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chel Serres, Bruno Latour (1995) *Conversations on Science, Culture, and Time*. :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 [!INFO]
> Type:: [[]]
> Title:: Conversations on Science, Culture, and Time
> Author(s): [[Michel Serres, Bruno Latour]]
> Year:: 1995
> Tags::
> DOI::
> Citekey:: serres_conversations_1995
> ZoteroURI:: [Open in Zotero: Conversations on Science, Culture, and Time](zotero://select/items/@serres_conversations_1995)
> ReviewedDate:: [[2025-08-11]]
> Related Note: 202508181009
## C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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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res_conversations_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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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미셸 세르와 브뤼노 라투르의 대담집 『과학, 문화, 시간에 대한 대화』는 세르의 독특한 사유 궤적과 방법론, 그리고 그의 철학적 입장을 심도 깊게 탐구하는 중요한 자료.
## Annotation
### 첫 번째 대화: 배경과 훈련 (FIRST CONVERSATION: Background and Training)
라투르는 세르가 철학자들 사이에서 잘 이해받지 못하고, 토론을 즐기지 않으며, 고립된 철학을 추구하는 "총을 피하는(gun-shy)" 성향에 대해 묻습니다. 그의 독특한 방법론과 문학, 과학, 신화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방식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
**"전쟁 세대"의 트라우마:** 세르는 자신의 "총을 피하는" 성향과 저작에 나타나는 "애가의 소리(sound of lamentation)"를 1930년대에 태어나 청소년기를 거치며 겪었던 끊임없는 전쟁(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식민 전쟁, 히로시마)의 경험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시기의 폭력과 죽음이 자신을 육체적, 감성적으로 형성했고, 당대의 예술 작품(피카소, 막스 에른스트)조차 이러한 비극의 "증상(symptoms)"이지 "분석(analysis)"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 경험은 그가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 이유가 됩니다.
**전후 지식인 사회의 "테러리즘":** 1947년부터 1960년까지의 지식인 사회, 특히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E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의 분위기를 "가장 테러적인 사회(most terroristic societies)"라고 묘사합니다. 마르크스주의와 현상학이 지배적이었고, "지적 범죄"로 규정되는 의견 위반에 대한 심문이 만연했기에, 그는 평화를 얻기 위해 과학사와 인식론을 공부하며 도피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교육기관을 거쳤음에도 결국 "독학자(self-taught man)"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평합니다 (9).
**과학에서 철학으로의 전환 (히로시마):** 해군사관학교를 자퇴하고 수학을 전공한 뒤, 그가 과학을 버리고 철학으로 전향한 결정적인 계기는 "히로시마"였습니다. 원자폭탄 이후 과학적 낙관주의를 재고하는 것이 "긴급한(urgent)" 과제가 되었고, 이 사건은 "지식과 도덕성 사이에서 일어난 전체적인 혁명"이었기에, 그의 철학적 관심사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과학이 처음으로 윤리적 문제의 "다른 면(other side of the ethical universe)"을 창조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 “In a certain sense, yes. The first revolutions concerned methodology, but the last one involved morality, sociopolitics, philosaphy. For the first time since its creation, perhaps since Galileo, science—which had always been on the side of good, on the side of technology and cures, continuously rescuing, stimulating work and health, reason and its enlightenments—begins to create real problems on the other side of the ethical universe.” (Serres 및 Latour, 1995, p. 17)
> >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최초의 혁명들은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지만, 마지막 혁명은 도덕, 사회정치, 철학을 포함했습니다. 아마도 갈릴레오 이후 처음으로, 창조된 이래 늘 선의 편에 서고, 기술과 치료의 편에 서며, 끊임없이 노동과 건강을 구하고 자극하며, 이성과 그 계몽의 편에 있었던 과학이, 윤리적 우주의 반대편에서 실제로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 가지 과학 혁명과 인식론의 실패:** 그를 형성한 세 가지 과학 혁명으로 수학(고전 수학에서 대수학 및 위상학적 구조로의 전환, 부르바키 세미나), 물리학(고전 물리학에서 양자 역학, 특히 정보 이론의 등장), 생명 과학(생화학, 모노의 발견)을 꼽습니다. 그는 당대의 프랑스 인식론이 이러한 혁명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뒤처졌다고 비판합니다.
> BL: So, this was your first important scientific training?
> MS: Certainly. I have never recovered from this happy surprise, because through it I experienced a change in the universe, the profound transformation of a world—my first scientific and intellectual revolution. An extraordinary upheaval that changed my entire life! (10)
> BL: 그러니까 이것이 당신의 첫 중요한 과학적 훈련이었군요?
> MS: 그렇습니다. 저는 이 기쁜 놀라움에서 결코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저는 우주의 변화, 세계의 깊은 변혁, 즉 저의 첫 번째 과학적·지적 혁명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 전체를 바꿔버린 특별한 격변이었죠!
**시몬 베유(Simone Weil)의 영향:** 자신의 역사적, 지적 경험에서 비롯된 "폭력"에 대한 사유를 "강렬하게" 탐구한 유일한 철학자로 르네 지라르를 언급. 지라르는 시몬 베유와 같은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지라르 또한 어릴적 『중력과 은총(Gravity and Grace)』를 읽었고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자퇴하고 과학에서 철학으로 돌아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룹에 대한 거부감과 고독:** 세르는 어떤 그룹에 "속하려는"("belong")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종파에 속하지 않는 자들을 배제하고 죽이려는" 충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독한 철학적 여정을 "개들이 사납게 지키는 집들"을 피해 "길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을 개척하는(blaze a trail off the beaten paths)" 것에 비유합니다. 그의 철학은 폭풍우 속에서 "뗏목이나 배를 만들" 듯이 스스로 건설한 것이며, 이는 "자유에 대한 원초적인 필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문학적 스타일과 총체성 추구:** 그는 철학에서 "과도한 전문 용어(hypertechnicality)" 사용을 비판하며 “Another idiosyncrasy: I must be grounded in French language and taste. Hypertechnicality in philosophy makes me laugh or cry but not think; it's useless, redundant, harmfu!.” (Serres and Latour, 1995, p. 23), 이는 "테러리즘의 효과(effect of terrorism)"를 낳아 미숙한 자들을 배제한다고 봅니다. “Furthermore, in these two types of discourse an effect of terrorism is achieved, dividing those who use these words (I say "use," not "understand") and the uninitiated. Ultratechnical vocabulary breeds fear and exclusion. 더 나아가, 이 두 가지 유형의 담론에서는 일종의 테러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는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제가 “이해하는”이 아니라 “사용하는”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나누어 버립니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어휘는 두려움과 배제를 낳습니다.” (Serres and Latour, 1995, p. 24) 대신 ==그는 "일상 언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use it in all its amplitude)" 스타일을 추구하며, "잘 이야기된 이야기(well-told story)" 속에 철학이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Discussion conserves; invention requires ra id intuition and being as light as welg essness. 그는 플라톤, 몽테뉴, 파스칼, 라이프니츠처럼 과학과 문학을 통합하려는 "전체성(totality)"을 추구하며, "철학자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a philosopher should know everything)"고 주장합니다. 이는 "단편화(fragmentation)"와 "정신분열(schizophrenia)"("과학 전문가들은 무식하고, 이른바 교양인들은 무지하다(the scientific experts were uncultured, and the so-called cultured were ignorant)")에 대한 반대입니다.
**논쟁에 대한 비판:** 세르는 논쟁이 사고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전쟁"과 같으며, "개념의 발명(inventing concepts)"은 "고독, 독립, 자유, 그리고 침묵 속에서(in solitude, independence, and freedom indeed, in silence)"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사르트르의 "헌신(commitment)" 윤리가 과학에 대한 무지로 인해 "발명을 불모로 만들었다(sterilizing invention)"고 비판합니다. “토론은 보존하지만, 발명은 빠른 직관과 무중력처럼 가벼운 상태를 필요로 한다.” (Serres and Latour, 1995, p. 37) 예시로 1960년대를 최고이자 최악의 시대로 이야기하며 terror, conformism, and repression으로 최악이었으며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식인 르네상스였다라고 이야기 함.
> “But did those who didn't choose the superhighways really contribute something new? Like Gilles Deleuze, for example. He separated himself from the traditional history of philosophy, from the human sciences, from epistemology. He's an excellent example of the dynamic movement of free and inventive thinking.” (Serres and Latour, 1995, p. 39)
> > 하지만 고속도로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정말 새로운 것을 기여했을까? 예를 들어, 질 들뢰즈 같은 인물 말이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사, 인문과학, 인식론에서 자신을 분리했다. 그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유의 역동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Dumézil 또한 아카데미에서 별로 사랑받지 못함. 베르그송과도 비슷. "베르그송에 대해 토론이 있었던가? 직관이 토론될 수 있는가? 개념적 발명을 포함한 위대한 발명들은 직관에 기반하지 않는가? 직관이 항상 첫걸음을 내디디고, 그 후에야 일반 대중이 모여 서로를 찢어발기듯 토론하는 법이다."
- **프랑스의 공화국** self-criticism → ‘집단적 이념(자유·평등·박애)’을 기초로 하지만, 현실에서는 개인들이 고립되고, 지식인 사회가 각자 따로 싸우는 풍토. 집단적이고 이론적인 이상 위에 세워진 공화국은, 실제로는 우리가 개별적인 존재이자 고유한 유형으로서 살아가고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내가 말하는 고독, 그리고 불행하게도 종종 진짜 내전으로까지 번지는 영속적인 다툼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것이 프랑스인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영·미식 민주주의** self-promotion →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참여와 절충**을 중시하고, 사람들을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 공동체’에 연결시키는 풍토. 앵글로색슨식 민주주의는 실제로 각 개인이 끊임없이 평등한 공동체를, 가능한 한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사람들을 쉽게 눈에 띄는 획일성으로 몰아넣는다. 이것이 당신이 옹호하는 토론의 한가운데서 비교적 평화가 유지되는 이유이며, 그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끊임없이 찬사를 보내고, 지속적으로 홍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So, as far as intellectual life and invention are concerned, for science, as a collectivity, it is perhaps better to have democracy, which produces the contract of conformity. But for a creative work, which is far more personal, the republic wins hands down, since it exacerbates individualism.” (Serres and Latour, 1995, p. 41)
> “But to finish up on the methodology of discussion, for me it was perhaps the experience of the war that irrevocably cut that thread. Sartre's dominant position no doubt also has something ta do with it. He crushes everything and understands nothing. Through his ignorance of the sciences and their fonnidable reverberations in society, he de1ayed the arrivai of all the real innovations. And at a certain point his ethic of "commitrnent" becomes the required ethic, sterilizing invention, which is always solitary.” (Serres and Latour, 1995, p. 41)
> > 하지만 토론의 방법론에 대해 마무리하자면, 나에게는 아마도 전쟁의 경험이 그 끈을 돌이킬 수 없게 끊어버린 결정적 계기였다. 사르트르의 지배적 위치도 여기에 한몫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모든 것을 짓누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과학과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막대한 파장을 무시함으로써, 그는 모든 진정한 혁신의 도래를 지연시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참여’ 윤리는 요구되는 윤리가 되어버려, 언제나 고독한 발명을 불모로 만들었다.
> “Do you believe that those who bury the dead and moum before the silence and indifference of the powerful-do you believe that the hundreds of thousands of dead-believe in the fruitfulness of battIes and in the advancement of history through slaughter?” (Serres and Latour, 1995, p. 41)
> > 묘비를 세우고, 강자들의 침묵과 무관심 속에서 애도하는 사람들이—그 수백 수천의 죽은 이들이—과연 전투의 결실과, 학살을 통한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고 생각하는가?
### 두 번째 대화: 방법 (SECOND CONVERSATION Method)
**브뤼노 라투르 (BL)의 질문:** 라투르는 세르가 시공간적 거리에 무관하게 모든 작가와 개념을 동시대적으로 다루는 "타임머신(time machine)" 같은 독특한 방법론과, 이로 인해 그의 저작이 "시적(poetry)"이라는 비판(또는 칭찬)을 받는 이유를 묻습니다. 또한, 이러한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작동자(operator)" 또는 "열쇠(key)"가 무엇인지 알고자 합니다.
**"모든 작가는 우리 시대의 동시대인이다(All Authors Are Our Contemporaries)":** 세르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에 대한 인식을 비판합니다. 현대의 책이나 물건(자동차)조차도 다양한 시대의 아이디어가 혼합되어 있으며, 철학적 성찰은 과학적 정보보다 훨씬 뒤처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 “Likewise, how many books appearing today are really and entirely contemporary?” (Serres and Latour, 1995, p. 45)
> “In the comparative disciplines you can find yourself in ancient Rome then poofl in Ireland and Wales then, without a pause, poofl in Vedic India. Have you asked Georges Dumézil this question? With the encyclopedic philosophers-Aristotle, Leibniz, Auguste Comte-there you are among the animaIs and then, poofl in politics and then, without warning, among theorems. Have you asked this question of Kant, who passes from astronomy to law to geography and anthropology before writing his Critiques?” (Serres and Latour, 1995, p. 44)
> > 비교학 분야에서는 당신이 고대 로마에 있다가도 휙, 아일랜드와 웨일스로 가고, 잠시도 쉬지 않고 휙, 베다 시대의 인도로 건너가 버릴 수 있다. 이런 질문을 조르주 뒤메질에게 해본 적이 있는가? 백과전서적 철학자들—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오귀스트 콩트—과 함께라면, 당신은 동물들 사이에 있다가 휙, 정치로,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휙, 정리들 사이로 옮겨간다. 천문학에서 법학으로, 지리학과 인류학을 거쳐 비판서들을 집필하기에 이르기까지, 이런 질문을 칸트에게 던져본 적이 있는가?
> “Poetry comes from the Greek, meaning "invention," "creation"—so aIl is weIl, thank you.” (Serres and Latour, 1995, p. 44)
이런 일은 인식론에서 자주 발생합니다. 두 요소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마치 한쪽은 그리스식 날개로, 기둥과 박공이 완비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현대식으로 사전 제작된 콘크리트와 유리로 된 건물과도 같습니다. 당신은 곡괭이로 원자를 쪼갤 수 있습니까 (do you split atoms with a pickax (45))?
루크레티우스의 글을 다시 읽을 때, 모두가 말하길 고대부터 19세기까지 논의된 기계론적 유물론의 철학적 상태는 이미 끝났다고 합니다. 실험 과학은 이러한 추상적인 꿈에서 벗어나 이 논의를 뿌리째 뽑아내고, 그것을 결정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페랭의 원자는 더 이상 루크레티우스의 원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루크레티우스는 더 이상 동시대적이지도, 심지어는 전혀 읽을 필요가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라틴어 학자들의 영역에, 또 한편으로는 유물론 역사 연구자들의 영역에 속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그는 두 번 잃혀진 셈입니다—그렇다면 왜 철학에서 그를 연구해야 할까요? 게다가, “그건 시잖아요.”
그는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를 현대 물리학(유체 역학, 난류, 카오스)의 관점에서 다시 읽으면, 그가 당대에 이미 "유동, 난류, 카오스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었으며(already thinking in terms of flux, turbulence, and chaos)", 따라서 그는 "정말이지 동시대적이다(truly contemporary)"고 주장합니다. 루크레티우스가 불러내는 수학은 바로 아르키메데스의 그것이며, 따라서 그는 에피쿠로스나 유클리드의 영향은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점에서 그는 과학적 내용뿐 아니라 철학적 사유에서도 진정으로 동시대적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폭력 문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깊이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이 문제들에 관해 ‘최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양심적으로 ‘현대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책들의 무시무시한 홍수보다 훨씬 더 오늘날에 가깝게 다가옵니다.
**"진보" 개념과 인식론적 단절에 대한 비판:** "진보(progress)"라는 개념은 시간을 끊임없이 진리에 도달하는 선형적 과정으로 보는 나르시시즘적인 착각이며, 이는 마치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인식론적 "단절(rupture)"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구식(archaic idea)"이며, 과학자들이 데카르트처럼 "나 이전에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No one has thought before me)"고 주장하는 경향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만은 _영원철학_(Philosophia perennis)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완전히 부조리하다.
> “But, irresistibly, I cannot help thinking that this idea is the equivalent of those ancient diagrams we laugh at today, which place the Earth at the center of everything, or our galaxy at the middle of the universe, to satisfy our narcissism.” (Serres and Latour, 1995, p. 48) “The curve traced by the idea of progress thus seems to me to sketch or project into time the banality and fatuousness expressed spatially by that central position.
> > “그러나 나는 이 생각이 도무지, 우리가 오늘날 비웃는 고대의 도식—지구를 만물의 중심에 두거나, 우리 은하를 우주의 한가운데에 놓아 우리의 자아도취를 만족시키던—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세르·라투르, 1995, p. 48) “따라서, 진보라는 관념이 그리는 곡선은, 시간 속에 투사된 형태로 보자면, 공간적으로 중심 자리에 놓임으로써 드러나는 그 진부함과 자만심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나에게 보인다.”
이 도식은 우리로 하여금 영구적으로(그렇다, 영구적으로. 왜냐하면 현재는 언제나 시간과 진리에 관한 최종 발언이기 때문이다. ‘영구적으로’라는 말은 역사적 진화 이론에는 꽤나 좋은 역설이다) 단순히 옳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만큼 더 옳다고 여길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나는, 항상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이론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럴듯하지 않으며, 가능성도 낮다.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단순한 선일 뿐이다. 아니, 선조차도 아니고, 단지 일등을 향한 경주의 궤적—학교에서, 올림픽 경기에서, 노벨상 경쟁에서 벌어지는 그 레이스일 뿐이다. 이것은 시간이 아니라, 단순한 경쟁이며, 다시 말해 전쟁이다. 왜 시간성과 지속을 다툼으로 대체하는가? 가장 먼저 도착한 자, 전투에서 승리한 자는 자신의 이익에 맞게 역사를 새로 쓸 권리를 상으로 받는다. 다시 한번, 이것은 변증법—겉모습의 논리일 뿐이다.
> Hegel's error was in reversing this logical evidence and in claiming that contradiction produces time, whereas only the opposite is true: time makes contradiction pog.. sible. This error is the source of all the absurdities recounted since then on war, "the mother of history."
> ? 헤겔의 오류는 이 논리적 자명성을 거꾸로 뒤집어, 모순이 시간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 데 있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로, 시간이야말로 모순을 가능하게 한다. 이 오류는 이후 전쟁을 ‘역사의 어머니’라 부르는 모든 부조리의 원천이 되었다. 아니다, 전쟁은 무엇보다 죽음의 어머니이며, 이어서 영원히 전쟁의 어머니일 뿐이다. 전쟁은 무(無)만을, 그리고 동일하게 자기 자신만을 낳는다. 따라서 파괴는 스스로를 반복하며, 이것이 바로 논쟁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이유다. 역사는 상당히 규칙적으로 이러한 헤겔식 도식을 믿지 않는 이들을 정당화해 왔다. 어떤 세대 이전에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가설은 모든 시간성과 모든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반면, 전통은 종종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사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49-50).
### Neither Judgment nor Absence of judgment
> “The Age of Enlightenment was very instrumental in categorizing as irrationai any reason not formed by science.” (Serres and Latour, 1995, p. 50)
그렇지만 세르가 말하는 것은 과거가 잊혔으므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세르가 거부하는 방향은 낭만주의/개몽주의 관계같기도 하다. 이건 결국 모던/포모도 같지 않은가?
> “To ignore the past is often to run the risk of repeating il. How many times have we read a book intoxicated with recent invention, whose author boasts of having finally escaped from certain ideas and ways of feeling and perceiving, which he innocently repeats without realizing il! We could name ten examples.” (Serres and Latour, 1995, p. 52)
> > “과거를 무시하는 것은 종종 그것을 반복할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최근의 발명에 취해, 자신이 마침내 특정한 사상과 감각·인식 방식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저자의 책을 읽는가.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무심코, 자각하지 못한 채 반복한다! 우리는 이런 예를 열 가지쯤은 쉽게 들 수 있다.” (세르, 라투르, 1995, p. 52)
**카오스적, 비선형적 시간:** 세르는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난류(turbulent)"적이고 "카오스적(chaotic)"이며 "삼투한다(percolates)"고 설명합니다. 마치 구겨진 손수건처럼, 시간은 접히고 뒤틀려서 아주 먼 지점들이 갑자기 가까워지거나, 가까운 지점들이 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 개념은 그의 "비교 방법론(comparativism)"의 토대가 됩니다.
시간은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중간중간 정지점, 단절, 깊은 우물, 갑작스러운 가속의 굴뚝, 갈라짐, 빈틈 같은 것들이 무작위로(겉보기엔 무질서하게) 흩뿌려져 있는 구조에 가깝다. 그래서 역사 전개는 마치 혼돈이론(chaos theory)이 설명하는 패턴과 유사하게 보인다.
> “To take up again the example of Lucretius, contemporary physics at least allows us to reread him, but in an oblique manner, and finally to discover some actuality that is still active.” (Serres and Latour, 1995, p. 54) “That if you translate atom by atom, you will not get very far. You must look somewhat alongside, or more globally, at the system of turbulence.” (Serres and Latour, 1995, p. 54) “원자(atom)를 원자(atom)로만 번역한다면,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 대신, 약간 옆을 바라보거나, 더 거시적으로 난류의 체계를 살펴야 한다.”
> 프랑스어는 지혜롭게도 ‘날씨’와 ‘시간’을 같은 단어, _le temps_ 로 표현합니다. 깊은 차원에서 보면 둘은 같은 것입니다. 예측 가능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기상(날씨)은 언젠가 변동,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s) 같은 복잡한 개념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역사적 시간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time doesn't flow; it ercolates (삼투; 58).
예를 들어 손수건을 바르게 펴서 거리를 잰 것과 접어서 주머니에 넣으려고 했을 때 . 그거리는 가까워지고 겹치기도 한다. 만약 찢어서 둔다면 두 지점은 가까우면서 멀기도 해진다. 이 거리의 과학을 = topology. 반면 쭉쭉 펴서 stable and well-defined 거리를 계산하는 과학을 geometry.
> “Classical time is related to geometry, having ==nothing to do with space==, as Bergson pointed out aIl too briefly, but with metrics.” (Serres and Latour, 1995, p. 60) “As we experience lime-as much in our inner senses as externally in nature, as much as le temps of history as le temps of weather-it resembles this crumpled version much more than the fiat, overly simplified one.” (Serres and Latour, 1995, p. 60)
> > “우리가 시간을 경험할 때—내적 감각에서나 자연 속 외적 세계에서나, 역사적 _le temps_ 이든 날씨의 _le temps_ 이든—그것은 평평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모습보다 오히려 이런 구겨진 형태에 훨씬 더 가깝다.” (세르/라투르, 1995, p. 60)
> “It's not always laminar. The usual theory supposes time to he always and everywhere Iaminar. With geometrically rigid and measurable distances—at least constant. Someday it will he said that that is eternity! It is neither true nor possible. No, time flows in a turbulent and chaotic manner; it percolates. AlI of our difficulties with the theory of history come from the fact that we think of time in this inadequate and naïve way.” (Serres and Latour, 1995, p. 59)
> > 시간은 항상 층류(laminar)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이론은 시간이 언제나, 어디서나 층류 상태이며, 기하학적으로 단단하고 측정 가능한—적어도 일정한—거리를 가진다고 가정한다. 언젠가는 그것이야말로 ‘영원’이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다. 아니다, 시간은 난류와 혼돈 속에서 흐르고, 스며든다. 우리가 역사 이론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은 시간을 이렇게 불충분하고 순진한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서 비롯된다.
**"헤르메스" (Hermes)적 방법론:** 세르는 자신이 사용하는 "작동자(operator)"를 "헤르메스"라고 명명합니다. 헤르메스는 "중개, 번역, 다중성(mediation, translation, multiplicity)"을 의미하며, 텍스트 간의 "간섭 공간(spaces of interference)"을 가로지르며 예상치 못한 연결(rapprochements)을 만듭니다. 이는 마치 벌의 "비행 패턴(fly's flight pattern)"처럼 복잡하고 비선형적이지만, 사물의 내재적 논리에 기반한 움직임입니다. "은유(metaphor)" 자체가 "운반(transport)"을 의미하기에, 헤르메스의 방법론과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헤르메스가 신들의 전언을 전할 때 어떻게 죽고 또 어떻게 이동하는지—혹은 천사들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를—구상하거나 상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표시된 사물들 사이에 놓인 공간들, 내가 헤르메스에 관한 두 번째 책의 제목에서 불렀던 ‘간섭의 공간’을 묘사해야 한다. 이 신이나 천사들은 접힌 시간 속을 통과하며 수백만 개의 연결을 만든다. ‘사이(between)’라는 전치사는 언제나 나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였다.
**수학적 스타일과 속도:** 그의 방법론은 "수학적(mathematical)" 속성과 "속도(speed)"를 특징으로 합니다. 수학적 사고는 "빠른 사고(rapid thought)"를 가능하게 하며, "우아한 증명(elegant demonstration)"은 중간 단계를 "생략(skips the intermediate steps)"합니다. 세르는 이러한 속도가 "모든 것을 아우르려는(covering everything)" 자신의 방대한 철학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설명합니다.
> “And here is my second argument: mathematics teaches rapid thought. Whoever writes x can mean simultaneously 1, 2, 3, the infinite, rationaIs and transcendents, real and complex numbers, even quaternions-this is an economy of thought.” (Serres and Latour, 1995, p. 68)
> “Have you noticed the popularity among scientists of the word inteifaee-which supposes that the junction between two sciences or two concepts is perfectly under control, or seamless, and poses no problems? On the contrary, 1 believe that these spaces between are more complicated than one thinks. This is why l have compared them ta the Northwest Passage [in Hermès V. Le Passage du Nord-Ouest], with shores, islands, and fractal ice fIoes. Between the hard sciences and the so-called human sciences the passage . resembles a jagged shore, sprinkled with ice, and variable. Have you seen the map of northern Canada? Once again the path of this passage strangely resembles what l earlier called the fly's flight pattern. It's more fractal than truly simple. Less ajuncture under control than an adventure to be had. This is an area strangely void of explorers.” (Serres and Latour, 1995, p. 70)
>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터페이스(interface)’라는 단어가 인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적이 있는가? 이 단어는 두 과학이나 두 개념이 만나는 지점이 완벽하게 통제되고, 매끄러우며,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전제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사이의 공간’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헤르메스 V: 북서 항로』]에서 북서 항로에 비유했다. 그곳은 해안과 섬, 그리고 프랙털처럼 갈라진 얼음 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른바 ‘정확과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통로 역시 날카로운 해안선과 흩어진 얼음, 그리고 끊임없이 변하는 조건을 지닌다. 북캐나다의 지도를 본 적이 있는가? 이 항로의 경로는 내가 앞서 ‘파리의 비행 궤적’이라고 불렀던 것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그것은 진정한 단순함보다는 프랙털에 가깝다. 완전히 통제되는 접합부라기보다, 탐험해야 할 모험에 가깝다. 그리고 이 영역은 이상하리만치 탐험가가 없는 곳이다.
**스타일을 통한 엄밀성 추구:** 그는 고전 철학의 전문 용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new language)"를 발명해야 했고, 일상 언어를 최대한 정교하게 다듬어 "스타일(style)"을 창조함으로써 수학적 엄밀성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스타일은 방법론을 드러낸다(Style reveals methodology)". 플라톤 역시 어려운 개념을 설명할 때 신화나 이야기를 사용했듯이, 그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문학적 방식("myth" or "storytelling")을 활용합니다.
**총체적 사유와 "관계의 철학":** 세르는 철학이 "총체성(totality)"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는 과학과 인문학의 "단편화(fragmentation)"에 대한 반대입니다. 그는 "관계의 일반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ons)" 또는 "전치사(prepositions)의 철학"을 추구합니다. 전통 철학이 "실체(substantives)"나 "동사(verbs)"로 추상화하는 반면, 그는 "~으로(to), ~에 의해(by), ~을 위해(for), ~에서부터(from)"와 같은 전치사들을 통해 "관계" 그 자체를 추상화합니다. 그의 저서 제목들(『간섭(Interférrmce)』, 『번역(Traduction)』, 『북서 항로(Passage du Nord-Ouest)』 등)이 이를 반영합니다.
> 그 장애물은 학계가 만들어낸, 오래된 것부터 아주 최근의 것까지의 분과 구분에서 비롯된다. 그 통로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장애물은 인위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당신은 나에게 하나의 인위적 산물에 대해 묻고 있는 셈이다. (74)
### 세 번째 대화: 증명과 해석 (THIRD CONVERSATION Demonstration and Interpretation)
**브뤼노 라투르 (BL)의 질문:** 라투르는 세르의 해석이 "임의적(arbitrary)"이라는 비판에 직면하는 이유를 다시 묻고, 그의 해석이 "옳다"고 판단하는 기준, 즉 "공식적인 증명(formal proof)"과 "실증(demonstration)"의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문제 중심의 해석:** 모든 해석은 "문제(problem)"에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베를렌(Verlaine)의 시를 "배경 잡음(background noise)" 이론으로 해석하면, 그동안 난해했던 시가 "명료해지고 투명해진다(becomes clear and transparent)"는 것입니다. "문제가 명료해지고 투명해지는 순간, 그 해석은 아마 좋은 해석일 것이다(The moment you bring transparency and clarity to a problem, the interpretation is probably a good one)"
**파스칼의 "고정점(fixed point)":** 파스칼의 과학적 저작(액체의 정역학, 산술 삼각형 등)과 종교적 명상(『팡세(Pensées)』,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점으로 보는 사상)이 "고정점"이라는 공통의 직관으로 통합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전통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그의 사상에 "통일성(unity)"을 부여합니다.
**내재적/국소적 해석과 총체적 증명:** 그의 증명은 텍스트 내부에서 "특정 요소"를 추출하여(예: 파스칼의 "고정점"), 이를 통해 텍스트 전체의 "일관성(coherence)"과 "통일성(unity)"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는 최소한의 가정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도출하는 "우아함(elegance)"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텍스트에 "투명성(transparency)"을 가져다줍니다. 그는 각각의 텍스트에 "국소적(localized)"이고 "특정적(specific)"인 방법론을 적용합니다. 예를 들어, 파스칼에게 효과적인 "고정점" 구조는 코르네유에게는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소적 접근들이 모여 궁극적으로는 "관계의 일반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ons)"이라는 총체적 그림을 그립니다.
**"중간 지점"의 생략과 수학적 엄밀성:** 독자들이 어려워하는 "중간 단계(intermediate steps)"의 생략은 수학적 증명의 "우아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인과적(inductive)"이고 "국소적(local)"인 관계들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상호 다름에도 불구하고 조직화된 관계들의 집합체(cluster of relations, differentiated but organized)"를 형성한다고 말합니다.
**"관계의 통일성(Synthesis of Relations)":** 세르는 자신의 철학적 목표가 "체계(system)"가 아니라 "관계의 통일성(synthesis of relations)"이며, 이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유동적인 혼합(mobile confluence of fluxes)"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저서 제목들이 "전치사(prepositions)"를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계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인문학의 역할:** 인문학은 인류의 고통에 대한 "지속적인 울부짖음(continuous cry of suffering)"을 보존하며, 이는 지식의 "근원(origin of knowledge)"이 됩니다. 과학은 인간의 나약함(weaknesses)과 연약함(fragilities)에 기반하여 발전하며, 비극을 통해 형성된 "지혜(wisdom)" 없이는 "야만적(savage)"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인문학과 과학의 "혼합(mingling)"을 통한 새로운 "교육 과정(curriculum)"을 제안하며, 이를 "교양을 갖춘 제3자(le Tiers-Instruit)"라고 부릅니다.
### 네 번째 대화: 비판의 종말 (FOURTH CONVERSATION The End of Criticism)
**브뤼노 라투르 (BL)의 질문:** 라투르는 세르가 "지식의 철학," "판단하는 철학,"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 같은 현대 철학의 주류적 경향을 거부하는 이유와, 그가 정의하는 새로운 철학의 시대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1. 세르의 독특한 방법론과 지식의 총체성**
세르는 자신의 문체가 단순히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곧 방법론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수학적 엄밀성과 '일반화된 비교주의(generalized comparativism)'를 통해 폭넓은 영역을 넘나드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며, 이는 라투르가 지적하는 '경박함'(dabbling)이라는 비난에 대한 반박이 됩니다 [i, p. 125]. 세르에게 지식이란 더 이상 '체계적'인 방식으로 분류되거나 위계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지식의 혼돈스러운 본성" (the chaotic nature of knowledge) [i, p. 127] 속에서 새로운 합리성을 찾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관계에 대한 일반 이론"(a general theory of relations) 혹은 "전치사들의 철학"(a philosophy of prepositions) [i, p. 127]으로 칭하며, 특정한 명사나 동사(존재, 사유 등)에 기반한 전통 철학의 추상 방식과 대비됩니다.
**2. 지식 철학과 비판 철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
**"지식의 철학"과 "인식론"에 대한 비판:** 세르는 인식론이 "쓸데없는 중복적인 해설(redundant commentary)"에 불과하며, 과학은 스스로의 "내부 인식론(endo-epistemology)"을 가지고 있기에 외부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합리성이 과학에만 국한된다는 주장을 "납치(hijacking)"라고 비판하며, 합리성은 "모든 곳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equally distributed everywhere)"고 말합니다.
> “No, not at all. With my first Hermes book l wrote a text (which we have talked about) in which l took leave of epistemology, which is merely redundant commentary when compared to scientific results.” (Serres and Latour, 1995, p. 128)
인식론은 이성이 오직 과학에만 존재하고 그 외의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주의도 아니고, 이성에 대한 타당하고 충실한 묘사도 아니다. 단지 왜곡된 장악, 혹은 내가 ‘선전 publicity’이라고 부를 만한 것일 뿐이다.
세르는 전통적인 인식론(epistemology)을 "쓸모없는 반복적 주석"(redundant commentary)이자 "반사적 순환의 무용성"(the uselessness of the reflexive loop) [i, p. 128]으로 일축합니다. 과학은 그 자체로 내재적인 인식론을 가지므로 외부 철학의 개입이 필요 없다는 것이죠. 또한, 이 인식론이 합리성을 과학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강탈"(hijacking) 또는 "홍보"(publicity)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i, p. 128]. 세르는 자신이 합리주의자임을 자처하지만, 합리성이 과학만의 전유물이라는 제한적 정의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성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는 영역은 없다"(No domain can have a monopoly on reason)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i, p. 128].
**경계 설정의 무의미함:**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작업(nonsensical work)"이며, 이러한 경계는 끊임없이 "변동한다(fluctuates continually)"고 주장합니다. 그는 과학과 지식의 영역을 "대륙처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바다처럼 섞이는 것(waters mix together)"에 비유합니다.
나아가, 세르는 리쾨르(Paul Ricoeur)가 '의심의 철학'(philosophies of suspicion)으로 분류했던 사조들에 대해 강력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그는 이러한 철학들이 "염탐하는 듯한 태도"(spying)를 취하며, 철학을 "경찰 국가"(police state)로 만든다고 봅니다 [i, p. 133]. 비판자가 모든 것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비판 불가능한 위치에 서려 한다는 것이죠. 세르는 대신 "정직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항상 옳지 않다"(not always right)는 겸손한 태도를 주장합니다. "이 비판은 지적 정직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This irenicism is the fundamental condition of intellectual honesty.) [i, p. 134]. 그는 비판적 활동을 "뒤돌아보는 행위"(looking back)이자 "게으름, 무지, 심지어 속임수"(laziness, ignorance, or even cheating) [i, p. 135]의 변명으로 간주하며, 대신 '생산하는 것'과 '발명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히로시마 이후, 철학의 임무는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 체계를 발명하는 것"(invent a new set of laws) [i, p. 136]이라고 역설합니다.
**"언어 철학"에 대한 비판:** 그는 언어 철학이 "엄청난 에너지(enormous amount of energy)"를 소모하지만 얻는 결과는 "상당히 미약하다(fairly weak results)"고 평가합니다. 그는 ==*오감(Les Cinq sens)* 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언어가 경험을 대체하는(language replaces experience)" 현상을 비판하며, 이는 폭력(violence)이라고 말합니다.==
**"의심의 철학(philosophies of suspicion)"에 대한 반감:**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분류한 "의심의 철학"은 "스파이 행위(spying)"와 같고, "경찰 국가(police state)"처럼 작동하여 비판자가 스스로는 비판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는 이율배반을 지닌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자신의 "평화주의(irenicism)"가 "지적 정직함의 근본적인 조건(fundamental condition of intellectual honesty)"이라고 말하며, 비판적 시도가 "게으름(laziness)", "무지(ignorance)", 심지어 "부정행위(cheating)"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합니다. "판단하기보다 행하는 것이 낫다(It's better to do than to judge), 평가하기보다 생산하는 것이 낫다(to produce than to evaluate)".
**3.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 '근대성'에 대한 해체**
세르는 서구 사유의 오랜 습관인 '혁명'을 통한 시간의 단절, 즉 '과거의 폐기'에 대해 비판합니다. 그는 이를 "반복되는 행위"(repeated gesture)이자 "원시적인 습관"(archaic habit) [i, pp. 139-140]으로 간주하며, 오히려 이러한 단절의 이면에 있는 느리고 점진적인 움직임, 즉 '지질학적 판 구조'를 발견하려 합니다 [i, p. 139].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대한 거부:** 세르는 서구 사상이 역사를 "단절(rupture)"로 쪼개는 "오래된 관습(very old custom)"에 갇혀있다고 봅니다. "현대성(modernity)"의 이름으로 "근원적인 단절(radical rupture)"을 반복하는 것은 오히려 "구식(archaic)"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는 챌린저호 사고(Challenger accident)와 카르타고의 바알(Baal) 신 제의를 비교하며, 표면적인 "단절" 아래에 있는 "극도로 느리고 끈적끈적한 흐름(extraordinarily slow movement that puts us in communication with the past)"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옮긴이 주석에 따르면, 챌린저호 사고와 바알 제의는 둘 다 사회에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고, 전문가들이 행사를 주도하며, 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생하며, "희생"을 부인하는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챌린저 호 참사와 바알 신에게 바치는 희생 의식**을 병치합니다 [i, pp. 140-141, 160-161]. 라투르는 이 비교가 "믿기지 않는다"(unbelievable) [i, p. 140]고 반박하지만, 세르는 현대 기술과 고대 의식이 본질적으로 유사한 '사회적 역할'과 '부인'의 메커니즘을 공유한다고 주장합니다. 챌린저 호 폭발도 통계적으로 예측 가능한 '사고'이며, 카르타고인들이 희생된 아이들의 비명을 짐승의 소리로 부인했듯, 우리는 기술적 참사를 '사고'로 치부하며 현실을 부인한다는 것이죠. "바알은 챌린저 안에 있고, 챌린저는 바알 안에 있다." (Baal is in the Challenger, and the Challenger is in Baal) [i, p. 160].
**과학의 인류학:** 그는 과학이 "차가운" 것이 아니라 "지옥불처럼 타오르는(burns, like a hellfire)" 열기를 지니며, 기술적 대상(챌린저호) 또한 사회적 대상(사회적 힘을 과시하는 도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사회과학이 "우주론적이지 않다(a-cosmic)"(세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자연 과학은 인간적인 측면에 무관심하다고 지적하며, 철학의 역할은 이 두 분야가 "두 발로 걷고 두 손을 사용하도록(walk with both feet, to use both hands)" 돕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러한 접근 방식으로 인해 자신이 "아모던(a-modern)" 또는 "비현대인(nonmodern)"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주피터(Jupiter)의 이름** 분석 또한 이러한 '혼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주피터는 '빛'(Ju-)과 '아버지'(Piter)라는 두 요소의 결합인데, 근대 이후 과학(물리)은 '빛'을, 사회과학은 '아버지'를 분리하여 설명하려 했습니다. 세르는 이 두 요소가 왜 함께 존재하는지, 그들을 묶는 "하이픈"(hyphen) [i, p. 151]에 대한 탐구가 철학의 핵심 과제라고 봅니다. 그는 자신이 '비근대적' (nonmodern) 또는 '아근대적' (a-modern)이라 불릴 수 있다고 인정하며, 칸트(Kant), 마르크스(Marx), 바슐라르(Bachelard) 같은 근대의 단절적 사유가 오히려 진정한 과거와의 연결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합니다 [i, p. 147]. 대신 그는 **케플러의 두 개의 초점을 가진 타원 궤도**를 지식의 모델로 제시하며, 이는 단일하고 순수한 중심이 아닌, 두 개의 중심(하나의 밝은 것, 다른 하나의 어두운 것)이 공존하는 지식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설명합니다 [i, p. 161-162]. 이러한 관점에서 세르는 기존의 '근대'가 사실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다고 말합니다.
**"주피터(Ju-Piter)"의 비유와 "하이픈(hyphen)":** 세르는 주피터(Jupiter)라는 이름(Ju/빛 + Piter/아버지)을 분석하며, 계몽주의는 빛(Ju)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사회과학은 아버지(Piter)를 사회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종교를 "신이 죽었다(death of God)"고 선언하며 배제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밝힘(unveilings)"에도 불구하고, "빛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하이픈(hyphen)"("왜 우리는 빛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지(why we live with our father in the light of day)")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습니다. 이 "결여된 연결(absent link)"이야말로 철학이 탐구해야 할 핵심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혼합과 통합의 중요성:** 그는 순수한 형태의 분리를 거부하고, 챌린저호와 바알, 과학과 종교, 자연과 사회가 서로 교차하고 섞여 있는 "혼합된 몸체(mixed bodies)"의 철학을 추구합니다. 이는 칸트 이후의 "비판적 괄호(critical parenthesis)"를 닫고, 두 가지 "밝힘"이 만들어낸 "어둠(obscurity)" 속에서 진정한 "연결(link)"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끊임없이 "관계(relations)"를 구축하고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다섯 번째 대화: 지혜 (FIFTH CONVERSATION Wisdom)
**브뤼노 라투르 (BL)의 질문:** 라투르는 세르가 최근에 관심을 두는 "지혜(wisdom)"와 "도덕성(morality)"에 대해 묻고, 이것이 어떻게 전통적인 철학과 다른지 알고자 합니다.
**1. 지혜의 재정의와 '새로운 필연성'의 도래**
**철학과 지혜:** 철학은 "지혜"를 추구하며, 이는 단순히 전문적인 문제를 넘어 "삶의 필연적인 질문들(inevitable, vital questions)"(죽음, 폭력, 몸, 자연, 악)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책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상태에 대한 직접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direct and often painful experience of the state of things)"에서 나옵니다.
세르는 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지혜'(wisdom)이며, 이는 단순히 논증이나 의심을 넘어선 총체적인 세계의 구성과 삶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i, p. 168]. 전통적으로 지혜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필연성'(necessity)에 대처하는 기술이었지만, 20세기 중반(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과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은 인간이 '필연성'이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 즉 질병, 죽음, 심지어 생명의 재생산 방식까지 통제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i, pp. 169-170]. "우리는 공간, 물질, 생명의 주인이 되었다." (We are finally the masters of space, of matter, and of life) [i, p. 169].
**"오래된 필연성(old necessity)"의 종말:** 과거의 지혜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필연적인 고통(inevitable pains)"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과학과 기술의 발전로 인해 인류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자(masters)"가 되었고,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있거나, 언젠가는 우리에게 달려있게 될 것(Everything depends or will depend on us, someday)"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지혜의 토대를 흔듭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숙달'(mastery)은 '새로운 필연성'을 낳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결정해야만 하는' 강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죠 [i, p. 172]. "우리의 권력이 우리의 권력을 벗어나는 것처럼 모든 일이 일어난다." (Everything happens as though our powers escaped our powers) [i, p. 171]. 세르는 이러한 상황을 "우리의 정복이 우리의 의도적인 의지를 앞지른다"(Our conquests outstrip our deliberate intentions) [i, p. 171]고 표현하며, 이 새로운 필연성이 바로 새로운 지혜의 원리이자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i, p. 172]. 우리는 이제 '할 수 있다'(can)는 동사에서 '해야만 한다'(must)는 동사를 활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i, p. 173].
**2. '객관적 도덕'과 '악'의 문제**
**"지배의 역설"과 "새로운 필연성(new necessity)":**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게 되면서, 과거에는 자연에 속해 있던 "필연성"이 이제 "우리의 자유 안에 거주하게(inhabits our freedom)"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구를 파괴하거나 기후를 교란할 수 있는 능력("can")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힘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must)"을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배를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 우리의 지배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How can we dominate our domination; how can we master our own mastery?)"라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세르는 이러한 변화가 도덕을 '주관적인 개인의 문제'에서 '객관적인 문제'로 전환시킨다고 봅니다 [i, p. 175]. 과거에는 자연에 내재했던 필연성이 이제 인간의 자유와 숙달 안에 들어와 자리 잡았으므로, 도덕은 '객관적 사실'과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죠 [i, p. 175]. "도덕은 객관적인 지식의 산물로서 나의 문화적 배경을 교란시킨다." (As a product of objective knowledge, morality dislodges my very cultural background) [i, p. 175]. 그는 "해야만 한다는 것은 곧 원인이다"(Must equals cause) [i, p. 176]라고 선언하며, 우리의 행위가 그 자체로 원인이 되고 그 결과가 다시 우리에게 필연성으로 돌아오는 순환적 관계를 강조합니다.
**객관적 도덕성 (Objective Morality):** 이러한 새로운 상황 속에서 도덕성은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objective facts)"과 "현실의 기술(technology of reality)"에 기반을 둔 "객관적인 도덕성"이 됩니다. "의무는 원인과 같다(Duty is the same as cause)". 우리가 지구의 운명, 생명의 번식, 죽음과 질병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면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decide about every thing)" 필연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는 라이프니츠가 신의 창조 활동을 묘사했던 방식과 유사합니다. 새로운 윤리는 "Natura sive homines—자연, 즉 인간 문화; 인간 도덕성, 즉 자연의 객관적 법칙(Nature, meaning human culture; human morality, meaning the objective laws of Nature)"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 “Because our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powers make our transcendence flow continually toward and in and for immanence. Here is the name of our new ethos: Natura sive homines—Nature, meaning human culture; human morality, meaning the objective laws of Nature.” (Serres and Latour, 1995, p. 176)
> > “우리의 과학적·기술적 능력은 우리의 초월성을 끊임없이 내재로, 그리고 내재 속으로, 내재를 위해 흐르게 만든다. 여기 우리의 새로운 에토스의 이름이 있다: Natura sive homines—자연, 곧 인간 문화; 인간의 도덕성, 곧 자연의 객관적 법칙.” (세르·라투르, 1995, p. 176)
==스피노자(Spinoza)의 유명한 명제 **"Deus sive Natura"**(신, 곧 자연)==
이러한 맥락에서 '악'(evil)의 문제는 세르 철학의 핵심으로 재등장합니다. 그는 악을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기존의 비판적 접근 방식을 거부합니다. 라이프니츠(Leibniz)의 『변신론』(Theodicy) 이래로 신, 사탄, 특정 집단 등 비난의 대상은 계속 바뀌었지만, "악은 전혀 변하지 않고 그 파괴를 계속 확산시킨다." (evil has not varied in the least and continues to spread its ravages) [i, p. 193]. 세르는 이제 악이 "모든 대상은 있지만 주체는 없는"(every object but no subject) [i, p. 191]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며, 이를 '과학적 문제'로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i, p. 192]. 그는 '악의 첫 번째 원리'(first principle of evil)가 존재하며, 도덕은 이 원리를 인식하고 이를 '관리하고 이동시키는 것'(managing and displacing) [i, p. 195]이라고 설명합니다. 심지어 암과 같은 질병도 끊임없이 제거하려 하기보다 '공생적 균형'(symbiotic equilibrium)을 찾는 것이 나은 해결책이라고 비유합니다 [i, p. 195].
**3. '약함'의 옹호와 '인칭 대명사의 철학'**
**인문학의 재발견과 "악의 문제":** 과학과 사회과학이 각각 인간 없는 세상과 세상 없는 인간을 다루는 동안, 인문학은 "인간의 불행에 대한 지속적인 울부짖음(continuous cry of human misfortune)"을 보존하며, 이는 "지식과 전문 지식의 근원(origin of knowledge and our expertise)"이 됩니다. "악의 문제(problem of evil)"는 과학의 힘의 기반이 되며, 이는 "지적 역량의 가장 취약한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미래의 전문가들은 "인간적인 과학(humane science)"을 찾기 위해 인문학과 인간성으로 향해야 합니다.
세르는 역사를 '승리자'의 서사가 아닌 '패배자'와 '약함'(weakness)의 관점에서 다시 읽습니다. 그는 '약함'이 역사의 '주요 동력'(prime mover)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진화는 승리가 아닌 "문제들, 실패, 그리고 수정"(problems, failures, and rectifications) [i, p. 188]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세르에게 '현명한 사람'(sage)은 "패배자, 약자, 취약하고 무방비한 자, 가난한 자, 굶주린 자"(the loser, the weak, the frail and defenseless, the poor, the starving) [i, p. 186]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통해 인류의 본질을 이해합니다. "약함이 시간을 만든다." (weakness creates time) [i, p. 188].
**"교양을 갖춘 제3자(Le Tiers-Instruit)"와 교육학:** 그는 과학(젊음)과 인문학(오래된 전통)을 결합한 "혼혈아(mestizo offspring)"로서 "교양을 갖춘 제3자"를 제안합니다. 이 인물은 "케플러식 혁명(Keplerian revolution)"을 따르며, 지식이 "두 개의 중심(two centers)"(지식의 태양과 덜 눈부시지만 활발한 두 번째 중심)을 가진 타원형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약함(Weakness)이 역사의 동력:** 세르는 "약자(the weak), 연약한 자(the frail and defenseless), 가난한 자(the poor)"가 인류의 "최고의 정의(best definition of humanity)"이며, "약함(weakness)"이 역사의 "주요 동력(prime mover)"이라고 주장합니다. 인류의 진보는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문제(problems)"와 "실패(failures)"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악의 문제"의 객관화와 비난의 종말:** 전통적으로 "악의 문제"는 책임을 물을 "피고인(accused party)"을 찾는 사법적 행위(재판)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르는 이 "비판의 시대"가 "가능한 피고인 목록을 소진했기 때문에(exhausted the list of possible accused parties)"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제 "악은 모든 객체는 가지지만 주체는 없다(evil, hate, or violence has every object but no subject)". 이는 날씨처럼 "비인격적이고(impersonal)" "객관적(objective)"입니다.
**"비난의 금지"와 "관계의 도덕성":** "모든 사람이 책임이 있다(we are all responsible)"는 인식은 "원죄(original sin)"의 합리적인 버전을 제공합니다. "도덕성"은 더 이상 비난을 통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 문제(scientific problem)"로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problem to be resolved)"가 됩니다. 그는 "모든 비난을 금지하는(proscribing all accusation)" 새로운 "도덕적 계약(moral contract)"을 제안하며, 이는 "관계의 과학(science of relations)"에 기반을 둔 "관계의 도덕성(morality of relations)"입니다.
**덕목과 자기 절제:** "자본죄(capital sins)"(교만, 탐욕 등)는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덕목(virtue)"은 이러한 "성장을 멈추는(stopping this growth)" "자기 절제(restraint exercised on oneself)"에 있습니다.
**인칭대명사와 전치사의 철학:** 세르는 철학이 더 이상 명사나 동사만으로 이루어진 "전보식 언어(telegraphic language)"를 사용해서는 안 되며, "관계(relations)"와 "주체(subjects)" 그리고 "객체(objects)"를 표현하기 위해 "전치사(prepositions)"와 "인칭 대명사(personal pronouns)"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we)"는 "그(him)/그것(it)"에 대해 말하고 생각할 때만 존재할 수 있으며, "제3인칭(third-person)"은 "모든 객관성(all existing objectivity)"과 "세상(world)"을 포괄하는 기반이 됩니다.
이러한 객관적 도덕을 정립하기 위해 세르는 독창적인 **'인칭 대명사의 철학'(philosophy of personal pronouns)** 을 제시합니다 [i, p. 197]. 그는 '나'(I), '너'(you)와 같은 1, 2인칭 대명사가 대화의 '토큰'(tokens of presence)에 불과하며, 진정한 '기초'(foundation)는 '그/그것'(him/it)으로 대변되는 **3인칭**에 있다고 봅니다 [i, p. 198]. "우리는 오직 그에 대해 말하고, 우리는 오직 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그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WE SPEAK ONLY OF HIM. WE THINK ONLY OF HIM. FOR WE WOULD BE NOTHING WITHOUT HIM.) [i, p. 198]. 이 '그/그것'은 세계의 총체성, 즉 인간, 사물, 신, 존재, 기후, 그리고 의무를 포괄하는 객관성의 기반입니다 [i, p. 198]. 인간 사회가 계약을 통해 형성되었듯이, '최초의 사물'(first object, 예: 이브의 사과)이 등장하면서 계약은 '더 무겁고 밀도 있게'(heavier and denser) [i, p. 201] 변모했고, 비로소 인간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합니다.
**4. 새로운 도덕률과 인류애의 재구성**
세르에게 과학은 특히 히로시마 원자폭탄 이후 전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힘은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으며, 인류에게 전례 없는 윤리적 문제와 책임을 부여합니다. 과학의 "지옥불 같은" 열기는 그 엄청난 파괴력과 통제 불가능성을 내포하며, 이는 단순히 지식의 발전을 넘어선 인류 생존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과학이 제공하는 "가능성"이 너무나도 빠르게 "필요성"이 되고, 그 결과가 종종 의도치 않은 악을 초래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그는 지적합니다.
**도덕률 ("살인하지 말라"):** 전통적인 "살인하지 말라(Thou shalt not kill)"는 계명은 이제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 인류(global human race)"와 "지구 전체(entire planet Earth)"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또한 "마음속으로도 폭력을 행하지 말라(Thou shalt not give thyself over to any violence in mind)"는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 작가, 철학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세 번째 보편적 법칙이 됩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법(law)"이 "휴전(truce)"(계약)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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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는 과학적 진보의 핵심이 냉철한 분석이 아니라 "정신이나 불의 강렬한 열기"에서 비롯되는 "발명"과 "직관"에 있다고 봅니다. 그는 수학, 물리학, 생화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의 혁신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혁신이 단순한 논리적 전개가 아니라,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천둥"과 같은 충격적인 발견에서 온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과학의 "열기"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예측 불가능한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이고 생동감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세르는 이러한 '객관적 도덕'에 기반한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합니다. 이는 '너는 죽이지 말라'(Thou shalt not kill)는 계명을 확장한 것으로, 폭력을 개인을 넘어 "지구 전체"(the entire planet Earth) [i, p. 203]와 "인간 집단 전체"(the global human race) [i, p. 203], 심지어 '정신'(mind)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확장합니다. 특히 마지막 계명은 "정신이 과학에 들어간 이래로, 그것은 양심이나 의도를 넘어섰고 폭력의 주요 증폭기가 되었다." (ever since the mind entered science, it has surpassed conscience or intention and has become the principal multiplier of violence) [i, p. 204]고 지적하며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 작가, 철학자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법이 '개인의 죽음'에 기반했던 과거의 법을 넘어 "인류의 궁극적인 죽음과 발생하는 구체적인 전 지구적 위험"(the eventual death of the human race and on the ensemble of specific global risks incurred) [i, p. 203]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를 '휴전'(truce)이자 '계약'(contract)이라고 부릅니다 [i, p. 204]. 인류가 과학적 전문성을 통해 얻은 힘이 비인간적인 야만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지켜온 '인간 고통의 기록'(continuous cry of suffering) [i, p. 180]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지식과 고통의 결합, 그리고 '인류'(humanity)와 '연민'(compassion)이라는 단어가 공유하는 어원적 의미를 통해 그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적인 과학' (humane science) [i, p. 183]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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