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leuze's Cinematic [[Diagram]]
## Note
### 들뢰즈와 시네마
들뢰즈의 시네마 책은 철학책이다. 그는 철학 내에서의 visibility를 연구하며 인간의 행위와 그를 통한 그가 역사적으로 겪은 파시즘과 독재의 위험에 대해 간접적으로 그 해결 방식을 제시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파시즘과 독재는 질문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방식의 생각은 [[immanence of plane]]안에서 보이는 것가 articulable로 짜여져 있으며 과거와 미래는 동시에 virtuality and possibility로 그 안에 함께 존재한다. [[Michel Foucault]]와 비교했을 때 그의 철학은 간접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행동보다 이론이 먼저 제대로 서 있기를 바랬으며 그의 이론은 언제나 확답을 피하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마도 들뢰즈가
> "The essence of a thing never appears at the outset, but in the middle, in the course of its development, when its strength is assured. 사물의 본질은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고 발전 과정에서 그 힘이 보장되는 중간에서 나타난다." [@deleuze_cinema_1986, 91]
라고 시네마책 첫번째권에서 말했듯이 그에게 있어서 우리가 보고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외각선 혹은 그것의 과정 속에서의 영향 뿐이다. 들뢰즈의 시네마 책은 운동이미지 The Movement-Image와 시간이미지 The Time-Image가 각각 1983과 1985년에 출판되었다. 그리고 영어로는 1986년 1989년 한국어판은 2002년과 2005년시각과 언어에서 출판되었다. 들뢰즈는 시네마에 대한 관심으로 유명했다. 그는 *[[Cahiers du Cinéma]]* 과의 인터뷰를 통해 잡지와의 인연을 시작했고 그의 첫 인터뷰는 1976년 *Three Questions on Six Times Two*란 타이틀로 연재되었다. [@deleuze_three_1995]^[들뢰즈가 리뷰한 것은 [[Jean-Luc Godard]]의 1976년 텔레비전 상영작 Six fois deux 6편으로 [1a](https://www.youtube.com/watch?v=qGie8UoWdRA&ab_channel=BergmanCinema)는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 영화 연구의 경향은 들뢰즈 자신이,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의 펠릭스 과타리와 함께 설정한 경로를 따라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반구조적이고 실제로 반정신분석적인 추진력은 1968년 5월 사건에서 유래한 기표 역습에 의해 지배된 일종의 사고에 대한 일련의 반발 중 하나로, 그 슬로건 중 하나가 "la structure ne marche pas (the structure does not work 구조는 작동하지 않는다)"였다.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on Anti-Oedipus in *Negotiations, 1972- 1990* [[@deleuze_negotiations_1995]]]
들뢰즈가 시네마 분석에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것은 [[André Bazin]]이라고 할 수 있다.
![[202204091645#^94b738]]
생각하는 시네마 (pensée-cinéma)의 경우 Serge Daney, Pascal Bonitzer, and Jean-Louis Schefer들에게서 먼저 생각되었고 프랑스에서 매우 인기있는 방식의 사고 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들뢰즈가 가장 [[Jorge Luis Borges]]의 위대한 세계 지도처럼 들뢰즈의 영화 철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될 만큼 많은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그의 철학적 방향은 언제나 틀에 박히거나 구조화가 되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Difference and Repetition* (1968)에서 말했듯이 그는 철학과 아트의 연계를 수차례 시도하였다.
> "[t]he search for a new means of philosophical expression ... must be pursued today in relation to the renewal of certain other arts, such as the theatre or the cinema. 철학의 새로운 표현의 수단을 찾는 것은 오늘날 반드시 극장이나 영화 같은 제 2의 예술의 재개발과 관련하여 추구되어야 한다." [@deleuze_difference_1994, xxi]
그가 보기에 예술가들은 창의적 "사상가"들이었고 그것은 감독, 작가, 건축가, 음악가, 그리고 철학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deleuze_cinema_1986, ix] 그가 보기에 철학, 예술, 그리고 과학은 각기 다른 것을 새로 만들어 내었다. 아트가 "percepts"과 "affects"를 만들어 내는 것은 주어진 미디엄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이 지점은 철학자도 함께 개념적, 개념을 구성하고, 만들고, 발명하는 과정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진실 truth라는 것은 "solely the creation of thought 오로지 생각의 의한 창조"였다.[@deleuze_what_1994, 54] 하지만 창조물 자체가 창조를 추월할 정도로 강력하게 사고를 가로채고 (hijacks thinking), 그 과정을 지배하고 (governing its processes), 그 지역을 제한하고 (circumscribing its provinces), 그 대상을 결정 (determining its objects)하는 광대한 도덕 체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시네마 Practice의 도덕 체계에 관한 문제는 [[cinematic moral system]]은 분명 생각해봐야할 문제이며 이는 다음번 들뢰즈의 글에서 다루어 보기로 한다. 이는 들뢰즈가 니체 처럼 이러한 "공식적 장르"에서 들어나는 "**[[system of judgment]]** 판결(감정)의 시스템"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장르를 만들어내는 감정과 판결에 대한 가치의 재평가에서 들뢰즈는 예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powers of the false 허위의 힘"을 동원하여, 판단의 목적을 위해 발명되고, 획득되고, 궁극적으로 귀화된 대표 범주들을 대체하기 위해 영화를 바라본다. 그에게 있어서 각각의 아트는 다른 감각의 덩어리 지각의 덩어리 [[the block of sensation]]를 만들어 낸다. 페인팅이 line and color의 감각의 덩어리를 만들듯 시네마는 운동과 시간의 감각의 덩어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바로 시네마가 시간의 덩어리를 만들고 철학 내에서 시간은 언제나 진실이란 관념을 위험 crisis에 빠뜨렸기에 철학은 영화적 이미지에 관여한다. [@deleuze_cinema_1989, 54]
### 철학내의 시간 그리고 이성의 몰락
철학에서 시간은 오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시간을 영원한 Ideas([[Plato]])뿐만 아니라, 고전 철학자들이 "우리는 신 안에서 모든 것을 본다" ([[Malebranche]])고 주장함으로써, 즉, 시간을 측정하거나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신성한 공간으로 줄임으로써 다시 찾은 선호인 공간 ([[Xeno]])에 종속시켰다.
시간은 그것이 선회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주요 지점 또는 경첩인 카르도 [[Cardo]] 로 단축되었지만, 들뢰즈가 주장하듯이, [[References/Authors/Immanuel Kant]]의 *Critique of Pure Reason*의 출현은 엄청난 철학적 반전을 나타냈다. 공간은 이전에 모든 변화가 연속 (succession)으로 측정되는 근거였던 반면, [[Immanuel Kant|칸트]]는 시간을 직관의 선험 형태 [[a priori form of intuition]]로서 정의한다: 시간은 "변하거나 움직이는 모든 것의 형태"이다. 그래서 시간은 더 이상 연장되지 않고 연속, 지속 시간, 그리고 동시성을 그것의 양식으로 포함한다. [@deleuze_kants_1984]
> "time ceases to be originary or derived, to become the pure form of interiority, which hollows us out, which splits us, at the price of a vertigo, an oscillation that constitutes time: the synthesis of time changes direction by constituting it as an insurmountable abstraction. 시간은 더 이상 독창적이거나 파생되지 않고, 순수한 형태의 내면성이 되어 우리를 움푹 패게 하고, 현기증을 일으키며, 시간을 구성하는 진동으로 분열시킨다: 시간의 합성은 극복할 수 없는 추상화로 구성함으로써 방향을 바꾼다." [@deleuze_forward_1996, xii- xiii]
이렇게 보면 들뢰즈에게 변화는 plane의 변화로 보인다. 즉 연결의 변화이며 내면의 생각의 plane을 이러한 시간의 변화 뭉텅이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시간이라는 것은 plane을 언제나 위험에 빠뜨리고 다시 새로운 연결 ([[becoming]])을 통해 Plane을 구성한다. 들뢰즈는 가장 처음 운동 이미지에 대한 논의를 형태의 진화의 윤곽을 그리며 시작한다. 전쟁 전의 [[D. W. Griffith|Griffith]]의 몽타쥬 실험과 프랑스와 독일의 시네마 **그들은 모두 시간을 운동 안에서 혹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취급했다.** 계산할 수 있는 공간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측정한 것인데 그러한 생각의 기본에는 시간을 rational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한 관점이 지대하다. 클래식 헐리우드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액션을 자극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상태가 발생하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들뢰즈에 따르면, 할리우드 영화는 특히 그러한 종합적 총합적 해결에 초점을 맞춘 내러티브를 만드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삶이나 집단의 평형이나 평온함 (equipoise)이 흐트러졌을 때, 행동은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들뢰즈([[Noel Burch]]에 이어)가 말하는 "large form"는 상황+행동의 요구에서+새로운 상황(SAS)으로 이동하는 이야기이며, 이야기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이해, 즉 줄거리의 감정적(심지어 카타르시적) 힘을 관객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차이는 유럽의 코믹을 미국의 영화로 번역산 Old (2021)에서도 두드러지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유가 불명한 것에 대해 detail을 붙여가며 이야기의 흐름을 막는 것은 오히려 이 영화가 시각 혹은 감각에 중점적이라기 보다 논리적 공포에 가담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인다. [[Rational Horror]] [@deleuze_cinema_1986, 141-59]] 이러한 흐름을 봤을 때 들뢰즈가 명칭한 [[movement-image]]는 움직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보다 계산 가능성과 이성적 순서에 더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은 철학의 전통에 따른 단어 선택으로 약간의 오해와 혼동을 가져올 가능성이 존재한다. [[References/Concepts/movement-image]]는 [[sensory-motor schema]]라고^[![[sensory-motor schema#^936471]]] 명명된 이런 우리가 세상과 연결되는 메카니즘을 통해 신경망을 통해 정서적 affectively 이미지유동 [[image flux]]을 내러티브 안에 담아낸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 but this narrative must be understood as having been underwritten by a moral exigency, the promise to make good, common sense. 도덕적 위급상황, 즉 선하고 상식을 만들겠다는 승낙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flaxman_introduction_2000, 5]
표면상, 전쟁과 익명의 폭력, 그리고 야만성은 그 목표와 진행 안에서 변제되었으나 20세기 우리의 모던 "[[theater of cruelty]]"와 함게 지금 현재의 세상은 완벽하고 가장 최선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그러한 믿음은 무너져 내렸다. 공간의 unity는 "[[any-spaces-whatever]]"을 통해서 여러 종류의 파편들로 이루어졌고 "irrational, disconnected, aberrant, schizophrenic spaces"들은 더이상 인과관계를 다르지 않았다. 자칭 '인내심'의 철학자 들뢰즈에게 이미지의 불확정성은 새로운 영화 '교육학'을 유도한다. 이미지는 더이상 밖으로 확대되는 것이 아닌 not extend but intend되었고 이는 바로 들뢰즈가 주장한 The Brain is the Screen을 향하는 그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 예시 중 하나가 [[Alain Resnais]]의 [Muriel (1963)](https://mubi.com/films/muriel-or-the-time-of-return)으로 이 영화는 극도의 트라우마적 기억의 갈라짐에 고통받고 있으며 그러한 고통은 야기되는 행동, 미래들이 그러한 과거에 의해 침투받게 만든다.
![[images.jpg|150]]![[Pasted image 20220403131718.png|150]]
이미지들은 생각으로 채워지고 자의식으로 고통받으며 cliche의 자가 생성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한다.
> Images are suffused by thought, and so the cinema itself begins to suffer from self-consciousness, begins to come into consciousness of its own production of clichés.
그리고 그에 의해 비약분의 noncommensurable 새로운 몽타주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며 시간에 대해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sensory-motor schema]]에게 위임했던 [[movement-image]]가 아닌 새로운 논리의 직접적 시간의 표현이 시작되는 것이다.
> the logic of the sensory-motor schema had relegated the image to an indirect presentation of time, a movement-image, this new logic ushers in the direct presentation of time, a time-image. [...] when it makes motion depend on time (with false moves manifesting temporal relations), the cinematic image becomes a time-image, an autotemporalisation of the image. [@flaxman_introduction_2000, 6]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가 철학적으로 질문해온 [[plane of immanence]]와 시네마가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된다. 사실 이러한 해석을 놓고 봤을 때 들뢰즈의 철학과 시네마의 직접적인 동일선상에서의 연구는 [[time-image]]에서 시작된다고 들린다. 시네마가 정신적인 변화와 이미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며 그러한 여러 변화와 자기 이미지 self reproduction을 통해 시간이미지 자체가 되어가는 것은 바로 또한 다른 모습의 인간 날 것의 인간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네마 상의 직접적인 인간 (시간은 헤겔에 의해서 인간의 identity와 연결된다.) 으로서 그 possibility와 virtual에 의해서 이벤트와 특이성들이 만들어진다. 컨셉이 생각들의 연결이 된 것 처럼 새로운 이미지는 [[subject and object]]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한 생각의 이미지들의 연결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바로 시네마, 들뢰즈가 생각하는 [[time-image]]의 시네마로 연결된다. [[Jean-Luc Nancy]]가 지적했듯 컨셉이란 단어의 의미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시네마틱하게 만든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nancy_deleuze_1996, 110] 그리고 [[Gregory Flaxman]]에게 있어서 그 반대 시네마를 만드는 것은 컨셉을 만드는 것이다에도 적용된다. [@flaxman_introduction_2000, 7] 이러한 새로운 이미지 지도를 그려내기 위해 들뢰즈는 [[signaletic material]]에 대해 쓴다. 그것의 변화 [[References/Concepts/movement-image]]에서부터 [[time-image]]까지와 전후 유럽에 그러한 변화에 대한 인지까지가 그가 시네마 책에서 다룬 중요한 이야기 이다.
### 현재 시간이미지 이후, 시네마와 철학
기술과 자본주의에 의한 [[cliché]]들에 의해 잠식되어진 현재. "linguistic turn" (academia experienced in the 1960s and 1970s) 이후에 이어진 "visual turn" 이런 병든 상황에 대해 들뢰즈 자신은 "이미지의 문명화"라는 문구를 빌려주었다. [@deleuze_cinema_1989, 21] 이미지의 문명화는 이미지를 문명화하고 [[cliché]]로 축소시키는 과정으로 문명과 유사하고, 그에 더해 [[cliché]] 말들로 구성된 "공포된 조직"을 만들고, 그 다음에 "misery"를 만들어내는 노동과 같다. [@deleuze_cinema_1986, 209] 이러한 [[cliché]]화에 마주하기 위해서 철학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 없는 수행이며 변화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 "For many people, philosophy is something which is not 'made', but is pre-existent, ready-made in a prefabricated sky. However, philosophical theory is itself a practice, just as much as its object." [@deleuze_cinema_1989, 280]
이는 [[Grand Theores]]를 거부한 [[David Bordwell]]이나 [[Noël Carroll]]입장과 닮아 있으면서도 그 둘이 다시 근본적이고 universal하며 에센셜한 schematic 가정들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The cognitivist gambit merely replaces Grand Theories (semiotics, psychoanalysis, Althusserian Marxism) with its own quasi Aristotelian, quasi-Kantian schematism. Cognitivism may not produce allegories as obvious as those of its theoretical predecessors, but that should not be taken to mean that it has eluded totalization-only that it is deeply and deceptively unaware of its own habitus. What cognitivism calls science and, better yet, common sense are the accumulation of conventions whose schematization we have yet to significantly interrogate. Fortunately, to a certain degree Deleuze does this for us: above all the Kantian schemata, Deleuze suggests, is the expression of power, the aim of which is to tame visibility. See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 Sean Han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68-70.] 모든것을 아우르는 이론이 아미라 "relate specifically to cinema" [@deleuze_negotiations_1995, 58]을 이야기하고자 한 들뢰즈는 시네마가 결국 무엇을 어떻게 아느냐라는 질문을 시작함과 동시에 "there is always a time, midday-midnight, when we must no longer ask ourselves, 'What is cinema?' but 'What is philosophy?"[@deleuze_cinema_1989, 280]라고 그가 시네마 두번째 권의 마지막에서 쓴 것처럼 시네마에 대한 질문은 철학의 질문으로 함께 merge된다고 본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러한 들뢰즈의 질문이 어느 정도까지 유효한 것인지는 그 이후의 디지털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함께 변화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며 여러 작업들이 주장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으로도 다시 철학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이러한 주장적 작업들은 개념을 시각화 시키는 것에 따른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시네마의 가장 커다란 힘은 "the power of cinema does lie in the capacity to exile us from familiar conceptual terrain, then the system is tantamount to its own formation, a [[becoming]]-system, a "process" (Whitehead) that we undertake each time we return to the cinema. [@flaxman_introduction_2000, 10] 나는 철학과 시네마의 가장 큰 차이점 중에 하나가 바로 medium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질문하지만 질문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서 함께 질문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네마에서 테크놀로지와 그 도구는 질문하기 위한 도구이면서도 질문하는 도구 이기도 하다.
[[Immanuel Kant|칸트]]는 *Analytic of the Sublime*에서 어떤 경험들은 (궁극적으로 혼돈과 맞서는 거대한 것이건 두려운 것이건) 상상을 효과적인 한계로 이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경험들을 이해하고자 하면 상상력이 후퇴한다. 그리고 이러한 후퇴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있는 것, 즉 상상과 이성" 사이의 피열 (dehiscence)이 생겨난다.^[Deleuze's Theory of Sensation: Overcoming the Kantian Duality [@deleuze_deleuze_1996], 33 그리고 들뢰즈와 [[Immanuel Kant|칸트]]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Cinema and the Outside* [[@flaxman_brain_2000]]] [[Immanuel Kant|칸트]]는 이 동요를 faculties 사이의 "진동"에 비유한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감각 sens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감각을 세상이 우리에게 생각을 강요하는 것 "Something in the world forces us to think" 으로 생각한다. [@deleuze_difference_1994, 139] 그러므로 감각은 언제나 어떤식으로든 (습관, rituals, conventions로응축 시키는) 폭력성을 betokens 나타낸다. 그렇다면 트라우마의 가장 강력한 힘은 이러한 응축을 낯설게 만들어 그 연결고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Catherine Malabou|Malabou]] 또한 이러한 피열과 트라우마 자체에 질문한 중요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변화가 있음에 주목했지만 그것을 일으킨 충격이 얼마나 완벽하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fragmentation됬다고 이야기 할 뿐이다. 그에게 변화는 단 하나, 전쟁에 의한 시공간의 이해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타격을 이야기할 뿐이다. 각각의 이유에 의해 나타난 여러가지 형태의 formation을 들뢰즈는 symptom을 읽는 의사처럼 하나의 지도를 그려나간다. 들뢰즈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감각은 아트에 의해서 생긴 감각으로 아트는 관련성의 감옥은 감각에 의해서 해방되고 생각은 감각으로 변화하고 그 자신만의 개념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들뢰즈의 감각은 "purposiveness without purpose" ([[Immanuel Kant|Kant]])
> The Movement-Image, "Camera-consciousness raises itself to a determination which is no longer formal or material, but genetic and differential." [@deleuze_cinema_1986, 85]
==In the same way that Deleuze looks to Francis Bacon in Logique de la sensation (1981), Martin looks to van Gogh to suggest that sensations traverse the membrane separating *Innenvelt* and *Umvelt*, breaking it down until we are left with an in-between (as Deleuze once explained, "the painter is already in the canvas").== [@deleuze_deleuze_1993, 193]
그렇다면 삶과 세상 universe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들뢰즈나 [[Henri Bergson]]에게 그것은 단지 정도 degree의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도는 공간적인 것도 시간적이거나 시간의 간격 (interval)인 것도 아니다. 삶 Life은 단지 순간이 딜레이거나 조각 (cut)가 [[image-flux]]로 소개된 것이다. 인간의 뇌의 세상에 대한 이미지의 추출 extraction은 빼기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들뢰즈의 주관성의 정의에서는 주로 이러한 빼기가 부정적인 함축을 파생시킨다. 뇌의 딜레이는 뇌가 요소들을 정의하고 정리하고 그리고 다른 새로운 운동으로 통합시킬 수 있도록 한다. (필터) 바로 이러한 과정이 [[Henri Bergson]]이 부르는 [[sensory-motor schema]]이다. 이러한 도식적 배치는 recognision (perception), intervalised (affection), transformed (action) 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도식이 바로 헐리우드의 필름에서 [[movement-image]]로 들뢰즈가 찾아낸 것이고 들뢰즈에게는, [[Henri Bergson]]의 Matter and Memory에서 처럼, 인간의 지각을 따라하는 것을 넘어섰을 때서야 metacinema가 될 수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deleuze_cinema_1986, 59]
들뢰즈는 감각이 생각을 움직이는 한 모든 예술은 움직임 movement라고 생각한다. 감각은 움직임을 설명하는 본능 탄력 *via elastica* 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예시를 [[Francis Bacon|Francis Bacon]]에서 그림을 신경 시스템과 함께하는 감각의 "sequence or a series" [@deleuze_deleuze_1993, 189] 문학을 살 수 있는 것과 산 것을 가로지르는 "the movement of [[becoming]]" [[@deleuze_essays_1998]]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시네마의 운동을 다른 아트에서의 운동과 구분하는데 다른 아트들은 스스로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운동하도록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 producing a shock to thought, communicating vibrations to the cortex, touching the nervous and cerebral system directly. Because the cinematographic image itself 'makes' movement, because it makes what the other arts are restricted to demanding (or to saying),it brings together what is essential in the other arts; it inherits it, it is as it were the directions for use of the other images, it converts into potential what was only possibility. [@deleuze_cinema_1989, 156] (시네마는) 사고에 충격을 주고, 피질에 진동을 전달하고, 신경과 뇌 시스템을 직접 만진다. 영화 이미지 자체가 다른 예술에서는 요구하는 (또는 말하는) 것이 제한되었던을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예술에서 필수적인 것을 하나로 모으고, 그것을 계승하고, 그것은 다른 이미지의 사용법이었던 것처럼, 가능성 Possibility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을 가능성 potential로 전환한다.
### [[movement-image]]
들뢰즈에게 [[References/Concepts/movement-image]]는 변화하는 공간이나 공간을 덮는 이미지로 간접적인 시간의 이미지이다. 그가 보기에 스크린은 "관계의 전체 whole of relations"으로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설정한다. 이렇게 프레임이건 [[montage]]건 질적 변화의 세트 "dividual"을 만들며 [[time-image]]의 경우에는 움직이는 프레임과 [[Montage]]에 더 관심을 가지며 실재 공간을 소진시겨 virtual [[becoming]]을 제공한다. [[time-image]]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과의 관계, 관계의 전체와 그 열림을 meta적 밖의 관점에서 상상하기 쉽도록 만든다. [@deleuze_negotiations_1995, 55]
최근 [[References/Concepts/movement-image]]에 대한 연구 중 하나는 [[Frarnçois Zourabichvili]]의 "The Eye of Montage: Dziga Vertov and Bergsonian Materialism"을 통해 머신을 통한 이미지 어셈블라지에 "machine assemblage of movement-images"에대한 논의로 확대한다. [@deleuze_cinema_1986, 3] 들뢰즈는 이 용어를 특히 Vertov와 실험 영화를 위해서 사용했는데 들뢰즈에게 있어서 [[experimental cinema]]란 그 스스로의 운동 조건에 대해서 실험하는 시네마를 지칭했다.
> "All Bergson asks for are movements and the intervals between movements which serve as units and it is also exactly what Dziga Vertov asked for, in his materialist conception of the cinema." [@deleuze_cinema_1986, 61]
### 사인 classification
들뢰즈가 인터뷰 *The Brain is the Screen*에서 밝혔듯이 들뢰즈는 개인적으로도 분류를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그가 다른 [[Cristian Metz]]등과 다른 점은 그가 이미지의 닮은 점을 통해 (이건 옛날 동물을 분류하는 방식과 같은 것 같다) 하지 않고 ontological fomula를 통해서 이를 진행한다는 점이다. 그의 분류는 주로 이미지의 주체성과, matter, ,운동, 그리고 지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는 [[Charles Sanders Peirce]]의 풍푸한 사인의 분류를 이야기하며 그의 분류가 metalanguage로 분류하는 것이 감각과 감지할 수 있음의 집합의 mode라는 지점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들뢰즈는 이미지의 사인이 이루어지는 [[signaletic material]], 즉 "a plastic mass, an a-signifying and a-syntaxic material" [@deleuze_cinema_1989, 29]에 대한 분류로 이루어진다. 들뢰즈는 [[Francis Bacon|Francis Bacon]]에 대해서도 이러한 비슷한 주장을 하는데 그가 보는 [[@grosz_bacon_2012]]의 페인팅은 바로 이러한 [[signaletic material]]을 이용해 새로운 sign of sensation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Francis Bacon|Francis Bacon]]에게 있어서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공포였고 그것은 비명의 새로운 사인을 만들어냄으로서 그 감각을 전달한다.
### 헤겔
[[Michael Hardt]]은 들뢰즈가 헤겔에게서 받은 깊은 영향에 대해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분명 내가 보기에 들뢰즈의 일관적인 분열로 합치되지 않는다. 이것은 인위적인 것으로도 보이며 이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Michael Hardt]]에 대한 글을 읽고 다시 한번 적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