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chel Serres (2016) *The Five Senses: A Philosophy of Mingled Bodies*: Bloomsbury Academic, an imprint of Bloomsbury Publishing Plc. > [!INFO] > Type:: [[]] > Title:: The Five Senses: A Philosophy of Mingled Bodies > Author(s): [[Michel Serres]] > Year:: 2016 > Tags:: > DOI:: > Citekey:: serres_five_2016 > ZoteroURI:: [Open in Zotero: The Five Senses: A Philosophy of Mingled Bodies](zotero://select/items/@serres_five_2016) > ReviewedDate:: [[2025-08-12]] > Related Note: 202508191250 ## Citation ```latex [@serres_five_2016] ``` ## Summary 이 글은 **미셸 세레스의 저서 『다섯 가지 감각: 섞인 몸들의 철학(The Five Senses: A Philosophy of Mingled Bodies)』**의 발췌문입니다. 이 책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지식의 본질**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탐구합니다. 저자는 **오감**이 단순한 생물학적 기능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기억**, **문화**, **언어**, 그리고 **현실**을 형성하는 **복잡하고 유기적인 과정**임을 주장합니다. 특히, **언어**가 **감각을 마비**시키고 **세상을 추상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며, **직접적인 촉각**과 **혼합된 감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Annotation ### Introduction by [[Steven Connor]] 이 책은 명확하게 구분된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각 장은 특정 감각을 선형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모든 감각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형성하는 "혼합된 몸"이라는 서레스의 핵심 사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그의 글쓰기는 예측 불가능한 반복(loops), 도약(leaps), 응집(poolings), 분출(spurts) 등으로 전개되며, 이는 정연한 '교과과정(curriculum)'보다는 여기저기 오가는(`discurrere`) 혹은 함께 달려가는(`concourse`) 담론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 우리가 상속받은 미로의 개념은 죽음, 절망, 광기를 상징하는 비극적이고 비관적인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로는 움직이는 몸들이 지나가면서 가능한 한 많이 되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데 가장 적합한 모델입니다. 미로는 구조화되지 않은 여정 속에서 유한한 이동이 최대한의 가능성을 갖도록 해주며, 피드백을 극대화합니다. … 그렇다면 구조화되지 않고 짧은 여정 속에서 가능한 한 많은 피드백 루프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봅시다. 미로는 이러한 극대화를 제공합니다. 훌륭한 수신기이자, 최고의 공명기를 제공하는 장소, 그리고 의식의 시작입니다. (챕터 2) 『오감』에서 세르가 쓰는 전통은 감각을 주로 분석이나 분리의 행위를 통해 이해하는 전통입니다. 첫번째는 수 quantity. 일반적으로 감각의 개수가 유한하다는 점에는 동의되지만, 그 정확한 수에 대해서는 일치된 보고가 드믐.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서로 다른 모양과 크기의 원자 마찰로 감각을 설명, 사실상 하나의 감각, 즉 촉각의 변형이라고 봄)부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그리고 소크라테스([[Socrates]], 4개의 감각, 이건 감각을 그의 네 원소와 대응시키려는 의도, 시각은 물, 청각은 공기, 냄새는 불, 그리고 촉각은 땅, 맛은 particualr form or modifiaction of touch라고 봄, 또한 다른 다섯 감각을 매개하는 일종의 여섯 번째 ‘준(準)감각’, 즉 *공통감각(sensus communis)* 의 필요성을 제안)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은 감각의 수를 특정하고(예: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감각을 네 가지 원소와 연결시켰습니다), 시각을 최상위에 두는 계층을 형성하려 했습니다 > “But Aristotle also suggested the necessity for a kind of sixth, quasi-sense, the sensus communis, the function of which was to mediate between the other five senses.” (Serres, 2016, p. 2) 즉, 시각·청각·후각과 같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감각들 외에도, 이름이 붙은 감각이 상당히 많으며, 이름이 붙지 않은 감각들은 무한히 많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것이 hierarchy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보통 시각이 가장 위에 오고 (인간의 몸의 가장 위에 있는 거서럼), 그리고 청각, sidekick으로, 그 다음은 matter of interesting dispute. 그러나 세레스는 이러한 전통을 '복잡하게 만들고 변형'시킨다. 그의 책의 다섯 챕터는 감각들을 선형적으로 나열하거나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1장 '베일(Veils)'은 촉각과 피부에 대한 명상이며, 2장 '상자(Boxes)'는 소리와 청각을 탐구합니다. 3장 '테이블(Tables)'에서는 미각과 후각을 통합하며, 이는 감각들이 종종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4장 '방문(Visit)'은 시각을 특정 방식으로 다루는데, 이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방문하거나 보러 가는 것'으로 해석되며, 장소, 풍경, 지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지막 5장 '기쁨(Joy)'은 전통적인 오감에 포함되지 않는 보조 감각들(예: 열, 노력, 가벼움, 무게, 속도)을 탐구하며, 이를 '즐거움, 즉 몸으로 존재함의 강화된 메타감각'의 구성 요소로 제시합니다. 세레스의 핵심적인 주장은 감각들이 '몸의 뒤섞임(mixing of the body)'이며, 이를 통해 몸이 '세상과 자기 자신과 뒤섞이고, 경계를 넘나드는' 주요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 “For Serres, by contrast, the senses are nothing but the mixing of the body, the principal means whereby the body mingles with the world and with itself, overflows its borders.” (Serres, 2016, p. 3) 데카르트가 영혼이 몸의 특정 포인트에서 만진다라고 한 점은 맞았지만, 세레스에게 영혼은 몸의 특정 위치([[René Descartes|데카르트]]의 송과선처럼)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몸이 자기 자신을 만지는 곳마다 활활 타오른다'. 즉, 영혼은 '피부 위 또는 피부 안에' 존재하는데, 이는 '피부가 영혼과 세상이 뒤섞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as has often been observed, the skin can in one sense be regarded as the ground or synopsis of all the senses, since all the organs of sense are localized convolutions of it.” (Serres, 2016, p. 3) 세르는 그 중에서도 피부와 촉각을 우선시. 특히 콘디야크([[Étienne Bonnot de Condillac]]), 그는 콘디야크([[Étienne Bonnot de Condillac|Condillac]])의 『감각론(Treatise of Sensations)』(1754)과의 대화를 통해 이를 심화시킵니다. 콘디야크의 사유상(statue)은 촉각을 통해서만 '나'라는 자기 인식을 얻게 되지만, 세레스는 이러한 '추상화(abstraction)'가 '감각하는 몸을 분할하고, 미각, 후각, 촉각을 제거하며, 오직 시각과 청각, 직관과 이해만을 남긴다'고 비판합니다. > “The sardonic references all the way through The Five Senses to various kinds of statue, automaton or robot will be Serres’s way of demurring from the approach to the senses by way of dissection and analysis, since, he says, ‘[a]bstraction divides up the sentient body, eliminates taste, smell and touch, retains only sight and hearing, intuition and understanding’.” (Serres, 2016, p. 4) > > 『오감』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다양한 조각상, 자동인형, 로봇에 대한 냉소적인 언급은, 감각을 해부와 분석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태도에 대한 세르의 이견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추상은 감각하는 몸을 분할하고, 미각·후각·촉각을 제거하며, 시각과 청각, 직관과 이해만을 보존한다.” > “Descartes is right to say that the soul touches the body at a particular point, but he was wrong to locate it in the pineal gland.” (Serres, 2016, p. 20) 다시말해, 세르의 주장에 따르면, 영혼은 데카르트가 말했듯 뇌 깊숙이 위치한 완두콩 크기의 송과선과 같은 특정 지점에 깃드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자기 자신과 접촉하는 곳마다, 그리고 그때마다 번쩍이며 나타납니다. 사유는 자기 촉각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기에 반사적입니다. 피부는 “변화하고, 반짝이며, 덧없고, 번쩍이고, 줄무늬지고, 색색이 물들고, 얼룩지고, 구름 낀 듯 흐릿하며, 별이 박힌 듯 빛나고, 장식되고, 다양하게 무늬지며, 격렬하게 흐르고, 소용돌이치는 영혼 (“observe on the surface of the skin, the changing, shimmering, fleeting soul, the blazing, striated, tinted, streaked, striped, many-coloured, mottled, cloudy, star-studded, bedizened, variegated, torrential, swirling soul. a wild idea, the first after consciousness, would be to trace delicately and colour in these zones and passages, as in a map.” (Serres, 2016, p. 23))”의 가변적인 장(場)입니다. > “The soul inhabits a quasi-point where the I is determined.” (Serres, 2016, p. 21) 세레스의 글쓰기 방식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다채로운 목록(variegated list)'을 사용하여 복잡하거나 불규칙한 표면(예: 보나르(Bonnard)의 '화장(La Toilette)' 속 여성의 피부, 공작새의 꼬리)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는 정확한 단어를 찾기보다 다양한 용어들을 나열하여 의미의 중심이 특정한 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장되는 배열 또는 흩뿌려짐' 속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레스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어원, 언어유희,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며, 이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감각적 경험을 표현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책은 그 자체로 '호문쿨루스(homunculus)'와 같아서, 피부 조직이 스스로 접히면서 내적인 감각과 의식을 형성하듯이, 텍스트 역시 혼합과 연결을 통해 자신을 구축합니다. > “The fan, as the convening of a distribution, will be one of Serres’s favourite devices throughout The Five Senses, appearing first of all in the story of the peacock’s tail, formed, according to greek myth, when hera drapes the skin of the many-eyed argus on to the body of the bird that will henceforth recall his eyes in its ocelli.” (Serres, 2016, p. 5) > > 부채는, 분배를 소집하는 장치로서, 『오감』 전반에서 세르가 가장 즐겨 쓰는 도상 중 하나가 됩니다. 그 첫 등장은 그리스 신화에 따른 공작의 꼬리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는 수많은 눈을 지닌 아르고스의 가죽을 새의 몸 위에 걸쳤고, 그 후로 그 새는 깃털의 눈 모양(ocelli) 속에 그의 눈을 기억하게 됩니다. 코너는 세레스가 학문적 세계의 '적대적인 본성(adversarial nature)'에 근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세르는 학문 세계에 만연한 공격과 반격, 공격성과 방어, 의심과 감시라는 환상적인 공방전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학문적 삶과 글쓰기에 내재한 이러한 대립적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가, 그의 저작에서 각주와 다른 저자들과의 명시적 교섭이 부재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오감』은 철학, 과학, 문학에서 감각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역사를 섬세하고 지속적으로 대화하듯 다루지만, 그 대화는 명시적으로 선언되기보다 은근히 함의되며, 외부적이라기보다 내재적으로 이루어진다. (8)" 그는 주석이나 다른 저자들과의 명시적인 논쟁을 피하고, 철학, 과학, 문학 속에서 감각을 이해하려는 시도들과 '우호적으로 암시된 대화(amicably implied conversation)'를 진행합니다. 그러나 『다섯 감각』에서는 드물게 '맹렬한 적대감(ferocity of its antagonisms)'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특히 3장에서는 감각에 대한 학술회의를 '시체들의 만찬(a dinner of statues)'이자 '돌의 향연(a feast of stone)'으로 풍자하며, '죽은 말들이 오가는'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말이 우리의 살을 채우고 그것을 마비시킨다'는 비판, ==즉 소크라테스가 독약으로 몸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계속 말하는 모습에 대한 혐오로 이어집니다==. 세레스는 '냄새와 맛은 구별하지만, 시각과 청각처럼 언어는 통합한다'는 이분법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4장부터는 분위기가 바뀌어 '언어가 죽어가고 있다(language is dying)'고 선언하며, 그의 책이 '단어의 죽음을 기념한다(celebrates the death of the word)'고 말합니다. 세레스는 수천 년 동안 언어 속에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과학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이를 통해 경험과 인지 사이의 분열이 치유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전망합니다. 이후 저서인 『몸의 변주(Variations sur le corps)』(1999)에서 그는 몸을 '모든 지식의 다재다능한 모체이자 모델'로 간주하며, `nihil in intellectu` (지성 안에 감각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격언을 `nothing in knowledge that has not first been in the whole body` (지식 안에 몸 전체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로 변형합니다. 결론적으로, 코너는 세레스의 책 자체가 '총체성을 포함하는 홀로그램(holographically includes the whole in itself) (14)'과 같다고 평합니다. 책의 서술 형식과 리듬은 그 내용 자체를 모방하며(예: 2장의 문장 구조는 밀폐된 상자 내부의 복잡성을 반영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를 '지리학(geography)' 혹은 '땅의 글쓰기(earth-writing)'로 간주합니다. 이 책의 영어 번역은 세레스의 감각에 대한 풍부한 사유를 영미권 독자들에게 전달하며, 그의 독창적인 사고를 현재의 논의와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1장: 베일 (Veils) 1장 '베일'은 미셸 세레스의 감각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촉각과 피부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시작합니다. 이 장은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에서 출발하는데, 배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고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 오직 촉각만이 그를 살리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던 경험을 서술합니다. 이 극적인 순간에 그는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나'라고 말하는 법을 몸이 영원히 배우는' 지점을 깨닫습니다. 그는 이 지점을 '영혼(soul)'이라고 부르며, 데카르트가 송과선에 영혼이 있다고 본 것과 달리, 세레스는 '몸이 자기 자신을 만지는 지점마다 영혼이 깃든다'고 주장합니다. 즉, 영혼은 몸의 특정 위치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단순화가 아닌 복잡함 속에서, 후퇴가 아닌 탐구 속에서' 존재하게 됩니다. 세르는 피부를 '뒤섞인 감각들의 한 변이(a variety of our mingled senses)'로 묘사하며, 촉각이 '공통 감각(common sense)'의 토대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피부가 어떻게 '눈, 귀, 입, 코보다 더 잘' 감각 메시지를 통제하고 수용하는지 설명합니다. 피부는 '연속적인 배경(“so does our skin form the continuous backdrop” (Serres, 2016, p. 70))'이자 '감각들의 공통분모(common denominator)'이며, 접히고, 주름지고, 적응하며, 감각 기관들 사이에 복잡한 길을 형성합니다. 이는 측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위상학(topology)적 개념과 더 가깝습니다. 이 장에서는 '천(canvas), 베일(veil), 피부(skin)'라는 은유를 통해 세상과 인간의 지각이 어떻게 겹겹이 쌓여 있는지를 탐색합니다. 보나르([[Pierre Bonnard]])의 그림 '화장실에서 나온 누드(Nude in the Bath)'에 나오는 여성의 피부는 '점박이, 줄무늬, 거친, 반점 있는, 점찍힌, 새겨진, 얼룩진, 박힌' 등 다채로운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는 '역사가 새겨진 피부(historiated skin)'이자 '수천 개의 매듭과 연결로 이루어진' 미묘한 직물로 표현됩니다. ![[Nude in the Bath_1925_Pierre Bonnard.png]] ![[The Bath_1925_Pierre Bonnard.png]] 세레스는 '보나르의 목욕 가운, 보나르의 누드, 보나르의 정원은 만개한 피부를 보여준다(bonnard’s bathrobe, bonnard’s nudes, bonnard’s gardens display skins in full bloom)'고 말합니다. 이러한 피부는 외부 세계의 인상과 내적인 기억이 새겨진 '변화하고 반짝이는, 덧없는 영혼'의 지도와 같습니다. 문신(tattooing)은 이러한 피부에 새겨진 '영혼의 흔적'이자 '세상의 흔적'으로 비유됩니다. ![[Pasted image 20250812152254.png]] 《[유노](https://namu.wiki/w/%ED%97%A4%EB%9D%BC "헤라")와 아르구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https://namu.wiki/w/%ED%8E%98%ED%85%8C%EB%A5%B4%20%ED%8C%8C%EC%9A%B8%20%EB%A3%A8%EB%B2%A4%EC%8A%A4 "페테르 파울 루벤스") 作, 1610년 세레스는 시각의 전제주의(tyranny of panoptical vision)를 상징하는 아르구스(Argus)와 음악을 통해 그를 잠재우는 헤르메스(Hermes) 신화를 통해 감각들 간의 '뒤섞임(mixture)'과 '간섭(interference)'을 설명합니다. 헤르메스가 소리로 아르구스를 압도하는 장면은 '소리는 시야를 무너뜨리거나 매혹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소리 파동이 전체성에 즉각적으로 접근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라이프니츠(Leibniz)의 '모든 것이 감각에 앞서 지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지성 자체를 제외하고는(Nihil est in intellectu, quod non fuerit in sensu, excipe: nisi ipse intellectus)'라는 격언과 연결되어, 발이 먼저 느끼는 경험이 지식의 토대가 됨을 주장합니다. 이 격언은 책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변주됩니다. 또한 세레스는 동화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verre)와 털 구두(vair)의 언어유희를 통해 촉각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유리는 보여주거나 드러내지만, 털은 만져지고 숨긴다'며, 유리가 '투명하고, 부서지기 쉬우며, 단단하고, 차갑고, 투명한' 반면, 털은 '부드럽고, 단단하지 않고, 느슨하며, 만지기에 매우 유쾌하고' 변형 가능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인식을 넘어선 복합적인 감각 경험의 중요성을 부각합니다 (64). > 이야기는 종종 두 가지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하나는 말해진 사물의 수수께끼이고, 다른 하나는 서사의 수수께끼이다. 예를 들어,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던진 수수께끼와 그가 이를 푸는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그 신화를 듣는 모든 이에게 던져지는 수수께끼이며, 이는 오랫동안 해답 없이 남아 있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발을 안다’는 의미를 지니며, 발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서사는 수수께끼를 설명하고 해답을 예고한다. 마찬가지로, 왕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다. 모피 슬리퍼는 신데렐라의 것이다. 그는 지배자이자 수단을 가진 자로서 가능한 한 비용이 많이 드는 방법을 택한다. 모든 여인을 철저히 조사하여 단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는다. 왜 슬리퍼가 모피로 덮여 있는가? 왜 ‘모피(vair)’라는 단어를 쓰는가? 이는 마치 ‘왜 수수께끼를 푸는 자에게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주었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63). 안개(mist)와 그림자(shadow)의 비유를 통해 세레스는 인식이 지니는 불확실성과 변동성을 탐색합니다. 안개는 '접촉의 연속적이거나 불규칙한 공간'을 차지하며 '거리, 측정, 정체성을 상실시킨다'. 이는 '사물이 사물로 남아있는' 그림자와 대조되며, 실재와 현상 사이의 구분이 흐려지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 “night does not anæsthetize the skin, but makes it more subtly aware. The body trains itself to seek the road in the middle of darkness, loves small, insignificant perceptions: faint calls, imperceptible nuances, rare effluvia, and prefers them to everything loud.” (Serres, 2016, p. 67) ? “우리의 기술은 종종 건강한 팔다리에 하는 정형외과 시술과도 같다. 이론에 따르면, 그것이 교체되거나 길어지기만 하면 곧 병들거나 무력해진다. 우리를 증진시키는 것은 취하고,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은 버리자.” (세르, 2016, p. 68) 결론적으로 1장은 몸과 세상이 뒤섞이는 근본적인 방식으로서 피부와 촉각의 우선성을 확립하고, 감각 경험의 복합성, 유동성,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인식의 지형학적 특성을 다룹니다. 이는 분석적 사고가 놓치는 '매듭(knot)'과 '뒤섞임(mixture)'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Meanwhile i am seeking the best model for a theory of knowledge, less solid than a solid, almost as fluid as liquid, hard and soft: fabric.” (Serres, 2016, p. 81) 세레스는 '매체(medium)'보다 '뒤섞임(mixture)'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매체는 '너무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며 정적이지만, 뒤섞임은 '유동적'이며 '융합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베일을 벗기는 것(unveiling)'이라는 전통적인 생각에 반대하며, 베일은 단순히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호 교차하는 다양성(intersecting multiplicity of veils (82))'이자 '세계는 옷 더미(heap of clothes)'라는 새로운 지식 모델을 제시합니다. > “Touch is topological and prepares the planes and smooth varieties for a relaxed, metric, Euclidean gaze, the skin covers with a veil what the eye cannot see. Molyneux’s problem – whether a person blind from birth, who has just been operated on, would be able to recognize with his newfound sight a cube or sphere that he was previously able to identify with his fingers – raises more questions about the geometry of those whose vision is not impaired rather than it does about the theory of knowledge.” (Serres, 2016, p. 83) > > “촉각은 위상학적이며, 평면과 매끄러운 다양체를 준비해 이완된, 계량적이고 유클리드적인 시선을 가능하게 한다. 피부는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베일로 덮는다. 몰리뉴 문제―선천적으로 시각장애가 있던 사람이 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했을 때, 이전에 손끝으로 식별할 수 있었던 입방체나 구체를 새로 얻은 시각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는 인식론 자체보다 오히려 시각에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기하학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입체가 아니라, 존재하는 꾀꼬리나 라일락 가지, 에메랄드나 벨벳 치마를 대상으로 실험하지 않는가? 우리 중 누가 실제로 완벽한 정육면체나 구체를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것들을 오직 언어 속에서만 개념화해 왔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시각장애인에게 공과 자갈을 쥐어준다면, 그는 촉각을 통해 연속적인 변형, 들쭉날쭉한 모서리와 고유한 질감을 파악할 것이고, 곧 당신에게 시각만으로 공과 구, 입방체와 자갈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지 되물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난처함에 동정 어린 웃음을 지을 것이다.” (세르, 2016, p. 83) ### 2장: 상자 (Boxes) 2장 '상자'는 소리, 청각, 그리고 언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들리는 것'의 세 가지 종류를 탐구합니다. 첫째는 몸 안에서 발생하는 '소음(noise)'입니다. 에피다우로스(Epidaurus)의 치유 극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세레스는 환자가 '병든 몸이 내는 소리를 들어야' 치유된다고 말하며, 내부 기관의 미묘한 속삭임을 '질병(illness)'으로 인지하는 경험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내부의 소음은 '점차 정보로 해결되어 건강한 침묵과 언어로 귀결된다'고 설명합니다. > “When a body will not remain silent, what voice do we hear? neither voice, nor language; cœnæsthesia emits and receives thousands of messages: comfort, pleasure, pain, sickness, relief, tension, release – noises whispered or wailing. Æsculapius quietens these messages, and slowly erases them. We are healed better by leaving noise behind than by diving into language.” (Serres, 2016, p. 85) > > 몸이 침묵을 거부할 때, 우리는 어떤 목소리를 듣는가? 목소리도, 언어도 아닌, 공감각이 수천 개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안락함, 기쁨, 고통, 병, 안도, 긴장, 해방 — 속삭이거나 울부짖는 소리들. 아스클레피오스는 이 메시지들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서서히 지워나간다. 우리는 언어 속으로 잠기는 것보다 소음을 떠남으로써 더 깊이 치유된다. 둘째는 세상에 퍼져 있는 소음입니다. 천둥, 바람, 파도 소리 등 자연 현상의 소음은 '내이와 외이의 정교하게 복잡한 상자'를 통해 정보로 변환되지만, 인간은 '몸 주변에 똑같이 정교한 상자들, 즉 벽, 도시, 집, 수도원의 독방'을 건설하여 이 소음을 차단하기도 합니다. 세레스는 이러한 집들이 '경화(hardness)에서 연화(softness)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공간'이며, '세상을 색색깔의 그림으로 바꾸고, 풍경을 태피스트리로, 도시를 추상적인 구성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자는 '외부의 혹독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는 집단(collective)이 만들어내는 소음입니다. 세르는 에피다우로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관광객 무리를 묘사하며, 이들이 '언어의 껍질에 싸여' '자신들의 집단적 소음'에 갇혀 있음을 비판합니다. 이 집단 소음은 '스테레오타입, 고집, 비극적인 운율, 정치적 분석, 사회 과학' 등으로 변형되지만, 결국은 '다른 소음, 즉 폐기물'이 됩니다. 세레스는 '집단은 오직 자신들의 소음만을 믿는다 “The collective only believes in its own noise.” (Serres, 2016, p. 86)'고 말하며, 언어와 사회가 만들어내는 폐쇄적인 순환을 비판합니다. 그는 이러한 집단적 소음이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knowledge)'을 방해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언어에 중독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감각마저 잃어버렸으니, 데이터에 중독될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최첨단 지식'은 나머지를 빠르게 평가절하하며, 고통과 굴종을 야기한다고 지적합니다. > “We no longer live addicted to speech; having lost our senses, now we are going to lose language too. We will be addicted to data, naturally. not data that comes from the world, or from language, but encoded data. to know is to inform oneself. information is becoming our primary and universal addiction.” (Serres, 2016, p. 104) > > 우리는 더 이상 말에 중독되어 살지 않는다. 감각을 잃어버린 우리는 이제 언어마저 잃게 될 것이다. 대신 우리는 자연스럽게 ‘데이터’에 중독될 것이다. 그러나 그 데이터는 세계나 언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부호화된 데이터일 것이다. 아는 것은 곧 스스로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며, 정보는 이제 우리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중독이 되어가고 있다. --- (104) 앞서 언급한 지적 활동은 마치 마약 복용과 같다. 정기적으로 ‘정보 주사’를 맞지 않으면 세상과의 접속을 잃게 될 것이다. 최신 발표는 이전의 모든 발표를 구식으로 만든다. 이것이 마약 복용의 법칙이다. 다음 주사만이 중요하다. 정보도, 마약 주사도 그것을 가졌을 때 행복을 주지 않지만, 없을 때는 비참하게 만든다. 과학은 더 이상 우리를 최악의 악—경쟁, 모방, 시기, 증오, 전쟁—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악화시키고 격화시키는 형태로 등장한다. 최첨단 지식은 다른 모든 것을 순식간에 평가절하한다. 그 최전선은 깊게 베어 상처를 주고, 고통을 가하며, 예속시킨다. 지식은 준다. 빠르고, 풍부하게. 데이터의 형태로, 그것은 ‘주어진 것’이 된다. 지식은 말한다. 빠르고, 풍부하게. 코드의 형태로, 그것은 언어를 대체한다. 그것은 ‘주어진 것’을 대체하고, 곧 언어가 된다. 그것은 주고, 말한다. 승인하고, 판결하며, 예속시킨다. 집정관(praetor)은 퇴장한다. 신탁(oracle)이 등장한다. 집정관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 가장 시작에 신탁이 있다. 그리고 신탁이 퇴장하면, 학자가 등장한다. 학자는 차례로 이렇게 말한다. _Do, dico, addico_—나는 행하고, 말하고, 판결한다. 나는 지식에 취해 있다. --- 세레스는 이러한 소음과 언어의 지배에 대항하는 '침묵(silence)'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는 에피다우로스에 '치유의 중심에 있는 침묵, 정보로부터 멀리 떨어진 침묵'을 찾아왔다고 말하며, '우리가 '과학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침묵은 '감각의 서식지(habitat)'이자 '둥지(nest)'이며, 이를 통해 사물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장의 중요한 서사적 장치 중 하나는 오르페우스(Orpheus) 신화의 재해석입니다. 오르페우스는 리라(lyre) 음악으로 괴물 케르베로스(Cerberus)를 평화롭게 만들고, 지옥의 딱딱한 것들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는 '목소리-여성, 단어-여성'인 에우리디케(Eurydice)를 '몸'으로 변환하려 시도합니다. 오르페우스의 음악은 에우리디케에게 살을 입히고, '언어가 살이 되고(The word is made flesh)' '딱딱한 것을 부드럽게 만들며(hardens what is soft)' 생명을 부여하는 창조의 과정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에우리디케를 완전한 육체로 데려오지 못하고 그녀는 '즉각적인 내파(instantaneous involution)'를 겪으며 '개념'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가장 쉬운 것은 철학'이며 '사물 대신 단어를, 여성이나 짐승 대신 고유 명사를 인용하는 것'이라는 비판과 연결됩니다. 창조는 '세상 자체로 돌파'하려 하지만, '가장 마지막 순간에 언제나 무너지는 어머니의 행위'입니다. 세르는 '상자(box)'라는 은유를 통해 이러한 변환의 공간을 설명합니다. '몸은 상자처럼, 또는 일련의 상자들처럼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며, '외부로부터의 에너지가 정보로, 심지어 의미로 변환되는 과정'이 이 상자들 안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감각은 이러한 '블랙박스(black box)'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안에서 '부드러움의 딱딱함과 딱딱함의 부드러움'이 교환됩니다. '우리는 상자를 만들기 위해 듣고, 듣기 위해 공간을 건설한다'. 이러한 '포획된 수용(“captive reception.” (Serres, 2016, p. 140))'은 자기-전송(self-transmission)의 형태로 작동하며, 피부에 새겨진 문신처럼 '유동적인 망'을 형성합니다. 몸은 거대한 '고무된 피부의 조각상(taut sculpture or statue of skin)'이 되어 소리를 듣고 반향하는 '공명 상자(resonance chamber)'가 됩니다. 이 '몸-상자(body-box)'는 우리의 청각, 균형 감각, 그리고 심지어 춤과 같은 자세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 “The body stands and walks through the space of messages, orients itself within noise and meaning, amidst rhythms and rumblings.” (Serres, 2016, p. 141) > “Sound is transmitted here in non-linear fashion, travelling from hardest to softest; here, at each stage, it submits to loops, circuits or feedback. The box receives the captive energy, organizes the repetition anticipated by the prefix, it traps noise, sound and message, makes them circulate quickly, brings them to rest, makes them vibrate in themselves for themselves, and through these circular movements transforms transmission into reception, resolving the contradiction that besets hearing.” (Serres, 2016, p. 143) 이 장은 지식, 언어, 감각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딱딱함(hardness)'과 '부드러움(softness)'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을 통해 탐색하며, 전자가 에너지, 물리적 세계, 물리적 경험을 나타내고 후자가 정보, 언어, 추상화를 나타냅니다. 세레스는 '역사는 현실에서 언어로, 사물에서 기호로, 에너지에서 정보로 옮겨간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딱딱함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혼합(mingling)'의 과정을 통해 딱딱함이 부드러움으로 '연화(softening)'되는 것을 설명하며, 이는 '필터링(filtering)'과 '전환(transformation)'의 과정입니다. 이 전환은 '과학 없이는 이해될 수 없지만', 결국 '몸이 그것을 관리하고, 유기체가 그것을 살고, 살아있는 몸이 그것으로 인해 살아남는다'. 2장은 이러한 '상자들 속의 상자들' 구조가 사회적, 개인적, 감각적 수준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거대한 문장으로 응축하여 제시하며, 소음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복잡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 3장: 테이블(Tables 3장은 주로 맛과 냄새, 그리고 이들이 지식과 존재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며, 언어와 추상적 사유가 감각적 경험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비판합니다. **동물 정신(Animal Spirits)** 세레스는 1947년산 이켐(Yquem) 와인 한 병에 대한 경험을 통해 맛의 중요성을 논합니다. 그는 "첫 번째 입"(말하는 입)이 언어와 담론의 지배를 받으며 맛과 냄새를 마비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언어와 웅변은 미뢰를 "마취"시키고, 가장 활기찬 대화조차도 "향기로운 꽃, 흙의 냄새, 사향과 살 냄새에 둔감"하게 만듭니다. 반면 "두 번째 입"(맛보는 입)은 와인을 통해 깨어나며 진정한 "지혜"(sapience)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지혜는 인간이 말하는 존재(homo loquens)가 되기 전, 맛을 음미하는 존재(homo sapiens, 'savouing animals' 즉 맛을 즐기는 동물)였음을 상기시킵니다. > “We were too quick to forget that homo sapiens refers to those who react to sapidity, appreciate it and seek it out, those for whom the sense of taste matters – savouring animals – before referring to judgement, intelligence or wisdom, before referring to talking man. The rise of the golden mouth at the expense of the tasting mouth. but hidden within a dead language, we find this confession of the first about the dead mouth: namely that wisdom comes after taste, cannot arise without it, but has forgotten this.” (Serres, 2016, p. 155) > > 우리는 _호모 사피엔스_ 가 판단, 지성, 혹은 지혜를 의미하기 전에, 말하는 인간을 지칭하기 전에, 먼저 ‘맛에 반응하고, 그것을 즐기며, 찾아 나서는 존재’—즉, 미각을 중시하는 ‘맛보는 동물’을 뜻한다는 사실을 너무 빨리 잊어버렸다. 미각을 지닌 입이 점차 ‘황금의 입’(웅변과 언설)을 위해 희생되었다. 그러나 죽은 언어 속에는, 죽은 입에 대한 살아 있는 고백이 숨어 있다. 곧, 지혜는 맛 이후에 온다는 것, 맛 없이는 결코 발생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고백이다. 와인을 맛보는 행위는 단순한 음주가 아닌, 감각의 재활성화, 즉 "미학(aesthetics)이 마취(anesthesia)를 치료하는" 과정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주어진 것(the given)이 수용자에게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까지 부여하는 "선물"이라는 세레스의 견해를 보여줍니다. 플라톤의 향연(Symposium)과 최후의 만찬(Last Supper)을 대조하며, 세레스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친구들이 말만 할 뿐 진정으로 맛을 경험하지 못하는 "조각상들의 저녁 식사, 돌의 향연"을 벌였다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언어와 개념이 감각의 풍부함과 개별성을 어떻게 희석시키는지를 암시합니다. 냄새와 맛은 "불안정한 물결 무늬(Unstable moire, mingled body.” (Serres, 2016, p. 157))"와 같아서 언어처럼 축적되거나 통합되지 않고 순간적으로 존재하며 사라지는 특성을 가집니다. 특히 후각은 "우리의 감각 중 챔피언"이며, 미뢰와 후각이 결합될 때 "풍요의 뿔(cornucopia)"에서 "공작의 꼬리"처럼 다양한 향이 펼쳐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미묘한 감각적 경험이 지닌 무한한 복합성을 강조합니다. > “A cornucopia emerges from nose and palate, odours and tastes spilling forth, the peacock’s tail is displayed. > Here is the map. > Here is the bottle from which this fan emerges.” (Serres, 2016, p. 157) **기억(Memory)** 세레스는 기억을 물, 공기, 심지어 와인의 "기질"(temperament)과 연관시키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는 감각적 경험의 고유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이켐 와인병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토양, 기후, 포도 재배자의 땀 등 "세상의 모든 단단한 것이 부드러움으로 변형되는" 시간을 담고 있는 "감각적인 폭탄(sensorial bomb)"으로 묘사됩니다. “a sensorial bomb, crowned by a cloudlike plume above the neck of the bottle.” (Serres, 2016, p. 183) 와인 한 병에는 "사피엔스(sapience)와 사가시티(sagacity)를 통해 20년 동안 모아야 할 것"이 한순간에 담겨 있으며, 이는 "수천 가지를 말하며 감각에서 정보로, 그리고 영혼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레스는 기억을 "시간 자체가 기억을 담고 있다"는 식으로 흐르는 물의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는 라이브러리(library)나 데이터 뱅크(data bank)에 저장된 고정된 정보와는 달리,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기억은 유동적이고 복합적이며, 때로는 "수천 가지의 망각에서 솟아나는 기억(a memory arising from multiple oblivions)"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조각상(Statue)** 콩디악(Condillac)의 조각상 비유는 3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콩디악은 조각상에 감각을 하나씩 부여하여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하려 했지만, 세레스는 이를 "원시적이고 불경스러운 무능함(crude and profane ineptitude)"으로 조롱합니다. > “and would gardeners or expert perfumers from grasse not laugh till they cried at the excessive sophistication of the experiment, where the automaton is concerned, and at its crude and profane ineptitude when dealing with flowers?” (Serres, 2016, p. 190) 그에게 있어서 "장미의 이름은 향기가 없다(The name of the rose has no fragrance)"는 말은 언어와 개념이 감각 경험의 풍부함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실제 장미의 향기는 "수많은 색조와 다양한 종류의 공간적 폭발(spatial explosion of the different hues and the speckled palette of different varieties)"과 같아서, 단순한 개념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복합성을 가집니다 > Did the statue find itself submerged in the delicate fragrance of great Maiden’s blush, the most beautiful of all speckled roses, Petite lisette, Queen of hearts, Princesse de Venosa, the carmo-sine or Jacqueminot? Not to mention the much-neglected dog-rose and other varieties. Bathed in this new peacock’s tail to the point of drunkenness, could or would even the most expert sense of smell want to fall back on analysis? > > 그 조각상은 장미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얼룩장미 ‘그레이트 메이든스 블러시’(Great Maiden’s Blush), ‘쁘띠트 리제트’(Petite Lisette), ‘퀸 오브 하츠’(Queen of Hearts), ‘프린세스 드 베노사’(Princesse de Venosa), ‘카르모신’(Carmosine) 혹은 ‘자크미노’(Jacqueminot)의 섬세한 향기에 파묻혀 있었을까?. 세레스는 언어와 논리가 감각의 복합성을 파괴하고, 인간을 "돌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존재로 만들며 "끔찍한 첫 지배를 위한 투쟁"의 주체로 만든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이러한 교육 방식이 "추함으로 가득 찬 세상"을 낳는다고 경고하며, 진정한 지혜는 언어가 아닌 "살아있는 육체의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합니다. **죽음(Death)** 세레스는 경험주의(empiricism)의 "무덤"을 이야기하며, 그의 책이 "엠피리시즘을 위한 기념물(a memorial to empiricism)"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언어와 추상적 사유가 감각 경험을 억압하고 소외시켜왔다는 역사적 과정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혜"를 몸이 제공하는 감각적 지각, 즉 "은총(grace)"으로 보고, 이는 대가 없이 주어지는 선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반면 언어는 지각을 "교환의 논리(logic of the gift)"와 "대가"의 틀 안에 가두고, 본질적으로 "무료"인 것을 "비용"으로 환원시키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나드유를 통한 예수의 몸에 대한 도유는 이러한 감각적 경험의 중요성을 나타내며, 이는 "말이 육신이 된" 사건과 상응하지만, 동시에 언어가 감각을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탄생(Birth)** 탄생은 단순히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감각적 경험을 통해 자아가 형성되는 끊임없는 재탄생의 과정으로 묘사됩니다. 좋은 와인을 맛보는 행위는 "새로운 입"을 탄생시키고, 몸의 각 부분이 감각을 통해 존재감을 얻는 "국소적 코기토(localized cogito)"를 만듭니다. 세레스는 몸을 "할리퀸의 망토(harlequin’s cape)"와 같은 "누더기"로 묘사하는데, 이는 다양한 감각적 경험의 파편들이 서툴게 꿰매어지고 덧대어져 만들어진 혼합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몸의 구성은 "촉각의 토폴로지(topology of tailoring)"와 "소리의 기하학(geometry of sounds)"이 결합된 형태이며, 감각적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팽창하고 존재하며 행동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 “The hideous little monster drawn by physiologists when they map nerve endings according to the relative space they occupy in the brain – fat lips, enormous tongue, small torso, boxing gloves for fingers, a hare’s ears – quite literally erects its receptors. Studded with tumescences, the homunculus takes out its antennae and deploys them. a template for those masks or models which trace cœnæsthesia, which depict in detail the feeling body, and which we, people of the word, so rarely understand. The topological structure of sensation corresponds, piece for piece and harlequin’s cape for matching tunic, to the rainbow-coloured, blended, striped, ocellated, almost checkerboard space of the sites of our brain. We need no trepan to see this patterned carpet, the world of the senses is enough, along with our variegated skin – or our mouth, erect when faced with a wine fanning out like a peacock’s tail. a bird with the same constellation as a brain.” (Serres, 2016, p. 232) > > 생리학자들이 뇌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공간에 따라 신경 말단을 지도화할 때 그려내는 흉측한 작은 괴물—두툼한 입술, 거대한 혀, 작은 몸통, 권투 글러브 같은 손가락, 토끼의 귀—은 말 그대로 자신의 수용기를 세운다. 부풀어 오른 돌기들로 뒤덮인 호문쿨루스는 더듬이를 뽑아내 펼쳐 놓는다. 이는 공감각(共感覺, cœnæsthesia)의 궤적을 따라, 감각하는 몸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가면이나 모형의 원형이며, 언어의 사람들인 우리는 이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감각의 위상학적 구조는, 어릿광대의 망토와 그것에 맞춘 튜닉처럼, 우리 뇌의 영역들이 빚어내는 무지갯빛, 뒤섞인 줄무늬, 눈점무늬, 거의 바둑판 같은 공간과 조각 하나하나가 정확히 대응한다. 이를 보기 위해 두개골을 절개할 필요는 없다. 감각의 세계와 우리의 얼룩덜룩한 피부—혹은 공작 꼬리처럼 부채꼴로 펼쳐지는 와인을 마주했을 때의, 곤두선 우리의 입—만으로 충분하다. 뇌와 같은 별자리를 지닌 한 마리 새. 그는 생리학자들이 신경 말단을 매핑하여 그리는 "추악한 작은 호문쿨루스(hideous little monster)"를 언급하며, 이것이 곧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따라 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이라고 설명합니다. 궁극적으로 감각의 "기쁨(joy)"은 몸을 춤추게 하고, 고정된 개념이나 언어적 틀에 갇히지 않는 "변화무쌍한 존재"로 만듭니다. > “language is threefold dominant: administrations rule through the performative dimension of the word; the media dominate through its seductive dimension; the sciences enjoy mastery through its truth dimension. trismegistic language produces an abstract dominant class, drunk on codes: legislative, computerized, rigorous, thrice efficient, and in this manner producing a whole world.” (Serres, 2016, p. 234) > > 언어는 세 겹으로 지배력을 행사한다. 행정은 언어의 수행적(performatve) 차원을 통해 통치하고, 미디어는 언어의 매혹적 차원을 통해 지배하며, 과학은 언어의 진리 차원을 통해 권위를 누린다. 이 세 겹의 힘을 지닌 ‘트리스메기스틱(trismegistic) 언어’는 입법적이고, 전산화되어 있으며, 엄격하고, 세 배로 효율적인 코드에 취한 추상적 지배 계급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하여 하나의 온전한 세계를 생산한다. "성 안토니우스는 승리하여 굴복한 인류를 ‘말’에 굴복시키고, 추상의 빵과 물로 이루어진 식단을 강요하며, 행정적이고 정보화된, 기술적 도시라는 무형의 사막 속에서 오직 언어의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만 주어진 것(the given)에 접근하도록 허락한다. 그는 명령하고, 매혹하며, 진실을 말한다. 그는 세상을 재프로그래밍하려 한다. 우리는 어느새 거대한 집단적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한가운데서 살고 있다.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몸과 감각이 필요하다. 몸을 결여한 언어나 인공지능은 필연적으로 하위 문화를 생산한다. 이러한 강제된 추상을 통해, 감각적인 것은 다시금 돌아오지만, 그것은 완고하고 지옥 같은 그림자로서, 이미지와 언어 속에 나타나되 낭비적인 경멸에 의해 흉하게 변형되어 있다. (234). ### 4장 방문(Visit)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저서 『다섯 가지 감각: 뒤섞인 몸의 철학』(The Five Senses: A Philosophy of Mingled Bodies)에서 4장 "방문(Visit)"은 감각 경험의 복합성과 장소 및 이동의 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장은 단순한 시각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방문'하거나 '가서 보는 것'이라는 행위를 통해 장소, 풍경, 그리고 매핑(mapping)의 본질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을 제시합니다. 세르는 전통적인 감각의 분리된 접근 방식을 거부하며, 감각들이 뒤섞이고 얽혀 있는 "혼합된 몸들의 철학"(Philosophy of Mixed Bodies)을 주장합니다. 이 장은 여러 하위 섹션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은 "방문"이라는 주제에 대한 독특한 측면을 조명합니다: #### (지역적) 풍경 (Local Landscape) 세르는 풍경을 "누더기-풍경"(tatter-landscape) 혹은 "조각보"(patchwork)로 묘사하며, 이는 몸이 조각조각 구성되는 방식과 유사하게 세계가 짜여진 방식에 비유됩니다. 그는 "pagus"(칸톤, 지역, 땅의 구획)라는 라틴어 단어와 "page"(페이지)를 연결시키며, 작가가 자신의 글을 통해 땅을 갈듯이 페이지를 경작한다고 설명합니다. 농부나 정원사가 수천 년에 걸쳐 풍경을 구성해 온 것처럼, 작가 또한 페이지를 통해 자신만의 '성소'를 구축합니다. 풍경은 예측 불가능한 "우발적인 사고(singular accidents or events)"와 "상황(circumstances)"에 의해 형성되며, 이는 지역적인 특성을 부여합니다. 세르는 이러한 다양한, 뒤섞인, 이교도적인 풍경과 언어 및 과학에 의해 강제된 획일적인 단일 문화 풍경을 대조합니다. 그는 "풍경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알려고 하지 말고, 대신 정원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배워라"(do not seek to know how to look at a landscape – compose a garden instead)고 역설하며, 모든 것을 단일한 법칙에 종속시키는 "미학적 오류"(aesthetic error)를 비판합니다. 풍경은 "페이지들의 페이지"(page of pages)를 표현하며, 항상 "열려 있고, 펼쳐져 있고, 자유로우며, 읽을 수 있고, 드러나 있고, 명백하다"(always open, displayed, free, readable, stretched out, unfolded, uncovered, manifest and obvious)고 말합니다. 또한 세르는 겸손(humility)이 땅의 얼굴과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우리가 보통 간과하는 풍경의 깊은 층위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감각을 통해 포도밭, 사과나무, 흐르는 물과 같은 자연 풍경을 다시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시야를 확장하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섬세한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그는 어부의 지역적인 경험적 지식과 과학적·행정적 매핑을 대비하며, 후자가 전자의 미묘한 차이를 지워버린다고 비판합니다. 피부와 풍경은 모두 뒤섞인 감각의 흔적들로 가득 찬 "얼룩덜룩한 몸"(mottled body)을 이룹니다. #### (전 지구적) 이동 (Global Displacement) 세르는 인간이 경험하는 세 가지 유형의 이동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출생지를 떠나는 것, 둘째는 국가적 중심지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셋째는 "공간에서 기호로, 시골에서 이미지로, 언어에서 코드로, 문화에서 과학으로"(from space to signs, from the countryside to the image, from languages to codes and from cultures to science)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동은 우리를 "정박되지 않은"(unmoored) 상태로 만들고 안정적인 자아나 장소의 감각을 상실하게 합니다. 새로운 인류는 "도식, 메시지, 숫자"(schemas, messages and numbers)의 디지털 세계에 거주하며, "실제"(real)와의 물리적 관계를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세르는 이러한 이동이 또한 몸의 "하이브리드화"(hybridization)를 가져온다고 봅니다. 여행자는 다양한 물과 문화에 적응하며 "뮬라토(mulatto), 쿼드룬(quadroon), 하이브리드(hybrid), 교배종(cross-bred), 옥토룬(octoroon)"처럼 뒤섞인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이는 지역적인 것과 전 지구적인 것의 상호 연결성을 보여주며, 새로운 존재론적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 방법과 방랑 (Method and Rambling: The Global and the Local) 이 섹션은 "방법"(Method)의 직선적이고 효율적인 카르테시안적 경로와 "방랑"(rambling)의 오디세이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구불구불한 경로를 대비합니다. "방랑"은 고대 사냥 용어인 'courir à randon'(사냥감을 몰아세우다)에서 유래하며, 우연성, 예상치 못한 전환, 다양한 경로를 포함합니다. 이는 미리 정해진 선택에서 벗어나는 "탈출"(exodus)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율리시스(Ulysses)는 이러한 "방랑"과 "창의적인 지식"(inventive knowledge)을 구현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질서 밖의 "이상한 끌개"(strange attractors)와 일시적인 안정성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합니다. 세르는 좁은 바다의 복잡성과 넓은 바다의 단순성을 비유로 들어, 다양한 문제 해결 방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폴리트로픽, 폴리메카니즘적 방랑"(polytropic, polymechanistic ramble)은 오늘날의 전자 칩이나 범용 곡선과 유사하게, 실제 세계의 복잡성을 탐험하는 방식을 나타냅니다. 세르는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혼자 힘으로 해내라"(Débrouillez-vous, literally to unscramble yourself)는 사고방식이 기계와 인간을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쥘 베른(Jules Verne)이 우주선의 궤적을 직선으로 묘사한 것이 "기념비적인 오류"(memorable, canonical error)라고 지적하며, 현실의 복잡한 비선형적 경로와 대조합니다. 지리학은 "지구가 스스로를 쓰는 것"(the writing of the earth about itself)으로 정의되며, 이는 침식과 상호적인 흔적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건축은 단단한 재료로 장소를 구축하는 행위이며, 이는 또한 장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 공동체의 "완전한 생태적 지위"(complete niche)는 정원과 여정을 결합하고, 세계의 모든 강물("mingled waters of all the rivers of the world")처럼 뒤섞인 존재를 형성합니다. 이 섹션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전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을 잇는 "매듭"(knot)의 복합성을 탐구합니다. #### 상황 (Circumstances) "상황"은 주변 환경, 이탈, 예측 불가능한 우연, 그리고 안정적인 실체나 시스템을 둘러싼 "세 번째 왕관"(third crown)으로 정의됩니다. 이는 행위, 인물, 사물의 존재를 한정하고 형성합니다. 전통적인 논리나 문법이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반면, 상황은 부수적인 요소들, 즉 시간, 장소, 조건, 결과, 감정 등을 포괄합니다. 존재(existence)는 균형("equilibrium")으로부터의 "이탈"(deviation)을 표현하는 반면, 그리스의 에피스테메(episteme)는 균형 자체를 추구합니다. 사고는 이러한 "원리가 아직 명확히 진술되지 않은 곳"(place where this principle has not yet been enunciated)을 방랑하며 이루어집니다. 소설 속 쥘리앵(Julien)과 드 레날 부인(Madame de Rênal)의 손길 접촉 사례는 우연적 접촉(contingency)이 어떻게 상황(circumstance)을 통해 합의(convention)로 발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상황적 구름"(circumstantial cloud)은 결정론적 시스템을 교란시키고 새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교환자"(exchanger)는 전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이 통과를 협상하는 지점이며, 이러한 지점들은 경로와 공간의 확산을 야기합니다. 매듭은 접촉의 위상학적 설명이며, 지역적인 것과 전 지구적인 것을 연결합니다. "감각적인 것"(sensible)은 의미의 끊임없는 변화 가능성을 나타내며, 요동치고, 흩뿌려지고, 춤추는 특성을 가집니다. #### 뒤섞인 장소 (Mingled Place) 1. **역사와 지리의 초월적인 장소로서의 뒤섞임**: 세르는 "뒤섞인 장소"를 "줄무늬가 있고, 밝게 채색되어 있으며, 다마스크 무늬의 뒤섞인 색깔의 모아레(moiré)이자 정교하게 역사화된 풍경으로, 역사와 지리의 초월적인 장소"(a moiré and precisely historiated landscape of blended colours – striped, brightly-coloured, damask – called the transcendental place of history, made up of bits and pieces, localities)로 묘사합니다. 이는 단편적이고 지역적인 조각들로 구성된 장소이며, 칸트적 초월론 아래에 놓여 언어로 가려져 왔던 본질적인 경험주의의 기반을 이룹니다. 나아가, 이 장소는 "지역적 '파구스'(pagus)가 지중해 우주에 제국을 펼치는 『토대서』(Book of Foundations)의 역사의 초월적 장소"이자 "감각들의 특수성이 뒤섞이는 상식의 유연한 평원, 즉 문신을 하고 반점이 있는 피부에서 만져지고 볼 수 있는 곳"인 지리의 초월적 장소입니다. 즉, 이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우리의 몸과 감각을 통해 직접 경험하고 이해하는 장소입니다. 2. **다차원적 다양성과 비균질성**: "뒤섞인 장소"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닌, "다양하고, 차별화되고, 가변적인 모아레(moiré)로서 수천 가지 형태와 색상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조 속에서 유희하며, 얼룩으로 박혀 있고, 길고 짧으며, 열리고, 닫히고, 부서진 곡선들로 교차되어 있다"(a diverse, differentiated, variable moiré on which a thousand shapes and colours play, in every imaginable relief; studded with splotches, criss-crossed by long and short, open, closed and broken curves)고 설명됩니다. 또한 "우물과 계곡으로 움푹 패여 있고, 산길과 돌출부로 주름져 있으며, 이러한 다차원적 다양성에 속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이 장소가 예측 불가능한 사건과 상황(singular accidents or events and circumstances)에 의해 형성되는 지형의 복잡성과 깊이를 보여줍니다. 이는 통일된 질서나 단일한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의 실제적 혼합 상태를 반영합니다. 3. **국지적(local)과 전 지구적(global)의 상호작용**: 세르는 "전 지구적인 것은 부풀려진 국지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The global appears to us as an inflated local)고 주장하며, 우리가 보편적이고 전 지구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 국지적인 특성들이 확장되거나 반복된 결과임을 시사합니다. "뒤섞인 장소"는 "국지성들의 푸딩(a pudding of localities), 너덜너덜한 조각보(a tatter), 다마스크 무늬의 바둑판 무늬"(a pudding of localities, a tatter, a damask chequer-board)와 같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법칙이나 통일된 시스템이 아니라, 상세하고 상황적인 지역 페이지들의 잡다한 집합으로 구성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전 지구적인 현상조차도 본질적으로 지역적인 조건과 우발성에 기반을 둔다는 세르의 유기적인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4. **감각적 경험과 몸의 표현**: "뒤섞인 장소"는 감각적 경험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는 "감각들의 특수성이 뒤섞이는 상식의 유연한 평원"(a supple plain of common sense, the underpinning of the senses where their peculiarities mingle)으로 묘사되며, "사물의 상태, 즉 직물, 베일,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거나 암시된다"(revealed or implied in the state of things, canvases, veils, varieties). 특히 촉각은 "피부에 문신처럼 새겨지고 반점처럼 박힌 상태에서 보여지고 만져질 수 있다"(can be seen, touched on the tattooed, ocellated skin). 이 장소는 "많은 이음새로 함께 꿰매어진 그 자체의 몸, 즉 기워지고 해진 누더기"(a body in its own right stitched together with many seams, a patched, thread-bare tatter)와 같습니다. 이는 몸 자체가 뒤섞인 장소이며, 감각들이 분리될 수 없는 "압축된 능력"(compact capacity)을 통해 세계와 혼합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작가의 "줄무늬가 있고, 선이 그어져 있고, 채색된 피부"(striped, banded, tinted skin)는 그가 경작하는 페이지이자 세계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뒤섞인 장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5. **경험주의의 토대**: 이러한 "뒤섞인 장소"는 "경험주의 제국(empire of empiricism)의 토대"(the underpinning for an empire of empiricism)를 형성합니다. 이는 추상적이고 균질한 합리주의적 공간과는 대조되는, 실제적이고 복잡다단한 경험의 세계입니다. 세르는 칸트적 초월론이 이러한 뒤섞인 장소를 언어로 덮어버렸다고 비판하며, 이는 "합리성이 자신의 행운을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모아레(moiré)의 특정 확장된 경우"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지식과 존재의 진정한 기반이 언어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복잡하고 혼합된 감각적 경험에 있음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6. **공간과 시간의 결합**: 세르는 4장의 마지막을 "몸과 마음의 혼인 이후, 이제 우리는 공간과 시간의 혼인을 축하할 것이다"(after the nuptials of body and mind, we shall now celebrate that of space and time)라는 문장으로 맺습니다. "뒤섞인 장소"는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혼합을 상징하며, 정적이고 분리된 존재가 아닌, 유동적이고 상호작용하는 존재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방문이라는 행위는 단순한 시각적 인식이 아니라, 이 뒤섞인 장소에 대한 몸의 적극적인 개입과 감각적 뒤섞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르의 "뒤섞인 장소"는 세계를 파편화된 조각들의 모음이 아니라, 감각과 경험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혼합되는 유기적인 총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차원에서 균질성과 단일성을 거부하고, 대신 다양성, 유동성, 그리고 혼합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 그의 철학적 프로젝트를 공간적으로 구현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제5장 "기쁨(Joy)" 이전 장들에서 전개된 감각과 언어, 몸과 세계 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논의를 종합하고, 그 궁극적인 목적지인 존재의 충만함과 조화로운 통합을 탐색합니다. 이 장은 서구 철학의 이원론적 사고를 비판하고 감각적 경험의 본질적 가치를 재확인하려는 세르의 철학적 여정의 정점을 이룹니다. 앞선 장들, 특히 제3장 "테이블(Tables)"에서 언어와 추상적 사유가 감각을 마비시키고 세계와의 단절을 야기하는 "마취"(anaesthesia) 현상을 비판했다면, "기쁨" 장은 이러한 마비로부터 회복되어 몸이 세계와 뒤섞이며 느끼는 "미학적"(aesthetic) 경험과 존재론적 충만감을 찬양합니다. 5장 "기쁨(Joy)"의 핵심 개념 및 심층 분석 이 장은 기쁨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몸이 세계와 혼합되고, 감각들이 조화롭게 통합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총체적인 존재 상태로 제시합니다. 이는 언어가 지배하는 추상적인 사유로부터 벗어나 몸의 본연의 활력을 되찾는 과정입니다. 1. **감각적 경험과 몸의 활력**: 세르는 기쁨을 극단적인 감각 경험, 예를 들어 뜨거움과 차가움의 대비 속에서 몸이 대상화되고 "영혼"을 찾아내는 과정과 연결합니다. 그는 몸이 단순히 수동적인 수용체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몸은 단순한 수동적 수용체처럼 행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철학은 몸을 최근의 혐오스러운 현현에 맞서 세상의 주어진 것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몸은 운동하고, 훈련하며,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다. 움직임을 사랑하고, 찾아다니며, 활동적이 되는 것을 기뻐하고, 뛰고, 달리거나 춤을 추며, 즉각적으로 그리고 언어 없이, 열정적인 에너지를 통해 스스로를 안다. 근육이 불타고 숨이 가쁠 때, 즉 탈진의 한계에서 그 존재를 발견한다." (The body is far from behaving as a simple passive receptor. philosophy should not offer it to the given of the world in its recent repulsive manifestation, sitting or slumped over, apathetic or ugly. it exercises, trains, it can’t help itself. it loves movement, goes looking for it, rejoices on becoming active, jumps, runs or dances, only knows itself, immediately and without language, in and through its passionate energy. it discovers its existence when its muscles are on fire, when it is out of breath – at the limits of exhaustion.) .     ◦ **호흡(Breathing)**: 호흡은 "아기의 첫 숨소리 이후, 즉 첫 한숨 이후, 몸이 호흡을 즐기기 시작하는 최초의 쾌락"이며, 신성한 "루아흐"(ruagh, 호흡, 바람, 영혼의 숨결)의 기원과 연결됩니다 .     ◦ **점프와 트램폴린(Jumping and Trampoline)**: 점프는 "호흡 다음으로 두 번째 신체적 쾌락"이며, 트램폴린에서의 도약은 중력을 초월하는 "천사 같은 기적"(seraphic miracle)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몸이 언어적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게 비행하는 듯한 황홀경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처럼 세르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무게 없는 비행" 을 경험하고, 이는 곧 천사와 같은 존재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 **달리기(Running)**: 달리기는 점프의 일반화된 형태로, 달리는 사람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한 "비행"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투사됩니다. 이는 "헤르메스, 달리는 자"의 메시지, 즉 "행동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do, without being)는 역설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     ◦ **운반(Porterage)**: 타인을 등에 업고 산을 오르내리는 경험은 육체적 고통을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근육과 관절의 "침묵의 영역"을 발견하게 하며, 몸을 "건축 구조물," "움직이는 석공술," "배"로 인식하게 합니다 . 이는 "나는 짊어진다, 고로 존재한다"(I carry therefore I am)는 코기토를 제시하며, 몸의 존재론적 기반을 재정립합니다 .     ◦ **수영(Swimming)과 춤(Dancing)**: 수영은 발의 책임을 전신으로 확장시켜 몸 전체를 "발"로 만듭니다. 이는 출생 이전의 상태, 즉 양수 속에서의 유영을 상기시키는 "세례"와 같습니다 . 중력을 감소시키거나 무효화하는 수영과 춤은 몸을 축 대칭에서 해방시켜 "구형 대칭"의 중심, 즉 영혼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몸이 유동적이고 구형의 공간에서 존재할 때 "덜 합리적이고 더 감정적이며 부드러워진다" 고 언급하며, 지성과 감각의 통합을 암시합니다. 2. **영혼(Soul)과 주체성(Subjectivity)의 재개념화**: 세르는 영혼을 데카르트의 송과선에 위치시키는 대신, 몸이 안팎을 통과하는 특정 "지점"(point)으로 정의하며, 이곳에서 '나'(I)의 존재가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영혼은 '나'가 결정되는 지점에 있다." . 이 지점은 고통스러운 탄생 경험을 통해 발견되며, 움직임과 균형을 통해 몸 안팎으로 확장될 수 있는 역동적인 극(pole)입니다. 스포츠 경기의 집단적 황홀경 속에서 선수들은 "언어가 없는 모나드"처럼 서로를 미리 알고 예측하며 행동하는데, 이는 언어를 초월한 직관적 공동 존재를 의미합니다 . 이처럼 영혼은 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몸의 활동과 뒤섞임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확장되는 유동적인 존재입니다. 3. **음악과 조화(Music and Harmony)**: 음악은 "모든 예술의 총화"이자 "의미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됩니다. 오르페우스는 소음을 음악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야수들을 길들이고, 존재들 간의 조화를 창조합니다 . 음악은 "언어 아래, 모든 언어 아래, 보편적으로, 의미 이전에 존재하며, 그 전제 조건이자 물리적 매체이다.". 이는 언어의 분열적 특성을 넘어 감각적 세계의 본질적인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힘을 상징합니다. 음악은 또한 "딱딱한 것을 부드럽게 만들고", "혼돈을 보편성으로 덮어버린다". 즉, 음악은 세계의 불협화음을 조화롭게 만들고, 의미를 창조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작가는 음악이 없이는 시, 건축, 조각, 산문 그 어떤 것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역설합니다 . 4. **언어에 대한 비판과 회복(Critique of Language and Redemption)**: 세르는 언어와 추상적 지식이 감각적 경험을 마비시키고 은폐한다고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특히 "지각"(perception)이라는 프랑스어 단어가 "징수"나 "과세"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는 "자유롭고, 그저 제공되는 것"인 "은총"(grace)에 대한 세금 부과와 같다고 꼬집습니다 . 그러나 이 장에서는 언어의 완전한 거부가 아닌, 언어가 감각을 통해 "정화"되고 "회복"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언어는 만남의 감정 속에서 탄생하고, 말은 예상치 못할 때 태어난다." (language is born in the emotion of the encounter, words are born when you don’t expect them.). 작가는 책을 쓰는 행위조차도 "딱딱한 것들을 마주하는" 감각적 경험과 세계와의 열린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합니다. 나아가, 과학과 컴퓨터의 발전으로 "기억과 언어가 해방된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펼치는데, 이는 기계적 기억이 인간의 두뇌를 해방시켜 "직접적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5. **은총(Grace)과 주어지는 것(the Given)**: "은총"은 세르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이는 세계가 우리에게 조건 없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the given)을 의미합니다. 언어는 이 "주어지는 것"을 '포착'하고 '교환'의 논리로 포섭하려 하지만, "은총은 선물(gift)의 논리에서 벗어나며, 성과(performance)의 시간에서 예외이다." (grace escapes the logic of the gift, it is an exception to the time of performance.). 태양, 천둥, 바람, 대지의 촉감 등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준다는 점에서 "무상의 선물"(gratuitous given)입니다. 이 "은총으로 가득 찬" 몸은 언어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아름다움과 감각적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 이는 인식론적, 경제적 교환 관계에 종속되지 않는 세계의 본질적 풍요로움과 몸의 원초적 수용성을 나타냅니다. 6. **문화와 삶의 예술(Culture and the Art of Life)**: 세르는 프랑스 문화를 "가장 가볍고, 매력적이며, 덜 추상적이고, 덜 계산적인"문화로 묘사하며, 이는 "순간적인 것의 미학," "일시적인 형태의 아름다움," 그리고 "기억을 제쳐두고 현재에 몰두하는 지혜로운 삶"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학문적 대화(dialogue)의 경직성을 비판하며, 프랑스 살롱에서 이루어진 여성 중심의 "대화"(conversation)를 이상적인 지식 교환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대화는 지식 체계를 다른 지식 체계 안으로 또는 그 위에 적용하는 일련의 활동이며, 그들의 변환의 집합이다." (conversation is the set of applications of a body of knowledge into or onto another, the set of their conversions.). 이는 학문적 분과 간의 장벽을 허물고, 끊임없이 혼합하고 변형하는 지식의 유동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문화는 "가벼움"과 "자유" 를 추구하며, 삶의 본질적인 기쁨을 포착합니다. 7. **재탄생과 부활(Rebirth and Resurrection)**: 이 장의 마지막은 "부활"(resurrection) 또는 "재탄생"(rebirth)이라는 주제로 귀결됩니다. 언어의 지배와 죽음을 통한 감각의 상실 이후, 몸은 다시금 세계의 감각적 풍요로움과 재결합하며 살아납니다. 이는 죽은 언어와 지식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사유와 존재 방식이 탄생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기쁨"은 이러한 새로운 삶의 방식, 즉 몸이 감각을 통해 세계와 뒤섞이고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예고하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요컨대, 미셸 세르의 "기쁨" 장은 추상적 언어와 합리적 사유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상실되었던 감각적 경험의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본질을 재조명합니다. 그는 호흡, 점프, 달리기, 수영, 춤, 운반 등 몸의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개인이 세계와 깊이 뒤섞이고 존재론적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탐색합니다. 이러한 육체적 활동은 몸을 "영혼"과 연결하고, 언어를 초월하는 "음악"과 같은 조화를 창조하며, 궁극적으로는 "은총"처럼 대가 없이 주어지는 세계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재인식하게 합니다. 세르는 프랑스 문화의 "가벼움"과 "대화"의 미학을 통해 이러한 감각적 지혜가 어떻게 삶의 본질적인 기쁨과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지 보여주며, 이는 언어와 지식의 죽음 속에서도 새로운 존재 방식이 탄생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합니다. ### Related ```dataview LIST FROM [[@serres_five_2016]] and -"Plans" and -"resour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