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runo Latour (1987) *The Enlightenment Without The Critique: An Introduction to Michel Serres's Philosophy*. : Cambridge University Press.
> [!INFO]
> Type:: [[]]
> Title:: The Enlightenment Without The Critique: An Introduction to Michel Serres's Philosophy
> Author(s): [[Bruno Latour]]
> Year:: 1987
> Tags::
> DOI::
> Citekey:: latour_enlightenment_1987
> ZoteroURI:: [Open in Zotero: The Enlightenment Without The Critique: An Introduction to Michel Serres's Philosophy](zotero://select/items/@latour_enlightenment_1987)
> ReviewedDate:: [[2025-08-15]]
> Related Note: 202508221703
## C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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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our_enlightenment_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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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이 문서들은 1987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열린 철학 강연집의 일부로, **브루노 라투르가 미셸 세르의 철학을 설명하는 강연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라투르는 세르의 철학이 비판적 사고에 기반한 기존 프랑스 철학과 달리, **과거와 현재, 과학과 신화, 주체와 객체 간의 엄격한 구분을 거부**한다고 설명합니다. 세르의 관점에서 **과학은 폭력을 종식시키는 대신 증대시킬 수 있으며**, 모든 지식 형태는 상호 연결되어 비교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과학적 지식을 세상에 **추가되는 것**으로 보며,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과학은 유용하고 그렇지 않은 과학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Annotation
### 1. 서론: 프랑스 철학의 혁명적 전통과 세르의 독특한 입장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프랑스 지성계의 특징으로 '혁명'에 대한 강박적인 사랑을 지적합니다. 이는 정치, 과학, 철학 전반에 걸쳐 과거를 급진적으로 전복하고 '백지 상태(tabula rasa)'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데카르트부터 푸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사상가들은 기존 사유에 대한 '인식론적 단절(coupure épistémologique)'과 '완전한 전복'을 추구해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사상가라도 철저한 비판과 혁명을 시도하지 않으면 '순진하고(naiveté) 잘 속아 넘어가는(gullibility)' 것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셸 세르([[Michel Serres]])는 이러한 프랑스 철학의 주류적 경향에서 벗어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라투르는 세르를 "묘사할 수 없을 만큼 순진하고 잘 속아 넘어간다"고 표현하며, 이는 세르가 프랑스 사상가들이 당연시하는 급진적인 전복과 단절을 거부하고 과거와 현재, 패자와 승자 사이의 선택을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세르는 "마치 세상이 이제 막 시작된 것처럼, 혁명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과거의 모든 것이 여전히 현재인 것처럼, 패자가 승자와 동등한 것처럼" 오래된 사상들을 계속해서 탐구합니다.
예를 들어, 라투르는 세르가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후 과학이 종교와 신화에서 벗어나 진리에 이르는 확실한 길을 확립했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세르는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고대 물리학이 "그렇게 비과학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보며, 졸라(Zola)의 소설이나 라 퐁텐(La Fontaine)의 우화가 논리에 대해 할 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과학과 비과학적 담론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세르의 '순진함'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열역학자인 카르노(Carnot)를 소설가인 쥘 베른(Jules Verne)만큼 생생하고 흥미롭게 여기며, 정보 물리학자인 브릴루앙(Brillouin)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보다 더 철학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라투르는 세르가 "아웃모드(outmoded)", "매력적인(charming)", "시적인(poetic)", "엄격한(rigorous)", "과학적인(scientific)", "허구적인(fictional)", "신화적인(mythical)"과 같은 형용사들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여하는 방식대로 능숙하게 배분하지 못한다고 비판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세르의 독창성을 강조하며 지적합니다.
### 2. 비판(Critique) 철학과의 단절
세르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비판(Critique)' 철학 운동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칸트 이후로 서구 철학은 비판을 통해 지식을 정초하고, 신념을 폭로하며, 이데올로기와 과학, 민주주의와 테러 사이의 구분을 확립하는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비판' 철학자들에게 가장 큰 걱정은 '속아 넘어가는 것'이었고,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확실하고 확실한 것(sure and certain)'의 작은 묶음과 '단순히 믿어지는 것(simply believed)'의 거대한 나머지로 환원하려 했습니다. 이는 '비판'이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중 일부를 유일하게 '진실'하거나 '합리적'인 것으로 확립하려는 시도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세르는 이러한 비판적 접근 방식을 거부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선원'에 비유하며, 거친 바다에서 구명정을 찾는 대신 "날씨에 단련된 키잡이처럼 선미에 머무른다"고 묘사됩니다. 즉, 세상의 혼돈과 불확실성을 피하려 하기보다 그 안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세르에게 비판은 철학의 유일한 소명이 아니며, "덜 불모적인 많은 다른 길과 소명들"이 존재합니다.
라투르는 세르의 '비비판적(acritical)' 접근 방식을 문학 비평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전통적인 문학 비평가(commentator)는 텍스트(text)보다 우월한 메타언어(metalanguage)를 사용하여 텍스트를 설명하고 분석합니다. 비평가의 어휘는 텍스트보다 훨씬 적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하나의 개념으로 수십 편의 소설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비평가가 텍스트를 지배하고 설명하는 '숙련도(mastery)'를 발휘합니다. 이러한 비판적 접근 방식은 결국 텍스트가 비평에 묻혀 사라지게 만듭니다.
반면 세르는 '해석자(reader)'로서, 텍스트와 비평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합니다(그림 2 참조). 세르에게는 메타언어가 존재하지 않으며, 설명하는 주체(텍스트 또는 비평)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결과적으로 어떠한 선행성이나 숙련도도 없습니다. 그는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Rerum)』와 같은 고대 텍스트를 단순히 '과학 이전의' 또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세르는 이 시가 '구름, 흐름, 유동, 유성, 변동, 난류, 혼돈'에 대해 다루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는 갈릴레오 물리학이 규정한 '고체와 낙하하는 물체'에 대한 좁은 레퍼토리와는 다르지만, 오늘날의 '유체 상태 물리학'이나 '카오스 물리학'과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세르는 고대 텍스트가 현대 과학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더 풍부한 어휘를 제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오직 하나의 신화가 있을 뿐이다: 모든 신화로부터 정화된 과학이라는 신화"라고 선언하며, 과학의 과거가 단순히 폐기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활성적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세르의 접근 방식은 칸트 이후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대한 회의와도 연결됩니다. 칸트는 정신(또는 이후에 무의식, 사회, 경제, 언어 등으로 대체된 중심)을 중심으로 사물이 움직이도록 만들었지만, 세르는 오히려 "검토 중인 텍스트가 항상 비평가보다 더 엄격하고, 더 생생하며, 더 현대적이고, 항상 더 풍부한 레퍼토리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며, 텍스트가 비평가를 압도한다고 역설합니다.
### 3. 비판 없는 계몽: 폭력과 대상의 재고
세르는 텍스트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접근 방식을 언어와 사물, 그리고 과학과 세계의 관계에도 확장합니다. 그는 사물들이 우리의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의 해석보다 더 풍부하고 정확하다고 봅니다. 세르의 최신 저서인 『다섯 가지 감각(Les Cinq Sens)』은 "알려지는 것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드문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백 년간의 관념론 이후 프랑스 철학자가 대담하게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심지어 '경험론자'의 면모를 보이는 독특한 현상으로 비유됩니다.
세르에게 과학적 지식은 세계를 환원하거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에 더해지는(added to the world)" 것이며, 세계의 "아름다움, 미스터리, 괴물들, 요컨대 신화와 문화의 일부"입니다. 그는 과학을 경멸하지도 숭배하지도 않으며, 리비우스(Livius)나 쥘 베른만큼 흥미롭고 호메로스(Homer)만큼 신화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세르의 핵심 주장은 과학 너머에 다른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도들(attempts)의 거대한 저장소"가 있으며, 그중 어느 것도 현재 과학에 의해 "극복되거나(overcome), 시대에 뒤떨어지거나(outmoded), 무력화되지(outwitted)"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언제든 사용할 수 있으며, 환원 불가능하고, 서로의 척도(measure)를 제공"합니다.
세르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이미지가 중심과 주변의 힘 관계를 확정적이고 되돌릴 수 없게 뒤바꾸는 것을 그리는 반면, '북서항로(North-West Passage)'라는 지리적 은유를 제시합니다. 이는 섬, 땅, 얼음덩어리들이 흩어져 있는 혼돈의 이미지로, "방향도, 명백한 숙련도도, 과학의 견고한 땅과 인문학의 부드러운 자원 사이의 명확한 경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가 말한 '과학의 확실한 길'은 이 미궁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라투르는 말합니다. 즉, 길은 있지만 "국부적이고(local) 일시적일 뿐"입니다.
'비판' 철학자들이 하나의 메타언어를 중심에 두고 주변의 모든 것을 그것에 종속시키려 하는 '제국 건설'에 비유된다면, 세르의 '비판 이전의' 철학은 중심이 없고 하나의 메타언어가 다른 것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주석은 '유전적 교차(cross-over)'와 같아서, 하나의 언어의 특성이 다른 기원의 속성들과 교차합니다. 그의 목표는 '오순절(Pentecost)'처럼 각 독자가 동일한 주장을 "자기 자신의 모국어"로 듣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특정 개념을 확장하거나 학문적 영역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만큼 '발명적(inventive)'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 4. 폭력, 질서, 무질서, 그리고 과학의 인류학
세르에게 '비판'이라는 긴 괄호가 닫힌 지금, 철학의 과제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비판' 철학이 종교를 종식시키고 모든 학문을 '과학의 확실한 길'로 이끌며, 사람들과 정신을 감각, 신념, 사물, 세계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다면, '비판 없는 계몽'은 어떤 모습일까요?
라투르는 세르 철학을 묘사할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긍정적(positive)'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콩트(Comte)가 이 단어에 부여한 모호한 후대성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극복(dépassement)', '지양(Aufhebung)', '능가(overcoming)', '압도(overmastering)'와 같은 단어들은 세르의 어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어떤 것을 가리지 않고, 아무것도 어떤 것을 묻지 않는다." 세르는 "부정(negation)"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이는 투쟁, 논쟁, 전쟁, 파괴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믿음과는 대조됩니다. 세르의 철학은 폭력에 대한 성찰이지만, 세계는 "긍정적(positive)이고 새로우며(new) 동시에 순수하다(innocent)"고 봅니다.
세르는 과학이 폭력을 제한하기보다 오히려 "부채질했다(fuel it)"고 보며, 히로시마를 역사의 진정한 전환점으로 간주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가 과학을 통해 종교의 어둠을 걷어내고, 객관성으로 주관성의 싸움을 대체하며, 민주주의로 권력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과 달리, 2세기 후 우리는 핵 참사를 통해 '완전한 광명과 완전한 어둠'이 융합되고, '객관성의 성장'을 통해 정치적 투쟁이 심화되며, '한 명의 지도자'가 모두를 죽일 수 있게 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세르에게는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폭력, 집단, 대상, 과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가 필요합니다.
세르에게 객관적 지식은 원시 사회의 영웅을 돌로 쳐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규모가 다르다(different in scale)"고 봅니다. 과학은 폭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으로 증가시킨다(fantastically increased)". 그는 구별, 분할, 분류를 믿는 대신, "과거와 현재, 문화와 과학, 개념과 데이터, 주체와 대상, 종교와 과학,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모든 분할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연구합니다. 그는 분할의 어느 한쪽에 서지 않고 "울타리 위에 앉아(sits on the fence)" 그 분할의 '추출(extraction)' 자체를 연구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르는 '과학의 인류학자'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이는 트로브리안드인이나 자메이카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연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탈레스, 카르노, 프리오지네(Prigogine)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즉, '비판'이라는 괄호가 닫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과제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분류되고 질서화되는지를 연구하는 '과학의 인류학'입니다.
세르의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관점 또한 기존 철학과 대조됩니다. 전통적으로 무질서(disorder)는 무시되거나 억압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고, 질서(order)가 규칙이며 무질서는 예외였습니다. 하지만 세르는 이 이미지를 뒤집습니다(그림 4b 참조). "무질서, 변동, 노이즈, 무작위성, 혼돈"이 규칙이며, 질서는 "작은 주머니, 안정성의 섬, 깨지기 쉽고 작은 군도"의 형태를 띠는 예외입니다. 따라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전환(transitions)과 분기(bifurcations)', 그리고 '바다의 무질서에서 질서의 산호초로 이어지는' 모든 해안선, 즉 '가장자리(fringes, edges, verges, rims, brims, auras)'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의 상당 부분을 '노이즈에서 질서가 발생하는 기적(miracle)'을 이해하기 위한 은유와 신화, 데이터 탐구에 할애합니다.
이러한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은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에 대한 논쟁을 완전히 뒤바꿉니다. 세르는 과학의 전체주의적 제국에 대항하여 변두리를 옹호하거나, 명료함과 엄격함의 폭정에 대항하여 모호한 사고를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명료함과 엄격함, 모든 과학을 지지하지만, 그것들이 '국부적인(local)' 성취로 여겨져야 한다"는 단서를 붙입니다. 과학은 세계를 대체하거나 다른 어떤 메타언어로도 대체될 수 없습니다. 과학은 '빛(lumen)'과 '암흑(nutmen)'의 새로운 혼합이며, 새로운 '인류학적 퍼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국부적인 것에서 전체적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과학의 확장이나 하나의 메타언어가 다른 언어를 대체하는 것은 "폭력으로 포장되고 또 다시 포장되어야 한다"고 세르는 말합니다. 그의 핵심 질문은 "과학이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시키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르는 과학 전체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담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과학이 "세계에 다양성을 더할 때" 사용되어야 하고, "다양성을 감소시킬 때" 거부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는 과학과 세계의 관계를 식물 유전학자와 원시림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식물 육종가들이 소수의 품종을 추출하여 생산성이 높지만 취약한 순수 혈통을 만들듯이, 철학자는 원시림의 다양성을 통해 번성하며,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색하고 육성합니다. 세르에게 철학은 과학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연구 전선 너머에서, 원시림 깊숙이, 세계 속으로 나아가 예상치 못한 잡종들을 재배하는" 역할을 합니다. 철학은 과학의 결과를 예측하거나 과학을 인류학적 기원 속에 다시 심어줌으로써, 또는 "과학을 폭력의 일부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과학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 5. 결론: 세르의 난해한 스타일과 '세계'라는 사운드트랙
세르의 글은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문체가 그의 철학적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상가들은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보지 않고, 주장 자체가 의미를 얻기 위해 실험해야 할 '재료'로 간주합니다. 그들의 가장 깊은 내용은 종종 '스타일' 그 자체에 있습니다.
세르의 글이 어려운 이유는 그가 '학자들의 평범한 언어'를 변형시키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그의 언어는 "너무 평범해서(too plain)", 즉 학문적 영역에 갇히지 않은 명료함을 가집니다. 우리는 학과 간의 갈등으로 규정된 '봉토(feuds)' 안에서 사고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특정 학문 영역에 속하지 않는 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세르는 경계를 넘나들며 사고하고 글을 씁니다. 그는 하나의 메타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가 주석을 다는 대상을 자신의 주석으로 대체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텍스트를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읽는 전설(legend)"처럼 삽입합니다.
이러한 방식 때문에 독자들은 세르가 이야기하는 우화나 풍경, 과학 이론의 '원전'이 어디에 있는지 종종 궁금해하게 됩니다. 세르의 텍스트는 원전을 "텍스트 안에 부재하게 하거나 현재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의 눈앞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라투르는 세르의 글이 어려운 동시에 읽기 쉽다고 말합니다.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다루는 바를 직접적으로, 스스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쉬운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읽기 위해 우리가 아는 세계를 포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르에게 텍스트는 세계의 유용하거나 위험한 대체물이 아닙니다. 모든 다른 것들처럼, 텍스트는 세계에 "더해져야(added to the world)" 합니다.
라투르는 세르의 텍스트가 "전체적이고, 인상적이며, 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와 함께 읽을 때 "기술적이고, 정확하며, 정밀하게"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세르는 단지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제공할 뿐입니다. 라투르는 이러한 '겸손한(modest)' 의미에서 세르가 '비판 없는 계몽'을 제시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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