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초 이야기: 중간 감상
[마스토돈](https://pub.eeruwang.me/@eeruwang)에서는 자주 간접적으로 이야기 했었지만 블로그에서 혹은 더 긴 글로는 이렇게 [80초 프로젝트](https://www.youtube.com/@EveryEightySeconds/)에 대해서 쓴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지금 쓴 글은 더 다듬어서 에세이 형식으로 80번까지 올려진 영상들을 편집해서 올릴 생각을 하고 있지만 먼저 블로그에 조금은 날 것의 글을 올려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루왕이라는 이름과 제 이름을 내고 하는 프로젝트와의 갭은 어느정도 온라인에서의 나와 작업을 통해 보여지는 나를 분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글을 쓰면서 개인사를 배제하고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니 약간은 어색하기도 하네요.
영화에 대한 접근은 여러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제가 작업을 통해 알아보고 싶은 것은 예술 영화, 그 중에서도 실험적 작업들의 공간입니다. 영상은 여러 감각, 빛, 소리, 움직임 등등을 사용할 수 있는 매개된 이미지로 복잡하고 다채로운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영상은 현실을 직접적으로 재현한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고 또한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이동시킨다고도 이야기되어 지지만^[이에대해 영상은 대략적으로 창문, 문, 거울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창문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프레임에 대한 이야기는 ([[@friedberg_virtual_2009]])에서 자세히 이야기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제 글에서 더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은 또한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제 프로젝트에 가장 많이 영향을 준 Jonas Mekas ([[Jonas Mekas|요나스 메카스]])에 대한 이야기와 일기란 형식에 대해 이야기한 후, 들뢰즈가 말하는 영화철학의 다이아그램에 대한 제 해석에 이어서 제 작업이 마지막으로 이루고자 하는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 요나스 [[Jonas Mekas|메카스]]의 일기의 신체적 수행성
제가 이 일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 가진 중심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프레임이란 단일 구조 안에서 내러티브로 경정되어 있지 않은 영상은 가능한가? 내러티브는 중심적 뼈대를 만들 뿐만 아니라 시간적 마지막을 결정합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결국 종결을 위한 결말을 위한 질주를 이루며 이를 통해 영상은 시네마 라는 형식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경향을 만들어 냅니다. 저의 질문은 내러티브가 배제될 수 있는가 (전체가 주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이미지들이 이야기 속에서 그 연결이 미리 결정되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들뢰즈의 잠재가 mode of expression을 통해 드러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구조 (공간적 움직임의 구조)를 획득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끝을 가지지 않는 작업은 영상이 시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점 그리고 작업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때문에 실현시키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기란 형식을 통해 나 자신을 영상의 뼈대로 위치시킨다면 제 영상은 저와 함께 virtual로 존재했거나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끝 위에 지속되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일기는 분명 [[Henri Bergson|베르그송]]의 이론과 닮아있을지 모릅니다. “과거의 끊임없이 커져가는 이미지를 현재가 분명히 함축한다는 점에서, 또는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기 뒤에 끌게 되는 언제나 보다 무거운 짐들을 현재가 현재 자신의 끊임없는 질의 변화 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PMVI, 201) 일기는 인생의 지속을 보여주며 존속의 재구성된 파편물 product로 구성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도출될 수 있는데 하루의 마지막에 글로 쓰여지는 일기와 영상으로 촬영되는 일기의 형식에는 베르그송이 말하는 회상-기억과 수축-기억과 대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루의 단막을 회상하며 재구성하는 일반적인 practice의 일기와 다르게 순간순간 쌓아가는 영상의 기록들은 그 단편들이 지속이되어 기억으로 그려질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요나스 메카스의 작업은 저의 일기 프로젝트에서 들뢰즈의 다이아그램과 에이젠슈테인의 공간의 몽타주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요나스 [[Jonas Mekas|메카스]]는 대표적 미국의 아방가르드와 언더그라운드를 이끈 감독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탐구는 시네마에 여러 확장성에 대해 논의되었으며 그 스스로도 여러 예술가를 발굴하고 후원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크게
![[@smith_representation_2016#^a0ba57]]
![[@smith_representation_2016#^36b49e]]
> “The most influential essay from James’ book on this thesis is Michael Renov’s, which connects Mekas’ [[avant-garde]] strategies to documentary practice.” ([[@renov_lost_1992]], 216)
로맨티시즘과 연결한 [[P. Adams Sitney|Sitney]]의 경우 메카스의 일기 필름을 “exercises in Romantic Autobiography” 라고 이야기 한다. 그가 맞게 지적한 일반적인 글쓰기와 영상을 통한 일기는 기본적으로 같은 형태를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위적으로 매우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다. "문학 일기와 달리 영화 일기는 일별 연대기를 따르지 않습니다. 구조적으로는 노트에 더 가깝지만, 영화 제작자의 삶 전체를 개략적으로 또는 단편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기장에 더 가깝고, 어쩌면 일기 날짜가 사라지고 페이지가 뒤섞여 있는 일기장에 더 가깝습니다. 메카스와 [[Andrew Noren]], [[Warren Sonbert]] 같은 젊은 일기 작가들은 자신의 삶을 촬영하고, 구성하고, 수정하는 데 창의적인 에너지를 쏟습니다." ([[@sitney_visionary_2002]], 339)
일기는 그 형식을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메카스의 작업 또한 그 형태가 고정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202301210249#^27434e]]
물론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영국 안으로 혹은 유럽의 환경 내에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인 나라들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은 각각 다른 형태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일기라는 개인 문화를 꽃피워 왔다. 일본, 중국, 그리고 아랍의 국가들에서 개인적 기술의 형태를 띄는 날짜별로 종합되는 기록은 11세기부터 발견된다. 이 중 일본의 경우 중세시기, 10세기 부터 보이고 있는 일기의 흔적과 함께, 계속 이어지는 모던까지의 오랜 일기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keene_seeds_1999]], 8)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기는 글쓰기보다 앞서서 삶의 방식이다.각각의 방식의 삶이 있듯이 각각의 일기의 방식이 있으며 우리는 일기가 전 세계 모든 문화권에서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가정할 수 없다. [[Philippe Lejeune|Lejeune]]가 주장한 것처럼, “일기는 마치 그물 짜기와 같기 때문에 단단한 부분보다 더 많은 빈 공간을 포함하는 더 촘촘하거나 느슨한 링크의 그물“이다. ([[@lejeune_diary_2009]], 153)
일기는 이것은 또한 디지털로 이동된 현재의 디지털 문화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디지털과 소셜미디어로 이어지는 날짜별로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기록하는 일기의 수행은 비록 개인의 공간에서 공공의 가능성을 품은 개인, 그리고 개인과 공공성을 동시에 지닌 형태로 변화했지만 그럼에도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글에서 나타나는 교정이나 수정 혹은 초안과 같은 것들은 숨기는 것과 반대로 일기는 그 모든 것들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Paul Ricoeur]]와 [Gérard Genette](app://obsidian.md/G%C3%A9rard%20Genette) 내러티브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Philippe Lejeune]]은 “Composing a Dairy” ([[@lejeune_composing_2009]]) 에세이에서 일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많은 사람들이 일기를 공책에 적거나 별개의 종이 위에 쓴뒤 모으기도 한다. 이 때 모아진 공책은 환상 속의 내러티브 아이덴티티로 최소한의 단일성을 구성하며, ^[내러티브 아이덴티티에 대한 아이디어는 [[Paul Ricoeur]]가 주장했으며 그의 책 [[@ricoeur_time_1984]]에서 발전시킨 개념이다.] 낱장에 쓰여진 하루에 대한 혹은 인생의 한 부분에 대한 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한 묶음으로 공책 혹은 책이라는 단일성이 구성되는 순간 일기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단일성 속에 지속성과 비지속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제노 Zeno의 파라독스를 반박한 베르그송과 숙고를 시로 표현한 Valéry의 시를 통해 이러한 지속성과 비지속성은 확장될 수 있다. 만약 낱장으로 이어진 공책이 끝났을 경우는 어떨까? 혹은 중간에 갑작스럽게 끊어지는 일기는 어떨까? 이러한 비지속성은 일기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역사적 특성적 연구를 통해 [Lejeune](app://obsidian.md/Philippe%20Lejeune)은 네가지 일기의 기능을 정리한다:
1. 표현 ^[일기의 표현 기능은 다시 표현의 방출 혹은 발산과 표현의 전달 혹은 소통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표현의 발산은 파괴의 충동과 닮아있으며, 무엇을 쓴다는 것은 쓰여진 것과 스스로를 분리하여 스스로를 정화하고 정리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더 극적으로 끌고 갈경우 이러한 기능은 다시 일기 자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두번째 표현의 기능인 소통의 경우 “친애하는 일기에게” 혹은 “친애하는 키티에게”로 시작하는 안나 프랭크의 일기가게예시가 될 수 있다.]
2. 반성
반성의 경우도 두가지 기능으로 세밀화시킬 수 있다. 하나는 스스로를 분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찰하는 것이다. 반성은 자주 표현과 기억의 글쓰기 기능과 연관되며 주로 인생의 위기 혹은 갈림길에 쓰여지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3. 시간의 동결
종이 위에 기억을 쌓아 올리고 삶의 경험을 보관하고 흔적을 축적하여 잊어감을 막는 기능으로 일기의 이러한 기능은 삶 자체에 부족한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기를 멈춘다는 것은 실패와 동일하고 일기를 파괴한다는 것은 완벽한 실패에 해당한다.
4. 글쓰기의 즐거움
누군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또한 그것이 즐겁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꼭 일기쓰기만 그러한 것은 아니며 다른 글쓰기의 형태들도 이러한 즐거움을 대신할 수 있다. 기억이 중요한 기능이 아닐경우 일기를 중지하는 것에 시간의 동결 기능처럼 큰 의미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진정한 일기, 솔찍하다는 의미에서의 일기의 특징을 다섯가지로 정리한다. ([[@lejeune_diary_2009]], 170)
1. 불연속 discontinuous
2. 수 많은 틈 Full of gaps
3. 암시적 allusive
4. 과잉과 반복 Redundant and repetitive
5. 비내러티브 Non-narrative
이러한 기록들은 글쓰는 이의 느낌의 수행이다. 느낌은, as [[Paul Ricoeur]] put it, "Feeling is ...without doubt intentional: it is a feeling of 'something'—the lovable, the hateful, [for instance]. But it is a very strange intentionality which on the one hand designates qualities felt on things, on persons, on the world, and on the other hand manifests and reveals the way in which the self is inwardly affected." In feeling "an intention and an affection coincide in the same experience." ([[@ricoeur_fallible_1986]], 127)
이러한 불연속적이고 비내러티브적인 일기의 수행에 대해 메카스는 그의 작업들이 마치 수많은 노트들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I'll film short notes, from day to day, every day." ([[@mekas_diary_1987]], 190-1)
> 내러티브가 아닌 형식은 훨씬 더 개인적이고 직관적이며 자동화된 종류의 편집이 필요하며, 이는 촬영 중에만 수행할 수 있습니다.
> Nonnarrative forms require a much more personal, intuitive and automatic kind of editing, and this can be done only during the shooting. ([[@mekas_jonas_2020]], 98).
이렇게 촬영 중 수행되는 개인적 이야기는 무엇일까? 메카스가 이야기하는 시네마는 이미 다른 예술 작업들과의 구별과 독특함을 구별할 시기는 지났으며 시네마도 다른 아트 안에서 일치하는 부분들을 통해 이야기 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예술 작업들 속에서의 일기 형태과 비교한다. 일반적 일기를 적기 위해서는 매일 정해진 시간—자주 저녁시간에—그날 하루를 반성하고 생각하게된다. 즉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영상에서는 카메라와 함께 노트를 작성하게된다. 그는 새로운 시네마는 전통적 시네마와 다르게 아티스트와 도구 그리고 그의 소재/재료들과의 직접적 관계들로 이루어지며 그로인해 카메라는 아티스트의 손가락의 연장선이 되며 렌즈는 세번째 눈이된다.^[그의 이러한 질문은 [[Sol Mednick]]이 말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지난 주말 필라델피아 예술대학에서 솔 메드닉이 영화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촉각적인 느낌, 즉 화가나 조각가가 붓이나 칼을 재료에 대고 누르면 불꽃이 튀는 에너지, 즉 매우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붓이나 칼을 통해 기질과 감정을 캔버스나 나무에 완전히 전달할 수 있는 촉각적인 상호작용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습니다." ([[@mekas_movie_2016]], 255)"And I remembered how, just last weekend at the Philadelphia College of Art, Sol Mednick was saying that he felt that one of the things that cinema will probably never have is that tactile feeling, that energy that sparks when a painter or a sculptor presses his brush or knife against his materials—the tactile interaction which produces a very direct relationship and enables him to completely transmit his temperament and his feelings through that brush or that knife into that canvas or that wood." ([[@mekas_movie_2016]], 255)]
그러면서도 영상일기는 쓰여지는 일기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 “When I am filming I am also reflecting.” ([[@mekas_diary_1987]], 191) 메카스가 [[Reminiscences of a Journey to Lithuania]]에 대해 강의한 글에 그가 생각하는 수행으로서 일기 영상에 대한 그의 생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처음에 쓰여진 일기와 영상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고 영상을 통해 실재 현실에 바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전혀 관여할 수 없었으며 모든 것은 기억과 과거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When I am filming, I am also reflecting. I was thinking that I was only reacting to the actual reality. I do not have much control over reality at all, and everything is determined by my memory, my past. ([[@mekas_diary_1987]], 191)
> So that this "direct" filming becomes also a mode of reflection. Same way, I came to realise, that writing a diary is not merely reflecting, looking back to you during the moment of writing, is measured, sorted out, accepted, refused, and re-evaluated by what and how one is at the moment when one writes it all down. "
그러므로 메카스는 영상을 찍는 것 자체가 반영 반추의 한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기는 단지 기억 속에서 뒤돌아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하루를 정리하는 순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 측정되고, 정리되고, 수용되고, 거부되고, 재평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It’s all happening again, and what one writed down is more true to what one is when one writes than to the events and emotions of the day that are past and gone.
그로 인해 가장 커다란 과제가 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카메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바로 그 순간 제가 느끼는 감정을 영상에 반영할 수 있도록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가 되며, 이렇게 만들어지는 일기는 카메라로 촬영된 객관적 기록과는 다르다. 그가 보기에 영상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찍고 있는 사람의 태도, 생각, 그리고 생각들이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과거부터 쌓여온 잠재적인 것들이 영상위에서 현실적인 것이 되는 순간이다.^[나는 여기서 잠재적인 것에 대해 들뢰즈-베르그송의 개념을 따르고 있다. 더 자세한 것은 [[@deleuze_actual_2007]]을 참조해주세요.] 그리고 오랫동안 예술에서 논의 되었던 현실과 자신과의 혼합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 탄생하는 세번째의 무엇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다시 들뢰즈가 문제시했던 변증법적 이성으로의 고착화로 연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나는 내 다른 글에서 논의할 것이며 여기에서는 잠시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러한 메카스의 주장에서, 그리고 그가 카메라를 삼각대에서 해방시켰다는 표현에서 그가 카메라와 신체를 연결시키므로해서 현실과 자신을 혼합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카메라의 움직임 여전히 이론의 변경에 위치하며 그 해석이 관객과 이미지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이용되었다. [[Jonas Mekas|메카스]]의 작업과 글들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또 다른 잠재성을 상기시키며,^[예를 들어서 인지학적으로 해석되는 [[Gregory Currie]]의 [[@currie_image_1995]], 심리학적인 해석의 [[David Bordwell]]의 [[@bordwell_camera_1977]], 자연스러운 유도로서의 연결고리로 파악한 [[Noël Carroll]]의 [[@carroll_philosophy_2008]], [[Tom Gunning]]의 [[@gunning_nothing_2020]] 등등에서도 확인된다. 이를 통해 [[@morgan_lure_2021]]에서도 분석되었듯이 카메라가 표현적 도구로 해석될 때에도 그것은 경험, 인상 혹은 무드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석된다. [[Vivian Sobchack]]의 경우 카메라와 신체를 연결시켰음에도 신체자체를 눈과 연결시켜 "watching through the eyes of another subject, a mobile and lived persepctive that already processes the film’s world for us" ([[@sobchack_address_1992]])로 관객의 신체와 연결시킨다.] 카메라의 움직임을 신체적 표현과, [[Jonas Mekas|메카스]]가 강조했듯이 실재와 아티스트의 관계에서 새로운 다이아그램으로 이끌 잠재된 이미지를 표면위로 이끌어온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Jonas Mekas|메카스]]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촬영된 뉴욕 위에 현실화시키듯이 일기 영상은 시처럼 현실을 또다른 현실로 분리시키고 구성시킨다. ^[이는 들뢰즈가 말하는 virtual과도 연결될 가능성이 보인다.] 이러한 카메라와 아티스트의 관계는 한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Jonas Mekas|Mekas]]가 이야기 하듯이 카메라의 움직임은 신체의 움직임을 반영하며 신체의 움직임은 감정과 생각의 움직임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다시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의해 발생하며 아티스트의 눈과 카메라의 눈 사이에 원이 형성된다. ([[@mekas_movie_2016]], 256)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메카스가 현실을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제거에 기반한다. 그는 모든 둘러싼 현실 속에서 단 하나의 특정적인 나무의 디테일을 선택하고 영상으로 노트화시킨다. 그러한 디테일은 그가 찾은 것이 아닌 잠재적으로 흘러가던 과거와함께 떠오른다.
> 모든 일기가 각자의 형식과 특징이 있듯이, 그것은 개인의 경험들과 습관, 그리고 그를 통해서 형성되는 주관적 생각들과 깊게 관계한다. dailiness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들뢰즈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캔바스에서 발견하듯 수많은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으며 또한 흩어져있다. 그것은 여기에 있다가도 저기에서 발견되며 곁에 있다가도 사라져있는 어떠한 것이다. 그것이 표현적 감각이되기 위해서 elimination이 필요하며 바로 그 순간에서야 그것은 dailiness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기는 수행적 쓰기와 함께 그 형체를 만들어 나간다. 인생에서 뽑아 낸 단어들과 이미지들이 한 글자 한 글자 weaved and mingled. 일기는 practice of abstract and adsorb. 일기의 시간은 단어의 시간 그리고 이미지의 시간이다.
> 그런 의미로 나에게 일기는, 더 detailed title을 붙이자면, dailiness를 의식하기 혹은 creating dailiness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dailiness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이며 스스로의 삶에 대해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험은 분명 도시에서의 생활과 닿아있을 수 있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속에서 평생을 살았고 도시 밖의 삶을 상상하기 힘들다. Susan Stewart는 도시에서의 걷기 경험을 이야기 하며 부분적인 시야와 의식의 분리를 경험하는 것이야 말로 도시에서의 걷기라고 말한다. 이러한 reflection은 Benjamin의 flaneur처럼 커다란 건물 아래서 모퉁이 모퉁이마다 fragmented 모퉁이 들의 이야기들에 대한 경험으로 나아간다. [[202305241226]]
나는 집단적 경험에서 벗어나 개인적 경험으로 초과되며 나 스스로의 시선 밖에서 나를 바라보며 나의 시선은 과잉된다. 다시말해 일기적 경험이라는 것은 실재의 세상을 추려내고 다시 그것을 카메라와 신체를 이용해 초과시키고 과잉시킨다는 것이다. 탈락시키고 과잉시키는 디테일의 반복 속에서 나의 시선은 방황한다. 나는 경험하고 나는 쓰며 나는 읽는다. 나는 내러이터이며 내러이트를 듣는 이이며 내러이팅 되는 주인공이다. 자신의 일기를 다시 읽는 다는 것은 경험 하는 나와 읽는 나를 재봉합 혹은 다시 포개는 것과 같다. 경험하는 나와 읽는 나의 시간의 흐름은 다를 수 밖에 없기에 이러한 재봉합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주인공 나는 쓰여진 일기의 책장을 넘기는 속도와 그 글의 실제 속도와는 별 상관이 없다. 새롭게 복원되는 기억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새롭게 구성하는 과거로서 작용하는 이러한 주인공의 역할은 무엇인가? 현재와 차이를 생성하므로서 과거로 존재하며 현재와 동일성을 구성함으로서 읽고 있는 순간과 재봉합된다. ^[quoted in [[202305241226#^ec0cbe]]]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은 영상을 통해서 새로운 실재의 공간성을 부여받는다.
## 공간의 다이아그램
<mark style="background: #FF5582A6;">여기 짧게 다이아그램 설명</mark>
[[202204091427|Cinematic Diagram]]
카메라와 신체의 몸짓은 일기 영상에 있어서 중요한 위지에 있다.
[[Vilém Flusser|빌렘 프루서]]는 몸짓이란 '몸의, 더 넓게는 몸과 연결된 도구의 움직임. 그중에서도 의도를 표출하는 방식의 특수한 움직임' 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몸짓은 그 움직임에 대해 만족할 만한 인과관계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 “Here, then, is the definition I suggest: a gesture is a movement of the body or of a tool connected to the body for which there is no satisfactory causal explanation.” And I define satisfactory as that point in a discourse after which any further discussion is superfluous.” ([[@flusser_gestures_2014]], 2)
그의 접근 방식에 따르면 움직임은 depicts pain and the movement is a symbol. The pain is its meaning. 이라는 관계망을 가지게 된다.^[이 경우도 두가지 움직임이 있을 수 있는데 reactive movement 와 active movement 로 어떠한 충격이나 변화에 의한 반응으로 몸을 움직이거나 무의식적인 감각의 표출로 이어어지는 것을 말한다. For instance, in Japan and Korea, it does not necessarily only in gesture and verbal expression of "hurt!" or "hot!". The second movement is the active expression and articulation of meaning by symbolising and codifying the certain movement.] [[Vilém Flusser|Flusser]] approaches the affect as a manifestation of state of mind by actively engaging with plephora of body movement, “affect” is the symbolic representation of states of mind through gestures. 정동은 몸짓을 통한 기분의 상징적 나타냄이다.
[[Vilém Flusser]]는 몸짓을 통해서 states of mind 마음의 상태가 스스로를 명시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양한 Plethora 몸적인 움직임으로 명시된다 하지만 그것이 표현하고 articulate 하는 것은 "몸짓을 통한 표현 gesticulations = affect" 을 통한 play 이 그들이 represented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flusser_gestures_2014]], 4)
하지만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몸 안에서만 outward되는 생각은 주관-객관의 양분이라는 문제점을 야기시킨다. [[Gernot Böhme]]에 따르면 body가 중심이 되는 [[Atmosphere]]에 대한 이해는 고전적 주관적-객관적 양분에서 해방되어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대신, [[Hermann Schmitz|Schmitz]]의 주장처럼, bodily self-aware이 동시에 being in an environment라는 것을 받아드려야한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일기영상은 어떠한 분위기를 발산하는데 이 분위기는 그것을 만든 작가의 주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영상이 발산하는 분위기의 특성과 특별한 삶의 형태–혹은 메카스에 따르면 기억의 잠재에 의해 존재하는 방식을 확장시키는 것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분위기는 언제나 ‘사이'로서, 주체와 객체의 (육체적이지만 사회적이며 상징적인) 공존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griffero_atmospheres_2014]], 121) 그것은 공간 속에 부어진 감정이며 선이원론적 육체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griffero_atmospheres_2014]], 108)
또한 이러한 [[atmosphere]]는 하나의 성질에 멈춰있지 않습니다. [[Giuliana Bruno]]가 [[Atmosphere]]로서의 프로젝션을 이야기하며 points out, 이 안의 관계는 conceived as a "network of dynamic, affecting, relational connections between subjects, objects, and space", which "relational dynamics come into being", this becoming, "aggregative dynamics of atmosphere is produced by discursive bodies as well as by the technical objects and cultural operations that make up everyday space.” ([[@bruno_atmospheres_2022]], 12, 21, 58)
이렇게 질문은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현재 어떤 공간을 만들어나가고 있을까요? **Atmosphere** 란 an [[ambiance]] of "spatialised feelings", resulting from the material assemblage of difference organisms and from the intermixing of forces in spaces. ([[@griffero_atmospheres_2014]], 36) atmosphere은 또한 삶이 존재하는 medium에 속하며 이 안의 관계는 network of dynamic, affecting, relational connections between subjects, objects, and space로 conceived 된다. [[Giuliana Bruno|Bruno]]가 보기에 projection에는 medium 성향과 더불어 공간적이고 도 건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다층적인 medium과 [[ambiance]]의 의미를 하나하나 ertmologically 분석하기 위해선 archaeological strata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이렇게 atmospherically presented space는 에리크 로메르가 주장한 화가와 건축가의 방식은 영상의 공간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화가라는 이미 공간이 존재한다고 보며 그것을 묘사하는 이들과 건축가라는 촬영을 하면서 공간을 창조하는 실제 공간과 더 이상 아무 관련이 없는 공간을 구상하는 이들로 두 방식을 큰 틀에서 분리합니다.^["Up until film, one had to either paint a painting or describe something. Being able to photograph, to film, brings us a fundamentally different knowledge of the world, a knowledge that causes an upheaval of values." ([[@rohmer_taste_1989]], 11)] 건축가들에게 있어서 "목표란 기존의 공간을 우리의 눈앞에 살아있게 만드는 것, 즉 사물들 간의 거리와 관계들이 실제 시계와 닮은 공간이 되도록 하는데" ([[@handyside_erickr_2017]], 140)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시: 프리츠 랑,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에리크 로메르) 그가 보기에 카메라를 이용하는 영화는 무엇보다도 '기계'로 실재 세상을 재구성합니다.
> 나는 <mark style="background: #FF5582A6;">영화적 미장센이라는 것이 축소보다는 확장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발화되는 순간 매우 짧은 그 무엇인가의 삶을 연장해야한다고 믿습니다.</mark> ([[@handyside_erickr_2017]], 105)
일기 영상 pratice에서 도구는 더이상 passive, inert한 tool이 아니라 vibrant matters로 함께 공명하며 관객에게 뿐만이 아니라 영상을 촬영하고 있는 메카스에게도 offers dynamic of a space or an object as well as of a subject in motion and experience the emotion, and even its memory.
Because the cinematographic image itself 'makes' movement, because it makes what the other arts are restricted to demanding (or to saying),it brings together what is essential in the other arts; it inherits it, it is as it were the directions for use of the other images, it converts into potential what was only possibility. [@deleuze_cinema_1989, 156] (시네마는) 사고에 충격을 주고, 피질에 진동을 전달하고, 신경과 뇌 시스템을 직접 만진다. 영화 이미지 자체가 다른 예술에서는 요구하는 (또는 말하는) 것이 제한되었던을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예술에서 필수적인 것을 하나로 모으고, 그것을 계승하고, 그것은 다른 이미지의 사용법이었던 것처럼, 가능성 Possibility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을 가능성 potential로 전환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은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고 발전 과정에서 그 힘이 보장되는 중간에, following Deleuze’s term, “현실적인 것과 그 현실적인 것의 잠재적인 것 사이에 행해지는 과정으로서의 개별화 individuation.” ([[@deleuze__2007]], 523)^[([[@deleuze_actual_2007]], 150) "Il n'y a plus inassignabilité de I'actuel et du virtuel, mais indiscemabilité entre les deux termes qui s'échangent." ([[@deleuze_dialogues_2002]], 184)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일기 영상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현실적인 대상의 분신을 만들어가며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분열과 공명하는 교환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공명을 통한 차이, 긍정적 차이는 내가 살아가는 생성을 만들어 나갑니다. ^[차이에 대해 저는 변증법의 부정보다 베르그송-들뢰즈의 차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한 변증법이 가능할까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지만) 베르그송-들뢰즈의 차이는 상태의 차이보다는 운동적 특면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지속으로 이야기되어 집니다. 대립되는 것이 아닌 운동, 변화, 생성에 유래하는 이 차이는 그 자체로 변화부쌍한 life를 이야기합니다. 더 자세한 것은 [[@deleuze_notitle_2004]]를 참조해주세요.] 그리고 신체는 Expanded cinema는 the three-dimensional space of reception와 body as a measuring reference로 form of realism이 아닌 <mark style="background: #FF5582A6;">정도? 퀄리티?</mark> “but as a resuscitation of the body as a measure of 로 영상과 재연결시키며 관객을 “unfixed, mobile, cognizant of that space” 로 되돌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