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therine Malabou (2022) *Plasticity: The Promise of Explosion*. : Edinburgh University Press.
> [!INFO]
> Type:: [[]]
> Title:: Plasticity: The Promise of Explosion
> Author(s): [[Catherine Malabou]]
> Year:: 2022
> Tags::
> DOI::
> Citekey:: malabou_plasticity_2022
> ZoteroURI:: [Open in Zotero: Plasticity: The Promise of Explosion](zotero://select/items/@malabou_plasticity_2022)
> ReviewedDate:: [[2025-03-07]]
> Related Note: 202503141625
## Citation
```latex
[@malabou_plasticity_2022]
```
## Summary
철학자 캐서린 말라부의 저서인 *Plasticity: The Promise of Explosion* [-@malabou_plasticity_2022]의 글들로, 그녀의 주요 개념인 [[Plasticity|가소성]](plasticity)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를 다룬다. 말라부는 가소성을 **형태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능력**으로 정의하며, 생물학적, 상징적, 개념적 형태의 생성과 소멸뿐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 간의 전환 가능성**을 탐구한다. 글들은 신경과학, 정신분석, 정치학, 문학, 그리고 헤겔, 데리다, 푸코, 레비나스, 칸트, 니체, 스피노자, 아감벤 등 다양한 철학자 및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가소성의 철학적, 정치적 함의를 분석한다. 특히 생물학적 차원과 상징적/개념적 차원의 연결을 강조하며, 결정론과 자유, 주체의 개념, 언어의 본질, 그리고 저항과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 Annotation
### 1. 언어, 보기, 사유 ([[Jean-François Lyotard|리오타르]], [[Gilles Deleuze|들뢰즈]], [[Emmanuel Levinas|레비나스]])
#### [[Jean-François Lyotard|Lyotard]]
가장 먼저 리오타르의 개념인 담론의 "가장자리에 있는 눈 on the edge of discourse"을 소개하면서 시작 [@lyotard_discourse_2011, 128]. 담론의 눈, 누구의 눈도 아님. 이 담론의 눈은 담론 외의 것을 보지만 담론의 함수로서만 상상될 수 있다. 언어는 '마주 보는 것(vis-à-vis)'으로 외면화하기 때문에 분열적이다. 언어와 세계와의 거리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으로 세계가 언어의 함수라면 언어는 세계-기능(world-function) 을 가지고 모든 발화는 지시하는 것으로부터 해독되어야 할 상징을 만든다 = demiurgical power (데미우르고스의, 세계를 형성하는 존재의). 하지만 사물을 존재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닌 사물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말한다는 것은 사물을 부재 속에서 명명할 가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부재 자체를 명명하는 것이다. 말파는 것은 잃는 것이다.
> But in this instance, to be able to lose is also to be able to see, to be able to see what one loses, and to be able to say that one sees it. (17)
> > 하지만 이 경우, 잃을 수 있다는 것은 또한 볼 수 있다는 것, 자신이 잃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담론의 세계-기능은 "세계 자체의 불변성과 가능한 소멸을 보장 (which ensures the constancy and possible evanescence of the world itself)," ‘distance in which the eye settles on the edge of discourse (눈이 담론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는 거리)’ [@lyotard_discourse_2011, 128].
How does a thought announce itself sensibly?
여기서 바로 [[Jean-François Lyotard|리오타르]]의 주장이 language renders itself both discourse and figure, and how it unfolds in both linguistic and figural space.이다.
담론 속의 눈이 존재한다는 것이 주어진 것이 텍스트라거나 세계가 책이라거나 (해독을 기다리는 언어 단위로 축소될 수 있는 의미로)는 아니다. 언어는 language renders visible that to which it refers implies (the function of this strange, foreign, external eye) that what is irreducibly given is the heterogeneity of discourse and figure, saying and form. 필연적인 공간적 현현을 포함하지만, 리오타르는 이것이 '흔들리지 않고서는 통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cannot incorporate without being shaken’ [@lyotard_discourse_2011, 128].
> 형상적인 것의 두께인 이 외부성은 생각이 형성되는 감각적이고 불투명한 공간입니다. 형상적인 것은 단순한 기표(signifier)나 이념의 감각적 반영으로 자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의존성 자체가 형상적인 것을 담론과 관련하여 자율적으로 만듭니다. 그것이 항상 이념의 다른 존재 방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 > This exteriority, which is the thickness of the figural, is the sensible, opaque expanse in which thought is formed. The figural never offers itself as a simple signifier, the sensible reflection of ideality. Its very dependence makes it autonomous in relation to discourse, inasmuch as it is never more than another mode of being of the idea. (17)
이를 바탕으로 '생각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면, 언어의 가장자리에서 찢어진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의 왜곡을 검토하고, 언어이자 시선이면서도 어느 하나 이상이 아닌 눈의 힘을 탐색해야 한다. There is, therefore, an originary violence at work in language, causing an irremissible schism between discourse and figure, sense and sensible, and idea and flesh. (17) 이게 바로 생각을 본다는 것이다.
#### [[Gilles Deleuze|Deleuze]]
idea가 글쓰기에 현존한다고 가정하면, 생각이 자신을 예상함으로써 자신의 시선을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는가? how, by envisaging itself, thought can figure its own gaze (18). 들뢰즈의 Difference and Repetition [-@deleuze_difference_2021]에서 이 형상화를 [[mise-en-scene|mise-en-scène]] 혹은 [[dramatization]]이라고 부른다. 도식(schema)이 '이념의 극화'이며 그 목표는 그것을 '명시하고(specify)' '구체화하는(incarnate)' 것 [@deleuze_difference_2021, 128]. 담론과 형상 사이에는 언어에 환원 불가능한 왜곡 distortion이 있듯이, 생각과 형태 사이에도 환원 불가능한 왜곡이 있습니다. 사색(speculation)이나 반영(reflection)은 없다. 거울 관계는 파괴, 반사성 reflexivity도 균열이 생긴다 → 이는 얼굴이 즉각적으로 식별 가능한 반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외부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
> Nevertheless, to see a thought is really to face a mirror game in which the relation between seeing and seen moves very quickly (18).
생각을 본다는 것은 시선과 보이는 것 사이의 관계가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고 [[Maurice Blanchot|Blanchot]]은 The Space of Literature [-@blanchot_space_1982]는 이 움직임을 매혹의 영역의 열림으로 묘사한다. 우리의 눈과 그것이 보는 것 사이의 공간, 즉 다시 말해 우리의 눈과 자기 자신 사이의 공간은 매혹의 환경이다. it is the ‘mirror image of own’s own look’ (1989: 32–3). Of whoever is fascinated it can be said that he doesn’t perceive any real object, any real figure, for what he sees does not belong to the world of reality, but to the indeterminate milieu of fascination’ (1989: 32)'매혹된 사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실제 대상을, 어떤 실제 형상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는 것은 현실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매혹의 불확정적인 환경에 속하기 때문이다 [-@blanchot_space_1982]'. 생각을 본다는 것은 부재를 보고 형상화하는 것, 블랑쇼가 말했듯이, 생각은 '끊임없이 부재의 현존... 부재 자체의 긍정'으로 우리를 되돌아오게 하기 때문이다 (1989: 30) = 이는 생각할 때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인상, 담론의 가장자리에 있는 눈이 누군가의 얼굴을 본다는 인상.
> When I am alone, I am not alone, but, in this present, I am already returning to myself in the form of Someone. Someone is there, where I am alone. The fact of being alone is my belonging to this dead time which is not my time, or yours, or the time we share in common, but Someone’s time. Someone is what is still present when there is no one. (Blanchot 1989: 31)
> > 혼자 있을 때,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현재 속에서 나는 이미 누군가(Someone)의 형태로 나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내가 혼자 있는 곳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혼자 있다는 사실은 나의 시간이 아닌, 당신의 시간이 아닌,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이 아닌, 누군가의 시간인 이 '죽은 시간(dead time)'에 속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아무도 없을 때 여전히 현존하는 것입니
생각을 누군가로 본다는 것은 부재를 인격적으로 보는 것, 즉 아무도 보지 않는 것만큼이나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To see thought as someone is to see absence in person; that is, as much as it is to see no one, it is also to touch the limits of the figurable). 생각의 응시 기능은 초자아(superego). 이러한 응시는 또한 부재의 사진이다. 사라진 가능성에서 시작하여 나를 응시한다. 따라서 글쓰기의 이상성뿐만 아니라 형상 가능성 속에서 모든 글쓰기 과정의 배후에 있는 원리는 고백 = 고백의 형태와 역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표현되었습니다 → 자신을 응시하는 것 (신)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 시선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있다고 느끼는 맹인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 모든 고백은 타자, 누군가가 내가 말하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나는 등을 돌릴 수 없으면서도 그것을 말하도록 부추김을 받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생각은 뒤에서, 등 뒤에서 나를 보고 있습니다. 헤겔 이후 우리가 알듯이, 모든 양심(conscience)은 정확히 그렇게 구성되고 해체되기 때문입니다. All confessions assume that the Other, someone, already knows what I am going to say and that I am egged on to say it, so to speak, without being able to turn round. The idea watches me from behind, at my back, because as we know since Hegel, all conscience is constituted and deconstituted precisely. (21)
[[Emmanuel Levinas|레비나스]]는 낯선 부재의 현존, 타자의 현존 = 얼굴(face). *Totality and Infinity* [-@levinas_totality_1991]에서 [[Emmanuel Levinas|레비나스]]는 [[Jean-François Lyotard|리오타르]]처럼 담론이 보여주고 따라서 자신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해보다 나은 것은, 담론은 본질적으로 초월적인 것과 관계한다" [@levinas_totality_1991, 195].
> 담론은 생각을 자신 밖으로 내보내어 생각이 자신을 볼 수 있게 합니다. 동시에, 생각을 밖으로 내던짐으로써 담론은 생각과 절대적인 방식으로 분리되어, 생각과 그것이 거리에서 형상화하는 것 사이에 환원 불가능한 거리를 팝니다.
> > Discourse puts thought outside itself, thus allowing thought to see itself. At the same time, by throw-ing thought out, discourse separates itself from thought in an absolute manner, digging an irreducible distance between thought and that which it figures in the distance (23).
'형식 논리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는 절대적 차이는 언어에 의해서만 확립된다. 언어는 장르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항들 사이의 관계를 완성한다 ('Absolute difference, inconceivable in terms of formal logic, is established only by language. Language accomplishes a relation between terms that breaks up the unity of a genus’)' [@levinas_totality_1991, 195].
그러므로 생각은 자신을 다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분리하면서 생각은 자신을 잃기도 한다 But in separating itself in this manner, it also loses itself (23). 담론의 눈이 보는 것, 생각에 대해 보는 것은 특정 형상, 즉 얼굴입니다. 그것은 상상하고 응시하는 복잡한 형상입니다. 누군가이면서도 아무도 아닌 것.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것. 비밀스러우면서도 공개적인 것. 물러나면서도 (예를 들어 지옥으로) 세상에 있는 것. 그것은 나에게 대답하도록 부릅니다. 형상은 타자성(alterity)의 얼굴입니다
여기서 말라부는 마치 형상과 얼굴을 하나고 같다는 듯이 말하지만 [[Emmanuel Levinas|레비나스]] 역시 레비나스 역시 형상과 얼굴 사이의 엄격한 구별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형태(form)의 의미. [[Jean-François Lyotard|리오타르]]가 정의한 얼굴은 형태가 부족하다. Totality and Infinity* [-@levinas_totality_1991] 그는:
> '얼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한정하는 형태를 뚫고 나간다' [-@levinas_totality_1991, 198]
> > the face [. . .] breaks through the form that nevertheless delimits it [-@levinas_totality_1991, 198].
얼굴은 '형태를 폭발시킨다 (explodes form)', 즉 우리가 보통 그것과 동의어로 여기는 형상과 얼굴의 윤곽을 폭발시킵니다. 리오타르가 『담론, 형상(Discourse, Figure)』 [-@lyotard_discourse_2011]의 서문에서 말했듯이: '사건의 당사자가 되려 하거나 사건에 대비하려 하는 것은 여전히 윤리적 망상이다. 증여(수여)의 속성은 우리를 몰수하는 것이다-강탈에 대비할 수는 없다' ‘Wanting to promote oneself as a partisan of the event, or to predispose oneself to the event, is still an ethical delusion. It is a property of the bestowal to dispossess us – one cannot predispose oneself to dispossession’ [-@lyotard_discourse_20111, 18]. 즉, 형상화하려 하지 않거나 타자를 형태 안에 담으려 하지 않는 것은 타자를 놓치는 것에 해당합니다. In other words, not to want to figure or not to want to take the Other in form amounts to missing the Other.
**생각을 보는 눈은 형상을 보는가 얼굴을 보는가? 형태를 볼까 아니면 모든 형태의 폭발에서 시작되는 무언가를 볼까?**
### 2. 가소성
[[Claude Lévi-Strauss|레비스트로스]]의 A Small Mythico-Literary Puzzle에서 [[Guillaume Apollinaire]]의 시 '가을 크로커스(Autumn Crocuses)'읽기
> 가을의 크로커스를 꺾는다 — 그 꽃은 마치 그들의 어머니 같고
> 그들의 딸들, 또 딸의 딸들 같아
> 너의 눈꺼풀을 닮은 색이야
> 미친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처럼 너의 눈꺼풀은 떨린다
우리는 ‘generation following’ structuralism이다.
> ‘Following generation’ invites a reflection not only on what it might mean to inherit, but also on the shaping [formation] of the inheritance by its inheritor, on the fact that an inheritance – no matter what it may be – far from being entirely constituted, must again, in some way, be engendered, shaped, regenerated to be what it is – to be something given. (27)
> > “뒤따르는 세대(Following generation)”라는 개념은 단지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성찰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유산을 받는 이가 그 유산을 어떻게 형성하고 빚어내는지를, 다시 말해 유산이라는 것은 —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 이미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태어나고, 형성되며, 새롭게 재생되어야 비로소 '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여기서 바로 [[Claude Lévi-Strauss|Lévi-Strauss]]는 구조주의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mothers daugh-ters of their daughters란 것은 일직선적인 anthropologist가 공부할 만한 kinship구조와 연결되지 않는다. The structure will come after, will follow kinship.
여기서 가소성은 텍스트의 재생력. 구조주의, 해체, 차이의 사상 등 이전 세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읽기 전통의 후손이 되는 문제, 즉 후손을 만드는 문제. 텍스트를 읽는 다는 것은 구조적 핵을 이끌어내는 것이며 이 구조는 해체의 결과로 텍스트 내에서 분출한다. 따라서 구조적 핵은 그것이 구조화하는 것 이후에 도착한다. 그러므로 텍스트가 해체된 이후에 살아남은 요소가 형태form라고 부르는 것이며 a posteriori 변태와 같은 것. 말라부는 이런 방식으로 [[Friedrich Hegel|헤겔]]과 [[Martin Heidegger|하이데거]]를 읽었고 그 해체를 따라 (==[[Jacques Derrida|데리다]]가 들린다==) 혹은 해체로부터 생성 작업, 즉 아 포스테리오리 발생을 통해, 재구성 같은 것(이 맥락에서는 엄밀히 말해 무의미할 것입니다)이 아니라, 텍스트의 피부를 잡아당겨 의미를 다르게 분배하고, 그 안에 새로운 조직을 드러내고, 텍스트 내에서 다른 움직임과 다른 진리의 효과를 가능하게 하는 상처(scar) 같은 것을 본다.
[[Claude Lévi-Strauss|Lévi-Strauss]]이러한 재생력을 완벽하게 본다. 기의(signified)와 기표(signifier)의 가역성(reversibility)이 무한 재생과 불멸성, 즉, 재구성이 아니라 다르게 분배하고 새로운 조직을 드러내고 상처같은 것을 본다는 문장은 들뢰즈의 [[diagram|다이아그램]]과 매우 닮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재생력 = [[Plasticity]]. 자신의 해체로부터 솟아나오는 현존은 어떤 의미에서 해체할 수 없는 현존이다 = 항상 새로워지는 현존 → 자기 복제의 비밀과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
> 무한히 스스로를 재구성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죽음 없는 죽음[mort sans mort]입니다.
> > Between the children and the cows, the autumn crocuses don’t budge, don’t die, they remain, immu-table horizon of meaning, seemingly capable of reconstituting themselves ad infinitum, death without death [mort sans mort] (35).
[[Jacques Derrida|데리다]] 또한 텍스트의 놀라운 자기 재생력을 관찰한다.
> 『산종(Dissemination)』 [-@derrida_dissemination_1981, 63]에서 그는 텍스트가 '유기체로서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게임을 마스터했다고, 모든 실을 한 번에 조사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비평의 해부학 또는 생리학에도 항상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1981: 63 인용)고 선언합니다.
> > 'as an organism [. . .] There is always a surprise in store for the anatomy or physiology of any criticism that might think it had mastered the game, surveyed all the threads at once’
**자기-재생(auto-regeneration)과 자기-생성(auto-engendering)**
말라부는 헤겔이나 하이데거를 그들의 해체 이후에 읽는다. 해체를 따라 재구성이 아니라 해체로 인해 만들어진 상처와 같은 것이 발전하는 것을 본다. 이 상처는 텍스트의 표피를 당겨 의미를 다르게 분배하고 새로운 조직을 드러내고 다른 움직임과 진리의 효과를 가능하게 한다. = **재생적인 힘을 가소성**
In this botanical phenomenon, the after comes before the before. 데리다는 이것을 『엽서(The Post Card)』 [@derrida_post_1987, 28]에서 '파국(catastrophe)', 즉 문자 그대로의 의미(그리스어 katastrophē)로 **역전(reversal)** 이라고 확인합니다. **자기-가소적 텍스트(autoplastic text)** 는 **타자-가소적 독서(alloplastic reading)** 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가소성은 또한 부상 후 조직이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지칭) 엽서의 특징은 항상 이중적. 첫째, 가역적입니다 reversible (앞뒤, 아버지/아들 없음). 둘째, 복제 가능하며 reproducible 완벽히 동일한 여러 복사본이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here will always be multiple copies of it, perfectly identical ones. is the task of producing the reading of this simultaneity, of this contemporaneity of two types of reproduction in one single subject, in one single biological and symbolic body.
말라부는 *Plasticity at the Dusk of Writing* [-@malabou_plasticity_2010] 에서 현존을 따르는 형태가 작품 속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을 주장했다.
> It is a matter of causing the form that follows presence to arise in works [-@malabou_plasticity_2010, 57, translation modified]
그러나 기호 구성 요소의 가역성을 발견할 때 생성되는 현존의 상기(recall)가 현존 자체를 다시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영속성을 다시 생성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구절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faithful copying** (auto-clone) and difference (a difference between code and message; a non-disseminatory difference between the nucleus and itself)
‘generative cell’처럼 완전히 똑같은 것의 재생산. 다름의 만듬 (It’s time to stop thinking of cloning in terms of the pure and simple identical replica. The clone clearly has something of difference in it, and the chief issue of the times to come will be to draw out the proper site of this difference.)
> We might not ask ourselves any more if clones are really twins, but instead how the phenomenon of cloning allows us to take twinness as the model of truth. Plasticity, from the perspective of such an investigation, would no longer be linked to the movement of an eternal post-postmodern ruminating rehearsal, but to the eruption of a reversibility between before and after that modernises posterity by giving new forms to atomised, nuclear sameness – whether it be vegetal, logical or ontological. Following this, it will be the atoms that split us. (38)
==그리고 아마 두 split사이에 위치하는 방법의 어려움이 다음 글==
### 3. 초월적인 것, 부정 Denial, 가능성
[[Friedrich Hegel|헤겔]]과 [[Jacques Derrida|데리다]]를 데려와 초월적인 것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 The question is how to avoid falling, how to prevent the object from falling, and what should we do with what falls down nevertheless? (39)
우리는 발기의 각자의 개념과 욕망, 타락, 보존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진 두 기둥을 가지고 있다. main ways of preventing (connection with other things, other things hold it, secure it, bind it; Such a totality forms a **system**) something from falling (cutting the whole structure into small pieces). 이것이 바로 [[Jacques Derrida|데리다]]의 1974년 책 _**Glas**_ 의 두 면이다. [[Friedrich Hegel|Hegel]] and [[Jean Genet]]은 이 질문에 매우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transcendental]]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도 (혹은 더욱더) 그들의 텍스트는 갈 수 있는 만큼 멀리 나아간다. 여기에 중심적으로 두 방법이 나타난다.
1. 철학 [[Friedrich Hegel|헤겔]]: systematisation, 오브젝트를 다른 것들과 연결해서 다른 것들이 이 오브젝트들이 hold it, secure it, bind it. Such a totality forms a system. 이는 **형이상학의 재건과 이상화**에 해당.
1. 예: 결혼, 가족, 통합 등의 상징 → 추락(chute)을 기념비(monument) 안으로 흡수함.
2. 문학 [[Jean Genet|주네]]: fragmentation; Phallic Circulation. 전체 구조를 작은 조각들로 자르는 방법. 마치 낱장의 종이처럼 모든 것들이 falls down 하도록. 모든 것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것에 특별함은 없다.
1. **떨어짐을 그대로 허용하거나 방치**함 → 해체, 파편화, 소외의 미학.
물론 이 두 방식은 서로를 옅본다. 그리고 두 과정들은 다른 버전들의 같은 문제다: erection. Glas [-@derrida_glas_1986] 에서 처음으로 erection은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이슈 아니면 형이상학 혹은 존재론의 마지막에 대한 이슈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이 질문은 동시에 두 개의 텍스트를 동시에 쓰는 방법과 그 가운데에 머무는 방법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욕망이 추락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욕망의 대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미 추락한 욕망의 대상들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욕망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그 힘과 에너지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how to prevent desire from falling, how to prevent the object of desire from falling, and what we can do with fallen objects of desire? How is it possible to keep desire alive, to preserve it in its full force and energy?)
[[Friedrich Hegel|헤겔]]
데리다는 *아우프헤붕(Aufhebung; 헤겔 철학에서 '지양(止揚)'으로 번역되는 개념으로, 폐기와 보존, 상승의 이중 운동을 내포)* 을 하나의 발기(erection)의 운동으로 이해한다. We know that, literally, [[Aufhebung]] means suppressing, preserving and lifting up in the sense of picking up what falls on to the ground in order to secure it by putting it in a higher place.
텍스트는 발기가 **전유(appropriation)** 를 의미하며, 이는 똑바로 서고, 상수성(constancy)을 갖고, 본질(essence)을 가지며, 존재(existence)하기 위해, 즉 실체(substance)를 갖기 위해 그것의 반대 속으로 고양(raised into its contrary)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동시에 건축적인 것이자 성적인 것이다. 여기서 논의되는 '발기(erection)'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넘어선 더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어 동사 _bander_ 의 이중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Glas》의 영어판에서 ‘band erect’로 번역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성적 발기—즉, 발기하다(have a hard-on)—를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인가를 붕대로 감싸거나 미라로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이로써 욕망과 보존이라는 이중의 작동이 함께 호출된다.
[[Friedrich Hegel|헤겔]]에게서 초월은 내부화, 이상화, 확대와 같은 과정은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정신을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측면으로 나눈다 = 철학적 사색은 정신의 자기 침투 = 대상은 내부화되고, 암호(crypt) 안에 잠겨져, 회수, 재활성화, 확대를 위해 받아들여져야 함.
[[Jean Genet|주네]]
반면에 제네의 입장은,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전체 체계나 구조 자체를 뜯어내어 모두가 붕괴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처음에 스스로 분리되어 떨어졌던 고립된 부분은 더 이상 나머지와 구별되지 않게 된다 → ([[Jacques Derrida|Derrida]]: proliferation, dissemination, multiplicity) 주요 글은 [[Jean Genet|주네]]의 [[Rembrandt]]에 대한 글 *What Remains of a Rembrandt Torn into Four Equal Pieces and Flushed down the Toilet* (1964)
> “Here, in the right-hand column, erection, like writing, becomes a means to maintain torn pieces in their togetherness, to preserve them from dispersion in the paradoxical absence of totality, in the flux, or ‘flow’. Everything remains, the whole is a remainder: anti-dialectical relationship to duration and time.” (Malabou, 2022, p. 48)
우리는 『Glas』가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의 대결로 읽혀온 사실을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통상적인 방식으로 대표되는 이성애는 결합, 결혼, 자녀, 가족(헤겔)을 의미하며, 퀴어는 흩어짐, 다수성, 이탈, 그리고 남근이 덩어리나 절단된 신체 일부, 잘린 꽃(제네의 경우)으로 변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결을 선험적인 것에 대한 두 관점 사이의 대결로 다시 읽을 것을 제안한다. 데리다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시스템의 가능성 공간을 보장하는 시스템에서 제외된 요소가 항상 있는가? 초월적인 것은 항상 엄밀히 말해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시스템에 고유한 어떤 범주에서도 받아들여지거나, 형성되거나, 완성될 수 없는 것. 시스템의 구토물.". 헤겔이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시스템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서로 극단적으로 달라 보이는 두 기둥이 왜 데리다에겐 "같은 것(_revenir au même_)"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는가? 왜 그 둘 사이에 "감염(contagion)"이 일어나는가? 이 두 기둥이 결국 **"같은 것으로 수렴하는 위험"** 을 내포하며, 즉, 차이를 구성하는 두 체계조차 서로를 더럽히고, 닮아가고, 심지어 **구분되지 않게 될 수 있음**을 말라부는 주목한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말하는 **철학적 문제로서의 발기(erection)** 의 핵심. 따라서 우리는 욕망, 추락, 보존에 대한 고유한 관계를 지닌 각각의 ‘발기’ 개념과 함께 두 개의 기둥을 갖게 된다. 이는 분명하고 모호하지 않아 보인다. 각 사상가는 자신의 자리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왜 데리다는 ‘발기’를 끊임없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바로 이 책의 서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 The first assures, guards, assimilates, interiorizes, idealizes, relieves the fall [chute] into the monument. There the fall maintains, embalms, and mummifies itself, monumemorizes and names itself – falls (to the tomb(stone)) [tombe]. Therefore, but as a fall, it erects itself there. The other – lets the remain(s) fall. Running the risk of coming down to the same. [@derrida_glas_1986, 1–2b]
> > "첫 번째는 기념비로의 추락(chute)을 보장하고, 지키고, 동화하고, 내면화하고, 이상화하고, 경감시킨다. 거기서 추락은 유지되고, 방부처리되고, 미라화되고, 기념하고, 스스로를 명명한다 - 무덤(묘비)으로 추락한다. 그러므로, 그러나 추락으로서, 거기서 스스로를 발기시킨다. 다른 것은 - 잔해를 떨어뜨린다. 같은 것으로 내려올 위험을 감수하면서."
= 페티시가 거부되고 무효화되는 페티시의 이중화, 페티시에게 가해지는 폭력
우리는 페티시를 정말로 버릴 수 있는가? = 초월적인 것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있는가?
> ‘Isn’t there always an element excluded from the system that assures the system’s space of possibility? The transcendental has always been, strictly, a transcategorical, what could be received, formed, teminated in none of the categories intrinsic to the system. The system’s vomit’ [@derrida_glas_1986, 162a].
> > '시스템의 가능성 공간을 보장하는 시스템에서 배제된 요소가 항상 있지 않은가? 초월적인 것은 항상 엄격하게 범주를 초월한 것이었고, 시스템에 본질적인 어떤 범주에서도 받아들여지고, 형성되고, 종료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스템의 구토물'
세움은 필연적으로 **붕괴의 가능성을 동반**, 즉, 데리다에게서 _erection_ 은 단순히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붕괴의 가능성을 품은 형상**.
그렇다면 우리는 욕망의 보존이라는 문제에 대해 초(超) 제네식(hyper-Genetian) 요소에 직면하게 된다. 즉, 체계는 스스로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을 통해 필연적으로 실패할 운명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이 **초 제네적** 비전은 즉각적으로 **초 헤겔적(hyper-Hegelian)** 비전으로 전환된다. 만일 발기가 전체로부터 분리 가능한 것이라면, 그 분리 가능성 덕분에 발기는 곧 전체를 분리로부터 보호하는 특권적 단편이 된다.
> Erection then becomes the most significant fragment (44).
The most detachable part. The essential part. A surplus, an excess, that is also what most systematically attaches detachment to itself. Erection은 총체성을 방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흩어짐(dissemination)의 중립성 자체를 침식시키는 것이다. 다시말해, 발기가 체계 안에서 중심을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고 발기라는 중심적 잉여에 의해 오염되기 때문에 제네적인 다중성과 파편성이 더 이상 순수한 탈중심도 될 수 없다는 것 → **Erection cannot help but become fetishised.** 환유적이면서도 본질화하는 잉여 효과, 이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닌 괴물적 현존. **변증법**, 어쩌면 **문학 자체**도 페티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페티쉬 = 하나의 연쇄에서 **분리될 수 있는 것**, 그래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무엇인 동시에, **다른 어떤 부분과도 대체 가능한 대용물**로 기능할 수 있는 것. 분리되면서도 전체를 지탱하는 중심, 잉여이면서도 본질, 교란하면서도 매개하는 것. 이걸 데리다는 ‘transcendental effect’ of erection라고 부른다.
> The fetish is the modern name of the transcendental. Derrida speaks of the transcendental effect that always accompanies taking part, but also asks: ‘How can a part take part, be party to?’ [@derrida_glas_1986, 15b].
문제는 [[Friedrich Hegel|헤겔]]과 [[Jean Genet|주네]] 모두 precisely, to avoid the fetishist economy of the transcendental. 헤겔에게 선험적인 것(the [[transcendental]])은 본질적으로 **모든 체계의 바깥, 또는 외부자**이며, 체계로부터 추락한 것이다. 칸트가 주장했던 선험적 법칙과 사유 구조가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관점에 반해, [[Friedrich Hegel|헤겔]]은 모든 것이 체계 속에 편입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데리다는:
> “선험적인 것 또는 억압된 것, 사유되지 않은 것 또는 배제된 것은, 자신이 속하지 않는 바탕을 구성한다.”
> “사변적 변증법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지하실(crypt)조차도 체계 안에 편입될 수 있다는 것. 선험적이거나 억압된 것, 사유되지 않았거나 배제된 것은, 신체(corpus)에 의해 동화되어야 하며, 하나의 계기(moment)로서 내면화되고, 그 부정성의 노동 안에서 이상화되어야 한다.” [@derrida_glas_1986, 1986: 166a]
[[Jean Genet|주네]]의 경우는 그는 대용물의 대용물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부분을 또 다른 부분으로 대체하며, 페티시(fetish)와 패스티시(pastiche, 포스티시(postiche, 모조물) 사이의 경계를 교란하며 선험적 경제로부터 탈주한다.
데리다가 장 제네의 글을 읽으며, 예컨대 '꽃'이라는 이미지를 그 텍스트의 주요 도상으로 선택하는 순간, 정작 데리다 자신이 페티시적 독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반헤겔적 우상, 즉 자기 텍스트의 오른편 기둥 위에 세워진 또 하나의 조각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위험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는 데리다는 우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 “당신은 그 함정에 성급히 *빠져들* 것인가? 그리고 '꽃(The Flower)'을 번역할 것인가? 그것이 상징하고(상징하고, 은유하고, 환유하고, 기타 등등) 있는 것은 남근이며, 잘릴 수 있고-죄가 있는(cuttable-culpable) 문법 구조 안에 포착된 그 순간, 그것은 죽음, 참수, 목 절단을 의미하게 되는데? Anthologos, 기호를 의미하는 기호로서 거세를 의미하게 되는가?” (1986: 27–28b, 강조는 인용자)
데리다는 이러한 위험의 단순화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대상의 추락, 떨어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황홀한 상실(ecstatic dispossession) → 그것을 유지하거나 보존하거나 간직할 필요가 없다. 남은 것, 잔여물, **le reste**로 만족하자. 그것을 욕망하는 법을 배우고, 부착할 수도 분리할 수도 없는 **쥬이상스(jouissance)**, 자유롭게 떠다니는 쾌락의 독서를 개발하자.
> “생각해보려는 시도… ‘유예된 잔여물(remain(s))’. 그것은 다음과 같지 않을 것이다: 현존도, 실체도, 본질도. 일반적으로 잔여물이라 하면 지속적이고, 실체적이며, 자존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서의 잔여물은 그런 의미에서 ‘남아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derrida_glas_1986, 226a].
이 잔여물은 심지어 더 이상 떨어지지도 않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 잔여물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derrida_glas_1986, 226a] 같은 페이지, 제네 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대상 그 자체가, 그것의 드러난 진리 안에서, 그 드러남 자체에 의해 이미 보충적 차이의 놀이에 휘말려 들어가자마자, 페티시는 더 이상 엄밀하게 결정 가능한 지위를 갖지 않게 된다. 팔로고중심주의(phallogocentrism)의 Glas (장승 종소리).” (1986: 226b)
이렇게 두개의 erection 사이에 서 있는 것은 즐겁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끌어가는 질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나의 질문이자, 우리를 ‘세워 놓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해체는 과연 초월론적(transcendental) 지평을 포기하는 데 성공했는가?**
이 질문은 앞으로도 철학과 문학 양쪽을 오래도록 괴롭히게 될 것이다.
### 4. 최악의 가능성: 신앙과 지식에 대하여 The Possibility of the Worst: On Faith and knowledge
한 문장으로 데리다의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항상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there is always another possibility". 모든 시제로 활용할 수 있는 문구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 그 자체 = 해체의 범주를 은밀히 지배하는 일종의 초월적 스케마티즘 (a sort of transcendental schematism that secretly governs the categories of deconstruction).
**현재시제**: There is always something other than what is.
**미래시제**: Another order of things may come to pass, even if one is unable to ‘see it coming’. → ‘the promise,’ which can be a promise of good fortune or happiness; it can also be the possibility of the worst, or what Derrida, after Kant, calls radical evil.
**과거시제**: Our entire history, everything that ever was or has been, could have happened differently.
또다른 가능성은 concept of ‘the possible’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전통 철학에서 ‘가능성’은 필연성(necessity)과 현실성(actuality) 개념과 연결되어왔다. 반면, ‘또 다른 가능성’, 완전히 다른 가능성은 그 어떤 철학적 범주와도 대응될 수 없는 것이다 —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것도 아니며, 심지어 불가능한 것조차도 아니다. 다른 가능성에 대해선 우린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믿음의 양식은 무엇인가? What are the modalities of such a belief?
말라부는 데리다가 설정하는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인 또 다른 가능성, 믿음, 그리고 부정(denial/dénégation) 사이의 연결고리다. 가장 먼저 belief and Denial
#### Belief and Denial 믿음과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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