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us, even as the gaze may trap the subject, the subject may tame the gaze. [@foster_obscene_1996, 109] > “But there is a third option as well, and that is to reformulate this vocation, to rethink transgression not as a rupture produced by a heroic avant-garde posited outside the symbolic order, but as a fracture traced by a strategic avant-garde positioned ambivalently within this order.” [@foster_obscene_1996, 115]. 할 포스터는 'Obscene, Abject, Traumatic' [-@foster_obscene_1996] 를 통해 [[Surrealism|초현실주의]]와 abject art를 이어서 예술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structure of feeling과 order of representation을 붕괴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는가 진단한다. 그는 라캉의 cone of vision 이론에서 응시가 주체를 포획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주체 역시 응시를 길들일 수 있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통해 실재(the real)의 개념을 초현실주의와 1990년대의 예술가들, 특히 abject art가 어떤 방식으로 break했고, 이 스크린을 찢어버림으로써 관객을 **억압된 현실**, 즉 혐오스럽고 외설적이며 트라우마적인 실제에 직접 노출시키고자 했다고 분석, 예술적 재현 방식에서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전환은 응시의 통제를 거부하고 실재의 충격을 직접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위해 Cindy Sherman의 작업의 변화 과정을 추적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포스터는 ‘추악한(abject)’과 ‘외설적인(obscene)’ 개념이 현대 예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추악한 것’(abjection) 개념을 차용하며,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 반드시 배제해야 하는 것(예: 신체의 분비물, 죽음, 혐오적 이미지 등)이 현대 예술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신체의 붕괴나 변형, 부패와 같은 요소들은 단순히 도발적이거나 불쾌한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재현 체계를 와해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혐오스러운 것과 동일시하며 그것에 접근과 혐오의 상태를 재현함으로써 그 작용을 유발하려는 시도는 단순한 전위적 도전이 아니라, 실재 자체를 다시 사유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시사함에도 주어진 abject를 컨펌하게 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초현실주의자들이 기존 사회 질서를 전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기성 권력의 반응(검열 등)을 불러오면서 체제를 더욱 강화한 것과 같은 역설적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다시말해 Foster는 혐오를 예술적으로 활용하는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기존의 혐오 구조를 공고히 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논리는 안과 밖의 구분을 전제로 하며, 결국 이러한 인물들이 대항하는 질서가 안정적으로 존재함을 가정(혹은 확증)한다. 즉, "이미지-스크린과 상징적 **질서의 상태**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며, 지역적으로는 혐오 예술의 가치 또한 이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상징적 질서가 온전한 것으로 간주된다면, 이미지-스크린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전복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이미 찢어진 상태라면, 그러한 전복은 무의미해지며, 아방가르드의 기존 역할은 끝난다. 이 관점에서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상징적 질서와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이 오래된 꿈은 이제 사라졌다), 그 질서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드러내고, ==그 붕괴의 지점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돌파의 순간을 기록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Surrealism의 상징질서의 전복과 Russian Constructivism의 새로운 사회 질서 창출를 대표로 단지 “급진적 혁신(혁신 전위)” 또는 “완강한 거부(저항 전위)”라는 두 가지 이미지로만 이해되어왔던 아방가르드는 훨씬 덜 “영웅적”이며, 현재 질서가 이미 내재하고 있는 균열을 파고들고, 그것을 더욱 벌려놓으며, 때로는 내재적·비판적 수행을 활성화하는 전략을 쓰는 형태로 진화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초현실주의가 접근 했던 것고 같은 혐오의 승화와 원초적 혐호의 표출 사이에서 더 나아가 더 복잡한 형태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John Miller]]와 [[Mike Kelley]]는 상징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공간을 탐구하며 이들은 단순히 무차별성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차이를 교란하기 위해 이를 수행한다. [[Mike Kelley|Kelley]]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toward aformal indistinction를 향해 push 해 더이상 신체들과 아기, 인형, 신체의 부분들이 구별되지 않는 그리고 서로 쉽게 symbolic interchange 가능한 상태를 만들어낸다. [[Hal Foster|Foster]]는 이러한 [[Mike Kelley|Kelley]]의 작업을 [[Georges Batailles|바타유]]와 연결시키며 "In a sense Kelley did what Bataille urged: he based his materialism “on psychological or social facts.” [@bataille_visions_1985, 15]" "그 결과 승화나 구원은커녕 형상화조차 거부하는 사물, 주제, 인물을 루멘 [[Lumpen]]으로 표현하는 예술이 탄생했습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여러 독재적이고 파시스트적 행위에서 나온 나폴레옹 3세부터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악용한 루멘과 달리 the Lumpen of Kelley resists molding, much less mobilizing. 이러한 구별되지 않으려는 욕구와 욕망하지 않으려는 역설적 욕망, 무기적인 것으로의 퇴행은 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표현하는 무관심을 보여줬다고 주장하며 포스터는 에서 더 나아가 [[바타유]]의 [[Surrealism|초현실주의]]를 따르는 [[Roger Caillois]]는 이러한 구별되지 않으려는 충동을 시각성의 차원에서, 특히 공간 속으로 위장(mimicry)을 통해 동화되는 곤충의 사례로 고찰했다. 카유아(Caillois)는 이 동화를 주체성은 물론 행위 주체성조차 허용하지 않는 상태를 예시로 든다. > To these dispossessed souls, space seems to be a devouring force. Space pursues them, encircles them, digests them in a gigantic phagocytosis [consumption of bacteria]. It ends by replacing them. Then the body separates itself from thought, the individual breaks the boundary of his skin and occupies the other side of his senses. He tries to look at himself from any point whatever in space. He feels himself becoming space, dark space where things cannot be put. He is similar, not similar to something, but just similar.And he invents spaces of which he is "the convulsive possession." [[@caillois_mimicry_1984]] 신체의 균열, 주체를 집어삼키는 시선, 공간이 되어가는 주체, 그리고 단순한 유사성의 상태 (경련적인 점유. convulsive possession)을 통해 환희와 절망의 경련 속에서 기존 질서의 붕괴 속에서의 트라우마는 단지 representation되는 것을 넘어 present된다. Hal Foster는 이후 같은 해에 출간된 저서 _The Return of the Real: The Avant-Garde at the End of the Century_ [-@foster_return_1996]에서 **혐오와 트라우마**의 개념을 더욱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고, 2010년대 중반 들어 예술계에서 혐오미술이 “컴백”하는 현상과 함께 2015년에 출간된 저서 _Bad New Days: Art, Criticism, Emergency_ [-@foster_bad_2015] 에서 이전의 이론적 어휘가 현재의 예술을 평가하기에 불충분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다시한번 abject art의 문맥 속에서 미니멀리즘 이후의 공통어(lingua franca)였던 형식 언어가 현대 예술가들에게는 트라우마의 언어(lingua trauma)”로 변모했으며 초기 80년대 포스트모던에서 보여주었던 한편으로는 이미지 화면과 상징적 질서의 상상적 붕괴에 대한 황홀경과 schizophrenia적 작업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90년대에 a symbolic order in crisis에 따른 절망과 공포에 따른 멜랑꼴리한 감각으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예술의 bipolar는 89년 이후, 즉 베를린 장벽의 무너짐과 천안문 uprising을 기준으로, global 시대의 현재 시점에서 새로운 작가들을 통해 was pushed toward a qualitative change: 많은 예술가들은 한편으로는 완전한 정동의 장소에 거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동을 완전히 빼앗기거나, 더 극단적으로는 한편으로는 상처의 외설적인 생명력을 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체의 급진적인 허무함을 차지하려는 야망에 이끌린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트라우마적 공간은 한편으로는 정서적 몰입의 공간으로 점유되고 소진되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or, even more extremely, to possess the obscene vitality of the wound on the one hand and to occupy the radical nihility of the corpse on the other [@foster_bad_2015, 35 of 202]".^[Benjamin, “ On Some Motifs in Baudelaire,” in Illuminations, trans. Harry Zohn (New York: Schocken Books, 1977 [1939]). The bipolarity of the ecstatic and the abject provides one affinity, sometimes remarked in cultural criticism, between the Baroque and the postmodern. Both are drawn toward an ecstatic shattering that is also a traumatic breaking.]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술, 문학, 이론에서는 트라우마 담론이 포스트구조주의적 주체 비판(poststructuralist critique of the subject)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갔으며 [[Hal Foster|Foster]]는 미술 해석을 위해 다섯 가지 모델(Abject, Archival, Mimetic, Precarious, Post-Critical) 속에서 Abject Art가 ‘비체(abjection)’를 통해 최근 25년간(특히 1989년 이후)에 나타난 어떤 흐름이나 개념의 “응급(emergency)” 같은 지점을 포착, 명료화해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할 포스터가 말한 이러한 terms는 완성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상태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가 말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다이아그램을 그려주는 전략 혹은 조건들로 이야기된다. 각 전략 혹은 predicaments: 첫번째로, Abject(아브젝트) art는 할 포스텅게 있어 [[Surrealism]]을 되돌아 보며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걸쳐서 the real seen as an event of trauma를 보는 경향의 예술 작업들을 지칭하고 있으며 혐오나 배설물, 죽음, 신체적 파편 등 ‘혐오스러운 것’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무고 이미지 놀이를 넘어, “트라우마적 리얼”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려는 경향을 이야기한다. 두번째로, Archival(아카이벌)은 전쟁 전과 전쟁 후의 앨범 및 아틀라스와 관련된 프로젝트들을 소환하며 two decades 동안 나타난 archival impulse를 보여주며 “the form of historical probes into people, places, and practices that are lost, outmoded, or otherwise stranded” (Foster, 2015, p. 8). 세번째로, Mimetic(모방적·흉내 내는)에서는 [[Dadaists|다다이즘]]에서 나타난 자세와 페르소나를 언급하며 9/11 이후 나타난 “과잉 모방” 혹은 자본주의적 시각 문화나 테러리즘적 정치 상황을 작품 속에서 과장해 재현함으로써, 그 부조리를 드러내는 전략. 네번째로 Precarious(불안정, 위태로운)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예술가 본인부터가) 경제적·사회적 불안정하고 불확실성에 놓인 상태를 예술 작업에 반영하는 경향. 마지막으로, Post-Critical(포스트-비판적), 2000년대 들어 나타난 비판적 태도나 이념은 낡은 것이다라고 선언하거나, “탈비판/쿨/장식적 태도”가 유행하는 경향에 대한 문제 제기. 포스터는 이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나는 비판을 포기할 수 없다”), “비판적 태도를 대체하는 의미 있는 새로운 방식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 “비평가의 본성은,” 레오 스타인버그가 한때 말했듯이, “그의 최고의 순간에 말하는 것이 결국 다음 시즌에 모두가 반복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는 클리셰를 만들어내는 자다.” Abject art가 사회적 질서에서 밀려난 것들과 들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면, 아카이브적 예술은 기록과 자료를 통해 그 배제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라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Cindy Sherman이 신체적 혐오를 다루는 방식과, Thomas Hirschhorn 같은 작가가 사진과 문서를 활용하여 역사의 폭력성과 배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봄. 이렇게 잊혀진 것과 배제된 것 사이에는 분해와 잊혀진 파편적 형태들의 균열, 주체를 집어삼키는 시선, 공간이 되어가는 주체, 그리고 단순한 유사성의 상태 (경련적인 점유. convulsive possession) 주체의 실존적 abjectivity와 경계 불안정성 Precarity or instability 속에서 공간과 주체 사이의 경련을 expose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과 다르게 “스위스의 토마스 히르슈호른, 영국의 타시타 딘, 덴마크의 요아힘 코스터, 미국의 샘 듀란트에 의해 각각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현대 미술, 철학, 혹은 역사 속 특정 인물, 사물, 또는 사건을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는 예술적 실천 모델을 공유한다.” [@foster_bad_2015, loc. 40 of 202] (a list of practitioners in this mode might also include Yael Bartana, M atthew Buckingham, Tom Burr, Gerard Byrne, Moyra Davey, Jeremy Deller, M ark Dion, Stan Douglas, Omer Fast, Joan Fontcuberta, Liam Gillick, Douglas Gordon, Renée Green, Pierre Huyghe, Zoe Leonard, Josiah M cElheny, Christian Philipp M üller, Philippe Parreno, Walid Raad, Danh Vo, the Otolith Group, and Raqs M edia Collective, among others). 물론 이러한 방식은 완전 새로운 것이 아니며 prewar period 시기에도 다른 forms로 다르게 나타났다. 이러한 archival 작업들은 잊혀진 혹은 억압된 역사적 정보를 다시 physically 만들고자 found image, object, and text들을 기반으로 작업되며 때때로 이러한 작업은 "the postmodernist complication of originality and authorship to an extreme". 이러한 경향은 또한 suggests the changed status of the artwork in an age of digital information, 정보는 자주 as cirtual readymades 그리고 데이터는 reprocessed and sent on 으로 간주되었다. "이 마지막 점은 아카이브적 예술의 이상적인 매체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아카이브일 수 있음을 시사할 수도 있다. 실제로 '플랫폼(platforms)'이나 '스테이션(stations)'과 같은 전자 네트워크를 연상시키는 용어들이 2000년대 미술 용어로 등장했으며, 당시에는 인터넷의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이라는 개념 또한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할 포스터가 하이라이트 하는 아카이브는 데이터베이스로서가 아니라 “The archives at issue here are not databases in this sense: they tend to be funkily material and recalcitrantly fragmentary, and as such they call out for human interpretation, not machinic processing.” (Foster, 2015, p. 43)". 이는 indiscriminant은 아니지만 indeterminate하고 데이터베이스로 정의될 수 있는 작업들과 다르며 또한 collector or cuatorial 작업을 함에도 아티스트를 큐레이터로 보는 관계와도 다르다. “Yet they are not as concerned with critiques of the representational order or institutional ethics of the museum.” (Foster, 2015, p. 44) 이는 archival 작업이 아카이브적 예술은 ‘파괴적’이라기보다는 ‘제도적’이며, ‘전복적’이라기보다는 ‘입법적’인 성격을 띠지만, 가장 뛰어난 사례들은 이러한 대립을 넘어서는 캐릭터와 더 연결을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작업은 "marginal cultural forms, in a synchronic register of fieldwork, while the former turns to minor historical materials, on a diachronic axis of research"을 연구하는 ethnographer와도 분리되어야한다. 즉 archival art는 데이터, 정보를 모으고 arrange하며 역사적 시간적 관계를 연구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작업은 database, curatorial, ethnographical art와 구분되어야한다. ![[Screenshot 2025-02-25 at 16.51.52.png]] [[Hal Foster]]가 [[Georges Batailles|바타유]]에게서 빌려온 이러한 [[informe]]의 개념은 현대 사상의 흐름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특히 가속주의 미학(accelerationist aesthetics), 사변적 미학(speculative aesthetics), 반(反)인간주의(anti-humanism) 등의 사조에서 바타유의 사유가 위어드 픽션(weird fiction)과 결합한다(Land 1992, Woodard 2011).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 파편적이고 불완전하며 끊임없이 mutations of 재구성되는 특징이 확장되면서 ‘재구성’의 과정에서 주체가 불안정해지는 트라우마적 환경을 동시에 제공하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archival art는 draws on informal archives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found and constructed, factual and fictive, public and private” (Foster, 2015, p. 44) 아카이브를 만들기도 한다. Therefore, as Foster points out, “much archival art does appear to ramify, through these operations, like a weed or a “rhizome” (Foster, 2015, p. 44). 이러한 환경적 분석 속, 디지털화와 해결되은 않는 트라우마와 익스트림화 되어가는 분안정한 주체성 등등, 현대 무정형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들뢰즈(Deleuze)의 미학적 사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들뢰즈는 “되풀이(refrain)”, “이종발생(heterogenesis)”, “배치(assemblage)” 등의 개념을 통해, 비형식적(non-formal) 형상을 비순환적 맥동(non-recursive pulsation)의 리드믹한 형성 구역(zone of rhythmic formation)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비록 바타유의 '[[inform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철학 전반에는 형태의 해체와 비(非)형식적 상태를 다룬 개념들이 풍부하게 등장합니다: 고정된 형상이나 유기적 구조가 제거된 순수한 잠재성의 장으로의 Body without Organs이라던가 Screen as Brain이라던가 “카오스와 접촉하면서도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내재성의 평면 (plane of immanence)” 을 구축하는 방식이라던가. 이러한 개념들은 바타유의 '무정형'과 정신적으로 상통하는 측면이 있으며, 들뢰즈는 이를 통해 기성의 형태와 구조를 넘어서 의도적으로 가해진 무작위적 흔적으로 기존 형상을 파괴하는 과정 속에서 기존의 유기적 질서에 대한 일종의 탈주선을 전개했습니다. The Logic of Sensation [-@deleuze_francis_2003]에서 Francis Bacon의 작업과 그의 random marks의 분석을 통해 개념화한 다이어그램적인 혼돈의 도입은 기존의 재현적 형체(figurative form)를 일시적으로 ‘무정형’ 상태로 만들었다가 , 거기서 새로운 감각의 형상을 탄생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혼돈은 들뢰즈에게 파괴적인 동시에 창조적인 무정형의 힘이며, 새로운 형태와 질서를 낳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비조형적(preactual) 단계로 바타유가 말한 ‘무정형’—어떠한 의미나 재현으로 환원되지 않는 원초적 뒤범벅—을 창조의 엔진으로 재해석 했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는 더 나아가 “강도(intensity)” 개념, “탈코드화/탈조직화” 에 대한 논의 등을 통해 고정된 형태가 분해 되어 새로운 현상이 출현시키는 창조적 예술과 철학의 과정에 대해 분석하고 논의하고 개념화합니다. 결국, “힘을 포착(capture forces)”한다는 것은 새로운 물질 속에서 ‘유사성 없는 발생 영역(germinal domain of non-resemblance)’을 창조적으로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Massumi 2011, 2019). 이는 무정형을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조합과 역동성을 창출하는 과정으로 보는 현대 철학적 관점을 반영한다. 예컨대 들뢰즈는 기존 철학이 제시하는 선택지, 즉 부정의 산물로 차이를 바라보거나 혼돈을 아무런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기분법에 도전한다. 들뢰즈는 금기-위반의 변증법이나 부정성의 미학보다는 지속적인 창조와 긍정의 철학을 선호했으며 이러한 접근은 [[Hal Foster|Foster]]가 트라우마들 속에서 나오는 두 경향에서 나오는 극도의 authorship without subjectivity 속에서 두 가지 대안을 모두 도전하고, “==형태가 없지만 그 자체로 차별화되어 있는 물질의 장(場)==”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며 오히려 형식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생산해내는 힘을 전면에 내세운다. 내 질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아카이브가 역사적 지역 혹은 인물이 아닌 자신을 향하는 것이 가능한가? 파편적이고 불완전하며 현재와 현공간을 끊임 없이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형태의 archival 주체성이 접근되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이러한 질문이 할 포스터가 제기한 "주체가 이토록 파괴되거나 피해자로만 정의되어도 괜찮은가? 혹은 그 피해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주체를 되살려낼 수 있는가?"라는 의문처럼 파편화 속에서 내 주체가 완전한 공간과의 집어삼켜지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주체를 되살린다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주체성은 thing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갑자기 뚜렷해졌다가 모호해지고 분열되었다가 합쳐지는 과정 속에서 "I"는 intensity에 의한 visibility로 기능할 수 있으며 momentary event로 real과 actual의 교환은 겹쳐지고 벌어지며 관계의 discursive force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며, the event rather than the monument. 이러한 방향에서 [[Mike Kelley|Kelley]]의 작업을 본다면 그는 단지 형체가 무너지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과정 속에서 가장 강렬한 지점을 끌어내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visibility는 목격자를 필요로한다. 시체는 인간으로의 주체성을 잃었다고 해도 단순한 thing과는 그 차이를 둔다. 그것은 단지 증거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것으로 존재하며 과거와 연결 속에서 현재의 의미도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성은 이러한 목격자의 gaze를 tame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나도 gaze를 던지고 내 gaze는 tame 당하는 과정 속에서 주체는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gaze안에서 누구도 초월적이지 않다 오히려 상호적으로 보안하고 연계하고 의지하는 관계 속에서 비어있는 세계 속 위치에 대한 확신을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IMG_2747.jpeg]] 그러므로 주체성을 strata in terms of flows of informe and reform between mechanisms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통해서 나는 여기서 abject와 archival 아트의 그 중간지점의 불안정한 힘을 긍정의 차이로서 파편과 불완전함을 들어가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abject art와 archival art는 나는 응시받지만 응시를 거부하는 동시에 응시를 인식하며 이러한 응시의 거부와 허용은 아카이브의 재구성과 몽타쥬를 통한 상호작용을 통해 응시의 구조와 실천을 통한 내부적 저항이 표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체성이 극도로 사라진 트라우마가 아닌 트라우마로 인해 표출된 fissure 속에서 그 betweeness에서 상처에서 새로운 살이 차오르듯 흔적과 새로운 살을 동시에 포용하며 긍정의 힘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