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duction: 고대인이 춤을 추고 낭만주의가 시를 읇으며 현대인이 노래를 부른다. 프랑크푸르트는 그의 책 *On Bullshit* [-@frankfurt_bullshit_2009]에서 "One of the most salient features of our culture is that there is so much bullshit" [-@frankfurt_bullshit_2009, 1] 이라고 지적하며, 이 현상이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 확산 이유, 기능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이론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불필요한 말'의 논리적으로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을 정의하는 것이 "다소 자의적일 수 있다"고 인정하며, humbug,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관련된 일화, 거짓말과의 비교를 통하여 bullshit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humbug'는 의도적인 기만을 목적으로 하며 이는 거짓말과 마찬가지로 행위자의 정신 상태에 달려있다. 거짓말은 허위'falsity'에 촛점을 맞추며 진실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여 그에 맞추어 의도에 따른 진실을 왜곡시킨다. 즉, 정직한 사람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말하고,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bullshit은 이러한 진실과 거짓의 관계 혹은 신념과는 상관이 없다. bullshit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이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지 여부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의 목적에 맞게 그것들을 고르거나 만들어낸다. He does not care whether the things he says describe reality correctly. He just picks them out, or makes them up, to suit his purpose." 이러한 방식의 bullshit 말하기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관련된 일화에서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Wittgenstein의 러시아어 선생님이 었던 Fania Pascal, who knew him in Cambridge in the 1930s, 의 기록에 따르면,^[Fania Pascal, “Wittgenstein: A Personal Memoir,” in Rhees, Recollections, pp. 28–29.] 그녀는 차고를 당했던 순간에 대해 “I feel just like a dog that has been run over.”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disgusted and said "You don’t know what a dog that has been run over feels like"^[Fania Pascal, “Wittgenstein: A Personal Memoir,” in Rhees, Recollections, pp. 28–29.] 라고 반응한다. 프랑크푸르트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반응에 대해, 그녀의 진술이 거짓말을 해서가 아닌 진실에 대한 관심과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녀는 관련 사실에 양심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정확한 현실 표현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즉, 그녀의 잘못은 제대로 된 표현을 하지 못했다거나 혹은 거짓, 개가 느끼는 것을 알 수 없던 것을 참인 것처럼 표현했던 것도 아니라, 노력조차 하지 않은 진실에 대한 관심과의 연결부족, 즉 진실에 대한 무관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동시대에서 발생하는 bullshit에 대한 원인을 추측한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만연한 skepticism and antirealist doctines에 따라 객관적 현실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었고 진실 탐구의 가치가 악화되었으며 [-@frankfurt_bullshit_2009, 64-5], 이러한 사조 속에서 사람들은 정확성보다 진실성이라는 대안적 이상으로 후퇴했다. 그는 이에 더해 민주주의 속에서 모든 것에 대해, 또는 적어도 국가의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가져야한다는 광범위한 확신을 통해 현실에 대한 이해 없이 의견을 내는 일이 많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프랑크푸르트는 bullshit를 진실에 대한 무관심을 본질로 하는 담론으로 정의한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진실을 보고하려 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실들을 취하거나 만들어낼 뿐이다. 즉, 개소리의 핵심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가짜(phony)'라는 것* 에 있다. 그러나 진실과 거짓, 혹은 사실이라는 해석은 특정한 이론적 가정을 내포할 가능성이 있으며, Mary Poovey [-@poovey_history_2009] 의 분석처럼, 예를 들어, 어떤 것을 세고, 물질적 실재를 어떻게 이해하며, 수량화가 체계적인 지식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대한 가정과 함께,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데이터가 아니라, 특정 사회적, 인식론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고 기능해왔다. Poovey는 "근대적 사실"이 "정밀하게 기술된 특정 사항과 체계적인 지식에 기여하는 동시에 존재하는 수치들"로 구성된다고 정의하며, 19세기 초반의 텍스트들 속에서 별개의 기능처럼 보였던 두 역할, 묘사와 해석, 이 실제로는 일치하는 기능이라고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Poovey는 "근대성이라는 인식론에서 사실에 부여된 특이한 역할 때문에" 사실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답변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Poovey는 특히 초기 근대 bookkeeping, known as double-entry bookkeeping은 '근대적 사실'의 원형이 생성된 가장 초기 실천 중 하나였다"고 언급하며, "This relationship was not just between accounting and the embyronic sciences of society, but between what counted as a fact and the way the systematic representation of these facts enabled more general theoretical knowledge to be produced" [-@poovey_history_2009, 29]. 이러한 복식부기 방식은 정확성의 효과를 통해 수사학의 영역에서 상인 집단의 정직성을 선언하는 사회적 효과를 불러왔다. Poovey의 분석 속의 복식부기가 보이는 이러한 정직성 혹은 sincerely는 프랑크푸르트의 분류처럼 진실과 거짓의 분류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이러한 고전적 수사학의 요소들은 상거래를 정당화하고 질서에 대한 믿음을 재강조하는 효과를 낳았으며 "신이 세계에 부여한 대칭과 비례를 그 형식 자체로 반복함으로써 reiterating in its very form the symmetry and proportion with which God invested the world [-@poovey_history_2009, 38]". 이는 '사실'이 단순히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목적을 위해 '구성'되거나 '표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과의 관계는 날짜 기록의 역사를 함께하는 일기 속에서도 드러난다. 일기는 특정한 구조 속에서 주체의 하루를 반복하고 진실성 있는 실체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겨져왔으며, 이러한 정직성은 일기를 구성하는 주요 골격이되었다. 뒤에 일상성과 함께 후술할테지만 이러한 진실성 혹은 정직성을 보여주는 '사실'이 '이론으로부터 자유롭고 가치중립적'이라는 주장은 "새로운 과학을 둘러싸고 이론적 논쟁이 격렬해질 때, "this ambiguity tended to attract attention whenever an emergent science became embroiled in political or social controversies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Poovey는 설명한다 [-@poovey_history_2009, 97]. 수사학적 과시에 대한 무관심은 간결한 문체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다시 지식 생산의 모델이 되어, 이는 상인들이 전달하는 지식에 '이해관계(interest)'가 없다고 여겨졌던 것과 함께, 투명성(transparency)와 연결되었고 그들의 "사실"에 대한 진실성을 부여해주었다. 이러한 방식은 앞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할 보일과 왕립학회(Society)의 다른 구성원들과도 관계가 없지 않다. 그들은 이러한 진실성을 통해 사실이 이론으로부터도, 가치 판단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주장에 기반하여 그들의 사회적 권위를 세웠다. "보일과 동료들은 지식 생산이 ‘무관심적(uninterested)’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면 홉스는 국가이성(reason of state)의 옹호자들이 부여한 ‘이해관계’의 긍정적 함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poovey_history_2009, xviii]. 이러한 접근은 미학적 선호도 진실과 거짓에 대한 interest (관심 혹은 이해관계) 보다도, 지식 그 자체의 신뢰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이론, 신념, 추측이 수행하는 역할 자체가 하나의 이론적 문제를 구성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 [-@poovey_history_2009, xx]"로, 사회에 대한 이론은 허구적 (fictional) 토대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a mere philosophical fiction, which never had, and never cou'd have any reality", 이러한 허구는 특정 이론적 설명을 위해 the idea of a state of nature is necessary로 "nothing can more evidently shew the origin of those virtues, which are the subjects of our present enquiry" (Treatise, 544, 545) 간주된다. 이러한 Poovey의 분석들은 '사실'의 순수성이나 '객관성'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효과이며, 종종 특정 사회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사적, 문체적, 심지어 허구적인 장치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사실로 보이는 것이 "개소리"의 요건처럼 예술적 수사학을 기반으로 구성되어진 투명성이될 수 있으며, 또한 과장되고 사실과 거짓에 대해 interest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형태의 표현도 특정 이론적 설명을 위한 necessary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는 Henry Wadsworth Longfellow의 시를 예시로 들며 신의 시선이 더이상 모든 곳에 있지 않고, 이를 통해 더이상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사려깊은 규율을 걱정하지 않는 현대의 장인들의 위치를 예시로 들며 임기응변과 꾸며냄, 그리고 창의적으로 현실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행위로 비유하며 [-@frankfurt_bullshit_2009, 20-1, 48-50] 이렇게 엄격함을 가지지 못한, 더이상 윤리적 self-criticism이 없는 허구맹랑한 개소리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예술이 신의 눈과 재현과 표상의 세상을 떠나 스스로의 작업으로 작업 안에서 의미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사회 안에서 기능하기 시작한 이후로, 예술의 목소리는 현실의 표상적 밖과 자기 참조적 물질성의 안을 동시에 향하고 있다.^[저는 여기서 Joseph J. Tanke가 해석한 푸코의 인식론적 관계의 설명, 숨겨진 닮음으로서의 르네상스, 고적적 표상의 가시적 기호의 분류학적 질서, 그리고 포스트 재현적으로 일컬어지는 현대 미술의 연속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Tanke, J.J., 2009. Foucault’s Philosophy of Art: A Genealogy of Modernity, Philosophy, aesthetics and cultural theory. Continuum, London ; New York.] 그러나 예술의 윤리적 규율을 진실과 거짓의 카테고리 안에서 진실된 세상을 재현한다는 생각은 진실과 거짓이 나누어지기 전, 혹은 알기도 전에 흩어지고 사라지고 또 변형되는 것들에 대한 예술의 비시기성, trnasgression, 시적 표현, 수사, 혹은 예술적 실천들을 배제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아마도 지체되는 사이, 틈, 그리고 의도적인 간격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에게 개소리는 비어있는 소리, 따뜻한 숨 외에는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은 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더 위험하게는 진실과 거짓에 관심 없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비어있으되 엄격할 수 있으며 거짓을 품고 있으면서도 흐름을 가질 수 있는 모호하고 결정되지 않은, 그리고 사실이나 객관성보다 행위 자체에 그 의미를 두는 표현으로의 확장은 필요하며, 이러한 확장을 통해 우리는 ==여기 한문장 더== Michel Serres는 *Humanistic Narratives* [-@serres_humanistic_2025]에서 서사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라틴어나 그리스어 연구에 국한되거나 서구의 관습을 보편화하는 한계를 가지는 인본주의나 정의에만 집중하여 너무 추상적이거나 '되어가는 과정'과 삶의 모호한 세부사항을 본질이나 실존으로 고정시키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존재의 서사적, becoming 동사적 관계 속에서 자세하고, 유연하며 살아있는 시간 속에서 스며드는 이야기적 생명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시간은 "질서와 무질서, 연속성과 불연속성, 기억과 망각이 혼합되어 만들어지며, 이는 서사, 음악, 자아의 구성 방식과 동하게 각 개인을 특징지으며 삶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웅얼거림'이나 '외침' 등과 같은, 그 안에 의미 없는 "개소리"들은, 수행적 행위 자체로 '수행적(performative)' 힘을 가지며 서사를 이어간다는 것에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Serres는 때로는 '진실'의 엄격함이 삶의 연속성을 파괴할 수 있기에, 서사는 '존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하며 '증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작가(author)'라는 단어는 '확장하다(augment)'에서 유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points한다. 이는 인간의 언어적 특권주의를 해체하며, 서사는 실존을 위해 필수적이며, '무(無)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때로는 '거짓말'하거나 '과장'해야고 이야기한다. 엄격한 사실보다 언어의 '음악적 기반'이 중요하며, 이는 허무함과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생존 전략으로 환희와 희망을 창조한다. 그는 글을 통해 confess when he has “anything to tell or recount, I must quickly invent so as to fill this hole of nothingness whose emptiness I often feel and live. So, panic-stricken, I augment. I exaggerate, swell up, replace. I create or I lie? At the ethical risk of lying, at the emotional risk of paranoia, I take myself to be a creator god having performative speech: I believe, whether firmly convinced or in bad faith, that I am truly living the way I say I am and desperately try to make it be believed” [@serres_humanistic_2025, 61]. "This gap in time, in the nothingness, in the subject, in existence, this distance that tends to overflow projects, dreams and their rare fulfillments, the beginning and the end, birth and death, lets another dimension emerge, transcendence" [@serres_humanistic_2025, 66]. 이에 더해 윌리엄 엠프슨의 모호서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프랑크푸르트의 엄격한 관점에 대해 언어의 본질적인 복잡성과 풍요로움을 더해주며, bullshit을 세심하고 꼼꼼한 주의를 기울여 참과 거짓의 이분법적 관계가 아닌 새로움을 창조하는 실천으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Serres의 말처럼 정의로 접근하는 것은 한계를 가진다. William Empson은 Seven Types of Ambiguity [-@empson_seven_1949]에서 "애매성(ambiguity)"이라는 용어를 "좋아하는 대로 사용하겠다 [-@empson_seven_1949, vii]"고 선언하며, 이를 extended sense로 사용하며 "which gives room for alternative reactions to the same piece of language"라면 아무리 미묘한 언어적 뉘앙스라도 자신의 주제와 이 주제와 relevant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그가 인정한대로, "absurdly far"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분명 허풍이나 윤리적 혹은 도덕적 사려깊음을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프랑크푸르트의 말처럼 의도된, bullshit이지만 또한 공공연한, when we recognise that there could be a puzzle, as to what the author meant, in that alternative views might be taken without sheer misreading" bullshit이기도 하다 [-@empson_seven_1949, x]. Empson은 오히려 이러한 의도적인 모호성을 언어적 richness와 heightening of effecting가 machinations of ambiguity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empson_seven_1949, 3], 즉 재치 있거나 기만적인 이중 의미와 문법적 혼란을 넘어 언어의 본질적인 다층성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ambiguity의 유형은, 여러 유사점과의 비교, 여러 차이점과의 대조, 비교 형용사, 억제된 은유(subdued metaphors), 그리고 리듬에 의해 암시되는 추가적인 의미등에 의해 a detail is effective in several ways at once,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이중 문법'(double grammar)을 대표로 하는 two or more alternative meanings are fully resolved into one, 주로 말장난(puns)에 의해 two apparently unconnected meanings are given simultaneously, 워즈워스(Wordsworth)의 『틴턴 사원』(Tintern Abbey)에서 범신론적 사상이 미묘한 문법적 모호성(예: 'something far more deeply interfused'가 무엇인지 불분명함을 예시로 when the alternative meanings combine to make clear a complicated state of mind in the author, 은유가 정확히 어떤 것에도 적용되지 않고 두 가지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적용되어 그가 표현한 "a fortunate confusion"을 발생시킬 때 [-@empson_seven_1949, 154], 동어 반복(tautology), 모순(contradiction), 또는 무관한 진술(irrelevant statements)을 통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the reader is forced to invent interpretations" [-@empson_seven_1949, 176], 그리고 마지막으로 full contradiction, marking a division in the author's mind so the "contradiction expresses both the need for and the difficulty of separating them" [-@empson_seven_1949, 196]. 그에 따르면 시는 단순히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네번째 유형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단일한 응집력 있는 단위(a single coherent unit) [-@empson_seven_1949, 130]"로서 복잡한 의미와 감정을 동시에 담아냅니다. 모호성은 셰익스피어의 경우처럼균형 잡힌 동시에 다층적인 정신 활동 "(its balanced but multitudinous activity)"속에서 거의 무작위로 아이디어를 끌어올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장치이다 [-@empson_seven_1949, 138]. 엠프슨은 "모호성(ambiguity)"을 동일한 언어 조각에 대한 대안적인 반응의 여지를 주는 모든 미묘한 언어적 뉘앙스"를 포함하는 "확장된 의미"로 사용하며, 심지어 “In a sufficiently extended sense any prose statement could be called ambiguous.” [@empson_seven_1949, 1] "충분히 확장된 의미에서 모든 산문 진술은 모호하다고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단순한 문장조차도 분석을 통해 여러 함축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언어가 단순한 진실-거짓 이분법을 넘어선 내재적 복잡성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며, "진실에 대한 관심 부족"이라는 프랑크푸르트의 기준이 언어의 본질적 다층성을 간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앰프슨이 일곱가지의 유형을 분석하며 보여주었듯, 모호성은 시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더하는 요소이자 단순한 "목적에 맞지 않는 말"이 아니라, 복합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위치된다. 더 나아가 "대안적인 의미들이 결합되어 작가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명확히 할 때" 발생하는 모호성 제 4유형에 따르면, 작가가 단순히 "진실에 무관심"하거나 "목적이 없다"기보다는, 내면의 갈등이나 복잡한 인식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작가가 글을 쓰는 행위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견하거나, 모든 아이디어를 한 번에 마음에 담고 있지 않을 때 발생하는 행운의 혼란의 제5유형은, 프랑크푸르트가 "개소리"에서 언급한 "부주의함"이나 "무의미함"과는 달리, 의미가 유기적으로 발전하는 "유용한 혼란(fruitful disorder)"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엠프슨은 “But, indeed, human life is so much a matter of juggling with contradictory impulses (Christian-worldly, sociable-independent, and suchlike) that one is accustomed to thinking people are probably sensible if they follow first one, then the other, of two such courses; any inconsistency that it seems possible to act upon shows that they are in possession of the right number of principles, and have a fair title to humanity” (Empson, 1949, p. 197).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일상 속의 모호함 창의적 실천의 fruitful disorder to establish a topology, rather than a geometry를 그리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나왔다. 특히 몸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미셸 세레스의 mixing of the body 방법론과 창의적 실천과 수행에 대한 들뢰즈의 다이아그램 개념에서 영향을 받아 몸을 감싸는 공기면서 피부를 때리는 물방울이고, 귀를 울리는 웃음 소리면서 피부를 긁어오는 차가움이기도 한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텅 비어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분위기는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그리고 존재들에 따라 다르게 파고들며 의미를 변화시키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하는 신기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그것은 ==여기 정의 하나 적을 것== 이기도 했고, 17세기 과학 속에서 그것은 ==여기 정의 하나 적을 것==이기도 했으며,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스크린을 넘고 종이 위를 넘어서 전파되고 저장되고 또 복제되는 구름이기도 하다. 미셸 세르는 *The Five Senses: A Philosophy of Mingled Bodies* [-@serres_five_2016]에서 시각보다 촉각, 그리고 언어적 추상성보다 신체적 유기성을 가진 topology를 통해 감각을 따라가며, "혼합된 몸들의 철학"(Philosophy of Mixed Bodies)을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경험하는 세 가지 유형의 이동을 제시한다. 첫째는 출생지를 떠나는 것, 둘째는 국가적 중심지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진정한 의미의 이동이자 새로운 전 지구적 이주로 "공간에서 기호로, 시골에서 이미지로, 언어에서 코드로, 문화에서 과학으로"(from space to signs, from the countryside to the image, from languages to codes and from cultures to science [-@serres_five_2016, 258])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은 우리를 "정박되지 않은"(unmoored) 상태로 만들고 안정적인 자아나 장소의 감각을 상실하게 한다 [-@serres_five_2016, 258]. 이러한 이동은 "도식, 메시지, 숫자"(schemas, messages and numbers)의 디지털 세계에 거주시키며, "실제"(real)와의 물리적 관계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재관계성은 뒤섞인 정체성, 지역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의 상호 연결성의 이해를 더 요구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러한 새로운 mingled place은 본질적인 경험주의의 기반을 이루며,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which a thousand shapes and colours play, in every imaginable relief; studded with splotches, criss-crossed by long and short, open, closed and broken curves; pitted with wells and valleys, pleated by mountain passes and protuberances [-@serres_five_2016, 310]" 우리의 몸과 감각을 통해 직접 경험하고 이해하는 장소로 이해한다. 이는 불가능한 사건과 상황(singular accidents or events and circumstances)에 의해 형성되는 지형의 복잡성과 깊이를 보여줍니다. 이는 통일된 질서나 단일한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의 실제적 혼합 상태를 반영하며, it is "a supple plain of common sense, the underpinning of the senses where their peculiarities mingle [-@serres_five_2016, 311]". 이는 추상적이고 균질한 합리주의적 공간과는 대조되는, 실제적이고 복잡다단한 경험의 세계로 언어에 의해 덮혀버린 합리성의 공간에서 공간과 시간의 혼합을 상징하는 장소로, 유동적이고 상호작용하는 상태로, 감각과 경험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혼합되는 유기적인 총체로 위치된다. 이 속에서 감각들은 서로 분리된 채 작동하는 기관이 아니라, 서로를 관통하며 섞이고 번역되는 장치로 나타난다. 미각은 발효·숙성·여운 같은 시간의 질을 드러내고, 촉각은 압력·온도·질감의 근접성을 통해 관계의 공간을 재구성하며, 후각은 기류와 장소의 확산을 따라 환경과 몸의 경계를 흐린다. 세르는 이러한 감각의 형식을 통해 추상적 표준화가 만들어낸 매끈한 표면을 거칠게 되돌려 읽고, 감각을 통해 몸과 환경이 뒤엉킨 ‘혼성의 장’으로서 세계가 어떻게 다시 형상화되는지 지형학을 그리며, 감각을 매개로 지식의 형식과 세계의 배치를 새로 그려낸다. [[Bruno Latour]]에 따르면, 데카르트부터 푸코에 이르리까지 정치, 과학, 철학 전반에 걸쳐 과거를 급진적으로 전복하고 단절하는 경향과 다르게, [[Michel Serres]]는 이러한 프랑스 철학의 주류적 경향에서 벗어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비판 철학과의 단절과 함께 "out on rough water he is not looking for a lifeboatlike seasickpassengersb,ut siaysat the stern like a weathered helmsman [@latour_enlightenment_1987, 85]"로 묘사된다. 세르는 텍스트의 commentator로 접근하기 보다 reader이자 해석자로서 우월한 metalanguage로 텍스트를 정제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방식 통해 그는 확실한 것(sure and certain)'의 작은 묶음과 '단순히 믿어지는 것(simply believed)'의 거대한 나머지로 환원의 폭력성을 재고하며, 비판을 철학의 유일한 소명이 아닌 "philosophyis beyond the research front, gambling far in the primitive forest, into the world, cultivating unexpected hybrids [@latour_enlightenment_1987, 96]", 그리고 세상과 함께 하며 그의 allusive, impressionistic and poetic" 글은 "appears technical, preciseand accurate" 하게됨을 주장합니다 [@latour_enlightenment_1987, 85]. 그는 개들이 사납게 지키는 집들을 피해 “blaze a trail off the beaten paths [@serres_conversations_1995, 21]”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것에 contribute something new한 예시로 [[Gilles Deleuze]]를 이야기합니다. [[Michel Serres|Serres]]에게 들뢰즈는 an excellent example of who separated himself from the traditional history of philosophy, from the human sciences, from epistemology, creating a "dynamic movement of free and inventive thinking" [@serres_conversations_1995, 39]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세르와 다른 형태로 linearity를 탈피해 새로운 형태의 Deleuzian event를 구성한다. 그의 이벤트는 세르의 것처럼 discipline를 통과하며 has neither beginning nor end but as only an miliue, 그의 out of joint된연결은 a crumpled handkerchief된 세르의 것처럼 the non-linear dynamics 지도를 그려내고 그의 개념들은 sensations and funtions과 함께 plane의 위를 미끄러져나간다. 들뢰즈의 개념 다이아그램이 어떤 trajectory를 통해 develop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있지만, 그가 푸코의 knowledge and power에서 relational visibal and sayable force diagram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그는 Foucaul [-@deleuze_foucault_1988]에서 *Discipline and Punish* [-@foucault_discipline_1995]를 통해 푸코가 archaeology에서 cartographer로 변모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그가 force를 이해하기 위해 '다이어그램'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지도(map)'에 비유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knowledge와 power에 대한 분석을 통해 푸코에게 force은 소유물이라기보다는 '전략(strategy)'에 가까워지며, 그 효과는 '처분(dispositions), 책략(manoeuvres), 전술(tactics), 기술(techniques), 기능(functionings)'에 기인한다고 이야기한다. 권력은 지배 계급의 '특권'이 아니라, '전략적 위치들의 총체적인 효과(the overall effect of its strategic positions)'로서 행사되는 것이다. 또한 지식은 가시적인 것과 발화 가능한 것을 연결하는 것으로 여기서 force는 그 '전제된 원인(presupposed cause)'으로 위치된다. 반대로, force는 지식이 없으면 행위가 될 수 없으므로 지식을 전제한다.“ 'There is no power relation without the correlative constitution of a field of knowledge that does not presuppose and constitute at the same time power relations [@foucault_discipline_1995, 27]” 여기서 다이아그램은 청각적 또는 시각적 기록 보관소(archive)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지도'이자 '추상적인 기계(abstract machine)'로 작동하며, 도표는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새로운 현실 혹은 새로운 model of truth를 생산하는 것으로 '어떤 장애물이나 마찰로부터 추상화된 기능(a functioning, abstracted from any obstacle [. . .] or friction)'이며, '어떤 특정 용도에서도 분리되어야(detached from any specific use)' 한다 [-@deleuze_foucault_1988, 34]. “The diagram is no longer an auditory or visual archive but a map, a cartography that is coextensive with the whole social field,” 또한 매우 '불안정하거나 유동적(highly unstable or fluid)'이며, 끊임없이 물질과 기능을 뒤섞어 변화를 만듭니다 [-@deleuze_foucault_1988, 34-5]. 이는 '전체 사회장에 걸쳐 있는 비통일적 내재적 원인(non-unifying immanent cause that is coextensive with the whole social field)'이며 이러한 힘의 관계는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this diagram “is like the cause of the concrete assemblages that execute its relations; and these relations between forces take place 'not above' but within the very tissue of the assemblages they produce” [-@deleuze_foucault_1988, 37]. power-relations이 can be affirmed only by being carried out, 그 스스로의 관계 또한 "can be established only by being carried out [-@deleuze_foucault_1988, 102]” 하지만 그럼에도 “Forces always come from the outside, from an outside that is farther away than any form of exteriority. So there are not only particular features taken up by the relations between forces, but particular features of resistance that are apt to modify and overturn these relations and to change the unstable diagram.” (Deleuze, 1988, p. 122) 이에 더 나아가 다이어그램이 연결하는 지점들 외에도 "certain relatively free or unbound points, points of creativity, change and resistance [-@deleuze_foucault_1988, 44]"을 포함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이어그램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안정한 실체로, “If there are many diagrammatic functions and even matters, it is because every diagram is a spatio-temporal multiplicity.” (Deleuze, 1988, p. 34) 기존의 현실과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force의 파괴와 trangression은 푸코가 The Order of Things에서 시작을 함께한 Diego Velázquez's Las Meninas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 그림 속에서 르네상스적 닮음 혹은 유사성에서 고전적 재현으로의 인식론적 전환은 동시에 서로 침투하고 예술 속에서 닮음의 유령은 이후에도 마네의 _Le Bar aux Folies-Bergère_)'(1881-1882)에서 드러나듯 재현주의 이후에도 파열의 순환을 지속한다. 이러한 푸코의 다이아그램은 The Order of Things [-@foucault_order_2012] 이후로 예술에 관한 명확한 언급이 없지만, Tanke를 통해 푸코의 후기 작업인 주체의 윤리적 형성과 연결되고 예술이 닮음과 재현의 불안정한 실체들을 윤리적 방출로 "초역사적 윤리적 범주" [@tanke_foucaults_2009, 177], 규정된 논리와 도덕성, 그리고 장소주의의 수행적 실천, 층위의 경계에서, 내부 전체는 외부 위에 능동적으로 현존을 통해 삶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전환시킨다고 주장합니다. 푸코의 예술적 다이아그램은 윤리적 문제로, 우리는 그 과거를 현재에 맞서 사유할 것이며, 이는 회귀를 위함이 아니라 ‘다가올 시간의 편에 서기 위함’(니체)이다. 즉, 과거를 외부에 능동적이고 현재적인 것으로 만들어, 마침내 무언가 새로운 것이 발생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사유가 언제나 사유 자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유는 자신의 역사(과거)를 사유하지만, 그것이 사유하는 것(현재)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마침내 ‘다르게 사유’(미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deleuze_foucault_1988, 119]".^["층위의 경계에서, 내부 전체는 외부 위에 능동적으로 현존하게 된다. 내부는 과거(긴 시간의 흐름)를 전혀 연속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응축하며, 이를 외부로부터 오는 미래와 대면시키고, 교환하며, 다시 만들어낸다. 사유한다는 것은 현재 시제의 층위, 즉 경계로 작용하는 그곳에 뿌리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나는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내부에 응축된 과거를 사유하는 것을 포함한다(내 안에는 그리스인이 있거나, 기독교인이 있거나, 그 외의 무엇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그 과거를 현재에 맞서 사유할 것이며, 이는 회귀를 위함이 아니라 ‘다가올 시간의 편에 서기 위함’(니체)이다. 즉, 과거를 외부에 능동적이고 현재적인 것으로 만들어, 마침내 무언가 새로운 것이 발생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사유가 언제나 사유 자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유는 자신의 역사(과거)를 사유하지만, 그것이 사유하는 것(현재)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마침내 ‘다르게 사유’(미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deleuze_foucault_1988, 119]".] 그의 예술에 대한 시대적 정신 분석과 다이아그램적 해체는 현대 페인팅과 영상 작업의근대성 안에서 들뢰즈의 프란시스 베이컨 [-@deleuze_francis_2003]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재구성된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해체하고 새로운 다이아그램을 만들어내는 페인팅에 대한 분석처럼 [-@deleuze_francis_2003], 창의적으로 현실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변형시키고, 즉각적인 이미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며,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능력, 즉 상상력과 함께 연결된다. 뒤에 후술할 테지만, 이러한 상상력은 이미 캔버스와 뇌를 채우는 이미지와 그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변화나 융합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지각이나 기억의 영역 속에서 세상은 구성되어질 것이다. ==여기 베이컨에 대한 분석 약간== 들뢰즈에게 이러한 고정을 풀어내고 새로운 매듭을 만들어 내는 꼬아내는 기술은 철학, 예술, 그리고 과학 practices안에서 각각 다른 형태의 결과물을 통해 창조된다. ==여기 들뢰즈 카오스 대한 분석 약간== 나의 글은 그들의 이러한 행위의 동작을 구성 원리로 전유하며 거리가 규정되지 않은 정제되지 않음의 엄격함 속에서 분위기의 topology를 그려나가고자 한다. 철학과 과학, 예술과 문학과 영상 예술의 이질적인 자료들을 병치하고, 그 사이를 이동하고 개념들을 번역하며 각각의 discipline을 간섭한다. 이를 통하여 나는 재현을 우선하는 해석 대신, 사용과 접촉의 절차를 세밀하게 기술하고, 감각의 층위를 시간성·근접성·확산성이라는 작동 특성으로 서술하여 추상적 범주가 놓치기 쉬운 리듬의 차이를 다시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르와 들뢰즈의 방법론적 그리고 개념론적 접근 속에서 경계해야할 것이 있다. 첫째, 세르는 *Humanistic Narratives* [-@serres_humanistic_2025]에서 서사의 분질적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사는 개인('나'), 집단('우리'), 그리고 인류 전체('모두')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으로 위치시킨다. 서사는 혼돈을 응집력 있는 의미로 변환하고, 연속적인 과정과 불연속적인 사건을 연결하며, 인간의 삶과 의식, 지식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수단으로 제시된다. 세르는 고정된 정의가 아닌 내러티브를 음악과 같은 혼돈스러운 배경 속에서 나타나는 멜로디와 같은 풍부하고 유연하며 살아있는 서사로의 "우리"를 강조하며, 전통적인 역사와 집단적 정체성('우리')이 종종 폭력과 분열을 야기했음을 지적한다. 또한 과거의 인간주의는 라틴어나 그리스어 연구에 국한되거나 서구의 관습을 보편화하는 한계가 있었으나, 오늘날의 새로운 인간주의는 고인류학, 생화학 등에서 파생된 위대한 서사를 통해 하나의 가족인 인류의 계보를 추적하며 보편성을 획득한다. 영웅의 역사로 [-@serres_humanistic_2025, 70], 행복의 원천이자 분쟁과 전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로 폭력과 경쟁을 낳아온 민족 혹은 "우리"의 서사는 동시에 역사 서사의 한계, Almost all groups make noise [...] What does the clamour of the city signify, that sound horizon, constant like the murmuring of the sea, if not collective presence, the announcement of the we?” (Serres, 2025, p. 84) 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기후 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문제('세계-대상')에 직면하여 더 긴 서사 속, 아프리카 대록에서 수에즈 지협, 순다 제도에서 호주 대륙으로, 그리고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한 통합된 새로운 인류 공동체('모두')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위대한 서사'를 통해 과거의 분리된 역사('짧은 시간')와 현재를 연결하고, 새로운 인본주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은, 시기적절하고 타당한 논의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we)’라는 호명은 여전히 "우리"에 속하지 않은 개념들과 감각들, 그리고 아이디어들을 서구 근대의 특정한 역사와 지적 전통 속에 포함시켜 버리는 실수를 할 수 있다. 『오감』에서 그는 항해·과학사·그리스‧라틴 어원, 파리의 도시적 일상과 같은 유럽 중심의 지평에서 사례를 끌어오며, 선상 화재 훈련과 조타의 감각(연기 속에서 시각과 청각이 무력화될 때 접촉이 마지막 안내가 되는 상황), 조타수가 배 전체를 “나”로 호명하는 장면처럼(몸-도구-환경이 한 몸으로 엮이는 감각의 배치), 체조·구기에서 공이나 철봉을 둘러싸며 몸이 ‘바깥의 점’에 영혼을 걸어두는 순간들을 대조적으로 펼친다. 이때 그의 다양한 형태의 ‘우리’는 인류 일반이라기보다 그러한 역사·경험을 공유한 가상적이며 abstrac의 공동체를 더 강하게 connote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라는 가상의 보편적 서사를 구축하기보다, 하나의 주제를 여러 예시들을 통해 다양한 소음을 강화하는 방향을 향하고자 한다. 또한, 세르는 감각의 위계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상징적 대비를 과감히 구사한다. ‘안개와 그림자’의 대목에서 그는 유클리드적 거리·측정이 유지되는 그림자(시각 중심)와, 접촉의 위상공간으로 바뀌는 안개(촉각 중심)를 맞붙이며, 공간을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그의 방향성은 시각보다 배제되어 온 다른 감각들, 특히 촉각에 대한 그의 차별적 애정을 포함해,의 자리를 복권시키고, 시각·청각·후각과 같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감각들 외에도, 이름이 붙은 감각이 상당히 많으며, 이름이 붙지 않은 감각들은 무한히 많다는 사실을 통해 위계성과 sergated sensations의 전통을 복잡하게 만들고 변형시키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드러내는 특정 요소들에 대한 대비, 시각과 촉각을 포함해 두꺼운 피부/얇은 피부의 변증법 속에서의 논쟁과 전투의 두꺼운 갑옷과 잔주름과 흔적을 받아 적는 얇은 피부, 표준화/특이성, 즉시성/숙성의 도식 속의 코카콜라와 와인 등의 예시들 속에서 그가 또 다른 위계성의 형태를 구성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나는 『오감』의 장면들—연기로 눈과 귀가 무력화될 때 만(觸)이 길이 되는 순간, 피부를 캔버스·베일과 등가로 세우는 회화적 장치, 안개가 “존재론을 어지럽히는” 위상적 변형—을 분석의 동력으로 삼되, ‘몸/감각’과 ‘언어/추상’을 본질적 대립으로 고정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내 감각과 언어로 재배치하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내 텍스트는 개념의 정의를 목적으로 삼기보다, 다양한 감각·장소·사용의 관계망을 따라 분석이 전개되는 글쓰기, 읽는 동안 배치가 실제로 달라지는 글쓰기를 목표로 삼는다. [@bellour_image_2010] [@de_bruyn_topological_2006] ## 과학과 낭만주의의 시작 이러한 모호성은 언어의 성질에만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 속에서 포착하고 형상화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모호성은 공기와 분위기처럼 비가시적이면서도 정동적·물질적으로 작동하는 매개와 닮아 있으며, 그 역사적 전개 역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확장되는 궤적 속에 자리한다. 부재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예상치 못한 풍부한 이미지의 폭발을 일으키는 능력 모호성은 대기, ambiance, mood, and atmosphere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확장되는 역사 속에서, 증류되고, marinated되며 "서사적" 변화를 이어왔다. Thomas Ford의 2018년 저서는 '대기(atmosphere)'의 의미론적 역사에 중요한 기여를 하며, 의미사(semantic history)와 낭만주의 미학과의 관련성을 분석한다 [-@ford_wordsworth_2018]. 그는 지성사와 문헌학에 기반하여, atmosphere와 _Stimmung_ 이 1800년경을 전후해 은유적이면서도 물질성과 관련된 복합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칸트, 키츠, 아도르노와 함께 헤르더, 괴테, 노발리스, 루크 하워드, 토머스 베도스, 험프리 데이비, 마이클 패러데이 등의 인물도 흥미롭게 분석한다. Ford는 이어지는 저작 『Atmospheric Fictions』 [-@ford_atmospheric_2021]에서 1830년대 후반에 등장한 세 가지 인식론적 단절—컴퓨터(배비지), 공산주의(마르크스), 기후 변화(러스킨)—이 낭만주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현대의 ‘탈-낭만주의’ 시대를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밝힌다. 동시에, 이러한 단절이 낭만주의의 핵심 원칙을 형식화하는 계기로 작용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논의는 공기 혹은 대기라는 개념이 단지 자연의 배경이 아닌, 역사적·형이상학적·정동적 사유의 무대로 기능해왔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_The Matter of Air_ [-@connor_matter_2010]는 공기에 대한 인류의 이해와 경험이 우리의 자아 개념, 예술, 과학, 사회 구조를 어떻게 형성해왔는지를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에테르에 대한 개념 이후 18세기 공기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함께, 고대에서는 꿈에서나 가능했던 occupying the airt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대략 4세기 동안의 몰두와 함께 점점 더 공기가 인간의 존재 상태를 표현하는 매개로 다가왔으며, 인간은 공기를 거울처럼, 영혼과 공기가 닮아있다고 상상한 반면 공기성은 또한 망상, 하찮음, 광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저자는 공기가 오랜 세월 동안 영혼, 생명, 비물질성을 상징하는 '아무것도 아님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지만, 과학적 근대가 도래하면서 관찰, 실험, 사변의 대상이 되어 기계적 힘과 화학적 성질이 이해되는 '가스'와 같은 새로운 용어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다른 원소들과 달리 공기는 '낮은' 대기권의 common air와 '높은'으로 이해되는 고대 그리스의 에테르의 두가지 형태로 상상되었다. 공기는 개방성과 밀폐성이라는 상반된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몸과 마음이 공기역학적 또는 기계적 시스템으로 이해되는 경향으로 이어졌고('영향 기계'와 같은 망상 포함), 19세기에는 가스 조명 기술 혁신을 통해 공기가 추상적인 물질이자 공공재로 상품화되고 '가벼움'의 이상을 상징하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핵심 관심사는, 과학적 인식이 공기를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객체로 구성해왔는지, 더 나아가 공기 자체를 ‘객체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보다 가볍고, 휘발적이며, 가상적이고 유연한 양태—으로 형성해왔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주요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중 하나는 토리첼리와 갈릴레이의 공기가 무게와 탄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냄과, 특히 토리첼리의 실험은 자연에 진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 보일의 여어 펌프 실험을 통해 공기를 '밖에서' 보는 방법 제시(1662), 얀 밥티스트 반 헬몬트(Jan Baptiste van Helmont)가 '가스(gas)'라는 용어를 만든 17세기 초부터 시작된 공기 화학(pneumatic chemistry), 샤를의 법칙(1787), 19세기 초 환자의 생각과 감정을 파동이나 광선, 신비한 힘을 통해 통제하는 것으로 상상된 Victor Tausk가 명명한 The Influencing Machine, 19세기 제임스 틸리 매튜스(James Tilly Matthews)의 물질화하고 기계화하는 상상 속 기계장치 '에어룸(air-loom)' , 게이뤼삭의 법칙(1809),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정교하게 통합한 아보가드로의 법칙(1811)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물리학적 발견들 속에서 공기의 압력, 부피, 온도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규명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 19세기 후반부터 음향적 노이즈(무선 통신 잡음)등과 같은 형태의 발명품을 통해 공기가 더 이상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라 혼잡하고 오염되며 소진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의 변화가 이어진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Connor는 공기에 대한 과학적, 기술적 이해가 어떻게 새로운 종류의 객체를 탄생시키고 공기 자체를 '객체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 즉 가볍고, 휘발성 있고, 가상적이며, 다재다능한 방식으로 변화시켰는지를 다각도로 탐구하며, "보일(Robert Boyle)과 그를 따르던 실험자들이 공기를 대상으로 한 운동학적 실험을 통해 추구한 것은 공기의 보편적 조건을 확립하는 일"이었음에도,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보일 자신은 공기가 *에플루비아(effluvia)* 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1692년의 『공기에 대한 일반사(General History of the Air)』에서 관심을 둔 것은, 그가 “공기의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성분들”이라 부른 것이었다(전집, 권12, p.12). 그는 공기라는 말로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순수한 공기의 원소도, 또 다른 이들이 말하는 에테르적 혹은 천상적 물질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전집, 권12, p.12). 그러나 코너의 공기에 대한 인류의 이해와 경험이 우리의 자아 개념, 예술, 과학, 그리고 사회 구조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심층적으로 탐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영향을 주는 이분법적 구별은 사회와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적 공기에 대한 이해에 한계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의 확장은 Jayne Elizabeth Lewis의 연구를 통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코너가 공기를 형이상학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바라본다면, Lewis는 공기를 언어, 곧 글쓰기, 재현, 더 나아가 영문학 전체와의 친화성 속에서 사유한다. 그녀는 _Air's Appearance_ [-@lewis_airs_2012]에서 공기가 언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며, 그녀의 연구는 과학적 신조어로서의 ‘atmosphere’를 참조하긴 하지만, 문학적 분위기가 자연철학의 개념들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반영하거나 그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공동 출현"했음을 강조한다. 이 글은 영국 소설에서 '대기(atmosphere)'라는 개념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특히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의 문학과 과학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시작으로, 저자는 로버트 보일, 조지프 프리스틀리의 과학적 작업과 함께 밀튼의 『실낙원』, 포프의 『머리채 강탈』,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및 『역병 연대기』, 필딩의 『톰 존스』, 레녹스의 『여성 돈키호테』, 프리스틀리와 앤 래드클리프 등의 문학 작품들을 병렬적으로 정밀하게 읽어나가며, 작가들의 소설 기법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여 미묘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문학적 경험을 형성했는지를 강조한다. 이러한 문학적 분위기는 단순히 은유적인 확장이 아니라, 공기의 문리적 특성에 대한 당대의 이해에서 비롯된 '실재감(air of reality)'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공기는 가볍고 불확실하며, 얇고 보이지 않으며,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물질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공기의 본질적 애매모호함은 문학, 특히 '허구(fiction)'로 스스로를 제시하는 글쓰기가 '문자적 진실성(literal truth)'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되었다. 즉, 공기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 것처럼, 문학도 그 자체의 분위기를 통해 현실감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적 경험은 단순히 대상을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전이(transference)를 통해 깊이와 볼륨감을 형성하며 독자를 텍스트 속의 계충화되고 영향력 있는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분위기적 문학은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기의 가시적으로 변화하는 형태를 통해 계몽주의의 창의적이고 포괄적이며 자기 비판적인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지진을 공기 중 가연성 물질로 인한 '대기 지진(airquake)'으로 해석하거나(1749-50년 런던 지진), 전염병을 유독성 증기 파괴로 예방하는 '은총'으로 여기는 당대인의 관점은, 영국 자체가 형태와 내용의 끊임없는 교환의 결과물인 '대기권(aerosphere)'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헨리 필딩(Henry Fielding)의 *톰 존스(Tom Jones)* 는 이러한 '소멸' 개념을 잘 보여줍니다. 소설 속 야외 장면과 여관, 오두막 같은 불안정한 공간들은 안과 밖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연극 무대가 인쇄된 페이지로 옮겨지면서 (쫓겨남) '희미한 신비감'을 창조한다. 인물들의 '기질(Disposition)' 또한 환경과 불가분하게 연결되며, 공기의 '탄성(elasticity)'과 '소멸'은 현실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문학적 장치로 사용된다. 당대의 점성술 연감은, 17세기 유행을 거쳐 18세기에 이르러는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적으로 유행하기도 했으며, 점성술의 '연대기를 경험으로, 인물을 인상으로' 바꾸는 정신적 기질을 형성했다. 필딩이 _톰 존스_ 의 연대기를 구성할 때 연감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이는 독자들이 '매개된 세계' 속에 존재하도록 훈련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점성술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의 혼합'을 특징으로 하여, 인물과 환경의 관계를 '우연한 사건들(accidents)'로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또한 샬럿 레녹스(Charlotte Lennox)의 "여성 돈키호테(The Female Quixote)" (1752)는 문학적 분위기가 초자연적 믿음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였고, 이 때 주인공 아라벨라(Arabella)의 차가움(coolness)가 그녀의 경험과 독자의 경험을 연결하는 핵심 요소로 등장한다. 감정적 거리를 통해 친밀감을 형성하는 매개된 글쓰기의 힘을 보여주며, 그녀의 이야기는 공중에 떠 있는 형태를 통해 현실감을 획득한다. 또한 조셉 글랜빌(Joseph Glanvill)의 "사두케우스 승리(Saducismus Triumphatus)"와 같은 당대의 유령 이야기들은 '진실성' 주장이 담론적 증거가 아닌, 물질적 효과와 정신적 원인이 혼합된 '감각'의 원천이 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레녹스는 이를 통해 집단적 광기(collective folie)와 사회적 관계를 탐구하며 문학이 현실을 어떻게 구성했는가 드러낸다. 또한, 앤 래드클리프(Ann Radcliffe)의 고딕 소설, 특히 "우돌포의 미스터리(The Mysteries of Udolpho)" (1794)와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의 기체 화학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보이며 래드클리프의 작품 속 분위기는 프리스틀리의 인위적인 공기와(Factitious Airs)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인공적인 구성임에도 통일되고 즉각적인 경험을 제공하며 이는 과학적 탐구가 문학적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래드클리프의 '공기'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불안', '우울', '두려움'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moods')을 유발하고 표현하는 매체로 기능한다. 이는 독자가 텍스트의 분위기 속에 '포함되는(contained)' 감각을 통해 문학적 친밀감을 형성한다는 새커리(Thackeray)의 관점과도 연결된다. 프리스틀리의 실험은 '언어를 통해 독자를 상상의 인위적인 공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취하며, 래드클리프의 글쓰기 역시 유사하게 독자를 '구성되고 재구성된' 환경으로 이끈다. 이는 문학적 분위기가 인지적 과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프리스틀리가 '공통 공기'를 '영구히 불안정한 구성'으로 본 것처럼, 래드클리프의 작품에서 '공기'는 인물과 환경의 '소멸(dissipation)'과 '어둠(gloom)'을 표현하며, 이는 지식의 본질적인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래드클리프의 문학은 '선적 구성(linear composition)'을 통해 독특한 '분위기'를 창조하고, 이는 실재감 (air of reality)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물리적 실재를 참조하기보다 매개된 경험 자체를 강조한다. 래드클리프의 공기는 인물을 소멸시키는 매체로 작용하며, 이는 문학적 지식이 텍스트 외부로 번역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래드클리프는 공기를 소설적 형태의 유리병(phial of fictional form)에 가두어, 독자를 순전히 허구적인 매체 속에 갇히게 만든다. 토마스 베도스(Thomas Beddoes)의 '기체 의학 기관(Pneumatic Medical Institution)'은 '인위적인 공기'의 치료적 잠재력을 탐구했는데, 이는 당대 고딕 소설의 건축적 형태와 유사하며, '가상적 공기(factitious airs)'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릴'을 제공한다. 이는 과학적, 의료적 담론이 문학적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이 책은 18세기 영국 소설의 '분위기'가 단순한 문학적 장치를 넘어, 당시 과학적, 철학적, 사회적 담론과 깊이 연결되어 독자의 경험과 현실 인식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고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18세기 소설이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독자들이 세상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매개 환경을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합니다. ==문학적 분위기와 과학적 분위기의 ‘공동 현(co-emergence) ==을 통해서 그녀는 서로 다른 공기에 대한 개념들을 현대 문학의 "분위기"에 대한 계보로 짜맞추며, "기체 화학자들도 '강박적인 작가이자 자의식적인 문학적 스타일리스트'였다"고 언급하며, 언어를 통해 공기를 ‘존재하게’ 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더 신비롭게 만들었다. 해당 시대의 작가들에게 분위기(atmosphere)는 외형(appearance)이며, 우리가 ‘경험’이라 부르는 것은 필연적으로 매개된 것이라는 점을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Pfau, Connor, Lewis는 서로 다른 접근을 통해 공기 혹은 분위기라는 개념을 문학적 사유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Pfau는 ‘Stimmung(조율)’ 개념을 통해 감정과 정동이 주체 바깥에서 조율되고 공기처럼 퍼지는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낭만주의 미학과 철학적 감수성의 복합적 구조를 조망한다. Connor는 공기를 단순한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감각, 언어, 존재론을 형성하는 물질이자 혼합된 몸으로 사유하며, 과학과 상상력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근대 이후 공기의 의미 변화를 추적한다. 반면 Lewis는 문학 텍스트 속에서 atmosphere가 단순히 과학 개념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서사의 작용 속에서 과학적 개념과 ‘공동으로 출현(co-emerge)’했음을 강조하며, 공기가 문학적 현실감과 독자 경험을 구성하는 핵심 매개임을 보여준다. 세 이론가는 각기 다른 시대와 분야에서 출발했지만, 공통적으로 공기와 분위기를 단순한 외부 환경이 아니라, 감정과 인식, 주체와 세계를 매개하고 구성하는 정동적이고 물질적인 장으로 재사유하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공기가 과학적 분석의 대상임과 동시에 문학적,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기능하며, 현대적 의미의 ‘분위기’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이론화되었으며, [[Steven Connor|Connor]]가 *The Matter of Air* [-@connor_matter_2010]의 마지막 챕터에서 이야기하듯, 과거에는 무게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지만 현대에는 역설적으로 '가벼움으로부터의 면제'를 추구하게 되면서, 공기가 인간의 자아와 관계 맺기 어려워지는 존재론적 위기를 반영하는 '절대적인 가벼움(Absolute Levity)'의 역설과 연결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기의 역사적 변형은, 세르가 『Atlas』에서 묘사한 ‘감각·물질·정보’의 삼중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세르는 공기를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물질과 정보가 감각적 매개를 통해 서로를 생성하는 장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사유는 낭만주의자들이 사유한 비물질적·정동적 세계와 교차하며, 나아가 Pfau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개념인 ‘Stimmung(정조)’을 재맥락화하여 제시하는, 감정과 정동이 주체 바깥에서 조율되는 상태의 역사적 변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Connor에 따르면, 공기와 연결되는 영혼에 대한 의해는 한때 자기 안에 거주하는 친밀한 타자성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적 존재였지만, 바로 그 이유로 분리되고 감춰진 채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내면이 외부화된 형상, 즉 탄력적으로 멀어지는 본질의 한 형식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영혼은 본질적으로 당신이 누구인지의 이름이면서도, 그것을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조건의 이름 [@connor_matter_2010, 335]”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영혼이 신이나 영원의 소유로 간주되었고, 악마적 침탈의 위협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Connor는 이러한 영혼 개념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현재를 지적하면서,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완전히 소속된, 더 이상 외부화되지 않는 영혼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오히려 그것은 우리 내부에 흡수되어 사라졌으며, 우리는 자신 안으로 스며든 자아와 다시 관계 맺는 법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영혼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친밀하면서도 불가해한 어떤 것이 될 수 있었으나, 지금 우리의 영혼은 완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 되었고, 그 결과 우리 안으로 사라졌으며, 우리는 그 안으로 녹아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초과(self-exceeding)’가 되어야 하며,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말한 ‘존재하다’(exist)라는 타동적 의미를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Jean-Paul Sartre, Being and Nothingness: An Essay on Phenomenological Ontology, trans. Hazel E. Barnes (London, 1984), p. 329.] 현대 예술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에테르적이거나 성운 같은 상태들, 연기, 안개, 흐릿함, 구름, 에 대한 집착은, 추출된 영혼의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다시 회복하려는 안타까운 시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 영혼을 다시금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꿈꾸고,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너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시각적 재현을 회피하거나 물질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태를 갖지 않은 상태, 즉 거의 ‘아무것도 아님’에 가까운 것들을 통해 감각과 존재에 대한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는 연기나 안개, 먼지, 김과 같은 미세하고 일시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무형성, 사라짐, 경계 없음, 비물질성의 경험을 제공하며, 그것이야말로 현대 예술이 보이지 않고 포획할 수 없는 물질의 깊이를 다시 상상하기 위한 한 방식으로 기능한다고 본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 흐릿한 순간을 포착하려 하고, 어떤 형상도 완전히 고정되지 않은 상태를 통해 지각과 정서의 여백을 마련하며, 바로 그 여백 속에서 관객은 새로운 방식으로 ‘느낌’과 ‘거리’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현대 예술의 미학적 경향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혼과 자아, 그리고 세계 사이의 거리와 관계 맺기의 방식이 변화했다는 점에서, 이는 곧 로젠이 지적하는 디지털 시대의 신체 경험 소멸과도 맞닿아 있다. 로젠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감각과 세계의 매개 조건이 약화되거나 상실되는 과정에 대한 경고이며, 이는 다마지오가 강조한 신경생물학적 감각 통합의 필요성과도 교차한다. 결국, 영혼·자아·감각을 하나의 유기적 구조로 보고, 그것이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재사유하는 것은 역사적·미학적 맥락 속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하는 과제가 된다. ## 다시 의미 찾기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전통적인 감정, 행복과 슬픔을 느끼는 지점에 대한 전통적인 답은, 느끼게 해주는 것은 뇌이며 특정 메커니즘이 있다는 생각과는 달리 “몸에 대한 지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몸과 뇌 모두에 대한 지각이 합쳐진 혼합물인 것이다.” [@damasio_feeling_2021, 26] 라고 이야기한다. 몸과 신경계는 직접적이고 풍부한 상호작용을 하고 뇌를 핵심으로 하는 신경계는 완전히 몸의 영역 안에 위치하여 “The nervous system, including its natural core, the brain, is located in its entirety within the territory of the body proper and is fully conversant with it.” (Damasio and Damasio, 2021, p. 7) 느낌 [[feeling]] 은 전통적인 생각과는 달리 “몸에 대한 지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몸과 뇌 모두에 대한 지각이 합쳐진 혼합물인 것이다.” (Damasio, 2021, p. 26) 그는 “내향적이며 사적인” 느낌feeling과 “외향적이며 공적인” 감정emotion을 구분하며, 우리의 의식은 무엇인가 happen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시작하고, "it is a feeling that accompanies the making of any kind of image—visual, auditory, tactile, visceral—within our living organisms" [@damasio_feeling_2000-e, loc. 28 of 346] 느낌은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그리고 본능적 이미지, 즉 패턴 지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신경생물학적으로 ‘지도화된 패턴들’이 우리가 이미지라 고 부르는 끼음속 사건들’로 변화한다고 할 수 있다” [@damasio_feeling_2021, 79]. 이를 기반으로 그는 “감각sensing이라는 말은 다른 완전한 생명체의 ‘존재’, 다 른 생명체의 표면에 위치한 분자의 ‘존재’, 다른 생명체가 분 비한 분자의 ‘존재’를 감지detecting한다는 뜻” [@damasio_feeling_2021, 37] 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지능 (명시적 explicit 지능)과 박테리아의 지능 (비명시적 non-explicit)은 수십억 년이라는 진화 시간만큼의 차이가 있다. 즉 범위와 역할 면에서 다르다. 인간의 경우는 명시적 지능이 마음을 필요로 하며 마음과 관련해서 출현한 것들, 느낌과 의식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명시적 지능은 지각 perception, 기억 , 추론 reasoning 도 필요로 한다. 마음의 내용은 사물과 행동을 표상하는, 공간적으로 지도화된 패턴에 기초를 둔다. 이러한 지도화된 패턴은 관찰이 가능하고 조작(추론)이 가능하다. 다른 포유류와의 차이는 단지 반응을 할 때의 발명의 범위, 복잡성과 효율성의 정도 → 반응의 차이가 특정한 종이 가진 의식의 속성이 아니라 지적 능력과 관련된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미셸 세르의 알고리즘이 타르트 타탱을 만드는 법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며 “‘마음을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해’ 불멸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유기체 안의 살아 있는 뇌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이런 일이 레시피 만을 컴퓨터에 전송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damasio_feeling_2021, 91] ### Serres 그가 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전통적 감각은 몸이 하나의 도시로 다섯개의 감각들로 이루어진 도시 = 몸이라는 개념으로 발달되어있지만 [[Michel Serres|Serres]]의 경우 감각이 바로 the mixing of the body라고 말한다. = 감각은 육체의 혼합이다. establish a topology (landscape) rather than a geometry of knowledge 이전에 순진했던 육체와 물질을 말들이 지배하게 되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육체가 자유롭고 여유롭게 달리고 감각을 즐길 수 있었던 파라다이스 시대를 꿈꾸는 것뿐입니다. 반란이 일어나려면 오감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serres_angels_1995, 71] 그의 몸은 현재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만드는 몸입니다. 몸은 감각에 의존하지만, 감각은 스스로 뛰어내리거나 옆에 있는 몸의 힘입니다. 저는 감각들이 어떤 시간성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볼 것이고, Serres가 부정, 고통, 죽음을 배제하는 것에 다양성의 일원론이 있다고 제안할 것입니다. 가진 전통적인 방식의 [[phenomenology]]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과 함께, Serres는 _The Five Senses: A Philosophy of Mingled Bodies_ [@serres_five_2009] 책 서두를 [[Michel Serres|Serres]]는 [[데카르트]]의 질문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로 시작한다. 그는 영혼은 몸 한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but rather in the contingencies of the body with itself, and with its environment.” (Connor, 2005, p. 320) 크리스틴 로젠은 The Extinction of Experience [-@rosen_extinction_2024]에서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신체적 경험을 안타까워하며, points out that "we arrived here by allowing valuable human experiences to wither or die, sometimes intentionally and sometimes unintentionally [-@rosen_extinction_2024, loc. 8 of 290]”. Many of the current technologies seem to take the view that people are the problem to be solved, which leads to a sense of mistrust and reliance on technology. Quoting mathematician Isaac Milner's 1794 text, she further argues, if the worry during the Enlightenment was the forgotten souls, the contemporary fear is that many of us have forgotten we have bodies [-@rosen_extinction_2024, loc. 15 of 290]. 그녀의 contemporary technology-filled world에 대한 비판은 현실과 가상 세상의 분간불가능성, 매개되어진 경험들, 현실에 대한 disengagement and lack of looking the real world, 소비의 대상이 된 경험들을 가로지른다. 이러한 가상 세상의 terms가 cloud 혹은 하늘과 연결되면서도 신체의 경험은, 그녀가 Mcsorley's Old Ale House in the East Village in New York City in the 1940에 대한 Joseph Mitchell의 묘사를 읽으며 "Reading Mitchell’s stories, you can almost smell the smoke and raw onions that permeated the atmosphere [-@rosen_extinction_2024, loc. 190 of 290]" 라고 표현한 것처럼 atmospehre로 연결되는 것일까?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1939년 작품인 Finnegans Wake [-@joyce_finnegans_2012] 에서 “아이스페이스iSpace”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아이스페이스는 공간이 시간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음을 표현하는(표의적이고 예지적인) 단어인 동시에 장소에는 한계가 있지만 공간에는 제한이 없음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First of all, she suggests the meaning of *medium* is a term that can be related to the geometrical solid form, homogeneous stable while, following [[Michel Serres]], mixture indicates hybridity and fluidity, therefore, useful to see components and sensory mixture, even further, as a milieu. medium은 언제나 중간 사이 혹은 Mixture의 형태만을 이야기하는가? [[Michel Serres|Serres]]의 경우는 medium의 solid geometry (압스트랙, homogenous, concentrated, and stable)의 이미지보다 Mixture를 사용함으로 fluctuate한 지점을 더 강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serres_five_2009]], 80) > “One may wish to think of any medium as always mixed, in the sense that it is related to, and mediates, our sensory experiences, and is as mixed as our sensorium.” (Bruno, 2022, p. 24) “Mixtures, in the poetic words of Michel Serres, create “veils of proximity, layers, films, membranes. ([[@serres_five_2009]], 81)" ([[@bruno_atmospheres_2022]], 24) 공기 ambiance mood를 공간에서 생각하기 [@bachelard_poetics_1994]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신체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포함해서 우리 내부의 감각들과의 총합적 통합을 강조한다. 반면, 로젠이 지적하는 신체 경험의 소멸과 다마지오가 제시한 신경생물학적 감각 통합의 관점은, 오늘날 디지털 환경 속에서 신체와 감각의 관계를 재사유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이를 역사적·미학적 계보 속에 위치시킬 필요성을 제기한다. 특히 감각의 총체성과 그 매개 조건에 대한 논의는, 근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대기’와 ‘분위기’에 대한 사유와 접속되며, 이는 낭만주의자들이 구축한 비물질적이면서도 물질적인 환경—즉 공기와 기후, 그리고 그것이 빚어내는 정동적 장(場)—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이러한 맥락에서, [[Michel Serres|세르]]는 Atlas (1994) 책을 통해서 기상학의 난기류 속에서 하나의 은유를, 아니, 정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진정한 *마파문디(mappamundi, 중세식 세계지도 혹은 세계관의 은유)* 를 끌어낸다. 우리는 일종의 정보적 날씨 속에 살고 있으며, 이 세계에서 아틀라스는 영토이자, 더 나아가 *공기-토리(air-itory)* 가 된다. 단단한 물체의 물리학, 명확한 경계와 외곽선으로 정의되는 고체의 세계는, 열역학의 시대에조차 적합하지 않으며, 정보의 흐름으로 정의되는 오늘날의 세계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세르의 글에서 휘발성의 혼합된 요소들이 그보다 더 휘발적인 정보의 물질적 지지대를 이루고, 그 혼합과 형상화가 우주의 형성과 긴밀히 맞물린다고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논리적 메시지는 물질의 흐름 속 일부로 존재하며, 바로 그 흐름에서 태어난다. Michel Serres는 이러한 확장의 관념을 한 걸음 더 밀어붙여, 공기를 감각·물질·정보가 서로 얽히며 세계를 형성하는 장으로 사유한다. 그는 이를 통해 공기가 단순한 물리적 매체가 아니라, 세계와 주체, 그리고 의미가 생성되는 동역학적 공간임을 드러낸다. “For many writers, the air signifies the wholly open, whether in the mode of yearning dream (Bachelard), or melancholy regret (Irigaray), or of impassioned possibility (Serres).” (Connor, 2010, p. 35) 많은 사유자들에게 공기는 완전히 열린 것, 곧 전면적 개방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바슐라르에게는 동경의 꿈의 형식으로, 이리가라이에게는 우울한 상실감의 형식으로, 세르에게는 열정적인 가능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그리고 “솟아오르라, 폭풍을 맞이하라…… 아프로디테는 파도 속에서 나신으로, 아름다움으로 나타나고, 언어는 세계의 육체로부터 솟아오르며, 다시금 그것을 ‘세계’로 만들어낸다 Michel Serres, Atlas (Paris, 1994), p. 112 [author translation].”는 비유는, 감각적 매개와 물질적 흐름, 그리고 세계의 생성이 불가분하게 얽혀 있음을 시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감각·물질·정보의 삼중적 관계에 대한 사유는, 낭만주의자들이 공기와 대기를 사유하며 구축했던 정동적·비물질적 세계와 상호 조명하는 관계를 이루며, Pfau가 『Romantic Moods』에서 제시하는 ‘Stimmung’ 개념과 그 역사적 변형을 이해하는 하나의 토대를 제공한다. > The volatile, mixed elements form material supports for an information which is yet more volatile, and the mingling or modelling of which concurs, better still, with the formation of the Universe, which all this concreteness allows to grow. The logical message forms part of the flow of matter and is born of it: rise up, welcome storms . . . Aphrodite, naked and beautiful, appears from the waves, the Word emerges from the flesh of the world and, in return, creates it as World. > > 휘발성의 혼합된 요소들은, 그것보다 더 휘발적인 정보의 물질적 지지대를 이룬다. 이러한 혼합과 형상화는 우주의 형성과 더욱 밀접하게 맞물린다. 바로 이러한 구체성이 우주가 자라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메시지는 물질의 흐름 속 일부로 존재하며, 바로 그 흐름에서 태어난다. 솟아오르라, 폭풍을 맞이하라…… 아프로디테는 파도 속에서 나신으로, 아름다움으로 나타나고, 언어는 세계의 육체로부터 솟아오르며, 다시금 그것을 ‘세계’로 만들어낸다. Michel Serres, Atlas (Paris, 1994), p. 112 [author translation]. Thomas Pfau의 『Romantic Moods』 [-@pfau_romantic_2005]는 낭만주의자들의 지속적인 칸트 미학과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주체적인 감정의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비주관적인 감정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Stimmung'(조율) 개념을 대기, 분위기, 기후와 연결한다. Emily Rohrbach(2016)는 이 시기의 작가들—특히 키츠(Keats)—가 역사를 안개 같은 ‘미스트(mist)’로 인식했다고 보는데, 그것은 포착하기 어렵고 비선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공중으로 죽어 들어가 공기의 정화된 상태에 도달하려는 열망이 강했다. 셸리(Shelley)의 화장 사례(==이거 사례 설명 자세히==)는 현대 화장의 시작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셸리의 화장은 육체가 재로 변하고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것은 "또 다른 더 밝은 삶의 유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관념과 연결되었던 반면 (==코너에서 레퍼런스 찾아오기==), 19세기 후반, 공기가 존 틴달(John Tyndall)이 말한 “에테르의 격동(aetherial commotion)”의 장, 공기의 실제적·상상적 조건에 있어 놀라운 변화의 시작이 나타남과 함께, 전통적으로 시적인 방식으로 공기는 일종의 빈 공간이자, ‘열림’이라는 개념 자체의 특권적 매개자라는 관념은 공기의 혼잡, 오염, 고갈 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충돌하게 되었다. 공기를 하나의 공허로 이해하던 전통적이고 시적인 관념은, 이제 혼잡, 오염, 소진에 시달리는 공기의 ‘과밀함’이라는 감각과 경쟁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계보는 비선형적이고 비물질 적인 실재감은 낭만적, 자유롭고 확장적인 공기 혹은 분위기를 지칭하는 계보와 연결되는 정보가 구름(cloud) 속에서 borderless expansion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그것은 자본화된 가벼움에 대한 추구성과 함께 부패함과 기온위기, 바이러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산재하는 미세 플라스틱 등의 오염 물질들을 향한 두려움의 양면성을 가지게되었다. 코너가 주장했듯 그러나 공기는 더 이상 무한하고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 아니라 통신, 운송, 전쟁(독가스) 등 인간 활동으로 인해 점점 더 점유되고 포화되는 공간, 즉 '사멸(mortification)'되는 공기가 되었으며, 19세기 말부터는 단순한 투명한 매개체가 아닌 간섭과 잡음으로 특징지어지는 '혼합된 몸'이자 환경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형태의 변화는 과학적 근대만을 통한 형성은 아니었다. 코너는 마리나 워너의 『판타스마고리아』를 참조하며, 과거에는 낭만주의가 과학의 건조한 시선에 맞서 상상력을 회복적이고 치유적인 힘으로 그려왔지만, 이제는 쿼크와 렙톤이 요정과 실프를 대신하게 된 세계 속에서 예술가와 작가들은 또 다른 역할을 요청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워너가 말하듯, 영은 더 이상 비물질적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물질적인 매체를 통해 실질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기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각과 매개의 실질적인 조건으로 재사유된다. 감각과 매개의 실질적인 조건으로 재사유된다. 다시 말해, 공기는 곧 매개(mediation) 그 자체가 되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거품들(Schäume)』(87쪽)에서 ‘표출(explicitation)’이라 부른 것은, 자기 바깥으로의 극한적이고 황홀한 이탈 속에서 우리가 자신의 몰입 상태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의 세 번째 권 _Schäume_ 에서는 이러한 사유를 현대 세계에 적용하며, 전체론적 관점이 아니라 ‘다중 구체론(polyspherology)’이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다중 구체론은 ‘다초점적(multifocal), 다원적(multiperspectival), 이계층적(heterarchical)’ 방식으로, 서로 다른 구체들이 형성하는 복합적인 응집체로서의 세계를 사유한다. 미시 구체론(microspherology)의 지배적 은유가 ‘비눗방울’이고, 거시 구체론(macrospherology)의 은유가 ‘지구(글로브)’라면, 현대 세계의 다중 구체론적 조건을 가장 적확하고 유연하게 설명하는 은유는 ‘거품(foam)’이다. 공기를 원소(elements)나 물질(substance)이 아니라 하나의 차원(dimension)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종종 무한함, 경계 없음, 초월성의 관념을 함께 사유하게 된다. 이러한 초월성은 특히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와 루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의 시적·철학적 상상력 안에서 깊이 탐구되었다. 두 사상가 모두 공기에 무한성의 의미를 부여했지만, 접근 방식과 탐구의 방향은 상이하다. 바슐라르에게 공기는 상승에 대한 열망의 가벼움과 자유를 상징하며,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비행의 힘을 환유한다. 그는 니체를 한 장 전체에 바칠 만큼 니체를 가장 ‘공기적인’ 철학자로 보았는데, 이는 니체가 _우위(über)_ 혹은 _높음_ 이라는 차원을 향한 사랑, 곧 고도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리가라이는 하이데거를 비판하며 그가 ‘공기를 잊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지적하는 ‘망각’은 고도보다는 *넓이(breadth)* 의 망각이며, 공기는 언제나 경계를 넘어서는 것, 다시 말해 _초과하는 것_ 을 의미한다. 바슐라르가 시적 공상 속에서 공기에서의 도피와 확장의 약속을 감지하고, 공기를 그 속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일어나는 비행으로 이해하며, 공기 자체를 곧 비행이고 비행 중인 것으로 본다면, 이리가라이는 공기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녀에게 공기는 결코 포획되거나 동일화될 수 없으며, 동일화하려는 시도 자체를 초과하고 거부한다. 바슐라르와 이리가라이에게 공기는 장소도, 물질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향이며, 확장이며, 다방향적 가능성(multivectorial potential)이다. “Air is not a place, or a substance for Bachelard and Irigaray: it is a direction, an expansion, a multivectorial potential.” (Connor, 2010, p. 35) Tawa는 _Atmosphere, Architecture, Cinema_ [-@tawa_atmosphere_2022]에서 지난 10여 년간 분위기 개념이 철학자와 이론가들 사이에서 활발히 논의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루는 방식이 주로 철학적·미학적 범위에 국한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건축 분야에서 그 개념이 널리 통용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기존 문헌에는 여전히 뚜렷한 불명확성이 남아 있으며, 이는 분위기를 감정·감각·정서의 문제로 축소하는 경향과 맞물려 있다. 그는 이러한 접근이 주관적 경험을 유발하는 조건이나 구조를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특히 ‘atmosphere’, ‘ambiance’, ‘mood’라는 용어가 혼용되는 문제를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한계는 건축가나 영화 제작자 같은 창작자의 시각에서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구체적 탐구의 부재로 이어진다. 또한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 유하니 팔라스마(Juhanni Pallasmaa), 페터 줌토르(Peter Zumthor)와 같은 주요 이론가와 건축가들의 논의 역시, 분위기를 주로 현상학적 또는 미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건축가나 영화 제작자 같은 창작자의 시각에서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라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이들의 논의는 경험의 일반적이고 반성적인 설명에 머무르며, 실천적 차원에서 적용 가능한 통찰이나 함의를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Tawa는 ‘분위기’라는 용어가 17세기에는 달 주변의 증기 같은 후광을 묘사하는 데서 비롯해, 이후 기상학적·과학적 의미(지구의 대기)와 감성적·미학적 의미(모임의 분위기)라는 두 축으로 발전해왔음을 짚는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 그는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 세 용어의 잠정적 정의와 의미 구분이라고 주장하며, _ambiance_ 를 특정 환경을 규정하는 조건들의 독특한 결합이자 그로부터 발산하는 정동적·역동적 기운으로, _mood_ 를 그 환경에 인간이 가져오는 성향과 태도로, _atmosphere_ 를 환경과 기분이 부여된 인간이 맞물리면서 형성되는 장소·경험의 고유한 색조와 온도로 정의한다 [-@tawa_atmosphere_2022, 85]. 특히 저 글에서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lookingout 들뢰즈 인용이었다. 그 부분을 좀 더 분석해서 여기에서 확장하고 > Early on Tarkovsky said: ‘If you extend the normal length of a shot, you get bored; but if you extend it further still you become interested in it; and if you extend it even more a new quality, a new intensity of attention is born’ [@tarkovskii_collected_1997, 6] 이 인용이랑도 연결될 가능성을 보자. 또한 하이데거의 [[being-the-there]]의 개념과 내가 [[202305241226|일상에 관하여]]에서 쓴 글에서 일상성과 연결될 가능성이 보인다. 이 지점을 확장하여 일상은 루틴을 이야기하지만 일상성은 intensity of attention이라는 점을 강조하자. 그렇다면 여기서 Ambiance 즉 작업이 접근되는 방식과 떠오르는 Atmosphere로 접근해야하지 않을까? Mood에 대해서 예측할 방법이 없는데 Atmosphere가 예측될 수 있을까? Mark Dorrian's *Clouds of Architecture* [-@eliot_complete_2014]로 건축에서의 cloud ## 파괴적 분위기와 형체 없는 영상 형체없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고 그 안에서 부정적인 감정은 어떤 역할을 할까? [@bourriaud_exform_2016] [@bois_formless_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