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usan Stewar (2002). *갈망에 대하여 (On Longing)*. : Sanbooks. > [!INFO] > Type:: [[book]] > Title:: 갈망에 대하여 (On Longing) > Author(s): [[Susan Stewart]] > Year:: NaN > Tags:: > DOI:: > Citekey:: stewar_longing_2002 > ZoteroURI:: [Open in Zotero: 갈망에 대하여 (On Longing)](zotero://select/items/@stewar_longing_2002) > ReviewedDate:: [[2023-05-24]] ## Citation ```latex [@stewar_longing_2002] ``` ## Related ```dataview TABLE file.aliases AS "Title" FROM [[@stewar_longing_2002]] and -"Plans" and -"resources" ``` ## Summary 미니어처와 거대한 것에 대한 문화적 의미를 분석한 후 그 두 가지 형태를 몸에 대한 프릭, 몬스터, 거인 등등으로 가져옴. - ## Annotation > 어떤 대상에 대한 서술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서술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어떤 대상’의 창안 자체는 서로 어떤 관계인가? 또한, 의미 작용 방식으로서의 과장은 무엇을 과장하는 것인가? (7) > 이 에세이에서는 서사narrative를 욕망의 구조, 즉 대상 object을 창안하면서도 거리를 둠으로써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을 끊임없이 새겨 넣는 구조로 본다. (7) **갈망의 세가지 의미** 1. 간절한 욕망 18세기 들어 의미가 분화됨 > 욕망하는 서사에서 힘의 작용은 언제나 미래future-과제past로 향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8) 2. 임신 중 여성이 느끼는 공상 섞인 열망 기원이라는 상상 속 지점 (시골/농경, 자연과 문화 간 경계, 세포분열이라는 생물학적 현실과 상징계의 시작이라는 문화적 ‘현실’사이의 간극이 임식을 통해 접합된다.) 3. 소유물 또는 부속물, 이 의미가 주체의 생성이라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중에서도 글쓴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의미 있는 대상들을 생성함으로써 중요한 타자를 생성하고 낳기까지 할 수 있는 서사의 능력” (Stewart, 2002, p. 11) > 실내의 환경이 내면의 자아를 대체하고 대신하듯, 소비문화에서는 그러한 부가성이 그것으로 인해 생성되는 주체를 대신한다. (11) > 그러므로 수많은 서사가 죽은 것을 산 것으로 만들기를 꿈꾼다는 데서 결국 모든 서사의 욕망은 실현 가능한 세계, '작동하는' 세계를 발명해 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모든 서사는 미니어처이며, 모든 책은 소우주다. 그러한 형식들은 항상 어떤 전체나 모형을 완결, 즉 종결짓고자 하기 때문이다. 11-12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은 종결을 갈망하지 않는 혹은 미루는 일기에서의 서사의 부재와 완결을 죽음에 대한 갈망으로 볼 수 있는가 이다.== > “이 책에서는 미니어처를 부르주아 주체 내면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은유로 간주한다” (Stewart, 2002, p. 12) 그리고 반대로 거대한 존재는 국가나 공적 영역의 집단적 삶의 추상적 권위에 대한 은유 → 이러한 안과 밖,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큰 것과 작은 것, 초월성과 부분성의 문제 등등에서 **몸은 우리가 규모를 인식하는 척도다.** “서사를 살아 숨 쉬게 하고 사실상 실재에 대한 환상을 창조해 내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려는**—욕망이다” (Stewart, 2002, p. 12) > “만일 권위가 시장, 대학 국가 같은 영역에 부여된다면, 대체로 과장, 환상, 허구성 같은 것들은 반권위적이거나 비권위적인 영역—여성, 어린이, 광인, 노인의 영역—안에 어울려 자리를 잡아야 한다” (Stewart, 2002, p. 14) ## 프롤로그 > “도시에서 걷는다는 것은 바로 부분적인 시야/부분적인 의식의 분리를 경험하는 일이다. 이러한 걷기의 서사성은 우리가 알면서도 경험할 수는 없는 동시성에 의해 감추어진다. 길모퉁이를 돌 때쯤 우리의 대상은 다음 모퉁이 근처에서 사라진다. 거리는 각 방면에서 우리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이를 경계할 때마다 가능성의 폭은 좁아진다.” (Stewart, 2002, p. 19) 풍경들 사이에서 갈라지는 시점 → 실행과 변형의 문제 > “알레고리allegory에서 독자의 시각은 텍스트의 시각보다 넓다. 독자는 초과와 과잉의 지점까지 꿈을 꾼다 [...] “가령 천로 역정 Pilgrim's Progress의 결말부분을 보면 저자존 번연은 독자가 종결에 다디르지 못함으로써 반복이 일어나고 세계에 그 서사를 더 깊이 새겨 넣게 된다고 보았다. 반복이야말로 동일하게 순환되는 역사의 패턴들에 대한 공표라는 것이다” (Stewart, 2002, p. 23) > “역사의 순환성과 종결에 대한 전체적 시각에 대한 이러한 확신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산업 혁명이 도래하고 새로운 형태의 리얼리즘과 신'심리주의'문학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이언 와트의 설명대로,[@watt_rise_1957, 14] 18세기초에는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에 두 가지 변회가 일어났다. 첫째, 르네상스 시대 이후 집단적 경험을 개인적경험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지속되어왔다. 둘째, 이러한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생활과 개인별 경험의 특정성이 실재의근거지가 됐다.” (Stewart, 2002, p. 24) ==이언 와트의 글과 [[Walter Benjamin|벤야민]]의 [[Erfahrung]]과의 관계도 연결하면 흥미롭게다. 이후의 글도 보면 대략 이 갈라지는 시점을 18세기로 바라보는 것 같다== **기호 자체를 향한 변화** <- 정치경제의 발달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음. >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흐름은 곧 물질로서의 기호에서부터 의미화 과정 자체로의 변화다. 모더니즘적 언어 사용의 재귀성은 언어 너머 바깥에 놓인 세계라는 물질적 존재보다도 세계를 만들어내는 언어의 능력에 대해 주의를환기시킨다 이 능력이 가리켜 보여주는 것은 기호의 자의성 그리고 동시에 언어가 만들어낸 일시적 세계다” (Stewart, 2002, p. 26) 경제 발전의 경우 상품생산의 체계만큼 언어를 닮은 것은 없으며 (마르크스) 사회적이고 전적으로 자의적이며 스스로 온갖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언어, 상품생산) 상품교환 = 기호학적 현상,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 = 의미화 또는 상징화 그리고 화폐의 등장으로 돈은 전혀 다른 것을 상징하는 존재로 바뀜 > “만일 상품생산과 허구적 형식들의 조직 간의 관계를 전체 기호 체계의 일부로 본다면, 장르의 변화와 여타 생산양식의 변화간에 동형관계isomorphism를 상정해 볼 수 있다.” (Stewart, 2002, p. 28) > “장르는 삶, 즉 현실 속 이중지향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특징들의 구체적인 조합에 따라 정의할 수 있으며, ‘전체적인’ 예술 ‘형태'에 해당하는 각 유형이 구사하는 이 이중지향은바깥에서 안으로 그리고 안에서 바깥으로 동시에 향한다. 첫번째 사례에서 관건은 사회적 사실로서의 작품의 실제 지위다.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의 정의, 이용 수단들과 공연 양식, 상정된 관객층 그리고 기존 관객 및 저자와의 관계, 사회제도나 습속 및 기타 이데올로기적 영역과의 연관성 등을 포함한다. 간단히 말히자면, 전반적인 '상황적' 정의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Vološnov, Marxism and the Philosophy of Langauge,p. 184. 글쓴이에게 인쇄된 텍스트는 영화라는 것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이미 영화적이다. 텍스트의 시간 및 공간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 시간 및 공간으로부터 명백히 분리되어 있는 구경꾼이 되는 독자 = 스크린 개념 소설에서의 세 가지 시간줄의 중첩 (미셸 뷔토르 [[Michel Butor]]) 흐름들 간 속도의 차이 1. 새로운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 2. 그 사건을 쓰는 시간 3. 그 이야기를 읽는 시간 전개되는 시간과 읽는 시간이 겹쳐지는 순간 "삽입된 대화나 편지를 읽을 때" (34) ^[작가의 시간, 독자의 시간, 이야기 전개시간, 이야기하기라는 행위의 시간, 텍스트의 재현 시간 간의 차이에 관한 논의는 Dolezel, "A Scheme Of Narrative Time,” pp. 209~217 참조.] > “여기서 우리는 자기 충족적 기계, 모든 부수적인 기호를 생성하는 기호 그리고 창조자를 지울 뿐 아니라 더 의미심장하게는 창조자의 노동마저 지워 없앨 수 있는, 프랑켄슈타인과 생각하는 컴퓨터 같은 것들을 지향하는 역사적 경향이 나날이 뚜렷해지는 추세임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의 대중영화가 공포 영화와 특수효과 영화로 갈리진 것은 바로이러한 재귀적 의미화 현상을 나타낸다” (Stewart, 2002, p. 37)” 이에 더 나아가 글쓴이는 스탠리 아로노위치가 영화가 후기 자본주의와 동시 발생한 예술형식이라고 주장한 것을 가져온다. 즉 욕망을 상품으로서 재생산하고, 지시체 즉 기의를 삭제하며, 오직 의미화 행위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 주된 의미 스스로에 대한 재생산. 몸의 사라짐 (예시 컨트리 음악에서 블루그래스로의 이동, 춤의 속도와 몸에 맞춘 컨트리 음악과 몸의 움직임을 흉내 내는 대신 그 움직임을 재생산해 내는 기계의 움직임을 흉내 내는 블루그래스, [Orange Blossom Special](https://www.youtube.com/watch?v=cPSiK5dCTCU) 이러한 문자 이후 장르들에서 보는 사람의 시간 체계는 무너지고, 작가마저 지워 없앤 기계의 시간 체계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 “일상과 그 일상 속의 언어들 사람들 시간성이 수행하는 기능은 적어도 두 가지다. 첫째,양적으로 역사를 지탱히며, 둘째, 질적으로 진정성을 지탱한다” (Stewart, 2002, p. 43) 일상적 삶의 시간성은 아이러니가 특징: 진행형이고 비가역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도 반복과 예측 가능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상성]], 일상생활의 보수성은 관습, 반복 그리고 예측 가능한 사회적 현실 유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서 기인한다[@lefebvre_everyday_2005] [@lefebvre_critique_2014] “순환 움직임 혹은 주기적 리듬의 반복은 기계적 행위의 반복과는 다르다. 전자가 자체의 고유한 시간성 속에서 비축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인 데 비해 후자는 연속적이든 비연속적이든 선형적인 시간성 속에서 축적적으로 이루어지는과정이다”. > “허구를 통해 우리는 반복이 프레임 재설정의 문제이며, 그러한 반복에서 ‘동일성'이 생겨나듯 차이는 양방향으로 드러남을 알수있다. 그러므로 반복은 원본에 대해 이차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반복은 원본을 보충하거나 대체한다기보다는 원본을 창조해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허구에는 관습적으로 ‘리얼리즘, ‘부조리’, 환상', ‘정밀' 같은 꼬리표가 붙지만 허구는 주체를 반영한다기보다 주체를 창조해낸다. 모든 허구는 살아낸 직접적 맥락의 권위와 그 맥락에서 비롯되는 경험의 ‘진정성을 부인함으로써 일상이라는 상상 속 순수를 오염시킨다” (Stewart, 2002, p. 55) > “노스탤지어는 대상 없는 슬픔, 갈망을 만들어내는 슬픔이다. 그런데 그러한 갈망은 진짜가 아닐 수밖에 없다. 살아낸 경험에 참여하지 않고, 그 경험의 앞과 뒤에 머물기 때문이다. 여느 다른 서사 형식과 마찬가지로 노스탤지어 역시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이다” (Stewart, 2002, p. 59)[...] “스탤지어적인 것이 갈구하는 이 욕망의 지점은 사실 부재로, 이것이 바로 욕망을 생성하는 기제다” (Stewart, 2002, p. 59) [...] “노스탤지어적 상상 속에서 실현된 재결합은 서사적 유토피아다. 이 유토피아는 고정되거나 종결되지 못한 속성, 그 부분성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노스탤지어는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Stewart, 2002, p. 59) > “노스탤지어의 지배적 모티프는 자연과 문화 사이의 간극을 지워 없애고, 그럼으로써 모성이라는 벽으로 둘러막힌 도시 안에서 생물학과 상징이 결힙된 유토피아로 회귀하는 것이다” (Stewart, 2002, p. 59-60)” 대표적인 것 ==인류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 > “노스탤지어가 꿈꾸는 것은 지식과 자의식 이전의 순간인데, 이는 노스탤지어적 서사의 자의식안에서만 존속되는 순간이다. 노스탤지어는 모든 반복이 진짜가 아님을 슬퍼하고, 반복을 통해 동일성에 도달할 가능성을 부인하는 반복이다” (Stewart, 2002, p. 60) > “기호가 그 기의를 ‘포착'하지 못하고, 서사가 그 대상과 하나 되지 못히고, 기술 복제의 다양한 장르가 직접 대면식 소통의 시간에 근접하지 못하면, 기원을 향한 자연을 향한 그리고 노스탤지어적 갈망 속에서 작동하는 매개되지 않은 경험을 향한 일반화된 욕망으로 귀결된다.” (Stewart, 2002, p. 60) ## 미니어처 주로 미니어쳐 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음 → 타블루 > “자연에는 미니어처가 없다. 미니어처는 문화적 산물이다. 물리적 세계에 대해 인간의 눈이 일정한 작업을 수행하고 조작하며 특정한 빙식으로 처리하는데서 비롯된 산물인 것이다.” (Stewart, 2002, p. 123) > “입센의 작품뿐 아니라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인형의 집이 재현히고 있는 것은 특정한 형태의 내면성, 즉 주체가 성소(환상)이자 감옥(티자성의 경계 또는 한계, 살아낸 경험이 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으로서 경험하는 내면성이다.” (Stewart, 2002, p. 141) 햄릿 2막 2장 행릿: 덴마크는 감옥이다 로젠크란츠: 그럼이 세상도 그렇습니다. 햄릿: 훌륭한 감옥이지 수없이 많은 감방과 수용소와 지하감옥이 있으니, 덴마크는 그중에서도 최악이네. 로젠크란츠: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폐하. 햄릿: 그렇다면 자네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겠지.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 따로있지 않고,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니까. 내게는 이곳이 감옥이야. 로젠크란츠: 그렇다면 폐하의 야망이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폐하의 마음에는 이 나리가 너무나 비좁은 겁니다. 햄릿: 천만에, 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무한한 우주의 제왕을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일세.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말이야. > “산업화 시대의 노동은 기능보다는 반복이, 전체보다는 부분이 우위를 점하는 것이 특징인 반면, 미니어처는 정반대의 생산양식을 재현한다. 사람의 손이 직접 만드는 생산물은 고유한 진짜다.” (Stewart, 2002, p. 148) 미니어처 = 내면성에 대한 경험 그리고 그 내면을 구성하는 과정 = 축소된 그러므로 조작이 가능한 경험, 오염될 리 없는 길들여지 ㄴ경험, 순수한 몸, 기계의 비유기적인 몸, 반복되는 죽음을 상징 (그러므로 죽음이 아닌) ## 거대한 것: 외면성과 자연, 도시 > “우리가 거대한 존재와 맺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는 풍경과의 관계, 즉 우리를 ‘둘러싼' 자연에 대해 직접 살아내며 맺은 관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Stewart, 2002, p. 155) 공간적인 전체 혹은 시간적인 부분으로서 인지하는 미니어처와 부분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거대한 것, 풍경 → 추상적으로 투사된 몸을 통해 주로 표현됨. 미니어처: 담기는 대상, 사적이고 개인적인 역사의 기원에서 발견 거대한 것: 담는 그릇, 공적인 자연의 역사의 기원에서 발견, 풍경에대한 우리의 언어는 풍경위에 투사된 거대한 몸. ==거인이 지금은 외계인으로 대체된 것은 자연이 우주로 대체된 것과 연관이 있나?== > 미니어처가 우리에게 세계 안에 세계를 포개어보는 유추적 사고방식을 제시하듯, 거대한것 역시 세계 바깥의 세계라는 유추적 사고방식을 제시한다. (162) > 롱키누스의 *숭고함에 대하여* Peri Hupsous에 뿌리를 두고 있는 숭고한 대상에 대한 미적 경험의 특징은 경악과 경이다. ![[Pasted image 20250430150221.png]] 에드먼드 버크가 분석한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the Beautiful (1757) 숭고한 것에 대한 구체화, - 모호성 - 힘 - 궁핍 - 광활함 - 무한성 - (막대한 노동과 노력을 요하는) 어려움 - 장엄함 > 여기서 헨리 무어의 ‘기념비적' 소형 조각상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바버라 로즈의 경험은 안내 책지나 엽서에 재현되어 실린 문화가 오히려 진짜 문화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더 의미있고 매력적이라 느끼는 관광객 입장에서의 경험이다. 실제 문화는 역사와 차이에 의해 오염되기 때문이다. (196) ## 상상 속의 몸 > “몸은 담기는 동시에 담는 역설을 보여주는 존재다.” (Stewart, 2002, p. 221) [...] “몸의 안과 밖에 모두 있는 것(대변, 소변, 침생리혈 등)은 그 모호하고 이상한 지위 탓에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다.” (Stewart, 2002, p. 221) 무엇이 몸이고 무엇이 몸이 아닌가. 구분히 모호한 그 경계는 카니발적 그로테스크의 영역에서 재정의된다. 바흐친 ([[Mikhail Bakhtin]]) 그로테스크한 몸을 무언가가 "되어나는 몸"이라 규정. "이 모든 볼록함과 구멍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몸과 몸 사이 그리고 몸과 세계 사이의 경계에 대한 극복은 바로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상호 교환과 상호 지향이 그 안에 있다." Rabelais and His World [-@bakhtin_rabelais_1984] > “그로테스크한 존재가 벌이는 퍼레이드는 대개 그 과장 된 부분의 고립이자 전시다.” (Stewart, 2002, p. 222) 그로테스크한 몸 = 몸의 내적 요소들에 대한 과장, 즉 '안이 바깥으로 나오도록' 뒤집거나 몸의 외부에 있는 구멍이나 틈을 내보이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다 → 외부와 내부 간의 상호 침투, 섹슈얼리티의 교환, 짐승과 인간 사이의 교환 등도 그로테스크함과 그로 인한 상호 교환 및 무질서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내는 데 동원될 수 있다. 예시1: 여장 남자들 상징적 전복, 바보축제, 트릭스터 (자연과 문화 간 경계의 침범, 짐승이면서 사람, 남성이면서 여성) 위네바고족(북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부족) 트릭스터의 경우 미시시피 강을 방출하여 대지 위에 넘쳐흐르게 한 덕분에 농경이 비로소 가능해짐 (==강물의 땅으로의 침투일까?==) 하지만 이러한 침투 전복은 항구적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 공식적으로 인가된 형태는 참여자들로 하여금 문화적 범주들을 반대편 입장에서 접합시키도록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범주들을 재확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듯 보인다 (226). > “첫째, 카니발의 그로테스크한 몸은 합일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이미지는 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키셔발이라는 민주적 공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시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움직인다.” (Stewart, 2002, p. 277) ## 욕망의 대상 기념품과 수집품 > “수집과 물신주의 간의 경계는 축적과 비밀주의와의 긴장 속에서 분류와 전시로 매개된다” (Stewart, 2002, p. 335) > 미니어처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의미작용의 사슬 속으로 들어온다. 미니어처에 진품이란 없으며, 이미 지워져버린, 너무 늦어버린 이 장면으로부터 사라져버린, 물건 '그 자체'가 있을 뿐이다. [...] 사실, 모든 대상이 그렇듯 미니어처는 자아의 한 가지 버전을 찾아내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러한 특정 대상들이 새로 만들어내는 자아의 여러 특정한 버전을 향할 수밖에 없다. 마로 그 미니어처의 사유화되고 길들여진 세상으로부터, 그 자그마한 진실성으로부터 '진정한' 주체는 생겨나는 것이며, 개인적 소유물에 대한 그 주체의 초월성은 일상의 시간성에 대한 굉장이 연대기적이며 따라서 철저히 단편적인 경험을 대신한다. 미니어처가 제시하는 자이개 혹은 심지어 자위행위나 다름없는 시선 그리고 그것이 거울처럼 되비처 소우주로 추상화하는 과정은 지배력에 대한 환영, 즉 공간 속으로 함몰되는 시간 그리고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이질성에 대한 환영을 선사한다. 반면 거인에 대한 이야기에는 진정한 몸이라는 허구에 동참하며 과잉성, 과도한 의미작용, 동시적 파괴와 창조, 사회적 지위와 통합에 관산 과장 혹은 거짓말과 연결된다. 언어를 상속받듯 거인 역시 상속받는다. 언어와 거인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미니어처가 개인의 창안의 관계를 설정한다면 거인은 집단적인 것의 창안의 관계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