적 환경으로서 빛의 범주화, 특히 흰색을 주는 구성, 미국 시네마 혹은 Antonioni의 뉴튼식의 빛을 분류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괴테의 빛, 어둠과 충돌하여 어둠에서 사물을 끌어내는 분해할 수 없는 힘이 있다. (Expressionism, Ford와 Welles도 이 쪽에 위치하니 앞의 것이 미국식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또 다른 빛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어둠과의 대립으로 정의되지 않는 흰색과 대립하는, 흰색을 근본적 불투명도로 여기는 빛이 있다. (이것은 괴테의 또 다른 측면으로 대표적으로 Sternberg)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빛으로는 더 이상 구성이나 대립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교체 교대로서의 빛이 있다. 이는 달 모양의 형상에 의해 번갈아 정의된다 (전쟁 전의 프랑스 학파인 Epstein과 Grémillon의 빛으로, 아마도 오늘날엔 Revette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화가 Sonia Delaunay의 작업과 닮아 있다). <h4>공간의 분류</h4> 시네마에서도 이러한 이러한 열린 공간 분류가 가능하다. 유기적 공간 혹은 둘러싼 (encompassing) 공간 (서양적 공간, 그리고 Kurosawa 또한 이러한 거대한 넓이를 둘서쌈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우주의 실용적 선들 (Neo-Western 그리고 Mizoguchi의 경우가 있다) 평평한 공간의 Joseph Losey, 테라스와 낭떠러지 혹은 고원들, 그러한 공간들의 연구는 Losey로 하여금 일본의 공간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또한 단속적인, 연결이 끊긴 공간들이 있다. 이러한 공간 안에서 연결은 불안정하며 Bresson이 특이 이러한 공간 연출을 사용한다. 다음으로 빈 공간이 있다. Ozu와 Antonioni에게서 볼 수 있다. 층서적 공간 (stratigraphic) 은 무엇이 그 공간을 덮는가로 시작해 그 공간이 읽는 것으로 향하는 공간이 있다 (Straubs), 그리고 또한 Resnais의 위상적 (topological) 공간이 있을 수 있다. 공간은 만드는 이의 수만큼 있을 수 있다. 공간과 빛은 서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얽힐 수 있다. 이 모든 경우 이러한 분류는 명암이나 공간적 사인의 분류가 영화에만 국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역, 과학, 예술, 뉴턴이나 Delaunay를 지시한다. 이러한 지시는 다른 순서, 다른 문맥, 관계, 다른 구분으로 분류한다. <h3>작가</h3> 커머셜과 창의적인 작업의 차이가 있다면 커머셜은 상품을 드러내고 대중의 기대에 부합에 반응한다. 하지만 아트는 반대로 기대되지 않은, 알아차리지 못한, 그리고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 “"Auteur" is a function which refers to the work of art(and in other conditions to a crime).”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 “It is difficult to make a work of art( une oeuvre), but it's easy to find criteria.”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 “A work of art is always a creation of new spaces-times (it's not a matter of telling a story in a determined space and time, the rhythms, light, spaces-times must become the true characters themselves).”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 “A work of art is a new syntax, which is much more important than vocabulary and carves out a foreign language within language.”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 “Syntax, in the cinema, are the links and re-linkings of images,but also the relations between sound and visual image (there is an intimate link between these two aspects).” (Deleuze and McMuhan, 1998, p. 52) <h3>시간 이미지</h3> 들뢰즈 이전 시네마의 영화학 (Filmological) 분석은 언제나 현재 앞에 이루어진다는 주장으로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들뢰즈는 시네마토그래픽 이미지는 현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What is in the present is what the image "represents," but not the image itself.” (Deleuze and McMuhan, 1998, p. 53) 현재에 있는 것은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 자체가 현재인 것은 아니다. 이미지는 시간 관계의 collection이다. “It makes the time­ relations which are irreducible to the present sensible, visible.” (Deleuze and McMuhan, 1998, p. 53) 이러한 시간 관계는 현재 감각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 시간관계는 이미지 안의 duration의 공존으로 완성되어 스크린된 이미지와는 전혀 같지 않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현재와 싱크 되는 지점에서 나온 것 같은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네마에 대한 작업은 퍼포먼스와 텔레비전 작업과 다른 대화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한 관점은 순수하게 스크린 이전에 속에 있다. 그는 말한다. 만약 스크린 상에 표현된 것에 멈춰 있으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자전거이며 산이고 차 혹은 인간이며 공간을 통해 여행하는 것이다. (Deleuze and McMuhan, 1998, p. 53) 하지만 난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시간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시간을 subjectivisation, 변화로만 읽는 것이 아닌 시간 자체가 여행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공간과 시간이 함께 여행한다고 생각하면 시간과 공간의 카테고리가 나뉘지 않은 시네마가 가능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This has nothing to do with the flashback or with a memory, because a memory is only a former present, whereas the characterin the imageliterally plunges into the past, or emerges from the past.” (Deleuze and McMuhan, 1998, p. 54) undefined 일반적으로, 공간이 "유클리드"가 되는 것을 멈추는 순간, 유클리드가 아닌 공간이 만들어지면, 공간은 더 이상 시간의 관계를 불러 일으키는 그 자체의 특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undefined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유클리드적 공간이 멈추는 순간,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공간은 스스로의 특성, 즉 시간의 관계를 발생시키는 공간의 특성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Cinema doesn't reproduce bodies; it produces them from granules, which are granules of time.” (Deleuze and McMuhan, 1998, p. 54) ### Related ```dataview LIST FROM [[@deleuze_brain_1998]] and -"Plans" and -"resour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