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l Foster (1996) *Obscene, Abject, Traumatic*. : . > [!INFO] > Type:: [[]] > Title:: Obscene, Abject, Traumatic > Author(s): [[Hal Foster]] > Year:: 1996 > Tags:: > DOI:: 10.2307/778908 > Citekey:: foster_obscene_1996 > ZoteroURI:: [Open in Zotero: Obscene, Abject, Traumatic](zotero://select/items/@foster_obscene_1996) > ReviewedDate:: [[2024-08-06]] > Related Note: 202408131428 ## Citation ```latex [@foster_obscene_1996] ``` ## Summary 할 포스터(Hal Foster)의 **"Obscene, Abject, Traumatic"**(1996)는 현대 예술과 이론에서 **‘실재(the real)’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분석하는 글이다. 포스터는 **실재가 더 이상 단순히 ‘재현의 효과’로 이해되지 않고, 이제는 ‘트라우마의 사건’으로 인식되는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정신분석학적 관점, 특히 라캉의 ‘응시(gaze)’ 개념과 연관되며, 시각 문화 및 예술적 재현 방식에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한다. 포스터는 [[Jacques Lacan|라캉]]이 ‘응시’를 어떻게 개념화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를 통해 주체가 실재를 경험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논의한다. 그는 르네상스 원근법이 주체를 관찰자로 설정하는 방식과 달리, 라캉이 주체를 ‘응시하는 대상’으로 규정한다고 설명한다. 즉, 주체는 단순히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스스로 ‘관찰당하는 존재’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라캉의 ‘사딘 통조림(Sardine Can)’ 일화는 이러한 개념을 잘 보여준다. 라캉은 자신의 어린 시절, 바다 위에서 반짝이는 사딘 통조림이 마치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인간이 응시 속에서 ‘객체화(objectification)’되는 감각을 설명했다. 포스터는 현대 예술이 이러한 응시의 구조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과거에는 예술이 응시를 ‘길들이는(taming)’ 방식으로 작동했다면, 현대 예술은 **응시의 통제를 거부하고 실재의 충격을 직접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표(signifier)와 재현의 틀(screen)이 깨지고, 응시는 더 이상 조정되거나 미화되지 않은 채 날것(raw)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후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이미지와 재현 자체를 탐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포스터는 이러한 전환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예로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작품을 분석**한다. 그는 셔먼의 작품이 라캉의 시각 이론에서 제시한 세 가지 주요 위치—주체(주체-이미지), 이미지-스크린(재현 체계), 대상-응시(실재)—를 따라 이동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셔먼의 초기 작품(1975-1982년)에서는 여성 주체가 타인의 응시 속에서 객체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83년 이후 그녀의 작품은 패션, 동화, 예술사적 이미지를 변형하여 이미지-스크린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1990년대 이후에는 실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그로테스크한 신체 변형과 극단적인 시각적 충격을 통해 응시의 틀을 해체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포스터는 **‘추악한(abject)’과 ‘외설적인(obscene)’ 개념이 현대 예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추악한 것’(abjection) 개념을 차용하며,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 반드시 배제해야 하는 것(예: 신체의 분비물, 죽음, 혐오적 이미지 등)이 현대 예술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신체의 붕괴나 변형, 부패와 같은 요소들은 단순히 도발적이거나 불쾌한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재현 체계를 와해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터는 현대 예술이 **트라우마와 응시의 해체를 통해 실재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는 기존의 미학적, 정치적 질서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러한 흐름이 기존의 ‘아방가르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보며, **단순한 전위적 도전이 아니라, 실재 자체를 다시 사유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포스터는 이러한 트라우마적 경험의 확산이 단순히 예술 내부의 흐름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심리치료 담론, 정치적 정체성 문제와도 맞물려 있음을 지적**한다. 현대 사회에서 트라우마는 단순히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집단적 기억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으며, 예술은 이를 반영하고 조작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글은 **현대 예술이 어떻게 실재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트라우마와 응시라는 개념을 통해 재현의 기존 틀을 무너뜨리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논의**라고 할 수 있다. 포스터는 **현대 예술이 더 이상 응시를 길들이거나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충격과 트라우마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새로운 예술적, 이론적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Annotation 현대 예술과 이론에서, 더 나아가 현대 소설과 영화에서도 ‘실재’에 대한 개념이 변화하고 있다. 실재가 재현의 효과로 이해되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트라우마의 사건**으로 인식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특히 라캉의 ‘응시(gaze)’ 개념과 연관되며, 시각 문화 및 예술적 재현 방식에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분석하기 위해 [[Jacques Lacan]]의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 [-@lacan_four_1998] 을 가져옴. 하지만 많이 인용되었지만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음. 예를 들어서 라캉에게 있어서 남성적 응시(male gaze)가 존재할 수도 있으며, 자본주의적 스펙터클이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구축되었다는 점은 중심적으로 분석되지 않으며 오히려 **응시는 처음부터 주체에 내재된 것이 아니며,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응시의 특징 - [[Jean-Paul Sartre|사르트르]] Being and Nothingness (1943)의 경우처럼 라캉은 look (or the eye)와 the gaze를 분리한다. - [[Maurice Merleau-Ponty|퐁티]]가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merleau-ponty_phenomenology_2002]에서 응시를 세계 속에 위치시키는 것과 유사하게, 라캉도 응시와 언어를 주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 주체는 모든 방향에서 응시되며 "세계라는 스펙터클 속의 얼룩"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 그러므로 응시는 주체에게 위협으로 다가오며 마치 그것이 주체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응시는 객체 a(objet a)로서, 거세(castration)라는 현상에서 나타나는 중심적 결핍을 상징할 수 있다"(77)고 라캉은 설명한다. [[Jean-Paul Sartre|사르트르]]와 [[Maurice Merleau-Ponty|퐁티]]에서 더 나아가 [[Jacques Lacan|라캉]]은 더 나아가 **시각적 인식에서 주체의 투명성이 당연시되는 가정을 강력하게 문제삼는다.** 바다 위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깡통은, 마치 어린 라캉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이를 **"빛의 점, 즉 나를 바라보는 모든 것이 위치한 지점"**(p. 95)에서 경험했다고 설명한다. 라캉적 주체는 이중적 위치에 고정되며, 이는 라캉이 주체로부터 발산되는 일반적인 시각의 원뿔(cone of vision) 위에, 대상으로부터 발산되는 또 다른 원뿔을 겹쳐 놓는 방식으로 설명하게 만든다. 이 두 원뿔이 만나는 빛의 점(point of light)에서 발산되는 시선을 라캉은 응시(gaze)라고 부른다. ![[Screenshot 2025-02-21 at 18.47.22.png]] > "I am not simply that punctiform being located at the geometral point from which the perspective is grasped. No doubt, in the depths of my eye, the picture is painted. The picture, certainly, is in my eye. But I, I am in the picture" (96) 즉, 주체는 단순히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대상의 응시 아래 놓여 있으며, 마치 빛에 의해 촬영되고 응시(gaze)에 의해 그려지는 존재이다. 따라서 두 개의 원뿔이 겹쳐지면서, 대상은 빛의 점(이제 ‘응시’라 불리는 위치)에 위치하고, 주체는 ‘재현된 주체(subject of representation)’로서 이미지의 지점에 자리 잡으며, 이미지 또한 스크린과 정렬된다. 여기서 [[Jacques Lacan|라캉]]이 어떤 의미로 스크린을 사용했는가는 확실치 않다. [[Hal Foster|Foster]]의 경우는 모든 이미지가 하나의 사례로 포함되는 문화적 저장소(cultural reserve)로 이해한다. 이를 예술의 규범(conventions of art), 재현의 도식(schemata of representation), 시각 문화의 코드(codes of visual culture)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 스크린은 주체와 대상-응시(object-gaze)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한다. ==들뢰즈 식으로 한다면 이건 사실 plane에 가깝지 않을까? 이걸 해석한 글이 있나?== 그러나 스크린은 또한 주체를 대상-응시(object-gaze)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응시를 포착하여, "맥박처럼 요동치고, 눈부시며, 사방으로 퍼져 있는" (p. 89) 시선을 이미지 속에 가두고 길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보호 역할은 특히 중요한데 동물이 세상의 응시 속에 잡혀 디스플레이된다면 인간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103) > Otherwise it would be impossible, for to see without this screen would be to be blinded by the gaze or touched by the real. > Thus, even as the gaze may trap the subject, the subject may tame the gaze [...] Note the atavistic tropes of preying and taming, battling and negotiating; the gaze is given a strange agency here, and the subject is positioned in a paranoid way [@foster_obscene_1996, 109]. > > 따라서 응시가 주체를 포획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주체 역시 응시를 길들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포식과 길들이기, 전투와 협상의 원시적 비유를 발견할 수 있다. 응시는 일종의 기이한 능동성을 부여받으며, 그 결과 주체는 편집증적인 방식으로 배치된다.^[브라이슨(Bryson)은 _The Gaze in the Expanded Field_ 에서 응시에 의해 위협받는 주체가 동시에 그 이질성(alterity)을 통해 확인된다고 주장한다. 주체는 응시에 의해 위협받지만, 역설적으로 그 위협 자체가 주체의 존재를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한 논의는 레오 버사니(Leo Bersani)의 _The Culture of Redemption_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pp. 179-99)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그는 편집증(paranoia)이 주체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설명한다. 브라이슨은 또한 다른 시각성 모델들—남성적 응시(male gaze), 감시(surveillance), 스펙터클(spectacle), 시뮬레이션(simulation) 등—역시 편집증적 요소를 띠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편집증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즉, 단순히 주체의 모순적인 안정/불안정 상태(paradoxical in/security)를 넘어, 이 편집증이 봉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라캉에게 응시는 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폭력적이다 arresting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럼으로 이미지메이킹은 apotropaic 액막이적이다. 응시가 우리를 붙잡기 전에 응시를 잡아채는 것이다 → 예시: 표현주의 그림. 또는 "아폴론적(Apollonian)" 방식에서 그림 제작은 응시를 달래는 역할을 한다. 그 완벽성(예를 들어, 신고전주의 회화를 떠올려보라)은 ==응시를 진정시키고 relax==, 관객이 그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이것이 곧 미적 관조(aesthetic contemplation)이다. 어떤 예술은 트롱프뢰유(trompe-l'œil) 기법을 통해 눈을 속이려 하지만, 모든 예술은 결국 **"dompte-regard," 즉 응시를 길들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말하자면 진정시킨다는 의미는 아폴론적 의미에서 진정은 카오스가 되기전에 order화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또 액막이 적에서는 ordered chaos로 들리고== > I want to suggest that much contemporary art refuses this age-old mandate to pacify the gaze, to unite the imaginary and the symbolic against the real. (110) > > ==나는 많은 현대 예술이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이러한 명령, 즉 응시를 진정시키고, 상상계(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를 결합하여 실재(the real)에 대항하도록 하는 시도를 거부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마치 이러한 contemporary 예술이 응시가 빛나도록 하고, 대상이 자리 잡도록 하며, 실재가 그 요동치는 (pulsatile) 욕망의 영광(혹은 공포) 속에서 존재하도록 하려는 듯하다. 적어도, 이 숭고한 상태 (this sublime condition)를 환기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거의 낭만주의적 숭고에 대한 해석 아냐?== ### [[Cindy Sherman]] [[Cindy Sherman|Sherman]]의 작업을 대강 3개의 그룹으로 나눈다면 [[Hal Foster|Foster]]가 보기에 딱 라캉의 다이아그램의 흐름대로 움직인다. - 초기 작업 1975-82 - 응시에 잡힌 주체 - 중기 작업 1983-90 - 응시에 침범된 주체 - 1991년 이후 - 응시에 의해 지워진 주체 **초기 작업 1975-82** 이 시기 그녀의 작업은 응시 아래에 있는 주체, 그림으로의 주체 (다른 페미니스트 작업들의 appropriation art의 흐름처럼)를 상기시킨다. ![[Cindy Sherman_Untitled Film Still 2 (1977).png]] 여기 나오는 이미지는 imagined 와 actual body-image가 동시에 들어난다. 셔먼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하품하는 상상과 실제 신체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지적 → 엔터테인먼트와 패션모델을 통해서 매일 매순간 우리의 인생에 (mis)recognition 을 채운다. **중기 작업 1983-90** 1983년부터 1990년까지의 중기 작품에서, 패션 사진에서 동화 삽화와 미술사 초상화, 그리고 재난 사진에 이르기까지, 셔먼은 이미지 스크린으로 이동하여 그 표현의 레퍼토리를 탐구 → 이건 단지 포커스의 문제긴 했다. 그녀의 이전 초기 작업에서도 이미지-스크린을 이야기 하긴 했었음 그리고 중기 작업에서 subject-as-picture에서도 사라지지 않음. 패션과 예술 역사 시리즈에서 셔먼은 전위적인 디자인을 패러디하며, 패션 희생자들의 긴 런웨이를 보여주고, 가짜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유형의 못생긴 귀족들로 가득 찬 긴 갤러리를 통해 미술사를 조롱한다. 하지만 상상된 신체 이미지와 실제 신체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정신병적이 될 때 (한두 명의 모델은 자아 인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일부 미술사 사진에서 탈이상화가 탈승화의 지점까지 이어지고 (흉터가 있는 주머니 같은 가슴과 이상한 종기가 난 코를 가진 이러한 신체들) 이러한 신체들은 적절한 재현의 수직적인 선들을 붕괴시키며, 나아가 정상적인 주체성(proper subjecthood) 자체를 해체한다. 그녀의 이런 작업들은 특히 freaks of nature 작업들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공포 영화는, 잠자리 동화에서 자주 그렇듯이, 공포는 무엇보다도 모성에 대한 공포, 억압 속에서 낯설고 심지어 혐오스럽게 변한 모성 신체에 대한 공포를 의미한다. 또한 신체는 추악한 것(the abject)의 주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따르면, 추악한 것은 **주체도 객체도 아닌 존재의 범주**로, 주체가 되기 전(즉, 어머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 또는 객체가 된 이후(즉, 시체가 되어 완전히 대상화된 상태)로 정의된다. 셔만은 생리혈 성적 분미물, 토, 똥, 그리고 썩음과 죽음을 통해서 representation of the body turned inside out, 주체를 abjected로 만든다. > “But this is also the condition of the outside turned in, of the invasion of the subject-as-picture by the object-gaze.” (Foster, 1996, p. 112) 이미지는 그리고 어느순간 abject를 넘어 어떤 특정 의미와 엮이게 되는데 단지 informe이 아니라 > 바타유가 설명하는 의미 있는 형태가 해체되는 상태는 형태와 지면, 자아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이 사라져 외설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 대상-시선이 마치 그것을 연출할 장면도, 그것을 담을 재현의 틀도, 화면도 없는 것처럼 제시되는 것*을 말한다^[이러한 차이에 대한 논의는 _October_ 67호(1993년 겨울)에 실린 "Conversation on the Informe and the Abject"와, 같은 호에 게재된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Informe without Conclusion"을 참고할 수 있다. 크라우스(Rosalind Krauss)나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와 같은 현대 이론가들은 [[informe]]를 **추악한 것(the abject), 탈승화(désublimation), 신체의 해체** 등의 개념과 연결하여 논의하며, 특히 예술과 시각문화에서 기존 재현의 틀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맥락에 따라 informe는 **무정형, 탈형식, 비형상**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바타이유가 원래 의도한 의미를 강조할 경우 **‘형태 없음’** 또는 **‘형식의 파괴’** 로도 이해할 수 있다.] > > a condition described by [[Georges Bataille|Bataille]] where significant form dissolves because the fundamental distinction between figure and ground, self and other, is lost, but also toward the obscene, where the object-gaze is presented *as if there were no scene to stage it, no frame of representation to contain it, no screen* **1991년 이후 작업** ![[Pasted image 20250222133727.png]] 그리고 몇몇 재난과 내전 이미지를 통해 라캉적 도식에서 불가능한 세 번째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다. 즉, 보호해 줄 스크린 없이 맥동하는 응시를 직접 바라보고, 심지어 외설적 대상(the obscene object)에 손을 대는 경험을 암시하는 것이다. 신디 셔먼(Sherman)의 작품 Untitled # 190에서는 이러한 악의적인 응시(evil eye)가 스스로 끔찍한 형상을 갖춘 모습으로 표현된다. "Obscene (외설스런 불유쾌한)"는 단순히 "장면(scene)에 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의 장(scene of representation)과 이미지-스크린(image-screen)에 대한 공격을 함축한다. 이는 또한 현대 예술과 대안 문화에서 두드러지는 시각적 공격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즉, 이미지-스크린의 균열을 상상하는 것, 실재(the real)로 향하는 불가능한 개방을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 an impossible opening onto the real. (113-14) [[Julia Kristeva]]에 따르면 abject는 내가 반드시 "I"로 있기 위해 없애하는 것이다. abject는 환상적인 물질로 주체에게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너무도 친밀한 것이며, 이러한 지나친 근접성은 피사체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기에 가장 연약한 외각을 만지고 (공간과 시간 둘 다: 공간적 안과 밖의 구분, 모체와 부계법 사이의 시간적 흐름)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추악함(abjection)은 주체성이 흔들리는 상태이며, "의미가 붕괴하는 곳"(p. 2)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주체와 사회의 질서를 교란하고자 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작가들에게 강한 매력을 끌어왔다 → 가장 큰 특징은 ambiguity > 이제는 익숙한 질문들이다. 추악함(abject)은 과연 재현될 수 있는가? 문화에 반하는 것이라면, 문화 속에서 드러낼 수 있는가?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의식화되면서도 여전히 추악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의식적인 추악함==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그것이 전부일까? 더 나아가, 추악함을 다루는 예술이 과연 도구적이거나 도덕적인 용도를 벗어날 수 있을까? (114) > 이는 또 다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외설적인 재현이 포르노그래픽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날 이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설성은 무대를 갖지 않은 역설적인 재현으로, 대상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관객을 압도한다. 반면, 포르노그래피는 전형적인 재현 방식을 통해 대상을 거리 두고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안전한 관음자로 남을 수 있도록 한다. (fn. 11) [[Julia Kristeva|Kristeva]]에게 있어서 abject (혐오스러운 것)의 모호성은 "혐오하는 행위"와 "혐오스러운 상태" 사이의 미묘한 이동에 있다. 그녀에게 있어 혐오하는 행위는 주체성과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혐오스러운 상태는 이 두 체계를 전복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주체성과 사회가 내부의 이질적인 것을 혐오한다면, 혐오 작용은 규율적인 운영 방식이 아닌가? > In her account of modernist writing, Kristeva views abjection as conservative, even defensive. "Edged with the sublime" (11), the abject is used to test the limits of sublimation, but the task remains to sublimate the abject, to purify it. (115) > > Kristeva는 모더니즘 글쓰기에 대한 논의에서 혐오스러운 것을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개념으로 본다. "숭고함의 가장자리에 위치한"(p.11) 혐오스러운 것은 숭고화의 한계를 시험하는 데 사용되지만, 궁극적인 과제는 여전히 그것을 숭고화하고 정화하는 것이다. "타자가 붕괴된 세계에서," 그녀는 수수께끼처럼 말한다. 예술가의 과제는 더 이상 혐오스러운 것을 숭고화하거나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깊이 파고들어 "원초적 억압이 형성하는 끝없는 '원초성'"(p.18)을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부터 나는 이해가 어렵다== "타자가 붕괴된 세계에서"라는 표현에서 Kristeva는 사회 질서를 지탱하는 부계적 법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시사한다. 이미지-스크린과 상징적 **질서의 상태**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며, 지역적으로는 혐오 예술의 가치 또한 이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상징적 질서가 온전한 것으로 간주된다면, 이미지-스크린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전복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이미 찢어진 상태라면, 그러한 전복은 무의미해지며, 아방가르드의 기존 역할은 끝난다. > 그러나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이 역할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며, 전복을 상징적 질서 바깥에서 수행하는 영웅적 아방가르드의 행위가 아니라, 그 질서 내부에서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아방가르드가 만들어내는 균열로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 > But there is a third option as well, and that is to reformulate this vocation, to rethink transgression not as a rupture produced by a heroic avant-garde posited outside the symbolic order, but as a fracture traced by a strategic avant-garde positioned ambivalently within this order. (115) 이 관점에서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상징적 질서와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이 오래된 꿈은 이제 사라졌다), 그 질서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드러내고, ==그 붕괴의 지점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돌파의 순간을 기록하는 데 있다==.^[급진적 예술과 이론은 종종 실패한 인물들, 특히 일탈적 남성성을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는 존재로 기념하지만, 이러한 아방가르드적 논리는 안과 밖의 구분을 전제로 하며, 결국 이러한 인물들이 대항하는 질서가 안정적으로 존재함을 가정(혹은 확증)한다. _My Own Private Germany: Daniel Paul Schreber’s Secret History of Modernity_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에서 Eric Santner는 이 논리를 탁월하게 재해석한다. 그는 전복을 상징적 질서의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기의 지점으로 다시 위치시키며, 이를 "비상사태에 놓인 상징적 권위"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이 3번째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심볼릭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심볼릭 질서가 위기라는 것을 드러내고 그 질서 내부에서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아방가르드가 만들어내는 균열로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다이아그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abject 아트는 두가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1. 첫 번째는 혐오스러운 것과 동일시하며 그것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트라우마의 상처를 탐색하거나, 실재의 외설적인 대상-시선에 직접 닿으려는 것이다. 1. 예를 들어, **외설적인 이미지나 신체적 파괴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들**이 이에 해당. 2. Andres Serrano의 _The Morgue_ 시리즈와 같은 작품들이 이를 대표합니다. 2. 두 번째는 혐오의 상태를 재현함으로써 그 작용을 유발하려는 시도로, 혐오가 작동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드러내며, 때로는 스스로 혐오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1. 이러한 예술은 **혐오 자체를 조작하여 반성적(reflexive)으로 만들거나, 심지어 혐오스럽게 보이도록 함**. 2. 예를 들어, Cindy Sherman의 후기 작품들은 신체가 붕괴되는 듯한 이미지들을 통해 이러한 전략을 수행합니다. **위험성은 이 주어진 abject를 컨펌하게 되는 것** → 이는 초현실주의가 60년전에 저질렀던 실수 (탈승화적 충동이 승화적 명령과 충돌하는 지점을 자신만의 것으로 주장)와 동일하다 → 마치 과거의 초현실주의 전복적 예술가가 성직자 같은 경찰과 같은 존재를 불러냈듯이, 혐오 예술가(예를 들어 Andres Serrano)는 복음주의적 상원의원을 불러내고, (예를 들어 Jesse Helms) 그들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듯한 역할을 한다 → 외설적인 것 또한 이러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많은 현대적 이미지들은 외설성을 주제로 삼아 그것을 안전하게 만들며, 이미지-스크린을 거슬러 작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대부분의 혐오 예술이 의도와 달리 수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외설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실재를 막아내는 _아포트로파이오스적_ 방패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며, 실재의 일부를 차용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Foster는 혐오를 예술적으로 활용하는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기존의 혐오 구조를 공고히 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초현실주의자들이 기존 사회 질서를 전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기성 권력의 반응(검열 등)을 불러오면서 체제를 더욱 강화한 것과 같은 역설적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AndresSerrano_Madonna and Child_1987.png]] 이러한 과정은 [[Surrealism|초현실주의]]와도 닮아있다. 그리고 초현실주의도 무너지면서 두가지 프린시펄, [[André Breton]]과 [[Georges Bataille]]를 중심으로, 두 개의 주요 파벌로 분열되었다. 승화된 욕망 vs. 원초적 욕망의 직접적 표출 - [[Georges Bataille|Bataille]] - 브르통에 따르면, 바타유는 "배설물 철학자"로, 단순한 육체적 물질과 순전한 오물에 머물며 - 바타유는 혐오를 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철저히 경험하고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 - [[André Breton|Breton]] - 낮은 것을 높은 것으로 승화 - 바타유에게 브르통은 "유년기의 희생자"로, 오이디푸스적 게임에 휘말려 있으며, 법을 해체하기보다는 처벌을 유도하기 위해 취한 "이카로스적 자세"에 불과했다 ==오늘날 혐오 예술은 이 두 입장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으며, 단순한 저항이 아닌 더 복잡한 형태의 대응이 필요.== **혐오 상태를 재현하는 방식** #### **1. 마이크 켈리 (Mike Kelley)** - 대표작: _The Riddle of the Sphinx_ (1991), _Catholic Tastes_ (1994) - **유아적 탐닉(Infantile regression)**, **애널 에로티시즘(Anal Eroticism)**, **신체와 사회적 질서의 붕괴**를 주요 주제로 삼음. - 어린 시절 장난감, 인형, 테디베어 같은 사물들을 기괴한 조합으로 배치하며 **사회가 어떻게 무질서와 질서를 구분하는지를 의문시함**. - **“사회적 차이와 규율을 비틀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만들기”**가 그의 주요 전략. - 작품 속 슬로건: _“Pants-shitter and Proud of It”_, _“Let’s Talk About Disobeying”_ →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조롱과 변형**. #### **2. 존 밀러 (John Miller)** - 대표작: _Shitty Sculptures_, _Lumpenproletariat_, _Black Paintings_ - 밀러의 작업은 **애널-비체(anal-abject)의 개념**을 탐구하며, **더럽고(lumpy), 모양 없는(informe), 비형상적(indistinct) 조형물**을 만들어냄. - 특히 ‘Lumpen’(하층 계급을 의미하는 마르크스주의 용어이면서 동시에 덩어리를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개념을 강조하며, **형상이 없는 것,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탐색**. - **‘예술의 전통적 형식 자체를 파괴하면서도, 체제 안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고민**. 그리고 이러한 일탈(똥 무브먼트)은 종종 모방적 퇴행을 통해 수행되는데, 즉 "모든 차이가 소멸하는 항문적 세계"로의 회귀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밀러(Miller)와 켈리(Kelley) 같은 예술가들이 비판적 놀이를 위한 가상의 공간으로 구축하는 세계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연결하고 하나의 장(field)을 형성해. 그래서 더 이상 차이가 존재하지 않아."** — 켈리가 _Theory, Garbage, Stuffed Animals, Christ_ (1991)에서 토끼가 테디베어에게 하는 말. 밀러와 마찬가지로 [[Mike Kelley]]는 상징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공간을 탐구한다. 그곳에서는 "배설물(돈, 선물), 아기, 남근이라는 개념들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으며, 쉽게 서로 대체될 수 있다." 두 예술가는 이러한 상징적 대체를 형태 없는 불분명성으로 밀어붙이며, 말하자면 아기와 남근을 하나의 덩어리진 배설물로 합쳐버린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무차별성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차이를 교란하기 위해 이를 수행한다. 독일어 _Lumpen_ (넝마)에서 유래한 _Lumpensammler_ (넝마주이, 벤야민이 주목했던 개념)와 _Lumpenproletariat_ (마르크스가 관심을 가졌던, 계급을 형성하기엔 지나치게 빈곤한 잔존 계급, 즉 "모든 계급의 찌꺼기, 잔여물, 쓰레기")은 켈리의 어휘 체계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그는 이를 바타유의 *forme 없는 것(informe)* 과 크리스테바의 _혐오스러운 것(abject)_ 사이의 제3의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바타유가 주장했던 바를 실천하는 셈이다.== 즉, 그는 물질주의를 "심리적 혹은 사회적 사실"에 기반하여 탐구한다. 그 결과, 그의 예술은 모양을 부여할 수도, 승화하거나 구원할 수도 없는, 덩어리진 사물들, 주체들, 페르소나들로 이루어진다. 나폴레옹 3세, 히틀러, 무솔리니의 _Lumpen_ 과 달리, 켈리의 _Lumpen_ 은 형성되기를 거부하며, 더욱이 동원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사회적 구조 안에서의 해체’ 수준에서 작업한다. ### 3차 분열 주체가 해체되는 상태를 다루는 예술적 탐구로 확장될 가능성 여기에서 문화적 정치성이 존재하는가? 혐오의 일반적인 문화(이를테면, 게으름뱅이와 패배자들의 문화, 그런지, X세대)를 살펴보면, 이 무관심의 태도는 종종 차이의 정치에 대한 피로감에 불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태도는 보다 근본적인 피로감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구별됨을 거부하려는 기묘한 충동, 욕망 없음에 대한 역설적인 욕망, 유아기를 넘어 무기물적 상태로 회귀하려는 어떤 부름처럼 보인다.== [[Georges Bataille|바타유]]의 [[Surrealism|초현실주의]]를 따르는 [[Roger Caillois]]는 이러한 구별되지 않으려는 충동을 시각성의 차원에서, 특히 공간 속으로 위장(mimicry)을 통해 동화되는 곤충의 사례로 고찰했다. 카유아(Caillois)는 이 동화를 주체성은 물론 행위 주체성조차 허용하지 않는 상태로 보았으며, 이를 "이 특권을 박탈당한" 존재로 묘사하며 극단적인 정신분열증 환자의 상태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 To these dispossessed souls, space seems to be a devouring force. Space pursues them, encircles them, digests them in a gigantic phagocytosis [consumption of bacteria]. It ends by replacing them. Then the body separates itself from thought, the individual breaks the boundary of his skin and occupies the other side of his senses. He tries to look at himself from any point whatever in space. He feels himself becoming space, dark space where things cannot be put. He is similar, not similar to something, but just similar.And he invents spaces of which he is "the convulsive possession." [[@caillois_mimicry_1984]] > > 이러한 박탈된 영혼들에게 공간은 마치 모든 것을 삼키는 힘처럼 보인다. 공간은 그들을 뒤쫓고, 둘러싸며, 거대한 식균 작용(세균을 삼키는 과정) 속에서 그들을 소화한다. 결국 공간은 그들을 대체해버린다. 그 순간, 신체는 사고로부터 분리되고, 개인은 자신의 피부 경계를 넘어 다른 감각의 영역으로 빠져든다. 그는 공간 속 어디에서든 스스로를 바라보려 시도하며, 자신이 점점 공간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사물을 담을 수 없는 어두운 공간으로. 그는 어떤 특정한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유사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경련적으로 점유당하는" 공간들을 창조해낸다. ==신체의 균열, 주체를 집어삼키는 시선, 공간이 되어가는 주체, 그리고 단순한 유사성의 상태 (경련적인 점유. convulsive possession)—이러한 조건들 The breaching of the body, the gaze attacking the subject, the subject becoming space, the state of mere similarity: these are conditions evoked in much art of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즉, 트라우마와 혐오가 단순한 사회적 도발이나 풍자를 넘어서, 주체가 자신의 경계를 상실하는 상태까지 나아가는 경향이 있으며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존재론적 불안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예술은 나아가고 있다. 어떤 고급 모더니스트들이 지시적 대상을 초월하려 했고, 초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순수한 이미지에서 즐거움을 찾았다면, 후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실재 그 자체를 소유하고자 한다. 이제는 그러한 반응들이 경련적인 점유의 두 가지 정서적 반응 구성 요소로 나타난다. - 환희(Ecstasy) - 하나는 이미지-스크린과/또는 상징적 질서의 붕괴를 상상하며 느끼는 황홀감이고, - **"이미지-스크린(image-screen)과 상징적 질서(symbolic order)가 붕괴되는 것에서 오는 희열적인 경험"** - 트라우마적 경험을 통해 **기존의 사회적·문화적 질서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 이는 과거 포스트모더니즘 초기에 나타났던 **시뮬라크르(simulacrum)의 환희적 측면**과 연결됨. - 예: 1980년대 포스트모던 예술이 **표면적 이미지와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기쁘게 수용했던 경향**. -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증상을 **언어와 시간의 정신분열적 붕괴**로 보았으며, 이는 보상적 기제로서 이미지와 공간에 대한 집착을 유발한다고 분석했다. - 다른 하나는 이 붕괴에 대한 공포와 그에 뒤따르는 절망이다. - **"이러한 붕괴가 너무 깊어져, 상징 질서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보일 때 발생하는 절망"** - 상징적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주체가 자기 자신을 잃고 **공포와 무기력에 빠지는 경험**. - 현대 예술이 트라우마와 혐오를 다루는 방식이 환희적인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멜랑콜리(melancholy)와 절망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반영. "경련적인 점유(convulsive possession)"라는 개념은 위의 두 가지 요소를 하나의 동적 과정으로 연결한다. - 현대 예술이 **"기존 질서의 붕괴를 경험하는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사용. - 즉, 현대 예술에서 **"실재(the real)"를 마주할 때, 주체는 환희와 공포 사이를 진동하며, 일종의 ‘경련적인 점유’를 경험한다는 것**. 왜 오늘날 이토록 트라우마에 매혹되고, 혐오스러움에 대한 동경이 생겨나는 것일까? 물론, 예술, 글쓰기, 이론 모두에서 그 동기를 찾을 수 있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현실을 텍스트적 모델로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 존재한다—마치 후기구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억압되었던 실재가 트라우마로서 돌아온 것처럼. 또한, 욕망을 이동하는 주체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통행증처럼 찬미했던 태도에 대한 환멸도 있다—마치 수행적(postperformative) 포스트모더니즘이 배제했던 실재가, 소비주의에 의해 타협된 환상의 세계를 거슬러 호출된 것처럼. 여기에서 트라우마적 주체는 확실히 존재하며, 그것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타인의 트라우마를 논박할 수는 없으며, 다만 그것을 믿거나, 동일시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할 뿐이다. 따라서 트라우마 담론에서 주체는 동시에 비워지고 상승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트라우마적 주체는 현대 문화의 모순된 요구들을 마치 마법처럼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는 해체적 분석의 요구, 다른 한편으로는 다문화적 역사 서술의 요구를 조화시키며, 한편으로는 붕괴된 사회에서 파생된 와해된 주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체성을 긍정해야 한다는 요구를 조율한다. 오늘날, 저자의 죽음이 선포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기묘한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좀비처럼 되살아난 저자의 모습이며, 부재하는 권위가 지속되는 역설적인 상태이다. ### Related ```dataview LIST FROM [[@foster_obscene_1996]] and -"Plans" and -"resour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