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th Lord (2012) *Deleuze and Kant*. Cambridge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 [!INFO] > Type:: [[chapter]] > Title:: Deleuze and Kant > Author(s): [[Beth Lord]] > Year:: 2012 > Tags:: > DOI:: > Citekey:: smith_notitle_2012 > ZoteroURI:: [Open in Zotero: Deleuze and Kant](zotero://select/items/@smith_notitle_2012) > ReviewedDate:: [[2025-03-22]] > Related Note: 202503291209 ## Citation ```latex [@smith_notitle_2012] ``` ## Summary ## Annotation 들뢰즈가 칸트에게 가장 매료된 지점이 “Kant’s answer to this question defines transcendental idealism, and forms the core of Deleuze’s lifelong fascination with Kant.” (Lord, 2012, p. 82) “the determination of the being of the self (“I am”) by its own thinking activity (“I think”).” (Lord, 2012, p. 82) > “The difference of thought from its being” (Lord, 2012, p. 82) 스스로를 생각하는 자신에서 생각하는 자신과 자신, 그리고 주체는 분리되는 관계. 인식 주체의 초월론적 조건을 탐구하면서도, 사유가 도달하지 못하는 물자체(존재 그 자체)의 영역을 남겨둠. “We cannot reduce the Deleuze–Kant relation to one of rivalry or criticism, but should instead see Kant as Deleuze’s co-apostle, trying to reveal the same mystery.” (Lord, 2012, p. 83) 이 지점은 들뢰즈가 칸트를 비판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바로 difference를 가리고 determination을 external로 만들어 단순한 epistemic procedure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 Thus a pure, productive, internal difference is suppressed in favor of a restrictive external separation reliant on a self-identical subject. This separation, a defining move of transcendental idealism, is for Deleuze a betrayal of transcendental philosophy, which on Kant’s model does not delve deeply enough into the differential conditions it briefly identifies. [@smith_notitle_2012, 83-84] > > 이렇게 해서 순수하고 생산적인 내적 차이는 억제되고, 자기 동일적인 주체에 의존하는 제한적인 외적 분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와 같은 분리는 선험적 관념론의 결정적인 조치이며, 들뢰즈에게 그것은 선험철학에 대한 배신이다. 칸트의 모델은 차이를 구성하는 선험적 조건들을 잠시 식별하는 데 그치고, 그 조건들 속으로 충분히 깊이 파고들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들뢰즈가 지지하는 지점은 Kant’s recognition of the difference of being and thought as an internally determining and ontologically productive difference. 들뢰즈가 비판하는 칸트의 지점은 칸트의 경험론과 그의 관념론 (idealism) 그리고 들뢰즈는 칸트의 “the transcendental” and “ideas” 의 한계를 무너뜨리고자 했다 → a philosophy of difference. 들뢰즈에게 칸트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Empiricism and Subjectivity [@deleuze_empiricism_1991, 111]에서로 “the difference internal to the Being which thinks itself”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풍부하게 나온 것이 [@deleuze_difference_1994] 에서 들어가는 챕터인 *On Four Poetic Formulas That Might Summarize the Kantian Philosophy* [@deleuze_four_1998] 와 1978년 강의에서였다 [@deleuze_kant_1978_1]. > Perhaps this is the supreme act of philosophy: not so much to think THE plane of immanence as to show that it is there, unthought in every plane, and to think it in this way as the outside and inside of thought, as the not-external outside and the not-internal inside – that which cannot be thought and yet must be thought, which was thought once, as Christ was incarnated once, in order to show, that one time, the possibility of the impossible. Thus Spinoza is the Christ of philosophers, and the greatest philosophers are hardly more than apostles who distance themselves from or draw near to this mystery. [@deleuze_what_1994, 59-60] > > 어쩌면 이것이 철학의 최고의 행위일 것이다. 즉, ‘내재성의 평면’을 사고하는 것이기보다는, 그것이 모든 평면 속에 사고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 방식으로 사고 속의 외부이자 내부로서—외부적이지 않은 외부, 내부적이지 않은 내부로서—그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결코 사유될 수 없으면서도 반드시 사유되어야 하는 것, 단 한 번 사유되었으며, 그 한 번은 마치 그리스도가 한 번 육화되었던 것처럼,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한 단 한 번의 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철학자들의 그리스도이며,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이란 이 신비로움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멀어지며 그 곁을 맴도는 사도들에 불과하다. 합리주의자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신의 무한한 지성에 의해 완전한 개념 안에서 사유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사유된다는 것은 곧 존재로 이끌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선험적 관념론에서는 idealism “Fundamental to transcendental idealism, by contrast, is the denial of the intelligibility of the genesis and complete determination of beings” (Lord, 2012, p. 84) 인간의 정신은 이러한 지성에 대한 관념, 그리고 존재가 어떻게 생성되고 완전히 규정되는지에 대한 관념들은 가지고 있다. 칸트가 말하듯, 이러한 ‘선험적 관념들’은 사유될 수는 있지만 인식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디어는: the procedure of applying concepts to intuitions. 인간의 정신은 사유함으로써 대상을 산출하는 무한한 지성의 관념과 같지 않다. 인간의 정신은 “오직 사유할 수 있을” 뿐이며,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어진 것들에 자신의 개념들을 적용해야만 한다. 범주들은 주어진 것에 외적으로 적용되어, 그것을 표상되고 인식 가능한 “일반적 대상(object in general)”으로 규정한다. 규정(determination)이란, 직관된 재료(intuited material)에 그것을 가능한 경험의 대상(object of possible experience)으로 만드는 개념들(concepts)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 재료의 생성(genesis)과 내적 규정(internal determination)은 우리에게 접근 불가능하며, 반드시 “미규정된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remain undetermined).” 들뢰즈는 이러한 선험적 관념론을 비판하는데 바로 being and thought를 나눔으로 사유와 존재를 분리함으로써 존재의 생성(genesis)에 대한 어떠한 탐구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들뢰즈는 칸트가 사유의 구조들을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들에 적용되는 방식으로만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경험주의 [[empiricism]]’를 비판한다. 이때 개념도, 이념도 존재와의 내적 연결을 갖지 않으며, 존재로부터 유래하지도, 존재를 생성하지도 않는다. > “The Transcendental Aesthetic, “the science of the sensible,” becomes founded on “what can be represented in the sensible,” and not on the “being of the sensible” (DR .56-57).” (Lord, 2012, p. 85) > > 선험적 감성론, 즉 “감각적인 것의 학문”은 “감각 속에서 표상될 수 있는 것”에 기반을 두게 되며, “감각적인 것의 존재”에는 기반을 두지 않는다 ([@deleuze_difference_1994] 『차이와 반복』, 56–57쪽). 이러한 문제점은 칸트 시대의 [[Salomon Maimon|Maimon]]에 의해서도 지적되었다. Maimon’s , 1790 *Essay on Transcendental Philosophy* 『순수이성비판』의 주장들이 동시에 합리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비판에 노출된다. 마이몬에 의하면 칸트의 주장은 fact of experience를 세우지도 our right to apply concept to it을 세우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 “How can the understanding submit something (the given object) to its power (to its rules) that is not in its power? In the Kantian system, namely where sensibility and understanding are two totally different sources of our cognition, this question is insoluble.” > > “이해가 자기 권한 밖에 있는 어떤 것(주어진 대상)을 어떻게 자기 권한(자신의 규칙)에 복속시킬 수 있는가? 감성과 오성이 인식의 완전히 다른 두 근원으로 간주되는 칸트 체계 안에서는, 이 질문은 해결 불가능하다.” 마이몬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의거해, 유한한 understanding은 무한한 interllect의 양태 mode이며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즉, 대상을 직관함 (intuiting) 으로써 그것을 산출한다. 따라서 실제 경험은 오성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성의 결과이며, 이는 “미분(differentials)”이라 불리는 성질 생성의 규칙에 근거한다. 이러한 순수한 defferences > 이러한 순수한 차이들로부터 ‘오성의 관념(ideas of understanding)’이라 불리는 강도적 성질들이 흘러나오며, 그것들은 상상력과 표상을 통해 감성의 대상으로 최종적으로 ‘고정’된다. 감성의 내용이 유한한 오성에 의해 산출되며 사고의 내용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개념을 감성의 내용에 적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85-96) 그러므로 경험론의 실수는 intuition 직관이나 the determination of things through concept을 밖으로 떼어버림으로해서 그 사이를 dogmatism 독단주의로 채운다. > 도그마주의는 규정 가능한 대상 determinable (이건 시간과도 연결되지 않나?)과 그것의 개념적 규정 (conceptual determination, 이것도 I think)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전자가 후자에 의해 선험적으로 완결적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하거나(라이프니츠적 합리주의), 양자가 필연적으로 새로운 비결정적 동일성 속으로 통합된다고 주장한다(헤겔적 관념론). the determinable과 determinant relation이 thing to be determined의 external 로 존재함. 여기서 시간이 내적 internally 라고 표현하는데 즉 appears as the form of interiority → internal interiority (inner sense)는 exteriority가 entails as much immanence 를 하는 반면 interiority entails transcendence → 시간이 우리 안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interior to time > and for this reason time always separtes us from what determines us by affecting it [@deleuze_four_1998, 31] | **Determinable** | 규정되기 전의 상태, 규정 가능성 있는 것 | **잠재적 존재** | | ------------------------ | ----------------------- | ----------- | | **To be determined** | 규정되어야 하는 당위나 과정 | **운동, 생성** | | **Determinability** | 규정될 수 있는 능력 또는 구조 | **가능성의 조건** | | **Determinant relation** | 규정 주체와 대상 간의 구조적 관계 | **현실화 과정** | **determinable** (규정 가능한 것): - 형상(form)이나 개념이 적용되기를 기다리는 내용(matter) 또는 기초적인 가능성. - 칸트에게서는 **감성의 자료**가 **범주에 의해 규정되기 전의 상태**. - 헤겔에게서는 **아직 자기-규정되지 않은 추상적 존재**. - 들뢰즈에게서는 **차이들이 작용하여 구체화되기 전의 생성적 조건**. - “경험 이전의 직관은 determinable한 대상이다.” **To be determined** (규정되어야 할 것) - 가능성(potentiality)이 현실성(actuality)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나 과정을 의미. - ‘규정 가능한 것’(determinable)의 존재론적 요청. - 규정받는 순간 객관성이나 실재성을 획득하게 됨. - “감각적 직관은 오성 understanding 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to be determined).” **Determinability** (규정성 / 규정 가능성) - **가능성의 구조**에 가까운 개념. - 어떤 것이 형식이나 구조, 법칙에 의해 정해질 수 있다는 잠재적 조건. - 들뢰즈에서는 종종 차이들의 장에서 생성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됨. - “현상은 그것의 규정성(determinability)에 의해 개념적 인식의 대상이 된다.” **Determinant relation** (규정하는 관계) - 칸트에게서는 오성(개념)이 감각 자료를 규정하는 구조. - 헤겔에게서는 개념이 자기 자신을 부정·매개·지양하며 형성하는 자기 규정 과정. - 들뢰즈에게는 차이들이 현실화되며 구체적인 구성으로 진입하는 장(field). 외적으로 주어지는 규정 조건들은 단지 정도 차이만 있는 “일반적 대상들”과 가능한 경험의 총량을 제공할 뿐이다. 칸트의 접근은 “지나치게 경험주의적”이며, 개념과 표상 사이의 피상적인 관계만을 탐구할 뿐, 그 표상들을 그것이 되게 만드는 “깊이” 속으로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들뢰즈의 선험적 경험주의는 바로 이 지점을 contrast한다. > “It is concerned with what is immanent to the empirical, the transcendental conditions that generate the real (where “real” is understood in the Kantian sense of qualitative or intensive, that which can only be sensed and not known a priori).” (Lord, 2012, p. 87) > > 이것은 경험적인 것에 내재하는 것, 즉 실재를 생성하는 선험적 조건들과 관련된다(여기서 “실재”는 칸트적 의미에서 질적이거나 강도적인 것으로, 오직 감각될 수 있을 뿐 선험적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칸트의 noumenon (물자체)의 determinate 버전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들뢰즈는 칸트의 물자체에 대해 보다 규정적인 형태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는 현상 phenomena과 초월적 관계를 맺는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에 가장 밀접한 물자체, 즉 현상에 내재하며 그것을 *내적 immanently*으로 생성하는 물자체를 추구한다 (『차이와 반복』, NNN쪽). > “Whereas Kant’s noumenon is the indeterminate thought of an intelligible ground, Deleuze’s is the being of the sensible which is both determinable and determining, and which can only be sensed or encountered, not represented.” (Lord, 2012, p. 87) > > 칸트에게 물자체는 지성적인 근거에 대한 비규정적인 indeterminate 사유인 반면, 들뢰즈에게 물자체는 감각적인 것의 존재이며, 이는 규정 가능하면서 동시에 규정하는 것이고, 표상될 수는 없으며 오직 감각되거나 마주침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 칸트에게 존재의 생성적 조건들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우리를 선험적 이념들(transcendental ideas)로 이끈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들의 설명력은 가능한 경험의 개념들 영역(the realm of concepts of possible experience)에만 제한된다. 그것들은 존재의 생성에 관한 “문제들”이며, 순수이성의 변증론에서 오류추리(잘못된 추리, paralogisms), 모순율(antinomies), 이상(ideal)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 The entire Kantian critique amounts to objecting against Descartes that it is impossible for determination to bear directly upon the undetermined. The determination (“I think”) obviously implies something undetermined (“I am”), but nothing so far tells us how it is that this undetermined is determinable by the “I think” ... Kant therefore adds a third logical value: the determinable, or rather the form in which the undetermined is determinable (by the determination). This third value suffices to make logic a transcendental instance. It amounts to the discovery of Difference – no longer in the form of an empirical difference between two determinations, but in the form of a transcendental Difference between the Determination as such and what it determines; no longer in the form of an external difference which separates, but in the form of an internal Difference which establishes an a priori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being. [@deleuze_difference_1994, 85-86] > > 칸트의 전체 비판 철학은, 데카르트에 대한 반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규정(determination)이 비규정적인 것(undetermined)에 직접 작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규정은 분명히 어떤 비규정적인 것, 즉 “나는 존재한다”를 함축하지만, 이 비규정적인 것이 어떻게 “나는 생각한다”에 의해 규정 가능하게 되는지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칸트는 제3의 논리적 가치를 추가한다.== 그것은 규정 가능한 것(the determinable),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비규정적인 것이 규정에 의해 규정 가능하게 되는 형식이다==. 이 제3의 가치는 논리를 선험적 인스턴스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차이(Difference)의 발견에 해당한다. 더 이상 두 규정 사이의 경험적 차이가 아니라, 규정 자체와 그것이 규정하는 것 사이의 선험적 차이로서의 Difference이다. 더 이상 외적이고 분리적인 차이가 아니라, 사유와 존재 사이에 선험적으로 관계를 설정하는 내적 차이로서의 Difference인 것이다. 들뢰즈의 논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25절에서 덧붙인 중요한 주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로 규정되는 나의 존재가 이미 주어져 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동시에 나의 존재는 즉각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 ==즉 “나는 생각한다”에 의해 결합되어야 할 다양한 표상들의 복합은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복합은 반드시 시간 속에서 직관되어야 하며, 바로 그 점에서 나의 비규정적인 존재는 “나는 생각한다”에 의해 규정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로써 “나는 생각한다”는 자기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을 규정하게 된다. 즉, ==시간 속에 주어진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존재를 자율적 존재로서 규정할 수 없으며, 다만 나의 사유의 자발성, 다시 말해 규정 행위 자체를 나에게 표상할 수 있을 뿐이다.” 칸트의 “균열된 나(fractured I)”는 규정을 하나의 원초적인 차이, 즉 비규정적인 존재와 그것을 규정하는 사유의 차이에 근거를 둔다. 균열된 나는 비규정적인 존재이자, 그 존재의 규정 가능성이며, 또한 그것을 규정하는 사유의 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나’는 들뢰즈가 말하는 “이념(Idea)”과 동일한 문제적 통일성을 지닌다. 들뢰즈에게 > 이념은 세 가지 국면을 가진다. 그것은 대상에 대해 비규정적이며, 경험적 대상에 대해 규정 가능하고, 오성의 개념에 대해 무한 규정의 이념을 지닌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이 이념들이 바로 균열된 코기토(Cogito)의 세 가지 측면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즉, 비규정적 존재로서의 “나는 존재한다(I am)”, 그 존재가 규정 가능한 형식으로서의 시간, 그리고 규정으로서의 “나는 생각한다(I think)”가 그것이다. 이념은 정확히 말해 코기토의 사유들이며, 사유의 미분들이다. (『차이와 반복』, ,169) - 즉, 비규정적 존재로서의 “나는 존재한다(I am)”, - 그 존재가 규정 가능한 형식으로서의 시간, - 그리고 규정으로서의 “나는 생각한다(I think)” 이념(Idea)은 “균열된 나(fractured I)”와 마찬가지로, 실제 경험의 규정과 생성에서 시간의 선차성(the priority of time)을 가리킨다. “이념은 정확히 말해 균열된 코기토의 사유들이다”라는 말은, 이념이 사유가 자신의 존재를 시간의 전개 속에서 규정하는 활동 자체를 수행을 성립시키기(enact) 때문이다. > “Time is the form of the determinability of being by thought.” (Lord, 2012, p. 93) 칸트에게 있어서 I에 internal 하고 끊임없이 I와 다른 I를 생산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는 시간은 internal to the idea, "its unfolding is the activity of the Idea determining itself and preserving its own indeterminacy" (93) 칸트에게 있어 ‘나(I)’ 내부에 내재한 형식은 ‘나’를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다른 것으로 산출한다. 반면 들뢰즈에게 시간은 이념(Idea) 내부에 내재하며, 그 전개는 이념이 스스로를 규정하면서도 자신의 비규정성을 보존하는 활동이다. 시간 = 사유와 존재 사이의 선험적 관계를 설정하는 pure difference [@deleuze_difference_1994, 86] 이는 마치 사유와 존재가 개념과 객체로서 서로 대립하며 하나의 시간이라는 그릇 안에서 관계를 맺는 것처럼, 사유가 시간 안에서 존재를 규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균열된 나(fractured I)와 이념(Idea) 모두의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이며==, 사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그 과정 자체가 시간의 전개이자 차이의 작용이다. “시간 그 자체가 전개되는 것이지, 사물들이 그 안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deleuze_difference_1994, 88]라는 말이 바로 이를 뜻한다. 그러니까 차이가 생겨서 초월적 무엇이 그 사이를 채우는게 아니라 내 스스로가 “The fracture in the I is “quickly filled by a new form of identity” and obscured by the external difference between spontaneity and receptivity [@deleuze_difference_1994, 94] ‘나(I)’의 균열은 “곧 새로운 동일성의 형식에 의해 메워지며,” 자발성과 수동성 사이의 외적 차이에 의해 가려지게 된다 (들뢰즈, 『차이와 반복』, 94쪽). ### Related ```dataview LIST FROM [[@smith_notitle_2012]] and -"Plans" and -"resour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