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ung-Chul Han (2017). *The Scent of Time: A Philosophical Essay on the Art of Lingering*. : . > [!INFO] > Type:: [[&]] > Title:: The Scent of Time: A Philosophical Essay on the Art of Lingering > Author(s): [[Authors/Byung-Chul Han]] > Year:: 2017 > Tags:: > DOI:: > Citekey:: han_scent_2017 > ZoteroURI:: [Open in Zotero: The Scent of Time: A Philosophical Essay on the Art of Lingering](zotero://select/items/@han_scent_2017) > ReviewedDate:: [[2022-07-05]] ## Citation ```latex [@han_scent_2017] ``` ## Related ```dataview TABLE file.aliases AS "Title" FROM [[@han_scent_2017]] and -"Plans" and -"resources" ``` ## Summary - 피로사회(2010)의 전작, - 피로사회의 경우 근대에서 후근대(Postmodernity)로의 이행을 바이러스, 적대자, 억압과 착취, 결핍과 같은 부정성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조명 - 시간의 향기에 경우 활동적 삶에 의해 초래된 시간의 위기 (반시간성 [[Dyschronie]])라는 관점에서 고찰 - 시간이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 → 시-점 Zeit-Punkt들로 축소 - 지속성의 상실 - 의미의 중력 상실 - 그로인한 방향성 상실 - → 사색적 삶 vita contemplativa를 주장 → 감각의 복원 - 복원을 위한 원인과 징후 추적 → Heterochronien, Uchronien ### Other Comments - [?] 그의 사상은 [[@steyerl_free_2012]] [[groundless]]와 반대지점에 있는 것일까? ## Annotation > Time is lacking a rhythm that would provide order, and thus it falls out of step. (8/280) > [!NOTE] 이 지점은 흥미롭다. 아마도 한병철의 이론이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이겠지. 즉 68세대 이후 poststructuralism 이 추구했던 새로움에 대한 추구 doxa에 대한 반항이 이제 다시 crisis의 원축이 되어 하나의 doxa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의 이론이 가졌던 파급력을 생각하면 가능한 이야기이다. 한병철은 시간의 리듬이 사라지고 방향성도 잃은 현재에 와서는 원자화 되어 제때 사는 것은 물론 제때 죽는 것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원자화된 시간 속에서 모든 시점들은 비슷해지고 어떤 시점또한 두드러지지 않으며 죽음은 불시에 찾아오게 된다. 이는 신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시간의 긴장의 사라짐에서 시작되었으며 그에게 있어서 [[Martin Heidegger|Heidegger]]의 Sein (They)과 [[Friedrich Nietzsche|Nietzsche]]의 최후의 인간 (ultimate man)구별되지 않으며 [[Friedrich Nietzsche|Nietzsche]]가 운명의 시간, 신이라는 존재가 부여하던 시간의 긴장감을 복원 시키려고 한 것 처럼 [[Martin Heidegger|Heidegger]]는 [[@heidegger_being_2013]]에서 한 것 처럼 역사의 종언이 임박한 가운데 역사를 복원하려고 시도한다. 역사 = 비어 있는 형식 > 오늘날 "현재"는 현재적인 것의 끝 부분으로 축소되었다. “The present is reduced to a point of currentness.” (20) [[Martin Heidegger|Heidegger]]는 “Faced with the domination of a point-like, ahistorical present, Heidegger felt that it was necessary to deprive ‘the “today” of its character as present’. (오늘의 **탈현재화**” [@heidegger_being_2001, 444] ==변증법은 그 자체가 이미 강렬한 시간적 사건이다 → **이미 일어난 것의 아직 일어나지 않음**에 의존== → 현재 속에 함축되어 현존하는 것을 해방 시킴 → 그로 인해 현재에 긴장이 넘치게된다. - [?] 이 말은 [[Gilles Deleuze|Deleuze]]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Possibles virtuals들을 운동화 시키고 시각화 시킨다는 것일까? 약속, 의무, 신의 같은 것들은 미래를 현재와 묶이게 만들고 뒤얽여 안정화 작용을 한다. - [?] 또한 글쓴이는 오늘날 삶이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 아마도 [[Friedrich Nietzsche|Nietzsche]]의 ultimate man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의미 있음, 신의 죽음 이후 비어버린 그 공간의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즉 의미 있음의 빈 공간으로 남겨짐과 함께 채워질 가능성의 상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주장의 근거가 약간 모호하다. 주장만 있다. > 삶에는 뚜렷하고 결정적인 결절점이 생겨나지 못한다. 인생은 더 이상 단계, 완결, 문턱, 과도기 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 The time of a life is no longer structured by sections, completions, thresholds and transitions.” (33/280) 구조의 무너짐. 비구조화. 비결정화? 비 크리스털? > [!IDEA] 글쓴이가 주장하는 사색의 힘, 그 사색의 과정에서 나오는 종합, 아름다움, 주체성, 시간 역사성의 힘은 dialectic의 운동의 리듬과, 특히 [[Sergei Eisenstein|Eisenstein]]이 주장한 [[ambulatory viewer]]의 리듬과 닮아있다. 즉 몽타쥬가 진정으로 가져오고자 했던 것은 사색, 즉 Processing의 시간적 간격, 이미지들만 주륵주륵 연결되어 fixing되지 않는 의미들의 흐름이 아니라 pregnant ([[Roland Barthes|Barthes]]?)되는 의미들이 아닐까? 그 말은 Fist 혹은 강렬함 Intensity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물이라는 말이된다. ### Related ```dataview LIST FROM [[@han_scent_2017]] and -"Plans" and -"resour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