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therine Malabou (2012) *Ontology of the Accident: An Essay on Destructive Plasticity*. : Polity. > [!INFO] > Type:: [[]] > Title:: Ontology of the Accident: An Essay on Destructive Plasticity > Author(s): [[Catherine Malabou]] > Year:: 2012 > Tags:: > DOI:: > Citekey:: malabou_ontology_2012 > ZoteroURI:: [Open in Zotero: Ontology of the Accident: An Essay on Destructive Plasticity](zotero://select/items/@malabou_ontology_2012) > ReviewedDate:: [[2025-02-26]] > Related Note: 202503051327 ## Citation ```latex [@malabou_ontology_2012] ``` ## Summary ## Annotation “The changes and metamorphoses of a life”을 단지 “simply the natural unfolding of circumstance, appear as the marks and wrinkles of a continuous, almost logical, process of fulfillment that leads ultimately to death” (Malabou, 2012, p. 1) 로 여기가 만든다. 하지만, 이 점진적인 실존적이고 생물학적인 경향은, 이 주제를 그 자체로 바꿀 수 있을 뿐이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복숭아 같은 피부 밑에 숨겨져 있는 다이너마이트처럼 겉으로 보기에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 자신을 수용하는 이 정체성의 가소성의 힘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 “As a result of serious trauma, or sometimes for no reason at all, the path splits and a new, unprecedented persona comes to live with the former person, and eventually takes up all the room.” (Malabou, 2012, p. 1) > > "심각한 트라우마로 인해, 또는 때로는 전혀 이유 없이 경로가 갈라지고 전례 없는 새로운 페르소나가 이전 사람과 함께 살게 되어 결국 모든 공간을 차지하게 됩니다." 현재까지 볼 때는: 삶은 dialectical 한 발전을 이루고 이러한 자연스러운 발전은 갑작스런 event accident을 통해서 갑작스런 방해를 받는다. 그리고 이렇게 방해를 받는 형태는 사건을 통해 상처를 입고 다른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수치는 해결되지 않은 유아적 갈등, 억압된 사람들의 압력, 갑작스런 환영의 귀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변증법적 발전의 한계점을 넘어서고자 하는 주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The suddenly deviant, deviating form of these lives is [[explosive plasticity]].” (Malabou, 2012, p. 3) 과학, 의학, 예술, 그리고 교육에서 [[Plasticity]]는 언제나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Plasticity refers to an equilibrium between the receiving and giving of form.” (Malabou, 2012, p. 3)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종의 자연 조각으로 이해되고, 경험에 의해 모델링되고, 우리를 모든 사건, 간격, 그리고 미래와 함께 역사의 주체로, 유일하고, 인식 가능하고, 식별할 수 있는 역사의 주체로 만드는 긍적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신경학에서 신경세포 연결의 변형, 대뇌 접촉의 위반은 [[Plasticity|가소성]]의 사례로 간주되지 않는다. “Plasticity is only evoked when there is a change in the volume or form of neuronal connections that impacts the construction of personality.” (Malabou, 2012, p. 3) "아무도 자연스럽게 '파괴의 조형 예술(plastic art of destruction)'에 대해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파괴 또한 형성적 과정(formative process)이다. 부서진 얼굴은 여전히 얼굴이며, 절단된 신체는 여전히 사지의 흔적을 남기고, 트라우마를 입은 정신도 여전히 정신으로 남아 있다. 파괴는 자체적인 조각 도구를 지닌다." 여기서 말라부가 예시를 든 two opposite: construction of potentialization and deconstruction of diminishiment. “Construction is counter­ balanced by a form of destruction.” (Malabou, 2012, p. 4). “Organic matter is like the sculptors clay or marble: it produces its refuse and scraps.” (Malabou, 2012, p. 5) 유기물은 조각가의 점토나 대리석처럼 living form을 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잔여물을 유기적으로 배출하고 evacuations 그러한 과정에서 밀도를 드러낸다. 가소성은 정신분석과 신경과학에서 이러한 의미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과 동일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과거와 미래사이에서의 균형과 "the giving and receiving of form"하는 과정을 수행하는 삶의 특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형태, force, general identity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Catherine Malabou|Malabou]]는 바로 이러한 회복하지 않는 plasticity, plasticity without recompense or scar, one that cuts the thread of life in two or more segments that no longer meet, nevertheless has its own phenomenology that demands articulation 이라는 지점이 "never connected to reality, neglected by psychoanalysis, ignored by phi losophy, nameless in neurology (6)" 그러므로 규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plasticity이다, 즉 나 자신과 완전 다른 subjectivity를 구성하는, "impose a new form on their old form [...] in a state of emergency, without foundation, bareback, sockless" (6), inflecting the course of a unexpected, unpredictable life .. ### 1 도망갈 수 없는 변신 부정적 유동성 서구의 상상 속에서는 Metamorphosis가 존재의 실제적이고 총체적인 일탈 (total devia tion of being)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드물다. 오비디우스(Ovid)의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 의 경우에서도 external form of the being (form)은 change 하고 transform할지라도 its nature and substace remains. 지혜의 여신 Metis의 경우에도 변신은 한정적이다. 사이클이 한번 돌면 no possibility of further innovation. 이는 다른 신들또한 비슷하며 "range of possibilities"라는 한계점을 가진다. 단순한 도피를 위한 속임수(trick), 전략(strategy), 가면(mask), 포이보스(Phoebus)의 추격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월계수 나무로 변신한 다프네(Daphne), 을 넘어선 true nature of being, 즉 identity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보다 깊은 실존적 지하세계(existential underground)를 배반하는 행위로 여겨지게된다. 이렇게 unrecognisable being이 되는 transformation은 내면적 조각(inner sculpture)의 탈피(molting)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러한 변신에는 end of its tether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변신은 도피가 아닌 도피의 포기를 the form of the impossibility of fleeing를 인정하는 것은 극한의 긴장(extreme tension), 고통(pain), 혹은 불안(malaise)이 존재를 존재하지 않는 '바깥(outside)'으로 밀어붙일 때, 그러나 그 바깥이 실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거 딱 지금 포모 포스터의 분석이랑 똑같은거 아닌가. 트라우마를 받았고 도피하려고 하지만 외부가 없고(1단계) 그리고 그로인해 도피 자체를 다시 말해, 어떤 형태의 도피 또는 그 대용물을 형성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 즉 도피의 불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버려지고, 다시 분열된 정체성, 자기 자신을 반영하지 않는 정체성, 자신의 변화를 살아가지 않는 정체성, 변화에 주체성을 부여하지 않는 정체성으로 나아가는 것== > 파괴적 가소성은 타자가 절대적으로 부재한 자리에서 타자성을 나타나게 하거나 형성하도록 한다. 가소성은 초월, 도피, 탈출이 더 이상 불가능할 때 드러나는 타자성의 형식이다. 이 상황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타자는 자기 자신에게 타자가 되는 것이다. > > “Destructive plasticity enables the appearance or formation of alterity where the other is absolutely lacking. Plasticity is the form of alterity when no transcendence, flight or escape is left. The only other that exists in this circumstance is being other to the self.” (Malabou, 2012, p. 11) Phoebus포이보스를 피해 월계수 나무로 변한 다프네 또한 피할 수 없음에 월계수 나무로 변하지만 그럼에도 이 변형은 일종의 구원이자 낯선 구원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이다. 여기서 metamorphosis 나무는 “도망갈 수 없음”의 형태 form 이다. 도망이 유일하게 가능한 상황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도망 불가능. 이에 반해, 파괴적 가소성에 의해 형성된 도피적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로부터 도피하며, 구원이나 속죄를 알지 못한 채 누구를 위해서도—특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무껍질도, 갑옷도, 가지도 지니지 않는다. 동일한 피부를 유지한 채 영원히 인식될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들뢰즈가 말하는 다이아그램이 근본적인 부족함이 있는데 그것은 들뢰즈의 새로운 다이아그램이 근본적인 변화 즉 Identity의 변화가 아니며 (force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는 결국 처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그 다이아그램이 정말로 변화를 이어가려면 고리를 끊어야하는 것일까? 저기서 원은 hauntology의 원도 해당되는 것일까?== ==이 말이 가장 중요하다 그녀가 말하는 Plasticity는 좀 더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다이아그램의 종류로 보이며 더이상 cliche의 사용이 불가능 한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녀가 예시로 드는 것은 다프네로 다프네가 포에버스에게 쫓겨 더이상 도망갈 곳이 없을 때 그녀는 나무로 변한다. Plasticity 는 들뢰즈의 다이아그램에서 다른 모습 즉 다이아그램이 언제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는 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Flee라는 단어의 해석은 좀더 정확하게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들뢰즈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을 긍적적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반대로 말라부는 새로움을 트라우마와 연결시키는 것 같다.== ==즉 다시말해서 실질적인 트라우마의 시기가 오면서 변형으로만 기능했던 것이 이제는 80-90년대의 트라우마에대한 변형들로 인해 완전한 변형 transformation이 가능하게 혹은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 “In all these cases what was striking was that once the metamorphosis took place, however explicable its causes (unemployment, relational difficulties, illness), its effects were absolutely unexpected, and it became incomprehensible, displacing its cause, breaking all etiological links.” (Malabou, 2012, p. 13) > > "이 모든 경우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변형이 일단 일어나면, 그 원인이 아무리 설명 가능하더라도(실업, 관계적 어려움, 질병 등), 그 효과는 전혀 예측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하며, 원인을 대체하고 모든 인과적 연결을 단절시킨다는 것이다." (Malabou, 2012, p. 13)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strangers가 된다. “it was the fact that they became new people” (Malabou, 2012, p. 13) "주체와 자아의 최악의 불화, 가장 심각한 갈등은 비극적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무관심과 냉담함이 그 신호입니다.” (Malabou, 2012, p. 14) 카프카의 변신을 예시로 든다면 존재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없는 상태, 해충이 된 그는 계속해서 타락의 모드에서 살고, 동물적 고독에 더 깊이 파고 들고, 부조리와 삶의 불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하지만 어떻게 될까요? 그는 그냥 계속 살아갑니다. “Metamorphosis is existence itself, untying identity instead of reassembling it.” (Malabou, 2012, p. 15) 하지만 그럼에도 텍스트는 하나의 고치처럼 인간의 목소리를 보존한다. 이 보이지 않는 나비는 짐승의 목소리가 아닌, 인간의 목소리, 작가의 목소리를 지닌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으며, **비록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독특한 존재로 경험할지라도 완전히 고유한 것으로 남지 않는 변신이란 무엇인가?** 카프카가 그의 편지에서 쓰듯, 예술은 구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존할 수 있다. 결국, 그레고르 안에서 다프네의 나무껍질을 알아보지 않을 수는 없다. 즉 이것또한 완전한 변신은 아닌 것. 만약 들뢰즈가 카프카의 해석이 카프카가 "실패했다"고 결론짓는 점에서 부당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즉 그레고르는 다른것이 되는 becoming이 되는 effectiveness를 발견한다. 들뢰즈는 "그레고르의 동물-되기, 그가 풍뎅이, 사슴벌레, 쇠똥구리, 바퀴벌레가 되어가는 과정이 가족 삼각형뿐만 아니라, 특히 관료적·상업적 삼각형과의 관계 속에서 강렬한 도피선을 형성한다"고 본다 [@deleuze_kafka_1986, 14] “The result of the metamorphosis is precisely a being in flight, one who constitutes a way out in the self, forming “a single process, a unique method that replaces subjectivity.” [@deleuze_kafka_1986, 36] - becoming-animal - an arrangement - becoming an animal - a form > 즉, 그레고르의 궤적은 여전히 아버지-어머니-여동생이라는 가족 삼각형 안에 갇혀 있다. "동물-되기에 내맡겨진 그레고르는 결국 가족에 의해 다시 오이디푸스화되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레고르의 죽음은 변신을 사물의 질서 속으로 되돌려 놓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변신 자체를 무효화한다. 가족은 변신하지 않으며, 그레고르는 끝내 가족을 알아보지 않을 수도, 그들을 부르거나,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이라 이름 붙이는 것을 멈추지도 않는다. (16) 들뢰즈에게 있어서 진정한 변신은,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becoming-form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 것이다 . According to him, “as long as there is form, there is still reterritorialization.” [@deleuze_kafka_1986, 6] > 나는 전통적으로 이해되는 변신의 한계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동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형태 자체가 아니라, 형태가 변형되는 존재의 본질과 분리되어 사고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형태가 단순히 피부, 의복, 장식으로 제시되며, 본질적인 것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17) “It is not form that is the problem; it’s the fact that form can be thought separately from the nature ofthe being that transforms itself.” (Malabou, 2012, p. 17) ==데카르트적 이분화가 문제라는 걸까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금 지적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은 essence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에센스가 있다 없다를 떠나서 form과 분리된 에센스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In meta­ physics, form can always change, but the nature of being persists. It is this that is debatable—not the concept of form itself, which it is absurd to pretend to do without.” (Malabou, 2012, p. 17)== > “We must find a way to think a mutation that engages both form and being, a new form that is literally a form of being.” (Malabou, 2012, p. 17) “According to him, “as long as there is form, there is still reterritorialization.”” (Malabou, 2012, p. 17) (Deleuze, Kafka, p. 6.) 글쓴이는 전통적으로 생각되는 변형의 한계의 문제가 그것들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여행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arrangement가 아니라 형태의 변형에서 멈췄기 때문에 한계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형하는 nature of being 것과 따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형태는 피부처럼 언제나 변화하지만 그 에센스는 변화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의 비판들은 형이상학이 지속적으로 에센스와 형태 form을 연구해 왔다는 것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 “In meta­ physics, form can always change, but the nature of being persists. It is this that is debatable—not the concept of form itself, which it is absurd to pretend to do without.” (Malabou, 2012, p. 17) 우리는 그러므로 형태와 being이 함께 변화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레고르 (비론 우리가 그전의 그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가 형태를 변화시켰다고 할 지라도 그는 remains the same, awaiting meaning. 그는 여전히 inner monologue에 있고 transformed in substance를 하지 않았다, which is precisely why he suffers. 이러한 두가지의 변형 1. 도망갈 곳이 없는 상태 갑작스런 타의에 의한 변형 2. form and essence가 함께 생각되는 변형 둘 다 각자의 변형을 가지고 있는 변형 그래서 destructive (1) plasticity (2) > “파괴적 가소성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것은 고통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 즉 이전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 형태의 출현이다. 이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 무감각, 망각, 그리고 상징적 기준점의 상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 버려짐 속에서도 또 다른 영혼과 몸의 합성은 여전히 하나의 형식, 하나의 전체, 하나의 체계, 하나의 삶을 이룬다.” (Malabou, 2012, p. 18) 프로이드는 충동이 form을 창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so called “**example**” sadism and masochism 하지만 프로이드는 이 두개의 예시 밖에 제시하지 못했다. ### 2. 어떻게 죽음 충동을 시각화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와 신경생물학 뇌 병리에 의해 형성된 정체성은 이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 있으며, 프로이트가 놓쳤거나 보기를 꺼렸던 예시나 유형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는 마치 그가 신경학자로서의 직업을 거부했던 것만큼이나 강하게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_생존자의 정체성_ (the formation of a survivor’s identity),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실존적·생명적 구성이다. 이는 뇌 손상으로 인해 형성된 정체성이며, 비록 자기 자신으로부터 결여된 존재일지라도 분명히 하나의 심적 구조, 하나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드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말라부는 neurobiological research (신경생물학) 를 가져온다. 두뇌와 정신적인 것들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신경생물학은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 destruction - negativity - loss - death 미국 과학자들은 대륙 철학으로 눈을 돌려서 생물학 및 해부학과 연계를 연구했고“[[Antonio R. Damasio]] 스피노자를 첫 “proto-neurobiologist” 신경생물학자로 이야기하며 form이란 컨셉에 몸과 영혼의 분해되지 않는 identity 라는 새로운 의미를 준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 “the first thing that constitutes the essence of the mind is simply the idea of a body that actually exists.” [@spinoza_ethics_2018, 100] **그러므로 form은 그 자체로 몸과 영혼의 unity에 이름을 주는 것이다.** 더 깊게는 subject의 unity에 존재론적 구성 및 생물학적 구조의 통일성에 이름을 주는 것이 바로 form 이다. ==프레임!!!!== 스피노자의 업적은 신체에 근본적인 역할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현상, 특히 감정 emotions, 다시 말해 그 자체 안에, 다시 말해, [[conatus|코나투스]] _[[conatus]]_, **즉 모든 생명체의 경항은 그들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경향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정확히 기초 정신 존재론 안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생물학적 사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대 생물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체계는 생명의 존재와 그것을 보존하려는 자연적 경향성에 의해 형성된다.== 또한, 생명의 보존이 생명 기능의 균형과, 나아가 생명 조절에 달려 있다는 사실, 그리고 생명 조절의 상태가 기쁨과 슬픔 같은 정서와 그에 따른 욕구의 형태로 표현된다는 사실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더 나아가, 욕구, 감정, 그리고 삶의 불안정성은 자아의 형성, 의식, 그리고 지식에 기반한 이성을 통해 인간 개개인이 인식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 > The importance of biological facts in the Spinoza system cannot be overemphasized. Seen through the light of modern biology, the system is conditioned by the pres ence o f life, the presence o f a natural tendency to pre serve that life; the fact that the preservation o f life depends on the equilibrium of life functions and conse quently on life regulation; the fact that the status o f life regulation is expressed in the form o f affects— joy, sorrow— and its modulated appetites; and the fact that appetites, emotions, and the precariousness o f the life condition can be known and appreciated by the human individual due to the construction of self, consciousness, and knowledge-based reason [@damasio_looking_2003]. 스피노자에게 정동은 기쁨과 슬픔 사이의 range로 manifest된다. 기쁨은 행동하는 힘을 증가시키고, [[conatus|코나투스]]의 강도를 높이며, 그 범위를 넓혀주고 반면에 슬픔은 이 힘을 약화시키고, 감소시키고, 제한한다. > “The human body can be affected in many ways by which its power of acting is increased or diminished.” [@spinoza_ethics_2018, 96] 추론이 비판적인 힘을 빼앗겼을 때, 감정과 감정을 구별하고 영향을 미치는 차이를 만드는 능력을 빼앗겼을 때, 다마시오가 말했듯이, 추론은 냉혹한 것이 되고 더이상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영향받는 것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욕망하는 것 없이 사유할 수는 없다. 욕망 없이 사유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다. 생각하고, 원하고, 아는 것은 어떤 일관성, 무게, 가치를 가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감정적 무관심이 모든 차이를 지우고, 원근감을 제거하며, 모든 것을 균일하게 만든다. 이성이 비판적 힘을 상실하고, 감정과 정서에서 비롯되는 변별력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게 될 때, 다마지오가 말하듯 이는 더 이상 사유가 아니라 ‘냉혈한 이성’이 된다. 그는 “감정의 선택적 축소는 과도한 감정만큼이나 이성에 해롭다”고 지적한다 [@damasio_feeling_2000, 41]. 스피노자는 신경생물학적 발견에 앞서 의식과 감정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 기억, 추론, 집중은 감정적 과정에 부속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_Conatus:_ > “It is the aggregate of dispositions laid down in brain circuitry that, once engaged by internal or environmental conditions, seeks both survival and well-being” (Malabou, 2012, p. 25) (Malabou, 2012, pp. 25-6) 내부 또는 환경 조건에 의해 한번 관여되면 생존과 행복을 모두 추구하는 뇌 회로에 있는 기질들의 집합체입니다. 스피노자의 Conaus란 뇌 회로에 축적된 기질들의 집합체로, 한번 내부 또는 환경 조건에 의해 관여되면 생존과 행복 모두를 주구하는 것이다. [[Antonio R. Damasio]]이 분석하는 이러한 뇌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은 이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지능은 완전히 온전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을 떠났으며, 이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했다. 이는 그들이 이성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미친것도 아니다 madness 마저 그들은 abandon했다. 뇌에 대해선 철학적 주제로 이야기된적이 없다. 물론 데카르트(영혼의 열정 에서)와 베르그송(물질과 기억 (1991) 에서)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뇌는 어디까지나 정보를 수용하고 전달하는 부차적인 기관으로 취급되며, 어떠한 상징적 자율성도 부여받지 못한다. > Spinoza might have intuited the principles behind the natural mechanisms responsible for the parallel manifes tations o f mind and body . . . I am convinced that mental processes are grounded in the brain’s mappings of the body, collections of neural patterns that portray responses to events that cause emotion and feelings. Nothing could have been more comforting than coming across this statement o f Spinoza’s and wondering about its possible meaning [@damasio_looking_2003]. > >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의 평행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적 기제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신적 과정이 뇌가 신체를 표상하는 방식, 즉 감정과 느낌을 유발하는 사건들에 대한 반응을 묘사하는 신경 패턴들의 집합에 기초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스피노자의 이와 같은 진술을 접하고, 그 의미에 대해 사유하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을 주는 일은 없었다. > 다마지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conatus|코나투스]]의 광범위한 활동 범위는 화학적·신경학적 방식으로 뇌에 전달된다. 이는 혈류를 통해 운반되는 화학 분자뿐만 아니라, 신경 경로를 따라 전달되는 전기화학적 신호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처럼 생명 과정의 다양한 측면이 뇌로 신호화될 수 있으며, 특정 뇌 영역에 위치한 신경 세포 회로들로 구성된 수많은 지도 속에 표상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생명 조절의 가장 높은 단계, 즉 감정이 응집되기 시작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damasio_looking_2003, 36-7] [[conatus|코나투스]] = A contemporary definition of Spinozas [[conatus]] might run as follows: “It is the aggregate of dispositions laid down in brain circuitry that, once engaged by internal or environmental conditions, seeks both survival and well-being. 스피노자의 [[conatus|코나투스]]를 현대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conatus|코나투스]]는 뇌 신경 회로에 형성된 성향들의 집합으로, 내부적 혹은 환경적 조건에 의해 활성화될 때 생존과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전개한 신체와 정신의 차별화된 정체성 개념에서 뇌의 역할은 바로 이 통일성을 보장하고, 문자 그대로 이를 체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뇌는 스크린== [[conatus|코나투스]]의 변형 가능성이 그 지속적인 정서적 가변성, 즉 긴장, 강도, 그리고 정서적 색조의 변화성과 일치한다는 가설은, 감정을 유발하는 뇌 영역이 손상될 경우 초래되는 결과를 사고할 기반을 마련한다. [[conatus|코나투스]]의 전개와 연결된 정서의 범위가 손상되거나 파괴될 때, 정체성은 깊이 변화하며 사실상 변신하게 된다. 개인의 역사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 뇌 손상, 자연 재해, 급격하고 맹목적인 폭력적 사건과 같은 단절이 발생하며, 의미 없는 사고에 의해 파괴되며 회고적으로 통합될 수 없다. 이러한 사건들은 순전한 충격으로, 주관적 연속성을 찢고 꿰뚫으며, 정신 속에서 어떠한 정당화나 회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 감정적 결핍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결국 정서이지만, 지금 문제시되는 것은 바로 그 정서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What is at stake is destructive plasticity.” (Malabou, 2012, p. 29) > > “How do you speak about emotional deficit since words must be carried by the affects whose very absence is precisely what is in question here?” [...] “What is at stake is destructive plasticity.” (Malabou, 2012, p. 29) 그러나 신경생물학자들이 ‘파괴적 가소성’이라는 개념이 중요 연구주제이면서도 뇌 손상과 그로 인한 정체성의 변화는 여전히 우연적 사건으로 다루어지며, 그것이 주체의 존재론적 가능성과 연결된다는 관점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정체성의 변화 가능성, 즉 _소멸적 변신 혹은 파괴적 변신 (annihilating metamorphosis, 돌아갈 수 없는 전면적 변신)_ 의 가능성은 존재의 지속적인 잠재성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하지말 말라부에게 사고는 우연이 아닌 종의 본질적 속성 (==진화?==) 이러한 accident에 의한 destruction은 새로운 종을 낳는다. 이러한 사고의 정체성 identity 의 구조적 상태는 발생 가능성을 감소시키지 않으며 모든 경우에 절대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 발생의 우발성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파괴(=사고의 종(種))을 통한 변형은 우발적 사건이 아닌 그러나 발생의 우발성을 무효화하지 않는 하나의 존재론적 구조** 사고의 발생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사고의 존재론을 인식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어려운 과제가 된다. Destruction remains an accident while really, to make a pun that suggests that the accident is a property of the species, destruction should be seen as a species of accident, so that the ability to transform oneself under the effect of destruction is a possibility, an existential structure. 파괴는 여전히 하나의 사고로 간주되지만, 사실상 사고가 종의 고유한 속성임을 시사하는 언어유희를 통해 본다면, 파괴는 하나의 _사고의 종류_ 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파괴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변형할 수 있는 능력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이며, 존재론적 구조라 할 수 있다. ==이거야 말로 들뢰즈의 다이아그램의 데리다식 해석이 아닌가? 혹은 데리다식의 suggestion== > “In principle, destruction does not respond to its own necessity, and when it occurs, does not comfort its own possibility. Strictly speaking, destruction does not come to pass.” (Malabou, 2012, p. 30) [...] “Normal identity is a changeable and transformable entity right from the start, always liable to make a faux bond or to say farewell to itself.” (Malabou, 2012, p. 31) > > 원칙적으로 파괴는 자신의 필연성에 응답하지 않으며, 일어날 때조차도 그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확증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파괴는 _일어나는 것_ 이 아니다 [...] 정상적인 정체성은 처음부터 변화 가능하고 변형될 수 있는 존재로, 언제든 거짓된 유대를 형성하거나 스스로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닌다. [[Baruch Spinoza|스피노자]]는 Damasio 혹은 들뢰즈보다도 더 래디컬한 해결방법을 제시한다. > Those things are good that ensure that the proportion of motion and rest which the parts of the human body have toward each other is preserved; conversely those things are bad that make the parts ofthe human body have a different proportion ofmotion and rest toward each other. > >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유지하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보존하는 것들은 선한 것이며, 반대로 그 부분들이 서로 다른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갖도록 만드는 것들은 악한 것이다." [@spinoza_ethics_2018, 189].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Life can be defined as the harmonious agreement of the movements of the body.” (Malabou, 2012, p. 31) 그리고 부분들이 autonomous movements를 가지게 되며 unity를 개는 것은 죽음을 불러온다. 이 비교문은 바로 삶과 죽음을 비교한 말로 각 신체의 부분이 자율적 움직임을 가지게 될 때 그러므로 해서 조직의 unity를 파괴하게 할때 죽음은 찾아온다. 그리고 이와 다르게 죽었지만 죽지 않은 상태를 철학자들 처음으로 스피노자는 언급한다. 신체는 죽지 않은 상태로 죽을 수 있다. 이는 신체가 단순히 시체로 변하는 것 transformation 이 아니라, 사고, 병변, 부상, 혹은 재난으로 인해 _동일한 신체 안에서 또 다른 신체로 변형되는_ 파괴적 변이 destructive mutation 이다. (Malabou, 2012, p. 34)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deleuze_expressionism_1990, 221] 에서 들뢰즈는 전통적으로 엄격한 필연성, 시간성 없는 불변의 사상가로 간주되었던 스피노자 철학에서 _[[conatus|코나투스]]_ 의 높은 가변성을 주장한다. “윤리학에서 유한 양태들의 실존적 변화, 즉 표현적 변화를 다루는 영역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이유를 우리는 이미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expressive variations** 혹은 실존적 변화에는 두가지의 order가 존재하는데 1. 적극적 activity(joy) 피동적 passivity (sorrow) 사이의 일반적 정동의 변화 variations 액티브가 올라가면 패시브가 "억제"된다 → 서로 반비례하여 변동, 각각 변화하는 비율 속에서 감응 능력을 구성 (constitute the capacity to be affected) [@deleuze_expressionism_1990, 222]. 2. 다른 구조의 [[conatus]],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항상 모든 관점에서 고정된 상태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deleuze_expressionism_1990, 222] 나이가 들고 자라고 아프고 하는 것들에 의해 그 범위가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한 것은 동일 인물인가? 이러한 변화들은 미세하게 진행되든 급격하게 일어나든, 신체를 규정하는 관계 속에서 감응 능력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마치 감응 능력과 그 관계가 일정한 여유 또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범위 안에서 형성되고 변형되는 것처럼 보인다 [@deleuze_expressionism_1990, 222]. 두번째에서보는 것은 무드 변화가 아니라 무드의 변화를 경험하는 유한적 존재의 본성의 변이. 따라서 질병과 노화는 _[[conatus|코나투스]]_ 구조 자체의 변이이다. 말라부가 보기에 1이 variation [[conatus]]이고 2은 구조 structure of the [[conatus]] itself 이다 = “Deleuze calls the “elas­ticity” of the [[conatus]]” (Malabou, 2012, p. 36) 이러한 구조적 변이는 들뢰즈가 *[[conatus|코나투스]]의 "탄성(elasticity)"* 이라고 부르는 것을 드러낸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피노자는 실재하는 양태를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관계가 일종의 탄성을 지니고 있다고 실제로 시사한다.” 말라부는 들뢰즈의 단어 elasticity는 다시 돌아감을 뜻하기에 대신 plasticity로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단어 안에 바로 power of modification of the identity in proportions that exceed the simple detour of hiccup. 즉 들뢰즈의 경우 그 변화에 집중한 반면 말라부는 그 변화의 power에 집중한 것이 된다. 이 지점은 들뢰즈가 시네마책 2권을 쓰기전에 눈치 챈 것이 아닐까? 그래서 시간으로 그 power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 “Acknowledgement of the role of destructive plasticity allows us to radicalize the deconstruction of subjectivity, to stamp it anew.” (Malabou, 2012, p. 37) ### 3. 들뢰즈의 스피노자 어떻게 나이가 드는 것과 병이 드는 것이 함께 취급될 수 있는가? 하나는 점진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지독한 것이 아닌가? 이를 위해 말라부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가소성의 상실을 "good" 가소성으로 지정하고 _긍정적_ 가소성이 사라질 때, 또 다른 형태의 가소성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노화를 _창조적 가소성과 파괴적 가소성_ 의 관점에서 다시 검토하며 노화를 하나의 사건으로서 질병의 범주 안에 포함. **becoming-old** ==약간 뭐랄까 들뢰즈의 다이아그램 자체를 두 종류로 만들어 버리는 느낌이다. 즉 들뢰즈는 creative plasticity therefore the diagram 밖에 보지 못했다는 말로 들린다.== 일반적으로 혹은 정신분석학자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도식은 (Gerard Le Gouès의 말로 대표) 노화 과정의 도식에 따르면, _가소성을 지닌다는 것은_ 쇠퇴에 서서히 형식을 부여 = _자신만의 노년을 발명하는 것_, 즉 그것을 “관리할 줄 아는 것”이며,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반면, 가소성의 상실은 단순히 하강을 받아들이고, 후퇴하며, 수동성이나 순전한 감수성 속에서 최종적인 파괴나 붕괴를 맞이하는 것으로 간주 = 이는 어떠한 형식도 창조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도식의 이해는 기본적으로 정신분석학에서 이해하는 특정한 가소성을 기반으로 발전되었다. 프로이드에게 plasticity는 함축적이다. 두가지의 기본적 의미로 전달되는데 “plasticity of psychic life” 그것은 대상의 정신적 운명을 구성하는 흔적의 불멸성을 말합니다. 첫번째로 프로이드에게 모든 기억은 잊혀질 수 없다. 단지 그건은 modified, deformed, reformed 두번째로 프로이드의 plasticity는 vitality of the libido 원시적 충동 (리비도)의 활력 -> mobility “its ability to change its object, not to remain fixed, the capacity to change its investments.” (Malabou, 2012, p. 45) 포기할수도 있고 다른 것과 연결될 수도 있고 다르게 원할 수도 있어야 자랄 수 있다. **accident-ageing** = the instantaneity of ageing 두번째는 이벤트로 인식하기. 첫번째가 비행기가 뜨고 크루징하고 하강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이벤트의 경우는 갑작스런 크래쉬 accidental, catastrophic dimension. 노화와 죽음 모두에서 동일한 문제가 제기된다. _즉각성_ instantaneity은 자연적 과정과 우발적 사건 사이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늙는 것인가, 아니면 폭력적으로 쇠퇴하는 것인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는 것인가, 아니면 폭력적으로 죽는 것인가? 죽음은 언제나 둘 중 하나일 뿐, 혹은 전적으로 하나이거나 다른 하나이지 않은가? > “Old age is an existential break—not a continuity.” (Malabou, 2012, p. 42) 이건 베르그송의 시간이 가진 지점을 인식의 시점으로 옮겨 놓은 것 같다. 프로이드에게 plasticity는 함축적이다. 두 가지의 기본적 의미로 전달되는데 1. the indestructibility of psychic life: 첫번째로 파괴를 피하기 위한 변화의 전략으로 기술. 프로이드에게 어떤 경험도 완전히 망각되지 않는다.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단지 그건은 modified, deformed, reformed. 즉 가소성은 변화하지만 파괴되지 않는다. “plasticity of psychic life” 그것은 대상의 정신적 운명을 구성하는 흔적의 불멸성을 말한다. 2. tenacity of libidinal investments: 두번째로 프로이드의 plasticity는 vitality of the libido 원시적 충동 (리비도)의 활력, mobility와 연결되어 있다. “its ability to change its object, not to remain fixed, the capacity to change its investments.” (Malabou, 2012, p. 45) 포기할수도 있고 다른 것과 연결될 수도 있고 다르게 원할 수도 있어야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분석적 치료는 중점적으로 리비도의 가소성과 연결되어있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프로이드는 나이드는 것을 바로 이러한 plasticity of the libido의 상실 (cathexes=리비도(libido)가 특정한 대상에 집중하여 발현(發現)하는 일이 diminution됨)이라고 간주하고 결국 [[Sigmund Freud|프로이트]]는 나이듬을 결국 "잃음"이라고 특징짓는다 → 이러한 잃음을 통해서 다른 걸 통해서 보상하는데 나르시스틱 pre-genital 시기로 돌아감. [[Catherine Malabou|Malabou]]의 질문은 1번에 해당. 정말 정신은 파괴할 수 없나? “the essence of mental disease lies in a return to earlier states of affective life and of functioning”^[Freud, “Thoughts for the Times on War and Death,” p. 286.] 는 언제나 진실인가? 신경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노화는 그것이 수반하는 뇌의 재조직화를 통해 _변신_ 또는 _정체성의 변화_ 로 특징지어진다. As Joseph LeDoux argues, “when connections change, personality, too, can change.” ^[LeDoux, _Synaptic Self,_ p. 307.] 여기서 이제 [[Catherine Malabou|Malabou]]가 바라보는 것은 두가지의 다른 ageing - progressive - instantaneousare 이 둘은 언제나 intertwined and implicated in one another. 이러한 예시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Marcel Proust]]의 _Finding Time Again_ 에서 나이 든 주인공이 오랫동안 안만났던 사람들을 “gathering”을 통해 만나며 두가지 컨셉 becoming-old and instantaneous old age를 스테이지 위에 올린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그 두가지를 conflic로 가져온다. 그는 현기증이 나고 불안감에 휩싸인 단결의 비밀 속에서 그들을 서로 부딪히며 충돌시킨다. 손님들은 unrecognizable하게 되고 (집을 인식하는데 오래걸리거나 손님들이 화장을 해서 알아볼 수 없음) → “distorting perspective of Time" 이것은 시간 관점의 왜곡 > 그 모호성—자아의 과잉이자 동시에 급격한 익명성—으로 인해, 노화는 결코 _진리의 작업_이 아니다. 점진적인 변화와 순간적인 추락 사이에서, 노화는 결코 존재의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본성이란, 앞서 언급된 점진적인 변형을 거쳐 마치 예술가의 작업처럼 개인의 두드러진 특징을 강조한다고 해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노화는 진리를 회피하며, 자신의 진리, 자신의 계시 능력마저도 벗어나 버린다.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자기 자신, 즉 _자기 동일적 존재_인 동시에, 완전히 변신한 _타자적 존재_이기도 하다. > > “As a result of its ambiguity—both an excess of self and a brusque incognito—old age is in no way a work of truth. Between gradual becoming and instantaneous precipitate, it never reveals the “true” nature of beings, a nature which would show itself “in the end,” even if, through the gradual deformation mentioned earlier, like the work of an artist, it does accentuate the salient fea tures of the individual. Old age eludes truth, eludes its own truth, its own power of revelation. What it reveals is just as much the self, the being identical to itself, as the other, the entirely metamorphosized being.” (Malabou, 2012, p. 54) 글쓴이는 [[Marcel Proust|프루스트]]의 묘사들이 보여주듯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는 range of the [[conatus]]가 아닌 its very structure 더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묻는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Plastic ambiguity of time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 “The progression, evolution, inflection, repetition, but also the instantaneous, the infinitely rapid, the bump, the acci­ dent, which appears to elude duration, or at least to introduce into the thickness of succession the undatable bifurcation of destruction, sharp as a claw, unpredictable, throbbing, magnificent.” (Malabou, 2012, p. 54) ### 4 Ageing before ageing 뒤라스의 비접속법 노화 전, 본격적으로 젊음이 수그러들기 전, 갑작스럽고 tragic 한 변화가 젊음을 가져가기 전. > “In The Lover, [[Marguerite Duras]] describes herself exactly as an “aged girl,” a woman aged by accident, too soon, subjected to destructive plasticity.” (Malabou, 2012, p. 55) 변화는 해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런 것이다 instantaneous Marguerite Duras가 묘사하는 그녀의 얼굴은 술에 중독 되기 전에 이미 그것이 얼굴을 통해 습득되었고 > “I already had a face that foretold the one I acquired through drink in middle age.” (Malabou, 2012, p. 58) pleasure를 알기 전에 이미 the face of pleasure를 가지게 되었다 [@duras_practicalities_1992, 12]. [[Marguerite Duras|뒤라스]]의 글쓰기 스타일은 연결과 인과 관계를 철저히 억제하는 데 기반하며, 이는 *비접속법([[asyndeton]])* 이라는 수사적 기법에 의존한다. 비접속법은 문장의 절과 단락을 연결하는 접속사가 생략된 하나의 생략(ellipse) 방식으로, “연결어를 생략하여 형성된 수사적 기법”으로 정의된다. 이는 *분절(disjunction)* 의 범주에 속하며, 단어들을 연이어, 그리고 겹쳐 배치함으로써 각각이 독립적인 사건처럼 나타나게 한다. 단어들은 서로 충돌하며, 유연성을 잃고, 표면과 윤활유, 사회적 연결마저 사라진다. 비접속법은 일종의 _언어적 알코올중독_ 이다. > “The asyndeton is linguistic alcoholism.” (Malabou, 2012, p. 61) 이러한 비접속법의 주된 효과는 **혼란의 표현**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접속법은 종종 대화에서 화자의 혼란을 전달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나는 완전히 지쳤어, 녹초가 됐어, 탈진했어, 힘이 다 빠졌어.” ### 5. Dying ==죽음은 이중적이다: 생물학적이며 논리적이다.== 또한 예상할 수 없는 사고이며, 스스로 하나의 형식을 창조한다. 죽음의 형식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불규칙성이 발생해야 하며, 그것은 _존재가 자신의 끝에 이르는_ 그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 이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은밀한 발명이다. 이 _죽어-사는_ (dead-living) 간극 속에서 존재는 스스로를 즉흥적으로 변주하며, 그것이 마침내 끝날 때까지 계속 새롭게 떠오른다. 결국 _죽음을 향한 존재_ 는 스스로를 발명해야 하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형성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언제든 가능했던 죽음이, 마침내 _가능한 것_ 이 된다. > “Illnesses are usually considered intermediary events between life and death. But the transformation of the event of illness into a deadly event requires an event of the event.” (Malabou, 2012, p. 69) > > “질병은 일반적으로 삶과 죽음 사이의 중간적 사건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질병이라는 사건이 치명적인 사건으로 변형되기 위해서는 _사건의 또 다른 사건_ 이 필요하다.” 여기서 급격하게 들뢰즈와 갈라지는 지점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즉 들뢰즈의 베르그송으로 연결되는 지점으로 인해 duration 즉 갈라질 수 없는 분해될 수 없는 하나의 뭉텅이를 상상한다면 말라부의 경우 급격한 분리 갈라짐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예를 드는 것은 변신, 노화, 사건, 그리고 죽음이다. 나는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_타인이 우리의 죽음에 무관심할 것이라는 사실_ 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 무관심을 미리 흉내 내며 살아간다. 결국, 뇌 손상을 입은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 안에는 공포도, 신화 속 변신처럼 천둥이 치거나 번쩍이는 극적인 변화도 없다. 아니다, 그들은 예전과 똑같다. 단지 _무관심이 덧씌워졌을 뿐이다._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이는 모습이며, 우리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들,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우리가 변해가는 방식이다. _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곳에서._ ### 6. 진정한 부정은 가능한가? 6장은 **부정(negation)과 파괴적 가소성(destructive plasticity)의 관계**를 중심으로 논의됩니다. 이 장에서는 인간이 특정한 경험을 부정(denegation)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방식과, 그 과정에서 어떻게 존재 자체가 변형될 수 있는지를 탐구합니다. 일반적으로 통과할 수 없는 가능성의 법칙으로 보이는 유형, 즉 긍정의 가능성입니다. 파괴적인 유연성은 가능한가? > “==Usually the notion of possibility is structurally linked to affirmation==.” (Malabou, 2012, p. 73) 일반적으로 가능성의 개념은 구조적으로 긍정과 연결되어 있다. 긍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항상 긍정하는 것이다. 가능성은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어떤 존재가 지속될 것인지를 지정합니다. 가능성이란 그 자체로 _가능함을 긍정하는 것_ 이며, 이 동일반복(tautology)은 결국 _부정적인 것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온다._ > “Without reducing it to affirmation, the negative possibility is not the expression of any lack or any deficit.” (Malabou, 2012, p. 75) [[Immanuel Kant|칸트]]의 경우 > “we find luminous proof of this point on the topic of the originary nature of conscience in the moral law: ask him whether, if his prince demanded, on the threat o f the same prompt penalty o f death, that he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an honest man whom the prince would like to ruin under specious pretenses, he might consider it possible to overcome his love o f life, however great it may be. He will perhaps not venture to assure us whether or not he would overcome that love, but he must concede without hesitation that doing so would be possible for him.” (Malabou, 2012, p. 74) > > 우리는 도덕 법칙 속에서 양심의 원초적 본성에 대한 이 논점을 밝히는 분명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라. 만약 그의 군주가 정당한 사람을 꾸며낸 죄목으로 파멸시키려 하며, 거짓 증언을 강요하면서 이를 거부할 경우 즉각적인 사형을 선고하겠다고 위협한다면,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는 아마도 자신이 그 사랑을 극복할 것인지 확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망설임 없이 _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_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프로이드는 negation을 이렇게 정의한다. 주체가 지금까지 억압되어 온 자신의 소망, 생각, 감정 중 하나를 공식화하면서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그것에 대항하여 계속해서 자신을 방어하도록 하는 절차. [[Friedrich Hegel|헤겔]]의 경우 물론, 헤겔은 이러한 사고방식의 모순적 형태를 지적했다. 인간은 _절대적 부정의 가능성_ 을 주장한다. 당신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것에 대해? 삶에 대해서도? 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순간부터 자유는 '아니오'에 '예'라고 말할 가능성과 연결된다. 따라서 절대적 부정은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헤겔은 모든 가능성이 결국 실현을 향해 나아가며, 모든 부정은 그것이 스스로를 이중화하는 에너지, 즉 긍정적 힘, 긍정의 힘과 결합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정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떤 가능성을 설정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부정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Catherine Malabou|Malabou]]가 제시하는 것은 부정적 가능성 “negative possibility.” (Malabou, 2012, p. 75) “Without reducing it to affirmation, the negative possibility is not the expression of any lack or any deficit.” (Malabou, 2012, p. 75) 부정을 단순히 긍정으로 환원하지 않더라도, 부정적 가능성은 결핍이나 부족함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긍정되지도, 결핍되지도 않은 부정의 힘 또는 능력을 증명하며, 하나의 형식을 구성하는 힘을 지닌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예’와 ‘아니오’의 내부이자 외부, 나아가 전통적으로 이해되는긍정과 부정의 내부이자 외부에 위치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답을 예도 아니오도 아닌 방식으로 응답하는 심적 태도, 즉 [[Sigmund Freud|프로이트]]가 “부정(verneinung)”이라고 명명한 특정한 정서적·지적 행위에서 찾을 수 있을까? 부정(denegation)은 파괴적 가소성의 고유한 논리적 작용 방식을 규정하는 개념이 될 수 있을까? Language of Psychoanalysis 정신분석에선 negation을 이렇게 정의한다: : “Procedure whereby the subject, while formulating one of his wishes, thoughts or feelings which has been repressed hitherto, contrives, by disowning it, to continue to defend himself against it. 주체가 지금까지 억압해왔던 자신의 소망, 사고, 혹은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부인함으로써 여전히 그에 대한 방어를 지속하는 과정” (Malabou, 2012, p. 76) > destructive plasticity는 하나의 형태의 negation 부정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Can destructive plasticity thus be viewed as a form of negation?” (Malabou, 2012, p. 76) [[Sigmund Freud|프로이트]]의 방법은 > "우리는 환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 상황에서 가장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순간 당신의 마음에서 가장 멀리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 환자가 이 함정에 빠져, 자신이 가장 믿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면, 그는 거의 항상 정확한 고백을 하게 된다." 따라서 해석이란 환자의 발언을 체계적으로 반대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환자가 "아니오"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예"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은 결국 **부정을 부정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부정의 부정 (Denegation)의 과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 말라부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부정(negation)은 **“부정=숨은 긍정”** 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환자가 “아니오”라고 말해도, 사실은 그것을 “예”로 뒤집어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_통합_ 혹은 _전이에 의한 치유_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는 것. - 하지만 말라부가 강조하는 **“파괴적 가소성”** 사례(극단적 뇌손상, PTSD 등)에서는, 이런 식의 “무의식적 해석” 자체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정신 구조가 완전히 끊겨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말라부는 정신분석(프로이트) 전통이 강조하는 “인과적 해석”이나 “재통합의 가능성”이 **일부 경우**에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 Denegation is not a simple negation that can be converted into its opposite. Nega­tion is a way of taking cognizance of what is repressed; indeed it is already a lifting of the repression, though not, of course, an acceptance of what is repressed. 부정(denegation)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며, 그 반대로 전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정은 억압된 것을 인식하는 방식이며, 사실상 그것을 해제하는 과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Sigmund Freud, “Negation” (1925), in _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_, Vol. 19, 1957, pp. 235-6.] 하지만 destructive plasticity은 파괴적 가소성은 억압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고—트라우마, 재난, 부상—는 **억압되지 않는다**. 그것은 밀려나지도, 숨겨지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Sigmund Freud|프로이트]]는 논리적으로 받아들여도 정서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 "우리는 이 과정에서 지적 기능이 정서적 과정과 분리되는 방식을 볼 수 있다."^[Sigmund Freud, “Negation” (1925), in _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_, Vol. 19, 1957, pp. 236.] 따라서, **부정성에는 두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1. 감성적 부정, 감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억압 과정과 일치 “One, affective and unconscious, coincides with the repression process.” (Malabou, 2012, p. 79) 2. 이성적 판단 judgement 부정 logical negativity 첫번째 부정에서 따라옴 “The other, intellectual, makes nega­tivity a function of judgment: something is or is not.” (Malabou, 2012, p. 79) → 우리는 심볼적 레벨에서 구식의 유아적 제스처를 반복한다. 제거하고 밖에 놓고 거부하고 → excluding, putting outside, rejecting. 1. 판단의 논리적 기능이 이중적 → 즉, **속성 판단**(어떤 대상이 특정한 속성이나 성질을 가진다고 판단하는 것)과 **존재 판단**(어떤 것이 현실에서 존재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뉜다 → 모든 부정성은 쾌락-자아(pleasure-ego)에서 기원한다. 속성 판단의 기원은 **자아가 좋은 것은 삼키고, 나쁜 것은 뱉어내려는 경향**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로이트는 계속해서 이 두 부정성의 관계를 분석하여, 논리적인 부정성이 구문, 사고, 그리고 판단에서 작용하고 이는 감정적이고 유아적인 부정성에서 비롯되며 그 결과 그것을 억제에서 자유롭게된다고 이야기한다 → “Negation thus has a clear affective origin: rejection.” (Malabou, 2012, p. 81) 이러한 거부 역시 단순한 무(無)가 아니며, 그것이 부정적 가능성 (negative possibility) 을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 가능성은 거부하거나 뱉어내는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사고는 피해자의 내면에 통합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의 운명과는 무관한 채 외부에 남아 있으며, 개인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지 않는다. 즉, 개인은 **트라우마를 자신 밖으로 밀어내지도 않으며, 그것과 관련하여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삼키려 하지도, 토해내려 하지도 않는다. [[Sigmund Freud|프로이트]]에게 거부(rejection)는 단순한 무(無)가 아니다. 거부는 배제를 전제하며, 반복 가능해야 한다. 이는 판단의 두 번째 형태, 즉 존재에 대한 판단(existence judgment)을 분석하면서, 이것이 오래된 내적/외적 구분을 유지하려는 본능적 요구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좋은 것을 내면화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나쁜 것을 거부하는 것" (외부로 밀어내는 것) 주체는 **원할 때 좋은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어야 하고, 원할 때 나쁜 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 The other sort of decision made by the function o f judgment— as to the real existence o f something o f which there is a presentation (reality-testing)— is a concern of the definitive pleasure-ego. It is now no longer a question o f whether what has been per ceived . . . shall be taken into the ego or not, but of whether something which is in the ego as a presentation can be re-discovered in perception (reality) as well. It is, we see, once more a question o f external and internal. What is unreal, merely a presentation and subjective, is only internal; what is real is also there outside. In this stage o f development regard for the pleasure principle has been set aside. Experience has shown the subject that it is not only important whether a thing . . . pos sesses the “good” attribute and so deserves to be taken into his ego, but also whether it is there in the external world, so that he can get hold of it whenever he needs it.^[Sigmund Freud, “Negation” (1925), in _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_, Vol. 19, 1957, pp. 237.] > > 판단 기능이 수행하는 또 다른 결정, 즉 어떤 대상이 실재하는가(현실 검증, reality-testing)에 대한 결정은 궁극적으로 쾌락-자아의 문제다. 이제 문제는 지각된 것이 자아로 받아들여질 것인가_가 아니라, 자아 안에 하나의 표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외부 현실에서 다시 발견될 수 있는가로 바뀐다. 다시 말해, 문제는 **외부와 내부의 관계**다. 실재하지 않는 것, 단순한 표상이며 주관적인 것은 내부에만 존재한다. 반면, 실재하는 것은 외부에도 존재한다. 이 발달 단계에서 주체는 쾌락 원칙만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어떤 대상이 _"좋은"_ 속성을 지녀 자아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외부 세계에 실재하여 필요할 때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외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확신을 필요로 한다.** "쾌락-자아"가 어떤 것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거부할 수 있으려면, 그 배제가 결정적(확정적)인 것처럼 나타나야 한다. (According to Freud, the ego needs to reassure itself regarding the reality of the outside. In order for the “pleasure-ego” truly to be able to throw out or reject something, the exclusion must necessarily appear to be definitive.) → 거부된것은 돌아올 수 있어서는 안된다 → 주체가 확신하는 것은 배제된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 존재로부터 확실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이것의 존재는 배제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존재는 오직 존재론적으로 이것이 금지된 한에서만 허용된다.** 프로이트의 예에서 어머니의 실재성은 표현될 수 없는(realistically non-presentable) 실재이다. "나의 어머니는 존재로부터 벗어나 있다"—이는 실재 없는 가능성이다. 부정(negation)은 주체가 두 가지 상반된 태도의 갈림길에 서도록 한다. 즉, **공개적으로 숨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게 은폐하는 것**. 정신분석가가 아무리 _대상의 존재_ 를 제시하더라도, 환자는 결코 정신분석적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허용할 뿐, 수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부정을 고수하며, 그것을 바꿀 방법은 없다. 프로이트의 후기 텍스트들은 이에 대해 매우 명확하다. **부정은 결국 "배제(Forclusion, Verwerfung)"에 이를 수도 있으며**, 이는 환자가 **자신의 저항을 인식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게다가, 1925년의 글은 두 가지 충동의 발전으로 마무리된다. 프로이트는 “긍정은 결합의 대체물로서 에로스에 속하며, 부정은 배제의 후계자로서 파괴 본능에 속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일부 정신병자들이 보이는 부정주의를 설명해준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에서 부정의 가능성은 단순히 파괴 충동과 혼동된다. 부정성은 annihilation 소멸로 변한다 →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존재의 변형을 야기 항상 거절당하고 배제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기원의 현기증 아닌가? 내뱉는 것은 항상 내가 아닌 것이고,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점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내뱉은 것 나일 수도 있었던 것 what could have been) 어떤 이야기든, 어떤 번역이든, 어떤 기원이든 간에, 부정적으로 가능한 금지된 질문입니다. > “Destructive plasticity deploys its work starting from the exhaustion of possibilities, when all virtuality has left long ago, when the child in the adult is erased, when cohesion is destroyed, family spirit vanished, friendship lost, links dissipated in the ever more intense cold of a barren life.” (Malabou, 2012, p. 89-90) 부정적 가능성은 모든 것들이 exhausted될 때까지 부정적이며 결코 현실이 되지도, 비현실이 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결핍하지 않는—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핍 자체마저 결핍하지 않는—주체의 외상 후 형태로 정지된 채 남아 있다. 이는 끝까지 자아로부터의 부재를 기반으로 형성된 주관적 형태로 지속된다. 현재까지 어떤 정신분석적 논의도 이 가능성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존재와 사건의 관계를 어떤 정신적 예정론의 개념 바깥에 두고, 재난의 가혹하고 예기치 않은 도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나는 순수한 사건에 대한 사유나 놀라움에 대한 숭배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사건이 어떤 정체성의 부름에 응답하며, 마치 그것을 전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 “I know definitively, resolutely, that “it is dangerous to essenciate.”” (Malabou, 2012, p. 90) 나는 단호하게, 확신을 가지고 "본질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Martin Heidegger]]가 , _Being and Time_ [-@heidegger_being_2010]에서 “It is no accident [_ist nicht zu fällig_] that world time [authentic] thus gets leveled off and covered up by the way time is ordinarily understood [inauthentic].” 이라고 말한 것과 반대로 말라부는 말한다. 본질화가 사건들을 불완전하게나마 평평하게 만드는 거대한 압착기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사건들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본질 자체를 훼손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하이데거의 주장과는 달리, 존재의 역사는 어쩌면 단지 일련의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들은 각 시대마다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본질의 의미를 위험하게 일그러뜨려 왔기 때문이다. ### Related ```dataview LIST FROM [[@malabou_ontology_2012]] and -"Plans" and -"resour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