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ry Poovey (2009) *A History of the Modern Fact: Problems of Knowledge in the Sciences of Wealth and Society*.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INFO]
> Type:: [[]]
> Title:: A History of the Modern Fact: Problems of Knowledge in the Sciences of Wealth and Society
> Author(s): [[Mary Poovey]]
> Year:: 2009
> Tags::
> DOI::
> Citekey:: poovey_history_2009
> ZoteroURI:: [Open in Zotero: A History of the Modern Fact: Problems of Knowledge in the Sciences of Wealth and Society](zotero://select/items/@poovey_history_2009)
> ReviewedDate:: [[2025-08-06]]
> Related Note: 202508131838
## C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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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vey_history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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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 Annotation
**서론(INTRODUCTION)**
저자는 "근대적 사실"이 지난 4세기 동안 대부분의 지식 프로젝트를 조직해 온 인식론적 단위로서 그 범위가 방대함을 인정하며, 이 책이 제시하는 역사는 그러한 역사 중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근대적 사실은 본질적으로 모호한데, ==이는 서구 철학이 17세기 이래로 우리가 관찰하는 것들이 철학적 및 실용적 지식의 정당한 대상이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맥락에서 분리되고 '이론', '가설', '추측'과 같은 단어로부터 자유로운 개별적 사실로 인식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체계적인 지식을 생산하려는 끊임없는 노력 때문에 이론이나 가설의 관점에서 수집된 증거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사실이 구체적인 현상의 풍부함과 다양성, 그리고 인간이 고안한 규칙 기반 시스템의 통일된 질서 사이의 긴장을 등록하는 인식론적 단위가 되게 합니다.
이 연구는 주로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영국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는 이 시기에 자유주의적 정부 형태가 등장하여 사적 시민과 자발적 사회가 다양한 지식 생산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장려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1588년의 영국 최초의 복식부기 매뉴얼을 연구의 시작점으로 삼는데, 이는 복식부기에 기록된 체계적으로 배열된 항목들이 근대적 사실 내의 긴장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 책은 J. R. 매컬록(J. R. McCulloch)의 1825년 지식 분류, 존 허셜(John Herschel)의 1830년 자연 과학에서의 사실 문제 다루기,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사회 과학에서 연역법의 우위 강조로 마무리됩니다. 이들 인물은 관찰된 개별적인 사실과 이론적 또는 체계적 지식 사이의 긴장을 전문적 해결책을 요구하는 문제로 인식했으며, 이는 1870년 이후 근대적 사실을 대체하기 시작할 재개념화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 책은 "이해관계(interests)", "사심(interestedness)", 그리고 "사심 없음(disinterestedness)"이라는 개념들의 변천, "신용(credit)", "신뢰성(credibility)", 그리고 "속기 쉬움(credulity)" 사이의 복잡한 연관성, 그리고 자유주의적 정부와 주관성 또는 욕구 이론 사이의 연결 고리라는 세 가지 주요 주제를 반복적으로 탐구합니다. 저자의 방법론은 "역사적 인식론(historical epistemology)"으로, 지식이 조직되는 범주들이 무엇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고 가정합니다. 이는 '사실'과 같은 인식론적 단위뿐만 아니라 '학문 분야'나 '전문직 단체'와 같은 제도화된 단위까지 포함합니다.
### **1장: 근대적 사실, 귀납법 문제, 그리고 방법론적 질문(THE MODERN FACT, THE PROBLEM OF INDUCTION, AND QUESTIONS OF METHOD)**
이 장에서는 근대적 사실의 특이성을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적) 사실과 대조하여 명확히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진정한 지식은 개별적이거나 관찰된 특수성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특히 한 개인이 경험한 것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는 『분석론 후서』에서 "감각 지각은 특수성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 반면, 지식은 보편자의 인지에 의존한다"고 선언했고, 『형이상학』에서는 "항상 그러하거나 대부분 그러한 것"인 공통 경험만이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 "sense perception must be concerned with particulars, whereas knowledge depends upon the recognition of the universal"; and in the Metaphysics he explained that the only experience that matters is common experience—"that which is always or that which is for the most part."
그러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정의한 근대적 사실은 고대 지식 단위와 한 가지 유사점을 가집니다: 근대적 사실은 체계적 지식의 단위이며, 그 자체로 베이컨이 이론적 전제로부터 격리시키려 했던 이론적 전제에 본질적으로 취약합니다. 피터 디어(Peter Dear)는 17세기에 "단일한 경험은 명백할 수 없었지만, 증거를 제공할 수 있었다(The singular experience could not be evident, but it could provide evidence)"고 설명하며, 이는 근대적 사실의 특이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즉, 사실은 베이컨이 주장했던 "탈맥락적 개별성(deracinated particulars)"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어떤 ==이론의 증거가 될 때 비로소 식별 가능한 단위로 존재==합니다. 베이컨의 구분은 수사적이었으며, 새로운 지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학문적 이견을 잠재우려는 의도였습니다.
저자는 17세기 과학 혁명 이전에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라는 기록 관행에서 근대적 사실의 원형을 찾습니다. 이는 복식부기가 "낮은 문화적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종류의 지식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식부기 시스템에서는 '돈(money)'과 같은 의인화된 개념, 참조 대상이 없는 숫자, 그리고 '장부 가치(book value)'와 가격의 동일시와 같은 "비판적 허구(critical fictions)"가 회계사가 "균형(balance)"을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균형은 상인이 신용 있고 정직하다는 중요한 의미를 생산했습니다 (11).
> When we examine the way knowledge is produced in the double-entry bookkeeping system, however, we do not see nature speaking for itself, as the natural philosophers claimed the laboratory enabled it to do; we see fictions being installed as props to systematic meaning and coherence. In the double-entry bookkeeping system, in other words, certain critical fictions-personifications like "money," numbers that have no referent, and the equation of "book value" with price-enabled the accountant to create the all-important balance, which produced the system's most salient meaning: that the merchant who kept the books obeyed the order of God's harmonious world, that the merchant was creditworthy because he was honest (11)
로버트 보일(Robert Boyle)과 왕립 학회(Royal Society)의 회원들은 이론과 무관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이러한 개별적 사실로부터 일반 지식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보일과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모두 지식 시스템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믿음(belief)"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홉스는 정치적 사실은 연역을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다고 보았고**, 왕은 정치적 지식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철학적 지식 생산을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베이컨, 홉스, 토마스 스프랫(Thomas Sprat),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데이비드 흄(David Hume) 등은 모두 자신들이 정의하려는 지식 생산 방식이 수사학의 과도한 장식을 버렸다고 주장하며, 숫자가 가장 투명하고 편향되지 않은 표현 형태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17세기와 18세기에는 체계적인 지식의 '허구적' 성격이 신의 섭리적 계획으로 이해되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 “In the double-entry bookkeeping system, in other words, certain critical fictions-personifications like "money," numbers that have no referent, and the equation of "book value" with price-enabled the accountant to create the all-important balance, which produced the system's most salient meaning: that the merchant who kept the books obeyed the order ofGod's harmonious world, that the merchant was creditworthy because he was honest.” (Poovey, 2009, p. 11)
이 장의 방법론적 논의는 이 책이 푸코(Foucault)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단절(ruptures)'을 강조하거나 '담론(discourses)'에만 초점을 맞추는 푸코주의적 서술과 다르다는 점을 명시합니다. 저자는 역사가들이 '단절'로 식별하는 것들이 연속적이지만 복잡한 과정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지식 생산의 영역이 어떻게 겹치고 점진적으로 분화되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 **2장: 상인들을 수용하기: 복식부기, 상업적 전문성, 그리고 정확성의 효과(ACCOMMODATING MERCHANTS: DOUBLE-ENTRY BOOKKEEPING, MERCANTILE EXPERTISE, AND THE EFFECT OF ACCU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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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복식부기와 상업적 전문성이라는 초기 상업 자본주의의 두 제도를 다룹니다. 복식부기는 글쓰기 시스템으로서 근대적 사실의 원형을 만들었고, 상인 간의 비공식적 합의 시스템인 상업적 수용(mercantile accommodation)은 상업적 거래를 조직하는 규칙 기반 시스템이 효과적인 정부의 모델을 제공한다는 것을 시사했습니다. 복식부기는 엄격한 형식적 규칙을 따름으로써 '정확성'이라는 효과를 창출했고, 이는 상인의 신뢰성과 덕목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16세기 후반의 독자들에게 ‘균형’은 정의의 저울과 신의 세계가 지닌 대칭적 질서를 함께 불러일으켰다 (54).
존 멜리스(John Mellis)의 『채무자와 채권자의 순서에 따라 회계 장부를 보관하는 방법 안내』(A Briefe Instruction and Maner How to Keepe Bookes of Accompts after the Order of Debitor and Creditor, 1588)와 같은 초기 매뉴얼은 복식부기의 시각적 대칭성을 보여주며, "공정함의 저울"과 "신의 질서"를 암시합니다. 숫자의 동일성은 검증 가능성을 통해 정의되었고, 이는 산술적 정확성을 덕목과 동일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복식부기는 여성이나 젊은이들의 "마음의 능력"에 따라 쓰이는 상세한 서술적 기록을 '과도한 것'으로 배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위험 요소를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완벽한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 Because women and young persons wrote "after the capacitie of their mindes" and not according to rule, no "perfitte doctrine" (no rules) could be given for their writing. Women and youths were represented as exceeding this kind of representation, in other words, and this kind of writing could be represented as "perfitte" because it excluded that which was, by definition, excessive to it (61-2).
“Three contributions to the debate about money-Gerald de Malynes's Center of the Circle of Commerce (1623), Edward Misselden's Circle of Commerce (1623), and Thomas Mun's Englands Treasure by Forraign Trade (1622 or 1623)constitute the basis for the analysis I offer here.” (Poovey, 2009, p. 66) 이 장은 1620년대 초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영국에서 두드러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통치술(reason of state) 개념과 관련된 상인 변호사들의 노력을 탐구합니다. 에드워드 미셀덴(Edward Misselden)과 토마스 문(Thomas Mun)은 통치술 이론을 활용하여 상인 전문성이라는 새로운 위치를 창출하고, 상인에게 무역 시스템을 해석할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이들의 글에서 해석 시스템은 무역 시스템을 가시화했고, 이는 상인이 왕권이 도전받기 시작한 상업 분야에서 모범적인 시민으로 부상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말린즈(Malynes)의 『상업의 원점』(Center of the Circle of Commerce)과 미셀덴의 『상업의 원점』(Circle of Commerce) 사이의 논쟁은 전통적인 군주 권력 지지자와 현대적 통치술 지지자 간의 대립을 보여주었습니다. 말린즈는 저울의 이미지를 비웃으며 복식부기의 지식 생산 방식에 내재된 문제를 비판했는데, 이는 복식부기가 상업의 정확한 표현으로 그 정밀성을 제시하기 위해 시스템 자체의 작동을 지워버린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숫자 사실이 추측의 증상일 뿐이며, 회계 장부의 정밀성은 시스템 자체의 속성일 뿐 실제 표현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토마스 문은 미셀덴의 화려한 수사학과 대조되는 간결하고 꾸밈없는 '평이한 문체(plain style)'를 채택했습니다. 문은 숫자에 대한 선호를 이론화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체 선택은 경제 지식 생산을 비인격성과 연결하고 비유적 언어가 무책임하다는 인상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숫자가 "자연의 보이는 토대"에 호소한다고 주장하며, 그의 경험에 대한 언급은 개인적인 증언의 한 형태였습니다.
> 먼(Mun)은 무역의 법칙과 관련된 원칙들을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서 끌어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먼은 무역에 관한 지식을 산출하는 최선의 도구로서 고전적 수사학을 거부하고, 경험을 상식적 지식으로 이해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에서도 벗어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경제 이론가들처럼 개별적인 경험적 관찰에서 규칙성을 도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 17세기 초반의 자연철학자들처럼 먼은 단순히 분석 대상이 법칙성을 가진다고 가정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경험을 언급한 것은 실험이나 관찰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술에 대한 신뢰성을 보증하는 일종의 사회적 증언 역할을 한 것에 불과했다. (83)”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 같은 18세기 시장 체계 이론가들은, 이른바 중상주의자들이라 불린 집단이 정확한 수치적 값을 결코 산출할 수 없는 개념에 특권을 부여한다며 비웃었다. 이미 1696년에 니컬러스 바본은 한 나라의 수입과 수출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역수지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했다. 바본과 스미스의 이러한 조롱 속에서 우리는, 세기 말까지 먼(Mun)의 회계가 보여주었던 형식적 정밀성이 (불완전한) 정확성으로 오인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복식부기, 상업적 전문성의 발전, 수사학의 점진적 위상 하락, 그리고 통치술 이론의 재해석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근대적 사실의 기초를 드러내며, "높은 문화"와 "낮은 문화" 사이의 복잡한 교환을 보여줍니다. 상업적 수용은 지위를 혈통이 아닌 관계로 보는 지위 시스템을 만들어냈고, 이는 "숫자와 비인격성 사이의 관계를 공고히" 했습니다.
**3장: 경제의 정치적 해부: 영국 과학과 아일랜드 토지(THE POLITICAL ANATOMY OF THE ECONOMY: ENGLISH SCIENCE AND IRISH LAND)**
이 장은 17세기 지식 위기에 대한 두 가지 대응을 다룹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통치술(reason of state) 주장을 철학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노력과 왕립 학회(Royal Society)가 신학적, 정치적 문제를 피하고 근대적 사실에 기반한 새로운 종류의 지식에 집중하기로 한 결정입니다. 홉스는 "추론(reckoning)"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수학적 추론을 자신의 연역적 방법의 모델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경쟁적인 이익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개인이 동일한 욕구(영광)에 의해 동기 부여된다고 가정하여 차이를 동일한 이익의 정도로 전환시켰고, 이를 통해 사회적 및 윤리적 분석에 산술적 계산을 통합했습니다.
이는 로레인 더스턴(Lorraine Daston)과 피터 디어(Peter Dear)의 선구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합니다. 더스턴은 '사실'이라는 현대적 의미, 즉 ==이론과 분리된 경험적 조각들이 17세기 초에 등장==했다고 지적하며,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일탈 사례"(Deviating Instances)를 개혁된 자연철학의 적절한 대상으로 삼았을 때 이 개념이 영어에 유입되었다고 설명합니다.
> “In 1991 Lorraine Daston directed our attention to facts in particular when she pointed out that the modern meaning offacts, "in the sense of nuggets of experience detached from theory," entered the English language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at the same time that Bacon identified"Deviating Instances" as the proper objects of a reformed natural philosophy.” (Poovey, 2009, p. 94)
베이컨은 사실이 "이론과 무관한"(deracinated) 것이라고 주장하며, 지식 생산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디어는 이러한 사실들이 의미 있는 '증거'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특정 사회적 또는 이론적 맥락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역설을 드러냅니다. 즉, "싱귤러 이벤트는 명백할 수 없지만, 증거를 제공할 수는 있었다." ("The singular event could not be evident, but it could provide evidence."). 이는 '사실'이 단순히 데이터 수집에 그치지 않고, 항상 이론이나 가설에 의해 조직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흥미'(interest)에 대한 논쟁은 매우 중요합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지식 생산에서 '흥미'를 긍정적인 의미로 활용하려 한 반면, 로버트 보일(Robert Boyle)과 왕립학회 구성원들은 자연 지식 생산이 '무관심성'(uninterested)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흥미'가 개인이익에 의해 왜곡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논쟁의 의도치 않은 결과 중 하나는 상인들이 현대 지식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문화적 재평가였습니다. 상인들은 자연철학적 가설을 증명하거나 반박하는 데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보일은 그들을 자연철학적 지식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실'을 수집하는 데 특히 적합한 집단으로 보았습니다. 상인들이 사용하는 수치적 표현과 이중 장부 기록법은 지식 생산에서 '투명성'과 '공정성'이라는 인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왕립 학회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과 토마스 스프랫([[Thomas Sprat]])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사심 없는(uninterested)" 지식 생산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개인적 이익을 제쳐두고 자연 세계에 대한 보편적 지식을 생산하려는 열망을 의미했습니다. 스프랫은 상인들을 "사심 없는" 사실 수집가로 여겼는데, 이는 그들의 수치적 표현과 복식부기 같은 도구들이 기록자의 개입을 제거하여 투명성과 공정성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프랫은 또한 수사학의 과도함을 비난하고, 상인들이 보여주는 자제력을 새로운 시민 사회의 모델로 제시했습니다.
이 장의 중심 인물은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입니다. 그는 홉스의 연역법과 보일의 실험주의를 결합한 "정치 산술(political arithmetic)"을 창조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산술'은 베이컨적 귀납법과 홉스적 연역법을 혼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사실'(economic matter of fact)을 창조했습니다. 페티의 사실은 관찰된 개별성이나 "일탈적 사례"가 아니라 추측적이고 추상적인 것("인구의 가치"와 같은)이었지만, 그는 숫자 표현의 정밀성과 전문가 해석의 공정성에 기반하여 이를 주장했습니다. ==페티는 그의 방법론이 사심 없음과 확실성을 보장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그의 정책 제안들은 아일랜드 토지에 대한 그의 개인적 이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페티는 자신의 방법을 레토릭과 이론적 분쟁에 대한 명백한 해독제로 홍보하며, "수, 무게, 측정"(number, weight, and measure)에 기반한 주장이 수학처럼 동의를 강요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수치를 공정하고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수치적 표현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법이 수학처럼 "확실하고 명백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군주의 후원을 통해 실험을 수행할 수 있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페티의 추상화된 숫자("인구의 가치" 등)는 개인의 복지보다는 집단의 복지를 강조하는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특정 용어로만 "복지"를 정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페티의 지식 프로젝트는 역설적인 특성을 가집니다. 그의 '사실'은 관찰된 특수성이 아니라 '추정적'(conjectural)이며, "사람들의 가치"(the value of people)나 "사람들의 상태"(the state of the people)와 같은 추상화된 개념을 묘사합니다 (123). 이러한 수치들은 실제 측정이나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구축한 이론의 효과로 존재합니다. 이는 이중 장부 기록법의 '정밀성'이 '정확성'을 보장한다는 주장과 유사하게, 페티가 수치적 표현의 '공정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 이익(아일랜드 토지 소유)이 그의 정책 권고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법이 정치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정책이 왕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페티는 자신의 방법론을 설명할 때 스타일을 강조합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레토릭적 장식과 구분하며, "수, 무게, 측정의 용어로 나 자신을 표현하고... 보편적인 말이나 지적인 주장이 아닌 감각적인 주장만을 사용하며, 자연에 눈에 보이는 기반을 가진 원인만을 고려합니다." ("I have taken the course... to express myself in Terms of Number, vveight, or Measure; to use only Arguments of Sense, and to consider only such Causes, as have visible Foundations in Nature..."). 이는 그가 자신의 방법이 '보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우위에 두며, '흥미'에 대한 호소를 배제하는 '정확한' 지식을 추구했음을 보여줍니다
> “Like Bacon and Sprat, Petty describes style where one might expect him to describe method. But his argument for style is not an evasion of method. Instead, by distinguishing his style-which features numbers-from rhetorical ornament, he is making a claim about method: like that of Bacon and Boyle, Petty's style embodies a method that appeals to the "visible Foundations in Nature," and not to "mutable Minds, Opinions, Appetites, and Passions."” (Poovey, 2009, p. 132)
> “the specific policies he recommended in the 1670s reveal that the method was never immune from interests-even when it was used specifically to erase those political and religious affiliations that had proved so divisive for the past half century.” (Poovey, 2009, p. 134)
1. 국왕의 급료로 살아가는 자들.
2. 토지와 자유토지를 소유한 자들.
3. 다른 이의 토지를 임차하거나 소작하는 자들.
4. 장인과 노동자로 일하는 자들.
(_Economic Writings_, 561-62)
이러한 범주들은 소득의 원천을 강조하면서, 아일랜드인을 종교적·정치적·혹은 민족적 주체가 아니라 경제적 존재로 전환하려는 목적을 지녔다. 이론적으로는 종교, 정치적 성향, 언어 대신 경제적 범주를 대체함으로써 아일랜드인들이 페티가 보았던 것처럼 자신들을 바라보게 만들고, 그 관점은 결국 그들의 진정한 이익이 아일랜드성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영국인처럼 만들어주는 습관을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깨닫도록 이끌려는 것이었다. 페티의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제안은 그의 추상화된 지식 생산의 잠재적 위험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는 아일랜드인을 길들이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말살하고 인구를 수치로 환원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경제적 사실에 연결된 추상화가 개인의 복지를 간과하고 집단의 복지만을 강조하는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패티의 아일랜드 문화를 근절하자는 악명 높은 제안은
1. 첫째, 그가 개발한 방법과 “사람의 가치”와 같은 추상 개념, 나아가 “국부”나 “인구”와 같은 개념의 산출 사이의 연결을 보아야 한다. 그러한 추상 개념들은—적어도 그것을 부추기지는 않더라도—개인의 안녕보다 집합체 전체의 안녕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이론적으로는 개인을 대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의 안녕을 무시하는 정책을 정식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1.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의 가치”와 같은 추상 개념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녕”을 경제적 용어로만 정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2. 비록 어떤 정치경제학자도 모든 고려 사항을 부(wealth)라는 단일 기준에 종속시키려는 이 경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19세기 이론가 일부는 그러한 종속이 해석적 제스처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2. 윌리엄 페티에게 정치 산술의 방법을 공정한 것으로 제시하는 일은 그의 이해관계에 부합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려는 군주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그는 이 방법을 왕의 이해를 충족시킬 수 있는 동시에 정치로부터 면역된—심지어 정치를 초월한—것으로 표현했다.
1. 페티는 정치 산술을 군주의 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동시에 정치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방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수학적 형식을 흉내 내어 공정성과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꾸몄고, 이를 통해 군주의 절대 권위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사실상 숫자와 공정성의 연결은 17세기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티의 숫자를 정치에 유용하게 만든 시도는 완전히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이해하려면, 당시 숫자의 문화적 권위가 수학적 도구와 실험 개념을 통해 강화되고 있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숫자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점차 추상 개념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모해 갔다.
**수학적 도구의 권위**
17세기 동안 수학적 도구의 발전은 수치적 표현의 문화적 위상을 크게 높였습니다. 페티는 아일랜드 토지 측량에서 현대 측량 기기를 능숙하게 사용함으로써 국가 통치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이는 수학적 추론이 "모든 인간 삶의 문제"에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7세기 초 신사 교육에서 기하학의 위상이 낮았던 것과 달리, 17세기 말에는 수학적 계산 능력이 유능한 통치의 필수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 “The rapidity with which numerical calculation became a critical component both of gentlemanly virtue and of effective statecraft can be grasped by two sets of comments, separated by less than a century.” (Poovey, 2009, p. 142)
존 아버트넛(John Arbuthnot)은 1701년에 "어떤 국가의 상태를 판단하거나 추론하려는 사람들은 수치적 계산을 통해 작업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정치적 지식이다." ("true political knowledge" with Petty's political arithmetic. Numerical calculation, Arbuthnot wrote, was "not only the great instrument of private commerce, but by it are (or ought to be) kept the public accounts of a nation....Those that would judge or reason about the state of any nation must go that way to work, subjecting all ... particulars to calculation. This is the true political knowledge.")라고 주장했습니다.
### 4장, "실험적 도덕 철학과 자유주의 거버넌스의 문제" (Experimental Moral Philosophy and the Problems of Liberal Governmentality)
18세기 초 영국 사회에서 지식 생산 방식, 특히 '현대적 사실'이 시장 경제와 자유주의 거버넌스라는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이 장은 17세기 후반의 영광스러운 혁명 이후 변화된 정치적, 경제적 지형 속에서 숫자 기반의 '정치적 산술'이 직면한 한계와 '도덕 철학'이라는 새로운 지식 형태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탐구합니다.
**1. 영광스러운 혁명의 영향과 정치적 산술의 쇠퇴**
18세기 초, 영국에서는 1688년의 영광스러운 혁명(Glorious Revolution)으로 인해 정치 권력의 본질이 재구성되었습니다. 이는 절대군주제의 종식과 의회파의 부상, 그리고 '금융 혁명'(financial revolution)을 통한 "화폐를 가진 사람들"(Monied Men)의 권력 증대로 이어졌습니다. 이 새로운 정치 지형에서 통치는 더 이상 군주의 절대적 권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거버넌스"(liberal governmentality)라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시민사회와 시장을 통해 작동하며, 강압적인 통치보다는 "자기 통치"(self-rule)에 의존하고, "차별"(discrimination)과 "모방"(emulation), 즉 유행과 취향의 메커니즘을 통해 자발적인 순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가 추진했던 정부 주도의 대규모 수치적 정보 수집 프로젝트인 '정치적 산술'(political arithmetic)이 더 이상 적합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다니엘 디포(Daniel Defoe)의 『몇 가지 프로젝트에 관한 에세이』(Essays upon Several Projects, 1697/1702)는 이러한 정치적 산술의 한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디포는 연금 제도를 위한 사망률 계산 등 페티의 수치적 방법을 활용하려 했지만, 결국 이 방법이 필요한 '확신'(confidence)이라는 '정서적 반응'(affective response)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불충분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에세이」의 해당 부분에는, 제안된 관청이 지출하게 될 비용에 대해 의심의 여지 없는 결론에 도달하는 듯 보이는 인상적인 수치 열(column)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데포는 결국 자신조차도 이 방법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이 제시한 수치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고 고백하며, 마지막에는 계산이 정확히 이루어졌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고 시인한다.
> “"As to my calculations, on which I do not depend neither, I say this, if they are probable, and that in 5 years' time a subscription of 100,000 persons would have 87,5371. 19s. 6d. in cash, all charges pay, I desire anyone but to reflect what will not such a sum do" (Essays, 28,29).” (Poovey, 2009, p. 187)
> > “내 계산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데,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약 그것이 그럴듯하다면, 그리고 5년 안에 10만 명의 구독자가 87,537파운드 19실링 6펜스를 현금으로 갖게 되고 모든 지출이 지불된다면, 그만한 금액이 무엇을 가능하게 할지 누구든 생각해보기를 바란다”(Essays, 28,29).
그는 자신의 수치가 "단순한 추측"(only guesses)이며, 계산이 정확한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고 토로하며 "정보만큼이나 태도(attitude)가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161). 이처럼 정치 산술의 방법 자체와 그것이 적절한 정동적 반응(즉, 신뢰)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 모두에 대해 데포가 불확실성을 드러내는 발언은, 태도가 정보만큼 중요한 맥락 속에서 정치 산술이 얼마나 불충분해 보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디포는 또한 글쓰기 스타일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상인들의 간결하고 "평이한 스타일"(plain style)이 "미덕"(virtue)과 "신뢰성"(creditworthiness)의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시장 사회에서 개인의 행동이 실제 태도나 신념보다 공적인 표지(public signs)로서의 스타일을 통해 평가되는 현상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디포는 이러한 시장 사회가 '거짓'(lying)과 '위선'(hypocrisy)을 조장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측면도 인정합니다.
**2. 18세기 실험적 도덕 철학과 보편적 주체의 형성**
이 시기에 등장한 '실험적 도덕 철학'(experimental moral philosophy)은 자유주의적 거버넌스 이론과 '현대적 사실'의 재개념화에 기여했습니다.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과 조지 턴불(George Turnbull)과 같은 도덕 철학자(스코틀랜드 계몽주의 맥락)들은 베이컨식 특이성(Baconian singularities,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례(특이성, singularities)를 관찰하여 지식을 쌓아가는 접근)보다는 "보편자"(universals), 즉 '인간'(man), '인류'(mankind), '인간 본성'(human nature)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보편자들은 수치적 측정을 통한 것이 아니라, '선험적 가정'(a priori assumptions)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되었지만, 수학적 과정을 '제스처적으로' (gestural mathematics) 사용하여 보편적 주체가 마치 통계적 집단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
허치슨은 아름다움과 미덕의 개념을 수학적 원리와 "섭리적 설계"(providential design)에 기반을 두어 설명했습니다. "To a certain extent Francis Hutcheson stabilized Shaftesbury's model of (self-) government by anchoring the subjective dynamic of aesthetic discrimination not just in mathematical principles but in providential design (Poovey, 2009, p. 208)." 그는 질서와 비례가 관찰자와 자연적(또는 수학적) 대상 사이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수학적 비율이 다양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통일성을 설명하고 신의 세계를 형성하는 미덕의 법칙을 도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지에 대해서는 간헐적으로 불확실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턴불은 허치슨의 주장을 더욱 명확히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정신학'(pneumatology)을 "정신의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 of Spirits)이라고 부르며, 실험과 관찰(주로 자기 성찰)에 기반을 둔다고 설명했습니다. 턴불은 철학자들이 눈에 보이는 특수성을 넘어선 "법칙이나 규칙성"(laws or regularities)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뉴턴의 수학적 방법론과 유사하게 자연 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증명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분석과 종합이라는 "이중 방식"(double manner of analysis and synthesis)을 사용하여 도덕 철학이 자연 철학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으며, 신이 부여한 질서에 대한 믿음이 모든 철학적 지식의 기반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섭리적 설계"에 대한 신념은 자유주의적 주체들이 어떻게 자기 통치를 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데이비드 흄: 실험적 도덕 철학에서 에세이로의 전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인간 본성론』(Treatise of Human Nature)은 실험적 도덕 철학의 정점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냅니다. 흄은 관찰과 경험, 실험이 도덕 철학자를 특정 지점까지만 이끌 수 있다고 보았으며, 모든 체계적 지식 프로젝트에는 이론, 신념, 추측이 내재되어 있음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여 "귀납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를 정식화했습니다. 그는 자기 성찰적 관찰이 "자신에 대한 태도에 의해 물들 수 있다"(colored by his own attitude toward himself)고 인정하며, 주관성의 개입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 “Equally to the point, however, is Hume's insistence that some of the epistemological tools of experimentalism were unavailable to moral philosophy. Specifically, because moral philosophers could not assume a position outside the subject of their experiments, their observations were always in danger of being influenced by the self-consciousness that inevitably accompanied introspection. Thus one facet of Hume's skepticism followed his recognition that the map of human motivation produced by the moral philosopher would inevitably be colored by his own attitude toward himself.” (Poovey, 2009, p. 119)
흄: 귀납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 흄의 결론은 **귀납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단지 **습관(habit)이나 심리적 기대(expectation)** 때문에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미래를 예측할 뿐입니다.
- 즉, 자연의 인과적 질서에 대한 믿음은 이성(reason)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반복에서 생기는 습관(custom)이라는 것이 흄의 주장입니다.
→ 칸트는 흄의 문제에 자극받아 “선험적 종합 판단”을 주장
귀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흄은 '신념'(belief)과 '관습'(custom)이라는 개념에 의존했습니다. 그는 신념을 "힘과 생동감"(force and vivacity)의 정도를 통해 허구와 구별하려 했으나, 결국 이러한 감각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했습니다. 궁극적으로 흄은 자신의 철학 프로젝트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unresolvable contradiction)에 도달했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개별적 지각은 개별적 실존이지만, 마음은 개별적 실존들 사이에 어떠한 실제적 연관성도 지각하지 못한다" ("all our distinct perceptions are distinct existences, and that the mind never perceives any real connexion among distinct existences (Treatise, 678)")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개별적 지각은 각각 독립된 실재다. 어제의 노란색이 다르고 오늘의 노란색이 다르다. 실재적 연결은 경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일성은 어디서 오는가? 일관된 정체성, 연속성, 인과성이 있다고 어째서 믿는가? 흄은 초기에는 믿음(belief)과 습관(custom)이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흄은, 이것만으로는 **지각의 단절성과 우리가 경험하는 정체성·연속성**을 양립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 습관이 믿음을 만든다고 해도, 실제로는 “독립된 지각들 사이에 아무 연결이 없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 그래서 “내 철학의 중심에 있는 이 두 원리를 조화시킬 수 없다”고 인정한 겁니다.
이러한 한계에 직면한 흄은 '에세이'(essay) 장르로 전환했습니다. 그는 에세이가 체계적인 지식을 생산하기보다는 독자들을 "차별"과 "자기 개선"(self-improvement)이라는 과정에 참여시켜 "대화"(conversation), "도덕적 모방"(moral emulation)을 촉진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지식 형태는 데이터 중심의 '사실'보다는 "교유(conviviality)만큼이나 분별(discrimination)을, 그리고 자료 수집보다는 사회성을 더 중시하는"(conviviality as much as discrimination and on sociality more than on data collection) 것이었습니다. 흄은 자신을 학문 세계(Dominions of Learning)와 대화 세계(Dominions of Conversation) 사이의 "거주자 또는 대사"(Resident or Ambassador)로 묘사하며, 두 영역 간의 "교류"(Commerce)와 협력을 상업적 비유를 통해 강조했습니다. 그는 여성들이 사회화와 문명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에세이가 지식 생산의 대안적 형태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반영합니다
흄은 체계적인 지식 기획 속에서 이론, 믿음, 추측이 담당하는 역할 자체가 하나의 이론적 문제(theoretical problematic)를 구성한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주장한 첫 번째 철학자.
오히려 그는 그것을 전혀 다른 지식 생산 양식의 근거로 전환했는데, 그 양식은 사실을 산출하는 대신 사회성(sociality)을 촉진했다. 나는 흄이 실험적 도덕철학에서 수필(essay)로 방향을 튼 전환을 추적함으로써, 18세기적 변형으로서의 근대적 사실과 지혜 문학(wisdom literature) 사이의 근접성을 밝힌다. 하지만 동시에, 베이컨과 페티가 공히 추구했던 ‘정보에 의한 통치(government by information)’라는 목표가, 18세기 중엽 내내 식별(discrimination)만큼이나 사교(conviviality)에, 데이터 수집보다는 사회성(sociality)에 더 의존하는 또 다른 통치 모델과 경쟁해야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4장은 18세기 영국에서 통치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지식의 형태도 함께 진화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중앙 정부의 수치 데이터 중심 통치에서 자기 통치, 주관적 동기, 그리고 취향과 대화와 같은 비수치적 지식 형태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거버넌스로 전환되었음을 다룹니다. 도덕 철학자들은 '보편적 인간'을 정의하기 위해 '실험적' 방법을 사용했지만, 흄의 회의주의는 특수성에서 파생된 체계적인 지식에 내재된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흄이 에세이를 인간의 사회성과 주관성을 이해하는 데 더 적합한 장르로 탐구하게 만들었으며, 데이터 중심의 '사실'보다는 '지혜 문학'(wisdom literature)과 사회적 정교함을 중요시하는 지식 생산 방식을 옹호하게 되었습니다
### 5장, "추정적 역사에서 정치 경제학으로" (From Conjectural History to Political Economy)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지식 생산의 새로운 형태, 특히 '추정적 역사'와 '정치 경제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탐구합니다. 이 장은 '현대적 사실'에 내재된 특이성과 귀납의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를 이어가며,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정치 경제학이 이론과 관찰을 어떻게 결합했는지, 그리고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의 여행기가 수치적 지식에 대한 대안을 어떻게 제시했는지를 분석합니다.
**1. 추정적 역사와 귀납의 문제**
5장은 '현대적 사실'에 내재된 특이성과 '귀납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시작합니다. 귀납의 문제는 특정 관찰 사례들로부터 보편적인 지식을 도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난제로, 18세기 중반의 '추정적 역사'(conjectural histories)는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해답을 모색했습니다. 이 시대의 철학적 역사가들은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일관된 행위자"(consistent agent)를 통해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려 했으며, 이는 관찰된 현상과 아직 관찰되지 않은 현상 모두를 설명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초기에는 '추정'(conjecture)이라는 개념이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나 홉스(Hobbes), 데카르트(Descartes)와 같은 과거의 방법론과 연관되어 낮게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든버러 대학교의 도덕 철학 교수인 듀갈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는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흄, 헨리 홈(Lord Kames)과 같은 이들이 추구한 역사학을 "추정적 역사"라고 명명하며 그 중요성을 인정했습니다. 토머스 리드(Thomas Reid) 같은 이들은 가설의 검증 어려움과 철학자들의 '자기 이익'이나 '과대망상'에 대한 우려 때문에 추정에 반감을 가졌지만, 추정적 역사가들은 "인간 본성"(human nature)과 "인간 정신"(human mind)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편자"(universals) 또는 추상적 개념을 탐구했습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분석에 기반을 둔 것으로, 일반적인 유형의 작동이 본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추상적 대상에 대한 초점은 "추정적 역사가"의 지위를 높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상적 개념은 오직 철학적 역사가만이 기술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 사건의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역사가를 역사적 행위자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이는 또한 '이성 국가'(reason of state)와 관련된 정치 이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의 우위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추정적 역사가들은 인류의 역사를 미개한 상태에서 상업 사회로 발전하는 4단계 과정으로 설명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관성(subjectivity)과 사회성(sociality)의 교차점이 강조되었고, 가정(domesticity), 예절(manners), 그리고 여성의 역할이 새롭게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인간 본성"(human nature)과 "인간 정신"(human mind)과 같은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분석에 기반을 두었는데, 이는 일반적인 유형의 작동이 본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합니다. 이처럼 추상적인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추정적 역사가"의 위상을 높였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추상적 개념은 오직 철학적 역사가만이 기술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 사건의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역사가를 역사적 행위자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특히 헨리 홈(Henry Home), 로드 케임즈(Lord Kames)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섭리적 설계'(providential design)에 대한 믿음은 체계적인 질서가 개별적인 현상들 아래에 존재하며, 이 질서가 아름답고 선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섭리주의'(providentialism)는 독자들이 당장의 어려움을 넘어 역사적 기록에서 관찰되는 순환적 발전과 쇠퇴의 암울한 비전을 넘어선 패턴을 인식하도록 이끌었습니다.
**2. 데이비드 흄과 "체계의 은유" (Metaphor of System)**
이비드 흄은 그의 『인간 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 중 "정의와 재산의 기원" (Of the Origin of Justice and Property) 섹션에서 추정적 역사의 가장 초기이자 중요한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흄은 '상업(또는 시장) 체계'라는 개념을 '섭리적 설계'의 대안으로 구축했습니다. 그는 귀납적 추론에서 '은유'(metaphor)와 '허구'(fiction)가 수행하는 역할을 명확히 인식했습니다. 그는 "설계"를 섭리가 아닌, 인간이 "허구를 발명하는 능력에 기반을 둔다"고 보았습니다 ("he grounds it in the human capacity to invent fictions"). 흄에게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는 "존재한 적도, 존재할 수도 없는 순수한 철학적 허구"(a mere philosophical fiction, which never had, and never cou'd have any reality)였지만, 이는 미덕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흄은 '사회'를 (인간의 필요와 관습의) '체계'로, 그리고 이를 (역사가의 이론이라는) 또 다른 '체계'를 통해 가시화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체계의 은유"(metaphor of system)는 과거의 기록과 사회의 미기록된 기원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흄은 이 은유가 욕망과 지식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기반을 두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유보했지만, 허구의 효과가 바라는 질서를 현실화하는 것을 포함하는 한, 체계의 은유가 순전히 철학적 사색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일반적인 원칙들이 정당하고 건전하다면, 사물의 일반적인 흐름 속에서 항상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General principles, if just and sound, must always prevail in the general course of things")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 “Their eye is confounded with such an extensive prospect; and the conclusions, derived from it, even though clearly expressed, seem intricate and obscure. But however intricate they may seem, it is certain, that general principles, if just and sound, must always prevail in the general course of things, though they may fail in particular cases; and it is the chief business of philosophers to regard the general course of things.33” (Poovey, 2009, p. 235)
흄의 이러한 모델은 개별적인 경험을 배제하고 일반적인 이득을 우선시함으로써 통치 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모델은 정책이 전문가들이 인식하는 일반적이고 장기적인 효과를 지지해야 하며 그렇게 옹호될 수 있음을 제시했는데, 이는 즉각적인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적 복리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철학자가 "불필요한 상황들" (superfluous circumstances)을 배제하고 자신의 지위를 높이며 권위를 강화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3. 아담 스미스의 정치 경제학의 구성**
아담 스미스의 정치 경제학은 '현대적 사실'의 18세기 후반 변형을 잘 보여줍니다. 스미스는 '자유주의적 거버넌스'(liberal governmentality)에 대한 이론적 및 서술적 정당성을 제공했습니다. ==그의 접근 방식은 관찰 가능하고 수량화할 수 있는 특이점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 즉 "사회"(society),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시장"(the market)에 이러한 특이점들을 종속시켰습니다. 이러한 추상적 개념들은 새로운 부의 과학의 기초이자 분석 대상이 되었습니다.==
스미스의 숫자 사용은 이러한 추상화에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는 기존의 수치들이 이론적 과제를 수행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철학적 이론에 입각하여 수치 정보가 수집된다면 그 수치가 "단순히 서술적인 것처럼"(merely descriptive) 보임으로써 편견이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암시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산술'(political arithmetic)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그의 방법론은 지식 생산에서 이론적 가정이 필수적이라는 추정적 역사가들의 주장과 일치했습니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에서 제시된 '공감'(sympathy)에 대한 가정을 정치 경제학의 근본적인 부분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경험적 데이터의 부족 때문에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 본성'(homo economicus)에 대한 체계적인 가정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스미스는 효과적인 글쓰기의 특징으로 간결성(conciseness), 적절성(propriety), 정확성(precision)을 강조했으며, 이는 작가의 감정 상태와 관련하여 판단됩니다. 스미스에게 지식 생산은 "묘사와 체계"(description and system)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묘사의 정확성과 선험적 믿음에 대한 의존성 사이의 연관성을 통해 "보는 것과 믿는 것을 동의어로 개념화할 수 있게" 했으며, "보는 것이 믿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4. 사무엘 존슨의 『스코틀랜드 서부 섬으로의 여행』(Journey to the Western Islands of Scotland)**
사무엘 존슨의 『스코틀랜드 서부 섬으로의 여행』(1775)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수치적 지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존슨은 이 책에서 '문화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는데, 이는 그의 보편주의적 가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평생 동안 보편적 지식을 생산하는 데 헌신했지만, 스코틀랜드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모든 체계적 지식 프로젝트의 한계를 의문하게 만들었습니다.
존슨은 추정적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섭리'(Providence)를 소환하는 대신, 그가 믿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간극에 대해 '선험적 가정'(a priori assumptions)이 우리가 보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지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현대적 사실'의 문제, 즉 관찰된 특수성과 체계적 지식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한, 어떤 체계적 믿음의 빛에서만 우리가 보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문제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계적 지식의 한계를 의문함으로써 '문화적 차이'(cultural difference)가 이론과 관찰의 결합에 도전할 수 있는 공간을 열었습니다.
존슨의 여정은 '수량화'(quantification)와 '측정'(measurement)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는 그가 예상했던 것과 실제 본 것 사이의 불일치를 해결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서술의 정확성"(accuracy of narration), 특히 정확한 측정과 계산을 철학적 엄밀성과 연결했습니다. 존슨은 그의 개인적인 반응을 일반적인 진리로 제시하려 했으나, 이는 독서, 경험, 기질에 의해 형성된 주관적인 반응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보편적이고, 고정적이며, 영원한 진리였지만, 그의 여행기는 지식의 불확실성을 드러냈고, 19세기 새로운 사회과학의 방향을 암시했습니다.
결론적으로, 5장은 18세기 영국에서 지식 생산이 단순히 관찰된 데이터의 축적을 넘어, 인간 본성, 사회적 메커니즘, 심지어 철학적 허구를 포함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고 재개념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정치적 산술'의 한계를 인식하고, '추정적 역사'와 '정치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지식 형태를 통해 '체계의 은유'와 추상적 지식을 도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동시에 사무엘 존슨의 작업은 수치적이고 철학적인 지식에 대한 대안으로서, 경험적 관찰과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지식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지식 형태들은 '현대적 사실'에 내재된 특이성과 귀납의 문제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지식과 사회, 그리고 인간 본성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재구성했습니다.
### 6장, "사실과 이론의 재구성: 새로운 부의 과학에 나타난 섭리주의의 흔적" (Reconfiguring Facts and Theory: Vestiges of Providentialism in the New Science of Wealth)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부의 과학'(science of wealth), 즉 정치 경제학이 어떻게 제도화되고 대중화되었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합니다. 이 장은 섭리주의(providentialism)의 지속적인 영향, 수량적 표상(numerical representation)의 재평가, 그리고 '귀납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해결책 모색에 초점을 맞춥니다. 특히 듀갈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 그리고 J.R. 맥컬럭(J.R. McCulloch)의 작업을 통해 정치 경제학이 어떻게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했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현대적 사실'(modern fact)의 본질적 이중성—즉, 이론과 관찰 사이의 긴장—이 어떻게 재구성되었는지를 상세히 다룹니다.
**1. 정치 경제학의 제도화: 듀갈드 스튜어트와 특수성의 거부**
듀갈드 스튜어트는 정치 경제학을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이론적 토대 위에 확고히 세운 중요한 인물입니다. 스튜어트는 정치 경제학이 도덕 철학의 한 분파로서, 단순한 부의 축적을 넘어 사회의 도덕적 발전과 조화로운 질서에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사상은 당시 영국 사회에 만연했던 프랑스 혁명의 급진주의와 회의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섭리적 설계'(providential design)의 존재를 지식의 근본적인 토대로 강조했습니다.
스튜어트의 방법론은 '추상화'(abstraction)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그는 현상적 대상(phenomenal objects) 자체보다는 그것을 지칭하는 '기호'(signs)를, 그리고 개별적 특수성(particulars)보다는 그들이 공유하는 일반적인 '특징'(features)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적 분석과 명목론(nominalism)에 뿌리를 둔 것으로, 대상을 구성 요소로 분해한 후 특정 속성에만 집중함으로써 '포괄적인 정리'(comprehensive theorems)를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지식을 개인의 능력보다 더 큰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철학을 "개별적인 대상과 특정 사건의 고찰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능력을 기호를 통해 확대"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스튜어트는 정치를 과학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특수성"(peculiarities)을 넘어 "고정되고 확실한 격률"(fixed and certain maxims)을 밝히는 "포괄적인 시각"(comprehensive views)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열정과 상황이 신의 자비로운 설계에 복종하여 작용하며, 이를 통해 기계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노동 분업의 치명적인 영향에 대한 자연이 제공하는 해결책이 마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튜어트는 정치 경제학을 '덕의 과학'(science of virtue)으로 격상시켰고, 이는 부의 축적에 대한 욕망을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더 큰, 신성한 계획에 종속시킴으로써 '이윤과 손실의 계산'(calculations of profit and loss)에 철학적 존엄성을 부여했습니다.
그의 낙관주의와 이론에 대한 헌신은 특히 프랑스 이론, 즉 콩도르세(Condorcet)와 같은 사상가들의 급진주의에 대한 영국의 의혹이 커지던 시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스튜어트는 자신의 철학적 '추정'(conjecture)을 자유 무역이라는 특정 교리로부터 분리하고, 정치 경제학이 스미스의 사상에 뿌리를 둔 영국 학문임을 강조하며 이를 방어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스튜어트에게 정치 경제학은 신의 자비로운 계획의 불가피한 전개를 표현하고 확인하는 과학이었으며, 이는 '특정 사실'(particular facts)에 대한 집착을 넘어 '자연의 일반 법칙'(general laws of nature)으로 나아가는 철학적 여정의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2. 토머스 맬서스와 수량적 표상의 재평가**
"정치경제학이 도덕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고, 또 스튜어트(Stewart)의 영향력 있는 논의가 이 학문을 강하게 섭리론적(providentialist) 색채로 특징지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19세기 영국인 다수에게 정치경제학이 체계적 지식의 가장 음울한 경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사실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렵게 보인다. 대체로 현대 역사가들은 이 난제를 이해하도록, 혹은 심지어 인식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지 못했다. 몇몇 주목할 만한 예외를 제외하면, 그들은 정치경제학을 대개 근대 경제학의 전조로 읽거나, 단순히 소설과 같은 보다 인간적인 담론에 대한 18세기의 대척점으로만 읽는 경향을 보여 왔다" (278).
토머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는 19세기 영국에서 정치 경제학이 "가장 암울한 경향"(the most dismal tendencies)을 대표하게 되는 전환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스튜어트와 달리 맬서스는 1790년대의 사건들(예: 프랑스 혁명)을 인간 진보의 신호가 아닌, "행복과 불행 사이의 영원한 진동"(perpetual oscillation between happiness and misery)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고통과 기근을 신의 교육학적 계획의 일환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신은 인간이 빵을 얻기 위해 덕스럽게 노동하도록 고무하기 위해 '인구 원리'(principle of population)를 부여했으며, 타락한 육체로부터 영혼을 얻기 위해 고통을 인류의 일상적인 운명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맬서스는 그의 저서 『인구론』(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의 첫 판에서 이러한 섭리주의적 관점을 명확히 드러냈으나, 이후 버전에서는 이 부분이 상당 부분 삭제되었습니다. ==그는 '인구'(population)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당시의 '다산성'(populousness)이라는 숫자적 개념과 현대 '통계적 인구'(statistical population) 개념 사이의 과도기적 형태였습니다.== 맬서스는 인구를 측정하고 계산 가능한 행동의 규칙성을 찾아 '행복'을 평가하려 했지만, 그의 집합 개념은 현대 통계학적 의미의 '대표성'(representativeness)에 기반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험적 분석과 수학적 분석의 결합이 "가난한 자들"(the poor)의 규칙성을 밝힐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의 '인구'는 모든 진실이 수량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맨틱 비평가들, 특히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는 맬서스의 과학이 종교에 반(反)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맬서스가 숫자의 '공정성'(impartiality)을 주장하며 이를 근거로 자신의 결론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이는 "마음속에서 아는 것"(what one knows in one's heart)과는 대치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콜리지는 맬서스를 "차가운 마음의 사람들"이 채택한 "도덕적 상대주의"(moral relativism)로 비난하며, 그의 연구가 "어떤 원칙이나 확장된 행동 체계로부터 분리된, 오직 당장의 편의만을 고려하는 저주스러운 관행"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는 정치 경제학을 "부의 수학적으로 결정된 행동"에만 집중하는 수학적 과학으로 재정의하려 했습니다.== 그는 정책 문제를 수학 공식으로 변환하고, 수학에 내재된 '공정성'과 '엄밀함'(rigor)을 이용하여 정치 경제학의 결론을 논쟁의 여지 없이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는 동시에 정치 경제학자들을 "맬서스주의자들"에게 제기된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기심'이라는 비난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반면 맬서스는 정치 경제학이 수학보다는 "도덕과 정치 과학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며, 국가의 복리를 평가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귀납과 종교적 원칙에 기반한 추론의 결합을 계속 옹호했습니다.
**3. 정치 경제학의 대중화: J.R. 맥컬럭과 현대 지식의 분류학**
J.R. 맥컬럭([[John Ramsay M'Culloch]])은 1820년대 정치 경제학의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이 학문이 직면한 방법론적, 철학적 문제에 대한 실용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리카도의 수학적 공식들을 "일반 독자들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지만, 맬서스처럼 정치 경제학을 단순히 부의 과학이 아닌 "가치의 과학"(science of values)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순'(contradictions)은 그가 리카도의 작업을 불가피하게 오해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 철학의 한 분과였던 정치 경제학을 '비도덕적'(amoral)으로 보이는 추상적인 연구로 전환하는 어려움을 드러냈습니다.
맥컬럭은 '경제'(the economy)를 "스스로 작동하는 자율적인 시스템"으로 간주함으로써, 전통적인 윤리적, 신학적 합리성으로부터 재정 문제를 분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지식 분류학(taxonomy of knowledge)에 따르면, '인간 본성'(human nature)은 지식의 기원이자 결과였으며,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욕망"(the desire... of rising in the world)은 철학자가 알고자 하는 대상이자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the desire implanted in the breast of every individual of rising in the world and improving his condition" (Discourse) 10). 그는 ==부의 과학이 다른 도덕 및 자연 철학과 유사하게 관찰된 특수성과 체계적인 본성을 모두 중시하지만, 정치 경제학의 결론은 "대부분의 경우에만 적용"(apply only in the majority of cases)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개별적인 경우를 관찰자의 통찰력에 맡기는 방식이었습니다.
> 만약 ‘근대적 사실(modern fact)’에 내재한 모호성이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이 본 것을 주목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촉발했다면, 관찰된 자료(raw data)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조직하려는 초기의 시도는 단순히 “인간과 물리적 세계의 본래적 헌정(original constitution)” 속에 내재한 원리를 따르고(그리고 반영한) 것일 뿐이다. 맥컬럭(McCulloch)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으로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즉 관찰된 특수한 사실들을 모으고, 그것으로부터 이론적 체계를 구성하려는 욕망—은 “모든 개인의 가슴 속에 심어진, 세상에서 지위를 높이고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욕망”을 재현하는 것이다(Discourse, 10). 맥컬럭은 이 주장을 펼치면서 18세기 도덕철학자들이 구축해온 ‘주체성의 학(science of subjectivity)’ 위에 서 있었다. 즉, 우리는 인간이 본래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지식이 이러한 욕망들을 반영(구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본성”은 지식의 기원이자 그 결과가 되고, “세상에서 지위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은 철학자가 알고(믿고) 있는 것이자 동시에 그가 전달(묘사)하고자 하는 것이 된다 (299-300).
==맥컬럭은 "공공"(the public)과 "여론"(public opinion)이라는 개념을 강력한 분석 도구이자 정부의 중요한 동인으로 제시했습니다.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s)은 분석가의 주의를 사적인 이해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여론'은 정치 경제학자가 입법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론'이 "정부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보았지만, 이는 복잡한 '주관성'(subjectivity)을 요구하지 않는 복합적인 개념이었습니다. 맥컬럭의 교육 프로그램은 모든 시민이 개인적 이익과 국가적 이익이 동시에 실현되는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을 배우도록 훈련함으로써 '자기 이익'(self-interest)을 통제하는 문제를 우회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또한 '섭리'(Providence)의 역할을 "상업"(commerce)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섭리'에 기반을 둔 활동으로 제시되었던 것이, "제한을 받지 않으면" '상업'이 독립적인 창조적 힘이 되어 "새로운 취향과 식욕을 부여하고" 이를 만족시킬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섭리적 설계가 "자연스러운 과정의 직접적인 설명"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정치 경제학이 신학적, ==윤리적 기반에서 벗어나 '경제'라는 자율적이고 전문화된 영역으로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결론**
6장은 정치 경제학이 도덕 철학의 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하는 복잡한 과정을 조명합니다. 듀갈드 스튜어트는 정치 경제학을 신의 섭리적 계획과 연결하며 '추상화'를 통해 지식의 보편성을 추구했습니다.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와 고통을 신의 교육학적 도구로 해석하는 특이한 '섭리주의'를 제시하며, 수량적 데이터를 통해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지만, 이는 동시에 그의 이론에 대한 도덕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지막으로 J.R. 맥컬럭은 정치 경제학을 대중화하고 '경제'를 자율적인 시스템으로 재개념화하며, '공공의 이익'과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 학문이 '귀납의 문제'와 '이해관계'라는 복잡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전문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 세 인물의 작업은 '현대적 사실'이 단순한 관찰된 특수성을 넘어 추상적이고 이론 주도적인 지식 형태로 어떻게 재구성되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며, 19세기 사회 과학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토대를 놓았습니다.
### 제7장 「숫자의 형상, 언어의 형상: 1830년대 귀납법의 문제」(FIGURES OF ARITHMETIC, FIGURES OF SPEECH: THE PROBLEM OF INDUCTION IN THE 1830s)
19세기 초 영국에서 지식 생산의 변화, 특히 사실(fact)과 이론(theory)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을 탐구합니다. 이 장은 근대 사실의 인식론적 특이성, 즉 '이론으로부터 분리되고 비이론적인 데이터'라는 환상을 역사화하며, 이는 숫자적 표상과 수사적 언어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 속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푸비 교수는 1830년대 영국의 통계학 논쟁과 존 허셜(John Herschel),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같은 주요 사상가들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 귀납법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궁극적으로 '전문가'라는 새로운 사회적 지위의 부상과 연결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 John Stuart Mill's elevation of deduction over induction in the emergent social sciences not because these metatheoretical gestures constituted the end of the modern fact but because, in recognizing the tension between observed particulars and theoretical or systematic knowledge as aproblem that required a professional (or disciplinary) solution, these three men implicitly turned the task of knowledge production in the rapidly professionalizing sciences over to so-called experts; these experts eventually introduced the reformulation that would begin to displace the modern fact after about 1870 (3).
> > 같은 맥락에서, 나는 J. R. 맥컬럭(J. R. McCulloch)의 1825년 지식 분류 체계, 존 허셜(John Herschel)이 1830년에 자연과학에서 사실(fact)의 문제를 다루려 한 시도, 그리고 신흥 사회과학에서 귀납보다 연역을 더 중시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논의를 결론부에서 다룬다. 이 메타이론적 제스처들이 근대적 사실(modern fact)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 사람이 관찰된 개별적 사실들과 이론적·체계적 지식 사이의 긴장을 전문적(또는 학문적) 해결을 요하는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암묵적으로 급속히 전문화되던 과학에서 지식 생산의 과제를 소위 ‘전문가’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 전문가들이 결국 1870년경 이후 근대적 사실을 점차 대체하기 시작할 새로운 재구성을 도입하게 되었다.
1. **1830년대의 통계학 (Statistics in the 1830s)**
1830년대 영국에서 '통계학'(statistics)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엄격한 수학적 실천과는 달랐습니다. 이는 독일어 'Statistik'에서 유래했으며, 고트프리트 아헨발(Gottfried Achenwall)이 1749년에 처음 명사로 사용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존 싱클레어(John Sinclair)가 그의 저서 『스코틀랜드 통계 기록』(Statistical Account of Scotland, 1791-99)을 통해 이 용어를 도입했는데, 그는 세금이나 전쟁 목적을 넘어 교육 접근성과 같은 요소를 통해 "행복의 양"(quantum of happiness)을 측정하는 데 이 방법이 유용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내에서 숫자적 표상과 '사실'의 역할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 학파(Cambridge group)의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과 리처드 존스(Richard Jones)와 같은 주요 사상가들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가 대표하는 수학적 연역법이 지나치게 성급하게 "관찰된 개별 사례"(observed particulars)에서 "과도하게 단순화된 일반 법칙"(oversimplified versions of general laws)으로 비약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리카도가 실제 관찰을 "몇몇 매우 일반적인 명제"(a few very general propositions)에 종속시킴으로써 정치경제학이 부와 사회 문제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았습니다. 대신 ==케임브리지 학파는 베이컨적 경험주의와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의 대륙적 분석 방법론을 결합한 귀납법(induction)을 옹호==했습니다. 이는 광범위하고 상호 연결된 실제 현상에 대한 정확하고 측정 가능한 연구를 통해 일반적인 지식을 도출하되,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이 1770년대에 인식하기 시작한 문화적 특수성을 반영하여 일반화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통계학의 이러한 비판적 지형 속에서 런던 통계학회(Statistical Society of London)는 자신들의 의제를 명확히 했습니다. 이 학회는 표어 "aliis exterendum" (타인에 의해 타작될지니)에 따라, 통계학은 "원인에 대해 논하거나, 있을 법한 효과에 대해 추론하지 않으며; 오직 사회적, 정치적 통치의 올바른 결론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사실들만을 수집, 정리, 비교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수학적 연역법과 당파적 이론의 "가장 심한 과도함"(worst excesses)을 피하면서도, 수학을 사용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한 지식을 생성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영국 과학 진흥 협회(BAAS, 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도 통계학을 수용했으나, 애덤 세지윅(Adam Sedgwick)은 통계학의 정당성을 "숫자적 형태"(numerical form)에 한정했습니다. 그는 과학을 "측정과 계산으로 환원될 수 있는 순수 또는 혼합된 모든 대상을 고려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통계학이 "사실, 단순한 추상, 그리고 숫자적 결과"와 관련될 때만 협회 내에서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J.R. 맥컬로치(J.R. McCulloch)가 1825년에 제안한 지식 분류학, 즉 "개별 사례에 대한 숫자적 정보 수집"(statistics)과 "일반 지식 생산"(political economy)을 분리하는 것과 유사했습니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언어의 형상"(figures of speech)과 "숫자의 형상"(figures of arithmetic)이라는 대조가 부각되었습니다. 통계학 옹호자들은 "언어의 형상"(수사학, 연역, 가설적 이론)을 평가절하된 것으로, "숫자의 형상"(귀납, 수학)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윌리엄 쿡 테일러(William Cooke Taylor)는 "연민을 자아내는 이야기"(pathetic tales)가 "지루하고 건조한 멍청한 숫자들의 나열"(dull, dry parade of stupid figures)보다 우세했다고 언급하며, "지루하고 건조한" 숫자들이 소설과 수사학의 "과도한 꾸밈"(undue embellishment)에 대한 보증으로서 문화적 가치를 얻었다고 지적했습니다.
> "서문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몇 해 전부터 근대적 사실에 대한 맥컬럭의 접근을 암묵적으로 구현한 텍스트들에 관심을 가져 왔다. 다만 표상의 수수께끼가 인식론적 문제에 대한 직업적(전문적) 해법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통계에 대한 옹호와 비판은 이러한 관심사의 교차를 특히 설득력 있게 보여 주는데, 통계는 맥컬럭이 제시한 전문적 해법의 한 부분이자 근대적 사실의 인식론적 문제가 가시화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급진지 「런던 앤드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젊은 부편집자였던 최소 한 명의 통계 비평가는, 당시 인식론적 문제로 볼 수 있었던 것의 핵심으로 바로 ‘사실’을 겨냥했다 (xxiv-xxv)".
> 1838년 G. 로버트슨은 이렇게 불평했다. “facts라는 단어에는 모호함이 있어 [런던 통계학회] 평의회가 지극히 해로운 오류를 슬쩍 넘기게 만든다. 그것은 ‘증거들’을 뜻하기도 하고, 존재하는 그 무엇이든을 뜻하기도 한다. 사실, 곧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있는 ‘것’은 그 무엇에도 중요하거나 관심거리가 못 된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이 무엇을 입증하는지와의 관계, 즉 증거로서 바라본 사실뿐이다.
그러나 G. 로버트슨(G. Robertson)과 같은 비평가들은 통계학회의 이러한 접근 방식이 통계학의 인식론적 힘을 박탈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로버트슨은 "사실이라는 단어에는 가장 해로운 오류를 범할 수 있게 하는 모호성이 있다: 이는 증거를 의미하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과 아무 관련 없는 사실, 즉 있는 그대로의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입증하는 것과의 관계, 즉 증거로 간주되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There is an ambiguity in the word facts which enables the council to pass off a most mischievous fallacy: it either means evidences or it means anything which exists. The fact, the thing as it is without any relation to anything else, is a matter of no importance or concern whatever: its relation to what it evinces, the fact viewed as evidence, is alone important.")고 주장하며, 이론이나 의견 없이는 사실 수집이 무의미하다고 강조했습니다.
2. 존 허셜과 존 스튜어트 밀: 귀납법, 연역법, 그리고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 (John Herschel and John Stuart Mill: Induction, Deduction, and the Limits of Scientific Method)
1830년대에는 자연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방법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존 허셜([[John Herschel]])은 귀납법과 연역법이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귀납적 방법과 연역적 방법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다른 것에서 연역된 결론을 검증하고; 이러한 경우에 활용될 수 있는 실험과 이론의 결합은 어느 하나만을 따로 취할 때보다 무한히 더 강력한 발견의 엔진을 형성한다." ("The inductive and deductive methods may be said to go hand in hand, the one verifying the conclusions deduced by the other; and the combination of experiment and theory, which may thus be brought to bear in such cases, forms an engine of discovery infinitely more powerful than either taken separately (Preliminary Discourse, 174,181).")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과학적 방법론에서 분류(classification)와 반복을 통한 검증(verification by repetition)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분류는 개별 사례의 무한한 차이를 관리하고 "일반적 사실"(general facts)을 생성하여 더 높은 수준의 추상화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이었지만, 동시에 이것이 "해석의 행위"(act of interpretation)이며 과학자들의 "정리하려는 광기"(rage for arrangement)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허셜은 또한 모든 관찰에는 숫자적 오류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고 보정하는 절차를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1830년대에 들어서 존 스튜어트 밀은 정치경제학을 정의하는 방식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이 “사회과학”을 귀납법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가장 파괴적인 효과로부터 분리해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밀은 허셜(Herschel)과 휘웰(Whewell)의 자연철학적 방법에 관한 성찰에 기초해, “사회 현상(the phenomena of Society)”은 자연 현상의 수학적 모델과 유사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복합적 분석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사회의 조건과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은 무수히 많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또한 사회에 대해 실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wealth)의 생산과 분배 같은 사회 현상은 확장된 형태의 베이컨식 귀납조차도 충분치 않은, 다른 분석 양식을 필요로 한다고 밀은 보았다. 그가 권장한 방식은 연역(deduction), 즉 **선험적 추론(reasoning a priori)** 이었다.
물론 “순수한 추측”이나 “단순한 이론”에 대한 적대감을 잘 알던 밀은, 연역이 결코 “경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서둘러 강조했다. 다만 연역은 “특수한 경험”을 그가 “가정(assumptions)”이라고 부르는 경험에 종속시킬 뿐이었다. 밀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은 사실이 아니라 가정으로부터, 가설로부터 추론한다. 예를 들어 기하학은 “길이는 있으나 너비는 없다”라는 임의적 정의를 전제로 하듯이, 정치경제학도 인간을 일정하게 정의한다. 즉 인간은 주어진 지식 수준에서 가장 적은 노동과 자기 절제만으로 가장 많은 필수품, 편의, 사치를 획득하려는 존재라는 식이다.
이러한 방법 규정은 정치경제학을 ‘모형화(modeling)’로 한정한다. 밀의 설명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은 가설적 경우를 탐구하는 분석 도구다. 사회 과학의 핵심에 '비교행동학, 또는 특성 과학'(Ethology, or the Science of Character)을 두며, 정치경제학을 "가정된 전제"(assumed premises)에 기반한 "추상적인" 또는 "가설적인" 학문으로 재정의했습니다. ==밀에게 정치경제학은 "인간이 오직 부에 대한 욕망에 의해서만 동기 부여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와 같은 가설적 사례를 탐구하는 분석적 도구==였습니다. 그는 "실제 인간이 부 외에 다른 욕망의 대상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치경제학자는 아무도 없다"고 인정하며, 정치경제학의 결론은 순전히 가상적인 경우에만 타당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은 정치경제학적 지식이 관찰된 개별 사례와 관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교란 요인"(disturbing causes)의 영향을 고려하고 "경향"(tendencies)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가설에 근거한 결론에 실제로 그것에 속하는 확실성과는 다른 종류의 확실성을 부여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어떤 순전히 상상의 경우에서만 무제한적으로 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은 정치경제학적 지식을 관찰된 특수 사실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하려 했다. 「정치경제학의 정의에 관하여(On the Definition of Political Economy)」에서 그는 이 관계를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했다.
- 첫째, 정치경제학의 원리에 “교란 요인(disturbing causes)”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 첫 번째 elaboration은 사회적 대상의 압도적 복잡성으로 그를 다시 이끌었다. 그는 원리의 효과에 교란 요인의 효과를 더하고 빼는 방식으로 묘사적 정확성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사회적 대상을 구별하는 그 “높은 수준의 복잡성”은 결국 “우리의 제한된 계산 능력을 넘어선다”고 거듭 인정했다.
- 둘째, 정치경제학자들이 묘사하는 것은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경향(tendencies)** 이라고 주장했다.
- 두 번째 elaboration은 그를 과학적 적합성의 새로운 기준을 상상하도록 이끌었다. 과학의 목적이 단순히 보편 법칙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경향을 묘사하는 데 있다면, 일부 과학은 동시에 “정확”하면서도 “가설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확하고 가설적인"(exact and hypothetical) 조합은 귀납법의 새로운 문제, 즉 "수치 계산"(numerical calculations)에서 나타나는 규칙성이 "자유 의지"(free will)나 도덕에 대한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3. 시와 체계: 포스트모던 사실의 출현 (Poems and Systems: The Emergence of the Postmodern Fact)
푸비 교수는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귀납법의 문제가 낭만주의 시인들, 특히 퍼시 셸리(Percy Shelley)와 존 키츠(John Keats)의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해 논하며 이 책의 코다를 제시합니다. 셸리는 시가 정치경제학의 계산보다 "영구적이고 보편적이며 지속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데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시가 "사물 자체의 묘사에서 사물의 내재적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에 "지식의 중심이자 원주"라고 보았습니다. 시는 현상 세계의 관찰된 개별 사례를 자신만의 "언어적 개별 사례"(linguistic particulars)로 대체함으로써 "일반적 지식이 개별 사례와 단순히 일치"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왜냐하면 개별 사례들이 은유를 통해 변형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낭만주의 시인들—셸리, 워즈워스, 그리고 특히 콜리지에게—시가 산출하는 지식의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은, 시가 현상 세계의 외양을 전달하는 능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존 키츠에게는 달랐다. 정치경제학적 계산으로부터 분리되어 시인들의 몫으로 넘어온 체계적 지식 추구조차도 여전히 무력화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사실과 이성에 대한 신경질적인 집착(irritable reaching after fact & reason)”—즉 체계, 설명, 철학적 해법을 찾으려는 어떤 시도든—은 시인 고유의 능력을 무디게 한다. 그 고유한 능력이란 바로 “불확실성, 신비, 의심 속에 머무를 수 있는” 관용이었다. 키츠는 이 능력을 “부정 능력(negative capability)”이라고 불렀으며, 체계적 지식을 산출하거나 개별 사실을 관찰하는 능력이 아니라, 오직 이 능력만이 참된 지식 생산의 중심적 역할을 맡는다고 주장했다. 반면 키츠([[John Keats]])는 "사실과 이성에 대한 어떤 짜증 나는 추구"(any irritable reaching after fact & reason), 즉 체계, 설명, 철학적 해결책에 대한 모든 탐구가 시인의 고유한 능력, 즉 "불확실성, 미스터리, 의심 속에 머무는"(being in uncertainties, Mysteries, doubts) 관용을 무디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능력을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이라 부르며, 체계적 지식을 생성하거나 개별 사례를 관찰하는 능력보다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 “I have argued throughout this book, then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poets and scientists, as well as philosophers, would worry about how to produce general knowledge from observed particulars.” (Poovey, 2009, p. 327)
“Unless, of course, one were to abandon not the desire for systematic knowledge but the need to yoke knowledge systems to observed particulars. This, I believe, is the "solution" adumbrated by the romantic poets' turn away from phenomenal particulars and toward the mind that contemplates those things.” (Poovey, 2009, p. 353) 푸비 교수는 낭만주의 시인들이 현상적 개별 사례에서 벗어나 그것들을 숙고하는 정신으로 향함으로써, 지식 체계를 관찰된 개별 사례와 결부시킬 필요성을 포기하는 "해결책"(solution)을 제시했다고 해석합니다. 이는 자율성을 지닌 "재현적 구조"(representational structure)로서의 문학 텍스트를 상정함으로써 귀납법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Shelley made in 1817: "A Poet participates in the eternal, the infinite, and the one; as far as relates to his conceptions, time and place and number are not" ("Defence," 483).” (Poovey, 2009, p. 327)
이러한 관점에서, 문학 텍스트가 내부적으로 일관된 모델을 만들고 역사나 현상적 개별 사례와의 관계가 부수적이라고 상정할 때, 시스템이 세상과의 가능한 연결을 설명하려는 시도보다 자기 완결적 시스템에 대한 묘사를 선호하는 분석 방식이 귀납법의 문제를 제쳐둡니다.
> 문학 텍스트가 내부적으로 일관된 하나의 모형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역사나 현상의 개별적 사실들과 맺는 관계는 부차적이라고 상상할 때, 우리는 귀납의 문제를 제쳐두고, 그 모형이 세계와 맺을 수 있는 연결을 설명하려는 시도보다는 자족적 체계의 서술 자체를 선호하는 분석 방식을 택하게 된다 (327).
물론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 것은 체계적 지식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지식 체계가 반드시 관찰된 개별 사실들에 결박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낭만주의 시인들이 현상의 개별 사실들에서 벗어나 그것들을 관조하는 마음으로 향했던 전환이 암시한 “해법”이다. 네오포멀리스트 비평가 크냅(Knapp)이 문학 텍스트를 “특수한 종류의 재현 구조”라 규정하면서 그 특수성이 자율성에 있다고 주장할 때, 그는 사실상 셸리가 1817년에 했던 주장을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셈이다.
문학 텍스트가 내부적으로 일관된 모형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역사나 현상의 개별적 사실들과 맺는 관계가 부차적이라고 상상할 때, 우리는 귀납의 문제를 제쳐두고, 세계와의 연결 가능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보다는 자족적 체계의 서술을 선호하는 분석 방식을 택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장은 귀납법의 문제가 1830년대 영국의 지식 생산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통계학은 '사실'을 비이론적이고 투명한 것으로 표상하려 했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인식론적 가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정은 결국 '전문가'라는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통해 지식 생산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낭만주의 시인들은 '사실과 이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대신 '부정적 능력'을 통해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포용하며 또 다른 지식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푸비 교수는 이 모든 논의가 현대에 이르러서도 사실과 숫자의 관계, 그리고 묘사와 해석의 분리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근대 사실' 시대가 완전히 지나가지 않는 한 이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기호는 자의적이라고 주장했든, 자크 라캉이 자아를 결핍으로 정의했든, 장 보드리야르가 시뮬레이션이 모든 원초적 참조를 끝장내는 능력에 매혹되었든, 슬라보예 지젝이 의미 생산을 분석 자체에 떠넘기는 “무의미한 흔적들”을 긍정했든 간에,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 체계가 의미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신은 점차 귀납의 문제와 내가 이 책에서 논의한 근대적 사실의 모든 변형들을 밀어내고 있다.
그 어떤 인식론적 혁명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글로벌 정보 마을의 시민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 전환도 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전개될 것이다. 또한 내가 이 책에서 서술한 경우를 포함해 어떤 인식론적 혁명이든 그 뿌리는 그것에 앞서고, 그것을 산출하며, 또 지금도 그것과 공존하는 인식론적 패러다임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겹침(imbrication)이야말로 내가 여기서 시도한 역사적 서술을 정당화한다고 나는 본다. 물론 내가 묘사하고자 한 과거와, 내가 이 힘겨운 작업을 감히 착수할 수 있게 만든 현재에 관해서는 여전히 더 많은 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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