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inema and Brain
## Malabou's Plasticity
[[Clayton Crockett]]의 *Forward* [-@crockett_forward_2010] 에 따르면 Malabou는 세 명의 중요 철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 세명은 그녀의 선생이였던 [[Jacques Derrida|Derrida]]를 포함에서 [[Friedrich Hegel|Hegel]]과 [[Martin Heidegger]]가 있다. 그녀의 방식은 짧게 이야기 해서 [[Friedrich Hegel|Hegel]]의 Plasticity를 [[Martin Heidegger|Heidegger]]의 변화와 [[Jacques Derrida|Derrida]]의 새로운 곳에 도착함 만이 있는 해체에 대한 질문을 통해 The New Wounded [-@malabou_new_2012]에서는 [[Sigmund Freud]]의 심리학을 [[neurology]]와의 연계를 통해 [[new materialism]]을 통한 subjectivity의 plasticity를 연구하는 데 있다. [@crockett_forward_2010]
그녀는 [[Plasticity]]를 [[Friedrich Hegel]]의
[[Alexander R. Galloway]]는 [[Catherine Malabou|Malabou]]의 글에서 symbol과 life 혹은 bio- 사이, 즉 축소될 수 없는 물질적 조건으로 특정지어지는 생명과의 사이에서의 근본적 구별 그리고 그에 따른 dynamism에 대한 관심을 발견한다. 심볼은 The symbol 종합적이며 그 의미에 집중한다, 이러한 종합은 통일성을 가지기 위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특수성을 추상화시킨다. [@galloway_malabous_2017] 철학은 오랫동안 심볼을 삶보다 우선시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편견은 마음이 몸보다 상위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편견은 mind, symbol, ratio, reason, language, abstraction, digitality, the genetic, the atomic, the alphabetical 등등을 표함하며, 만약 철학이 우리에게 상징에 들어가 Logos (ratio)에 들어가 비율이나 이성의 영역에 참여하도록 지시한다면, 반철학적 편견은 우리에게 철학적 편견의 바로 그 용어를 "해체"하라고 지시한다. [[Catherine Malabou|Malabou]]는 이러한 두가지 편견에 모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몸과 마음 사이의 분리와 편견에 문제점을 제기한다.
[[Alexander R. Galloway|Galloway]]에게 있어서 디지털에는 요소 메커니즘 존재한다. 그것은 알파벳 순으로 만들어지는 유전자 또는 원자 요소를 통해서 보편 코드 universal code 또는 보편 기층 ([[substratum]])으로 생산된다. 반대로, 유추성의 수학은 상당히 다르게 작용한다. 유추성 (analogicity)의 수학은 연속성의 기초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항상 글자에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확실히 정신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날로그 수학의 심장과 영혼은 기하학에 있습니다. 유추성은 일종의 기하학적 연속체를 필요로 한다. [[Alexander R. Galloway|Galloway]]는 이러한 연속 continuum에 대해서 질문한 철학자는 매우 적으며 analogical 철학자인 들뢰즈 조차도 연속이라기 보다 편재하는 difference를 통해서 analogicity를 이해한다. ^[[[Alexander R. Galloway|Galloway]]는 [[Catherine Malabou|Malabou]]는 anti-Hegel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Gilles Deleuze|Deleuze]]에게 타협한 것은 아닌가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신체와 몸을 연속성의 plasticity로 가져오는 것일까? 첫번째로 그녀는 [[Friedrich Hegel|Hegel]]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인 축소할 수 없는 다이나믹한 조건으로 확장시키는데 이는 그녀가 주장한 post-modern의 늑대에서 집단으로서의 늑대로 확장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malabou_whos_1996] 말라부에게 있어서:
> “it is Hegel who fully and successfully formulates the modern nature of human subjectivity, and he does this by modeling it upon divine subjectivity.” [@crockett_forward_2010, xii]
그렇다면 그녀의 헤겔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까? *Phenomenology of Spirit* 에서 그녀는 헤겔의 [[dialectic]]을 늘어나고 접히는 방식의 일시성과 주관성의 형태 form으로 읽었다. 그녀의 방식은 전체주의적 활용에 대해 경계하던 포스트모더에서 헤겔을 비판하며 사용된 Supercessionism (대체 신학)과 거리를 둔 것으로 그러한 헤겔에 대한 해석이 그를 오히려 단 하나의 figure로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그녀는 *Who's Afraid of Hegelian Wolves?* 에서 postmodernism 이해에 따른 [[Friedrich Hegel|Hegel]]이, 그 중에서도 다중성을 강조했던 [[Gilles Deleuze|Deleuze]]의 경우를 중심적으로 symbolised 하나의 wolf가 되어 버린 점을 지적한다. [@malabou_whos_1996] 특히 [[Gilles Deleuze|Deleuze]]의 경우 다중적 subjectivity을 그의 연구 전반에 걸처 연구하면서도 [[Friedrich Hegel|Hegel]]을 한마리의 늑대로 축소시켜버렸다고 주장한다. 말라부가 [[Friedrich Hegel|Hegel]]의 Plasticity란 개념을 가져온 것은 [[Friedrich Hegel|Hegel]]의 글 *Phenomenology of Spirit*로, 그녀의 급진적인 방식을 통해 이를 통해 변증법은 늘어나고 접히는 형태의 시간성과 주관성으로 확장되었다. [[Friedrich Hegel|Hegel]]에 의해 인간의 주관성 subjectivity는 신성의 subjectivity와 동일선에 놓이게 되었으며
헤겔은 정통적이지 않은 삼위일체의 해석을 통해 삼위 일체의 지행적 소외로 구성된 각각의 페르소나가 결핍의 징후가 아닌 "새로운 [[Ontology|존재론]]적 시간의 출현"으로 해석된다. 그로 인해 그에게 있어서 묘사의 과정 (the process of representation) (Vorstellung)^[(= Gedanke) idea; (bildlich) picture; (= Einbildung) illusion; (= Vorstellungskraft) imagination] 이란 “seals into one the divine kenosis^[신성포기] and the kenosis of the transcendental subject.” 즉 신성 포기와 자기-타인화가 된다. [@malabou_plasticity_2010, xii] [[Catherine Malabou|Malabou]]는 이러한 신성 소외 (divine alienation)란 시간화의 현시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신은 자신을 한 순간으로 고찰한다"는 사건, 즉 '화신'의 선형적 존재이며, 필요한 순간이지만, 지나가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malabou_future_2000, 119]
하지만 [[Catherine Malabou|Malabou]]가 [[Jacques Derrida|Derrida]]에게서 문제점을 찾았듯이, 이러한 선형적 존재는 새로운 땅에 도착하기만 하고 떠나지 않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래하는 것없이 도착하기만 하고 새로움을 열기만 하는 데리다의 사상적 움직임은 원래 있던 무엇인가를 가져가지도 변화시키지도, 고정된 레퍼런스 포인트에서 벗어나서 목적없이 이 혹은 무작위로 표류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데리다의 작업은 파생이 기원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에 대해 끊임 없이 질문을 제기한다.
> “You mean that derivational drift, even if reversed, even if traversed, even if fallen into catastrophe, does not appear to travel as far as one might think in Derrida’s thinking?” [@malabou_counterpath_2004, 285]
[[Catherine Malabou|Malabou]]의 [[Plasticity]]는 그 모습 혹은 형태의 모습 혹은 한계나 형태에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한계나 대체로의 form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 (mutability)에 대해 이야기한다.
> plasticity = Greek plassein = to mold
그리스 원어에서 plasticity는 주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어엔에는 형태를 주는 것이 만이 아니라 형태를 받는 것 주는 것 그리고 그 형태 자체를 무효화할 수 있는 힘을 포함한다.
> “plasticity can mean the power to annihilate form, as in plastic explosives.” [@malabou_what_2008, 5]
그리고 또한 그녀에게 있어서 이러한 가소성은 철학의 역사 그 자체이며 모든 철학자들은 이 가소성의 장인 이었다. 또한 그녀는 이러한 가소성의 개념을 뇌의 가소성 [[neuroplasticity]]과도 연결시키는 데 여기서 유연성과 가소성의 차이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가소성은 능동적 변화로 수동적 수용은 [[Plasticity|plasticity]]를 유연성 혹은 완성된 가단성 malleability^[망치로 두드리거나 롤러로 압연하거나 프레스 기계로 눌러도 부서지거나 갈라지지 않는 성질. 실용 금속 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질의 하나이며 강철(鋼鐵) 등은 적열(赤熱)상태의 고온에서 가단성이 높아진다.]로만 착각하게 된다. 즉 이러한 가소성은 계층적 연결이 아닌 네트워크로 변화에 저항을 하면서도 변화에 열려있는 성향을 지칭한다. 그녀는 이러한 가소성을 통해 [[Jacques Derrida|Derrida]]의 글쓰기를 능동적인 운동 체계로 대체한다.
[[Catherine Malabou|Malabou]]는 *One Life Only: Biological Resistance, Political Resistance* 에서 두뇌신경학을 이용해 뇌의 plasticity를 이러한 철학의 역사와 연결시키는데, [@malabou_one_2016] 이 지점은 들뢰즈가 스크린은 brain이라고 말한 지점과 연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deleuze_brain_1998] 아마도 다시 한번 들뢰즈의 *The Brain is The Screen*을 읽어봐야할 것 같은데, [[Catherine Malabou|Malabou]]가 [[Plasticity|plasticity]]를 통해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다시 그러한 지점을 [[Sigmund Freud]]의 주관성과 연결시킨 것은 매우 직설적인 연결로 보인다. 그녀에게 있어서 뇌의 가소성은 바로 뇌 스스로의 자율적인 세상을 주조 (mold)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녀가 말한 가소성은 세상의 거울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것은 가능한 세상의 다른 모습이다와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는 [[Gilles Deleuze|Deleuze]]의 반대 성질의 동시성과 닮아 있다. 즉 들뢰즈가 생각하기에 완벽한 카오스는 가시성을 무너뜨리고 그와 동시에, 아마도 [[Catherine Malabou|Malabou]]가 지적한 [[Jacques Derrida|Derrida]]의 끊임 없는 openness처럼 새로움을 열기만 하는 완벽한 무질서를 이루어낸다. 하지만 [[Gilles Deleuze|Deleuze]]가 말하듯 카오스는 그 스스로 규제되고 있는 새로운 구조를 말한다. 그러한 구조는 스스로의 법칙을 통해서 이 전과 다른 [[Catherine Malabou|Malabou]]의 말처럼 거울이 아닌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어 낸다.
[[Gilles Deleuze|Deleuze]]와 같이 [[Catherine Malabou|Malabou]]는 급진적인 변화를 연구한다. 다른 점은 [[Catherine Malabou|Malabou]]의 경우 급진성이 나오는 지점, 눈에 보이게 되는 그 지점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예를 들어 그녀의 후반 작업에서 보이는 [[destructive plasticity]]라는 개념과 그를 통해 사건적 변태 [[metamorphosis]]를 연구하는 것이 있으며, [[Gilles Deleuze|Deleuze]]의 경우 급진성이 나올수 있게 하는 가능성, 필름과 페인팅의 새로운 지도를 만드는 방식들에 대해 집중한다는 점이다. 이는 둘의 관심사가 정반대 지점 material과 symbol라는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Gilles Deleuze|Deleuze]]와 [[Catherine Malabou|Malabou]] 모두 주관성의 temporality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된다. 추상화 되어버린 시간성은 일렬적 자신의 관계망을 만든다. 하나가 생겨나면 하나가 사라진다. 왜 [[Catherine Malabou|Malabou]]은 다중인격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는가? 그것이 오히려 plasticity에 더 어울리는 지점이 아닌가?
## Deleuze's Brain
들뢰즈에게 뇌의 모습은 [[@deleuze_brain_1998|Gilles Deleuze (1998) The Brain Is the Screen]]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다. 하지만 들어가기 전에 들뢰즈가 생각하는 뇌와 시네마의 모습을 다시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사용하는 뇌와 시네마란 의미는 열려 있는 집합체에 가깝다. 여러가지 알갱이들과 미립자들의 집합인 뇌와 스크린은 formation of image를 보여주는 데 이는 뇌와 시네마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적용된다. 즉 시네마는 자극 혹은 연결 그 자체를 의미하는데 이는 분명 다른 필름 이론과 다른 지점이고 들뢰즈의 고유한 시네마에 대한 개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들뢰즈에게 있어서 시네마는 졀대적인 결정, 그 연결, 자극에 의한 연결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들뢰즈는 시네마를 열린 형태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들뢰즈는 그가 처음 시네마에 충격을 받은 것이 시네마가 정신적 삶을 보여줄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deleuze_brain_1998, 48] 이러한 정신적 삶이란 존재에 대한 선택이며 주관성을 이루는 관계들이다. 바로 이 지점이 들뢰즈가 생각하는 시네마의 관점이며 이는 그가 여러가지 주관체들을 범주화 시키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이는 또한 인간 주체에 대한 확장으로도 보이는 데 [[Friedrich Hegel|Hegel]]이 신성함을 인간의 정신과 동등한 선상에 놓으므로서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확장을 이루었듯이 들뢰즈는 이를 인간의 예술적 수행에서도 같은 주관성을 이야기 한다.
다른 예술적 수행, 페인팅, 조각 등등과 다르게 시네마는 음악과 같은 시간적 요소를 품고 있다. 시네마는 지속적으로 자기 움직임으로 이미지를 표현하기 때문에, 뇌의 회로를 추적하고 역추적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끊임 없는 주관성의, 혹은 헤겔을 따라 시간성의, 지속적 재구성이 바로 들뢰즈가 시네마로부터 질문을 얻고자 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Catherine Malabou|Malabou]]는 비록 시네마 혹은 아트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지만 그녀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과 plasticity 개념은 바로 이러한 변형과 변화와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들뢰즈가 아트에서 극도의 변화 새로움으로의 끊기를 확인했듯이, [[[@deleuze_francis_2003]]] [[Catherine Malabou|Malabou]]는 직접적으로 두뇌를 파고들어 재구성된 를 연결하는 지점이다. 말라부가 이야기하는 뇌와 subjectivity처럼 시네마는 끊임 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시네마 또한 갑작스런 Identity의 변화가 생길 수 있는가? 사실 들뢰즈가 철학을 통해 시네마를 읽는 것이 바로 이러한 [[Catherine Malabou|Malabou]]식의 트라우마 혹은 커다란 이벤트를 통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철학과 시네마의 만남이 시네마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 “The encounter between two disciplines doesn't happen when one of them sets about reflecting on the other, but when one realizes that it must resolve for itself and with its own means a problem which is similar to that which is also posed in another." [@deleuze_brain_1998, 49]
들뢰즈는 두 분야 간의 만남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반성하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에서도 제기되는 것과 유사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두 분야 간의 만남은 들뢰즈에게 있어 철학과 아트로 나뉘어지지 않는다. 그가 행하는 수행의 분류는 오히려 그것이 생산하기 위해 이용하는 물질과 이어져 있다. 즉 시네마와 페인팅이 맞딱드리거나 시네마와 음악이 마주하게 되는 것을 포함해 들뢰즈는 철학과 예술이라는 분리를 거부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 들뢰즈의 분류화는 매우 철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 스스로가 분류법 혹은 범주화를 즐기기도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가결의 준비 작업이다. 즉 들뢰즈가 스스로 해결한다는 말의 의미는 철학과 시네마에게 공통적으로 제시된 공간과 시간의 끊임 없는 재구성과 분열에 대해 철학적인 분류법을 통해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개념은 formation으로 분류된 것들은 추상적인 에센스가 아닌 무엇인가에 의한 징후들이다. 시네마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스크린, 즉 이미지의 총합을 만들어 내는 것의 자극 물질이다. 그 자체로 Material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네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징후들을 만들게 한 신호 물질을 찾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시네마의 신호 물질을 빛과 공간으로 구분한다. 빛과 공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얽히며 시네마적 분류를 만들어내는 데, 그럼에도 이러한 공간들의 sign은 시네마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문점이 드는 것은 그가 구별하는 빛의 분류이다. 그는 뉴튼과 괴테식의 빛의 구분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가 페인팅 *Francis Bacon*을 분석할 때도 사용한 구분법으로 그가 사용한 구분법이 시네마에서도 과연 그대로 사용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또한 들뢰즈가 말하는 신호 물질들에 의해 생겨난 징후들은 unity되어 스크린 위에 이미지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바로 들뢰즈는 뇌 = 스크린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스크린과 이미지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들뢰즈는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합이 뇌라고 대답한다.
움직이는 이미지 혹은 시간 관계의 집합이 이미지로 표현되는데 그렇기에 이러한 이미지는 현재의 시간과 관계가 없다. 들뢰즈에게 운동이미지는 사실 간접적인 시간에 대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즉 공간과 빛이 자극이 되어 구성하는 것은 시간이지 운동이 아니며 운동은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용된 하나의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 이러한 시간 관계는 현재 감각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 시간관계는 이미지 안의 duration의 공존으로 완성되어 스크린된 이미지와는 전혀 같지 않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현재와 싱크 되는 지점에서 나온 것 같은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네마에 대한 작업은 퍼포먼스와 텔레비전 작업과 다른 대화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한 관점은 순수하게 스크린 이전에 속에 있다. 그는 말한다. 만약 스크린 상에 표현된 것에 멈춰 있으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자전거이며 산이고 차 혹은 인간이며 공간을 통해 여행하는 것이다. ([Deleuze and McMuhan, 1998, p. 53](zotero://select/library/items/8EPEZCYD)) 하지만 난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시간을 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들뢰즈의 관점을 반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을 subjectivisation로만 읽는 것이 아닌 시간 자체가 여행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시간이 운동하는 것이 아닌가? 공간과 시간이 함께 여행한다고 생각하면 시간과 공간의 카테고리가 나뉘지 않은 시네마가 가능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 Related Notes
[[@malabou_plasticity_2010]]
[[@galloway_malabous_2017]]
[[@crockett_forward_2010]]
## Bibli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