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어 초록
이 글은 쓰여진 일기와 일기적 실천을 구분하는 데서 출발하여, 고정된 자아를 회고적으로 재현하는 장을 넘어서 일기적 수행의 반복과 감각, 리듬 속에서 주체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하나의 생성적 실천으로 사유하고자 한다. 블랑쇼가 보여준 ‘진실함’과 서사의 경계,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과 감각의 수축 개념,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 그리고 아감벤이 재해석한 고대 그리스어 *chresthai*(사용)의 존재론적 의미를 바탕으로, 일기는 자아가 감응하고 머무는 리듬적 형식으로 떠오른다. 여기서 반복은 동일성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발생시키는 생성의 작용이며, 감각의 리듬은 정동과 기억이 교차하는 시간의 밀도로 작동한다. 서사의 윤곽을 따르기보다 리듬과 침묵의 결로 이어지는 일기적 실천은 삶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긴장들을 기록하며, 주체를 조율하는 비완결적 행위로 나타난다. 일기란 도달하지 않은 상태, 말해지지 않은 감정 속에서 자아의 여백을 구성하는 움직임인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서도호의 공간 작업 속에서 구체화된다. 건축적 구조는 반복적 제스처, 몸의 흔적, 이동하는 궤적과 맞물리며, 감응의 리듬이 응축된 일기적 표면으로 펼쳐진다. 집의 표면을 따라 이어지는 문지름은 언어 없이 쓰이는 일기와 같으며, 그의 작업은 퇴적된 감각의 층위를 따라 삶의 흔적을 다시 쓰는 감각적 실천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일기적 실천의 재읽기는 서사적 자아의 반영이라는 관점을 넘어, 형식화되지 않은 존재의 흐름 속에서 감각적으로 구성되는 자아의 윤리적 공간으로 이끈다. 일기 쓰기는 단순한 재현이나 기록이 아니라, 세계와 접촉하며 머무는 ‘사용’의 방식이며, 이는 감응과 리듬, 반복을 매개로 구성되는 하나의 정치적이자 시적인 실천으로 자리한다.
## 핵심어
## 서론
> "우리는 관조하기 이전에 먼저 꿈을 꾼다. 모든 풍경은 의식된 경관이기 이전에 몽환적 경험인 것이다. 우리는 꿈에서 보았던 풍경들만 미적 열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bachelard_water_2020, 12-3] — Gaston Bachelard
어린 시절 혹은 나이가 들어 일기를 썼던 경험은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습관 중 하나다. 하루를 마감하며, 혹은 일주일의 끝에서 마침표를 찍듯 일기를 쓰고, 그 안에 흩어진 순간들은 다시 엮인다. 흐름이 생기고, 과거의 시간은 현재 속에서 조용히 반복된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감각의 일상은 기록을 통해 감정의 흐름과 이야기의 강도를 얻으며 특별해지고, 이러한 반복은 다시 일상성을 변화시킨다. 일기는 장르적 형식 이전에, 기록이 된다면 무엇이든 구성해내는 감각의 흐름에 뿌리내린 하나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기적 실천은 1980년대 미국의 실험 예술가들이 매체의 참조성, 주관성, 즉각성에 대해 던졌던 질문들과도 맞닿아 있다. 요나스 메카스를 중심으로 앤드루 노렌, 샹탈 아커만, 아녜스 바르다, 카베 자헤디 등은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영상 기록을 통해 일기의 미학적 가능성을 탐색했으며, 이는 이후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반복, 파편화, 감각의 리듬을 통해 계승되었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1979)는 이 흐름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며, 파편적 글쓰기와 단편의 자의적 배열, 기록되는 환경과 자아의 관계를 미학적으로 확장한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 일기 쓰기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나의 기록’을 공유하거나 출판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지만, 바로 그 사소함 때문에 오히려 미학적 논의에서는 종종 배제되어 왔다. 공적/사적, 사회/개인의 경계를 흐리는 일기는 미학과 윤리, 정치성에 걸친 복합적인 논의를 열 수 있음에도, 일상의 실천으로 환원되며 그 가능성은 간과되곤 했다. 이러한 배제의 역사는 일기의 ‘형식’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의 어려움과도 맞닿아 있다. 이러한 일기 연구의 어려움을 댄 돌 [-@doll_british_2020]의 연구를 통해 더듬어 볼 수 있다. 돌은 16세기 이전의 일기들이 대부분 개인이 아닌 공동체나 가족을 위한 기록이었다고 분석하며, 고대 로마의 가정 연대기는 사적 기억보다는 사회적 실용을 위한 장부에 가까웠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개인적 일기’의 기원은 자료의 소실로 인해 여전히 불분명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후 중세와 르네상스기의 일기 쓰기는 정신적 수양이나 신앙 고백에 가까웠으며, 16세기 영국에서 유행했던 이른바 ‘청교도 일기’는 보다 규범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이었다. 로버트 포더길 [-@fothergill_private_1974]은 일기 쓰기를 정해진 형식을 따르는 장르가 아니라,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수행적 글쓰기라고 본다. 19세기 이후 일기의 출판 가능성이 확산되면서, 일기는 은밀한 사적 기록에서 점차 공적 문서로 이행했고, 그 경계는 더욱 유동적으로 변해갔다. 오늘날 ‘삶’은 고유한 생의 감각이나 개별적 존재의 흐름이라기보다, 과학이 정의하기를 포기한 생기나 삶의 형식이 지워진 익명의 사실로, 한 개체의 생존을 의미할 뿐이다. 공적 공간이 사라지고, 오직 사적인 생명만이 남는 사회에서, 이러한 삶에서 은밀한 사적 기록조차 타자에게 드러나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이를 통해, 개인의 삶은 일상의 이미지로 실시간 송출되고, 삶은 생존의 문서로, 자서전은 또 하나의 무력한 재현으로 치환되기 쉽다.
그러나 일기를 단지 자아의 진실이나 기억의 보존 장치로만 이해하는 방식은, 그 쓰기 행위 속에 잠재된 감각의 리듬과 생성의 가능성을 놓치게 한다. 일기 안에서 드러나는 일상의 조각들은 서사적 구조에 갇히지 않으며, 때로는 그림, 낙서, 분위기와 같은 감각의 흔적으로 남는다. 일상은 되풀이되는 삶의 구조를 지시하지만, 그 반복은 결코 동일한 형식으로 되풀이되지 않는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일기를 쓴다 해도, 감각의 긴장과 정동의 파장은 매번 달라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러한 맥락에서 조르조 아감벤 [-@agamben_use_2015]과 도나 해러웨이 [-@haraway_staying_2016]는 오늘날 생명과 인간 존재에 대한 통념을 근본적으로 의심하며, 전통적인 정치·철학적 틀을 넘어서는 사유를 제안한다. 두 학자 모두 생명을 순전히 생물학적 사실로 환원하거나, 인간을 고립된 개체로 상정하는 인간 예외주의를 비판하며, 인간이란 관계와 삶의 방식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라는 점을 환기한다. 아감벤은 조에/비오스, 자연/법, 본질/실존 등의 이분법이 생체정치적 장치를 통해 작동해온 방식을 고고학적으로 해체하며, ‘몸의 사용’과 ‘자신의 사용’이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의 경계를 다시 사유한다. 반면 해러웨이는 인류세와 자본세의 위기 속에서 인간 중심적 자기-만들기를 거부하고, 사이보그, 동반종, 홀로비온트 개념을 통해 다종적이고 얽힌 존재론을 실천적으로 제안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끝나버린 세계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여전히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려는 ‘문제와 함께 머물기(staying with the trouble)’의 윤리이다. 두 사상은 탈구성과 얽힘, 비작동화와 재생산이라는 서로 다른 어휘를 통해, 고정된 질서를 흔들고 관계적이고 변형 가능한 삶의 형식을 탐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기 쓰기는 단순한 자아 표현이나 과거의 재현을 넘어, 리듬의 중첩 속에서 감각적 차이를 생성하고 주체를 구성하는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아감벤이 말한 ‘사용 (chresthai)’, 즉 자기 자신을 외화된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사용함으로써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변형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해러웨이가 강조한 ‘친족 만들기’ 역시 타자와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감각적이고 비언어적인 조율의 리듬을 내포한다. 이러한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함께 일기 쓰기의 수행성은 일기를 쓰는 이의 주체를 감각적 사용성과 관계적 생성성의 공간을 여는 것으로 바라본다. 이는 기록이라는 외연적 행위 너머에서, 반복되는 일상의 틈 사이에 감각의 어긋남, 정동의 흔들림, 언어화되지 않은 분위기들을 포착하고 구성해 나가는 실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기 쓰기는 사소하고 은밀한 기록이 아니라, 삶의 형식을 다르게 구성하고 감각의 정치학을 실험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일기 쓰기의 행위 속에 잠재된 감각의 층위와 리듬에 주목하고자 한다. 일기는 기록이기 이전에 하나의 실천이자 수행이며, 반복적인 일상성의 형식을 구성해 나가는 하나의 방식이다. 들뢰즈(질 들뢰즈)의 반복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반복은 동일한 것을 되풀이하는 순환이 아니라 차이를 낳는 생성의 장으로 이해된다. 그 안에서 리듬은, 들뢰즈가 ‘수동적 종합’이라 부른 시간의 흐름처럼, 기억되지 않은 채 쌓이는 감각적 흔적, 사유 이전의 충동, 미분화된 경험의 접힘으로 구성된다. 리듬은 세계와 신체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형식으로, 감각의 수축과 시간의 응축을 통해 형성된다. 일상의 리듬은 단지 같은 것들이 지속적으로 되돌아오는 삶의 원형이 아니라, 차이가 감각되는 순간들의 윤곽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말하는 ‘일상’은 표준화된 행위의 연속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생성되는 미묘한 차이들의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이 바로 ‘일상성’이라는 감각적 시간의 장을 구성한다. 일기는 그 장 안에서, 형식화되지 않는 자아를 지속적으로 생성해가는 ‘창조적 관조’의 공간이다. 존재의 시간성 속에서, 일기는 매 순간 ‘나’의 자리를 새롭게 묻는 실천적 장치가 된다. 반복은 고정된 자아를 재확인하는 수단이기보다, 감각의 차이에 머무르며 자아를 새롭게 구성하는 실천으로 작동한다. 주체는 반복 속에서 차이를 낳는다. 그것은 자기 동일성을 증명하는 진술이 아니라, 감각과 정동의 리듬을 통해 형식화되지 않은 자아를 생성하는 지속적인 조율과 감응이다. 고정되었던 자리들이 미세하게 어긋나고, 그 틈에서 다른 ‘나’가 스며든다. 기존 일기 이론들이 반복을 자아 동일성의 회복이나 진실의 수행과 연결해왔다면, 이 글은 일기의 수행적 반복을 감각의 차이와 생성의 리듬으로 전환하는 사유를 통해 일기 쓰기를 분위기적 형태로 사고한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일기의 글은 문장이기 이전에 맥박이고, 숨결이 된다. 일기의 문장은 스스로의 의미를 해명하기보다, 감각을 남긴다. 이러한 리듬과 감각의 층위를 중심으로 일기를 재사유하기 위해, 본 글은 모리스 블랑쇼가 말한 서사와 일기 간의 긴장, 필립 르쥔의 ‘정해지지 않은 형식’ 개념, 폴 리쾨르의 시적 반응 개념을 통해 일기의 존재론적 잠재력을 살펴본다. 나아가 들뢰즈의 반복 이론, 질베르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 그리고 서도호의 작업을 통해, 예술 작업에서 나타나는 일기적 실천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습관의 구성을 통핸 주체의 실천으로 다시 사유하고자 한다. 이러한 개념적 고찰을 바탕으로, 본 글은 일기적 수행이 어떤 방식으로 예술 작업의 리듬과 감각 속에 스며들 수 있는지를 탐색할 것이다.
## 개인의 일기 타인의 파편
감각적 실천으로서의 일기는, 동시에 '진실함'이라는 윤리적 요청과 만나면서 글쓰기의 형식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Maurice Blanchot|모리스 블랑쇼]]는 그의 글 *일기와 이야기 (Diary and Story)* [-@blanchot_diary_2003]에서 일기와 이야기라는 두 가지 글쓰기 형태를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과 일기를 '진실함의 요구'라는 윤리적 프레임 속에서 사유한다. 그는 이야기를 파괴적인 경험을 진정한 형태로 표현하는 글쓰기라 본 반면 일기는 시간에 종속된 형식적 장치로, 겉보기에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상 달력이라는 '규칙'에 철저히 복속된 글쓰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속된 형식은 일기를 위기이자 은신처로 만드는 긴장 구조를 드러낸다. 매일매일의 시간 속에서 글쓰기를 위치시키고, 그 일상성에 의해 주체성은 보호받는 반면, 일상적인 현실의 범위를 넘어선 기회와 끌림의 공간에 자리하는 것이다. 블랑쇼는 버지니아 울프와 들라크루아와 같은 예술가들이 "예술이라는 시련, 예술의 무한한 요구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다고 말한다 [-@blanchot_diary_2003, 183]. 작품 안에서 자아를 지워야 하는 위험이 도사리는 반면, 그들에게 일기는 '나'를 쏟아내고 위로받는 곳이며, 이야기의 글쓰기가 주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안전 장치로 보인다. 그러므로 일기는 일상의 표면에 붙들린 채, 일상의 밑바닥을 긁으며 자아를 가라앉히는 닻처럼 기능하고, 더 나아가 덧없는 일상을 아름다운 놀라움이자 삶의 유일한 진실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희망을 제공한다. 일기라는 형식을 통해 덧없는 일상은 밀도 있게 응축시킨 삶의 단면을 드러내며, 그 안에서 사소하지만 지속적인 삶 전체의 단면들을 펼쳐친다. 이 과정 속에서 달력을 기반으로 한 날짜는 일기의 영감, 구성, 도발, 보호자 역할을 하며 일상적인 시간의 보호 아래 글쓰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그 일상의 진실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때 진실함은 일기에서 반드시 도달해야 하지만,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윤리적 한계로 작용한다. 진실함의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진솔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용기를 요구하는 미덕으로 받아들여진다. 블랑쇼는 진실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피상성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용기를 요구하는 미덕이라고 말한다 [-@blanchot_diary_2003, 183]. 이처럼 진실함의 윤리는, 반복되는 자기 관찰을 통해 고정되지 않은 주체의 윤리적 가능성에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로 읽힐 수 있으며, 일기를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실천으로 이끈다.
일기가 매일이라는 시간 속에 갇힌 채로 진실에 대한 맹세를 어기지 않겠다는 '결의'를 요구한다. 블랑쇼에 따르면 이와 달리 이야기는 진실함으로 증명해낼 수 없으며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너무나도 평범한 현실의 조건을 망가뜨릴 수 있는 것과 씨름한다. 이야기는 실제적인 형상 너머, 그 그림자의 매혹에 반응하도록 독자를 유도하며, 주체가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자기화의 장소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일기는 달력이라는 형식에 기대어 우리를 필연성 속에 고정시키는 장치이며, 불안과 파편의 위에 임시로 세워진 피난처, 주체 상실을 은폐하는 얇은 보호막에 불과한가? 블랑쇼의 일기 개념은 일기의 '진실함'을 둘러싼 믿음과 회의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일기의 리듬은 우연히 발생한 순간들을 일정한 서사 구조로 고정시키며, 그로 인해 기록된 자아와 현재의 자아 사이에 간극을 형성한다. 그러나 우연은 일상의 인과적 흐름과 지나치게 이질적이기에, 그것을 마주하는 경험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미지와 조우하는 일에 가깝다. 이로 인해 자아는 추상화된 비인격성 속에 고립되기도 한다. 일상 너머에서 도래하는 존재와의 관계는 말이나 서술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Sam Ferguson|샘 퍼거슨]]은 블랑쇼의 「일기와 이야기」(1955)와 『도래할 책』(1959)을 연속선상에서 읽으며, 이 두 작업이 언어와 주체의 문제에 깊이 관여한다고 본다.
퍼거슨은 블랑쇼가 진실된 말하기와 글쓰기의 허구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중심으로, 존재, 표현, 즉각성, 자아의 상실 등 복잡한 모순 구조,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변증법을 드러낸다고 본다 [@ferguson_maurice_2021]. 그에 따르면 블랑쇼에게 있어 일기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이는 말하기와 글쓰기 수행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러한 가치란 일기가 단순한 자아 보호 장치를 넘어, 표현 불가능성과 존재 조건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주체를 구성하는 실천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퍼거슨의 해석에 따르면, 블랑쇼는 일기를 존재의 허무함을 보상하거나 방어하는 도구로 환원하는 관점에 비판적이며, 말과 글, 실재와 허구 사이의 진동 속에서 주체가 마주하는 불안정한 자리를 드러내는 수행적 공간으로 일기를 재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을 감당하기 위해, 일기는 실재라는 진실성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긴장을 수용할 때, 일기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창조적 경험의 장으로의 예술적 실천으로 자율성을 갖게 된다.
일기 이론가 필립 르쥔은 ‘날짜 적기’라는 행위를 단순한 형식이 아닌, 일기·시간·자아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매개하는 리듬적 제스처로 본다. 일기는 날짜를 포함하기 때문에 일기이며, 과거의 전달이 아닌 미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는 페이지 상단에 날짜를 명시하는 행위가 쓰기의 시간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제스처가 되며, 이를 통해 일기는 “삶의 불연속적인 단면들을 보여주고 그 움직임을 다시 포착”하는 형식이 된다고 본다 [@lejeune_diary_2009, 184]. 그는 이러한 날짜의 발화(enunciation)가 단순한 표기(enunciated)를 넘어 일기의 시간성과 진술성을 구성하는 핵심 구조라고 주장한다 [@lejeune_diary_2009, 79]. 르쥔이 주목한 시간성과 단편성은 자아 형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열어준다. 폴 리쾨르는 이 지점을 해석학적 층위로 확장하며, 서사를 통해 형성되는 자아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 개념을 통해 우리가 서사적 존재임을 강조하는데,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단순한 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사건들을 연결하고 해석하는 이야기의 구성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사를 통해 형성되는 주체와 주체적 수행이라는 관점을 통해, 일기가 파편성과 단절적 리듬에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정체성이 생성되는 방식에 대한 해석적 가능성이 확장된다. 이때 서사는 자아를 선형적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시간의 간격 속에서 자아를 해석하고 조율하는 실천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해석학적 자아 개념은 서사적 자아를 허구나 픽션으로 간주한 [[David Hume|데이비드 흄]]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Alisdair Macintyre|알래스터 매킨타이어]], [[Charles Taylor|찰스 테일러]], [[Daniel C. Dennett|대니얼 데닛]], 그리고 [[Paul Ricœur|리쾨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들 모두 자아를 자기 해석의 산물로 보았지만, 해석 방식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맥킨타이어와 테일러는 윤리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자아를 파악하고자 한 반면, 데닛은 자아를 이야기의 모든 측면을 연결하는 ‘중력 중심’에 비유하며, 실재하지 않는 구성적 허구라고 보았다 [@dennett_self_2014, 103]. 그는 서사를 생성하는 뇌와 서사 속 등장인물로서의 자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한편, 신경과학자 [[Gregory Berns|그레고리 번스]]는 리쾨르의 서사적 자아 개념을 토대로, 자아는 뉴턴식 인과성처럼 외부에서 유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감각의 흐름 속에서 구성되는 서사라고 본다.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사건은 시간의 순서를 따른 재현이 아니라, 고도로 편집되고 선별된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자아는 이러한 감각적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된다고 본다[@berns_self_2022, 105–6]. 이러한 관점은 [[Marya Schechtman|마리야 쉑트먼]]의 주장을 통해 강화된다. 쉑트먼에게 있어 서사적 자아는 현재의 육화된 경험과 함께 구성되며, 자아의 감각은 곧 서사라는 점, 자아의 삶은 구조적으로 서사적이라는 점, 이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schechtman_narrative_2013, 395].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자아의 구성 방식이 단순한 선형적 재현이 아니라 감각되고 기억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리쾨르 역시 자아를 동일성(sameness)과 서사적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며, 서사적 사고 능력과 행위성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는 자아와 서사, 그리고 행위성 사이의 관계를 조명한는 해석학적 서사 이론에 동의하면서도, 삶과 문학 사이의 불연속성(discontinuities)에 주목한다. 이 차이들을 ‘조율(negotiation)’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인과관계의 설명이 아닌, 인물의 동기, 행위, 결과를 시간에 따라 조직적으로 엮는 과정을 통해, 행위의 시작자로서의 자유를 유지하며, 그 원인과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 돌려보내는 과정을 통해, 행위의 주체로서 자아가 형성된다 [@ricoeur_oneself_2008, 72]. 리쾨르는 이를 ‘귀속의 아포리아(aporia of imputation)’로 부른다. 그렇다면 이 해석학적 접근은 자아의 분열과 감각적 리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리쾨르가 제시한 서사적 정체성 개념은, 자아를 일관된 이야기 구조 속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이론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일기의 파편성이나 감각적 층위에서 드러나는 자아의 분열과 미완성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자아의 불연속성과 감각적 리듬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시적 응답’ 개념이 등장한다. 그는 이 아포리아에 대한 해답이 논리적 해명이나 정체성의 실체화가 아니라, 창조적 해석과 시적 수행의 형태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시적 응답(poetic reply)’이라 명명한다[@ricoeur_oneself_2008, 92]. 이러한 시적 응답은 일기를 정체성의 기술로 환원하는 서사적 관점을 벗어나, 단절, 반복의 감각을 통해 자아가 생성되는 하나의 윤리적·미학적 장으로 자리 잡는다. 이 시적 응답은 일기의 파편성과 감각적 리듬을 단순한 분열이 아닌, 미완의 자아 형성 조건으로 전환시키며, 주체를 사건의 익명성에서 건져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반복 리듬과 감각적 형태는 분산된 자아를 연결하고 조율하는 하나의 서사적 장으로 작동한다. 단편성의 조합 속에서 우리는 과거를 서사로 재구성하고, 이를 현재에 귀속시키며, 미래를 예측한다. 그러나 르쥔은 「일기 다시 읽기(Rereading Your Diary)」 [-@lejeune_rereading_2009]에서 리쾨르의 내러티브 시간 개념을 비판적으로 인용하며, 일기의 리듬은 연속이 아닌 단절의 리듬이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묶어나가는 이 파편들은, 제본되거나, 풀로 붙여지거나, 스테이플러로 고정된 하나의 물질적 틀을 통해 리쾨르가 "서사적 자아"라고 부른 최소한의 통일성을 약속받는다 [@lejeune_diary_2009, 185]. 하지만 쓰여진 일기가 외형상 연속적일지라도, 쓰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파편적이며, 이 파편성이야말로 일기의 리듬을 구동시키는 에너지다. 쓰는 행위 속에서 ‘나’와 ‘이야기’로 구성된 자아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분리된다. 이 분리는 이미 쓰여진 기록물의 연속체에 다시 접속되며, 이러한 에너지는 일기를 고정된 형태가 아닌, 정체성을 구성하는 운동으로 작동하게 한다 [@lejeune_composing_2009, 33]. 일기는 삶의 일관된 초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동시에 매일매일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그 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푸코가 일기의 범법적 경향을, 사회로부터 고백하라고 배운 개인이 실천하는 반담론 또는 반기억으로 보았다면, 르쥔에게 이러한 ‘고백’은 사적 삶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만, 제도가 요구하는 적절한 자아의 훈련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주체성의 반전통을 형성할 수 있다 [@lejeune_composing_2009, 19]. 르쥔은 이러한 파편적 리듬과 단절의 흐름 속에서 일기를 ‘그물 짜기’에 비유한다. 그것은 단단한 구조보다는 빈틈이 많은, 느슨하고 불완전한 연결들의 반복을 통해 구성된다 [@lejeune_diary_2009, 153]. 이러한 관점은 일기가 서사적 통일성보다 단절, 공백, 파편적 리듬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일기를 쓰는 이들은 더 넓은 사회적 세계 안에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lejeune_composing_2009, 18].
일기는 서사의 구성에 앞서서 시적으로 접근되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각기 다른 방식의 삶이 존재하듯, 일기 또한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Philippe Lejeune|르쥔]]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일기를 글쓰기의 실천이자 형식화되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주체성의 기호로 읽을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라는 중요한 타자를 생성하는 일기의 리듬은 제도적 자아 형성에 대한 대안적 가능성을 품는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자아는 사건의 선형적 연대기가 아니라, 사소한 흔적들의 엮임으로 형성된 유동적 집합체로 드러난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건들의 부분을 편집하고 맥락을 이어붙여 만들어지는 집합체로 드러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고 압축하며 예측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틈과 암시들로 이루어진 서사를 구성한다. 반복은 사건적 감각의 응축인가? 끝난 순간의 재호출인가? 지속되지 못한 시간에 대한 갈망인가? 아니면 아직 정의되지 않았고, 목격되기 전까지는 결코 포착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은 반복이나 행위의 순환들인가? 일기는 현실적인 대상에 대한 응답으로서 일상적 삶의 일부를 외부화하지만, 그 기록이 반드시 고정된 자아를 반영하거나 완결된 정체성을 생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흩어져있다. 그것은 여기에 있다가도 저기에서 발견되며, 곁에 있다가도 사라져 있는 어떤 것이다.반복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되지 않은 정동의 여운과 미세한 차이의 잔여를 남기며, ‘또 다른 나’를 생성하는 비개인적 흐름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촘촘하지 않은 그물처럼 느슨하게 엮인 단편적인 구조 속에서 주체의 비밀스러운 형상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는 아직 분류되지 않은 감각의 잔여와 미분화된 정동이 얽혀 있으며, 감각과 상상력의 층위에서 다시 접근해보면, 일기의 미완성성은 단지 해석의 지연이 아니라 정동적 응답의 장소가 된다. 그러므로 일기의 반복과 파편적 리듬은 서사 중심의 해석을 넘어, 감각과 정동의 차원에서 더 깊이 탐구되어야 한다. 이러한 층위를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욕망과 감각의 밀도를 분석한 수잔 스튜어트의 이론을 참조해볼 수 있다. 이러한 내밀한 틈은 때때로 ‘갈망’이라는 정서적 밀도로 응축되며, 이는 타자화된 시간 혹은 소외된 자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다. 일기는 이러한 갈망을 하나의 형태로 구체화한다. 수잔 스튜어트(Susan Stewart)는 『갈망에 대하여(On Longing)』[-@stewart_longing_1993]에서 간절한 욕망의 구조를 분석하며, “욕망하는 서사에서 힘의 작용은 언제나 미래-과거로 향한다”고 말한다 [@stewart__2002, 8]. 그녀에 따르면, 갈망은 죽은 것 혹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다. 스튜어트는 이를 ‘갈망은 통증이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하며, 임신 중 여성이 느끼는 공상적 열망이나 사물·부속물에 대한 감각을 통해 이 정서를 구체화한다. 이처럼 해석학적 자아 이론은 일기의 서사적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 너머에서 감각과 정동, 상상력의 층위를 통해 일기의 미완성성과 생성 가능성을 다시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공상적 열망의 역동 속에서, 일기적 실천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감각과 가능성의 충만성을 호출하는 공간으로 작동하며, 이는 하나의 산파술(maieutic)처럼 생성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일상적 반복은 종종 상상력을 제한하는 경직된 구조로 인식되며, 서사가 불연속을 통해 여어주는 감각적 우연성과는 대조된다. 블랑쇼에 따르면, 우연은 “습관적인 언어와 고요한 낮의 빛을 포기해 다른 날의 매혹과 다른 언어의 척도와 관련하여 자신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일상의 틈새를 불러오고 예기치 않은 개방성과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blanchot_diary_2003, 185]. 반복은 흔히 이러한 틈을 감추고, 일반성 속에서 차이를 지우며 욕망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일기의 의미를 단지 일반성의 반복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일기의 흥미로운 지점은 그것의 사소함”이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그 미세한 일상 안에서 새로운 감각과 리듬이 드러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blanchot_diary_2003, 185]. 자아를 서사적으로만 이해하는 접근은, 일기의 파편성, 지연된 진술의 감각적 리듬, 그리고 침묵과 상상력의 여백, 침묵의 층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반복적인 일상 그 자체가 감각과 사유를 개방하는 힘을 품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일기 쓰기를 미정의 상태를 통해 주체를 생성하는 시적 실천으로 확장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사적 자아가 정체성의 귀속을 설명하는 해석적 도식이라면, 시적 실천은 그 이전, 즉 정체성이 고정되기 전의 생성적 상태, 형식을 갖추지 않은 생성의 상태에서 발생하는 의지와 상상력의 운동에 주목한다. 이러한 시적 응답은 단지 윤리적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바슐라르가 말한 상상력의 운동성과 접속하며, 아직 형식화되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생성한다. 이러한 전환점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상상력’ 개념과 침묵의 언어로서의 시가 어떻게 일기 쓰기의 미완성성과 내적 긴장을 사유하게 만드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일기라는 행위는 현실적 대상의 분신을 구성하며,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분열 속에서 공명하는 교환을 수행한다. 우리는 현재와의 차이를 생성함으로써 과거를 살아가고, 현재와의 동일성을 구성하며 그 속에서 자아를 재봉합해나간다. 일기엔 사건이 있고, 또 그 곁에 욕망이 있다. 일기가 주체를 ‘기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서사를 위한 기록이라기보다 하나의 욕망 혹은 충만성의 힘을 구현한다. 현재와 차이를 생성함으로써 과거에 존재하고, 현재와 동일성을 구성하는 힘으로서의 일기 쓰기와 읽기 속에서, 자아는 재봉합된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논의될 바슐라르의 상상력 개념과도 맞닿아 있으며, 비가시적 주체성의 가능성을 다시 사유하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완결된 형태(form)에 도달하기 전의 일상성과 습관, 그리고 일기의 비완성성은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형식’이라는 창조적 특성에 대해 다시 한번 주목하게 만든다.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주체의 이미지는 상상의 관조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며, 범주화되기 전의 존재, 또는 아직 명명되지 않은 존재를 사유하게 만든다.
바슐라르는 시의 본질을 상상력, 꿈, 운동성의 관계 안에서 파악하며, 시는 고정된 세계를 단순히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를 향한 열망과 필요에 부응하는 하나의 사유를 넘어서는 수행 실천이라고 본다. 시는 정지하거나 침묵하는 세계를 아름다움을 목표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리듬을 창조하는 시간적 존재로서의 구체적 실천이다. 그렇다면 일기를 시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과 자아, 서사와 기록 사이의 조율을 상상과 묘사를 넘어서 주체와 대상을 함께 감싸는 하나의 존재론적 실천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결국 일기는 감각의 리듬과 존재의 틈을 조율하는 행위로, 고정된 정체성의 재현을 넘어섬과 동시에 단순한 자아의 재현이나 완결된 정체성의 서사가 아니라, 정동적 여운과 감각의 리듬이 얽힌 미분화된 실천으로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반복과 흐름이 어떻게 상상력의 장 속에서 형상을 얻는지를 바슐라르의 시론을 통해 따라가본다.
## 나에서 한 발자국 밖으로
일기는 시간적 리듬을 따라 파편들을 배열하며, 고정되지 않은 방랑하는 서사를 만들어낸다. 반복은 이어지지만, 되풀이되지는 않으며, 매번 다르게 흔들리는 바람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불러온다. 이러한 구성은 반복의 구조 안에서 일상성을 관조하거나 예감 혹은 상상하게 한다. 말하지 못한 말들이, 그날의 틈에, 침묵처럼 묻힌다. 따라서 일기는 단지 일상의 기록을 넘어 역동적이고 물질적인 상상력의 경험을 표현하는 장으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일기와 문학의 관계, 그리고 파편적 구성 속에서 형성되는 서사적 자아와 시적 반응을 바탕으로, 일기는 형식화된 주체가 아니라, 형태 이전의 흐름과 생성의 리듬, 그리고 지연된 진실의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은 반복의 구조 안에서 일상성을 관조하거나 예감 혹은 상상하게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공기와 꿈들 (Air and Dreams)』 [-@bachelard_air_2011]에서 바슐라르는 상상력을 단순한 이미지 생성이 아닌, 끊임없이 확장되는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으로 설명한다. 감각하고 지각한 것을 탈형상화하며 새로운 존재 감각으로 전환시키는 이 운동은, 형상을 넘어서는 열림의 에너지로, 자기 존재를 이미지 속에 투사한다 [@bachelard_air_2011, 5]. 이 상상력의 운동은 초월성과 내재성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진동과 개방성이 바슐라르가 말하는 역동적인 정신의 본질이다.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열려 있고 포착하기" 어려우며 [@bachelard_air_2011, 1], 역동성이 증폭기처럼 작동하여 생성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아우라를 통해 그 가치가 판단된다. 이러한 일기 쓰기는, 파편적 서사와 실재-허구 사이에서 진동하며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는 시적 실천이다. 그러므로, 시적 실천은 단지 형식적인 시를 쓰는 행위가 아니라, 감각의 리듬 속에서 기억을 정동화하고, 감각의 리듬 속에서 다시 상상으로 탈바꿈되는 과정을 이끌며, 바로 이 지점이 형식과 쓰여진 시에서 구별되는 시적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적 실천’이 단순히 종이에 적힌 시와 구별된다면, 그 본질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르쥔이 일기의 날짜를 단순한 표기가 아닌 ‘발화 행위’로 간주했다는 점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기가 언어 이전의 감각적 실천으로 잠재적 에너지를 간직하듯 시 또한 가장 먼저 근본적인 실천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바슐라르는 같은 책 챕터 12에서 침묵하는 말 (Silent Speech) 개념을 통해 시가 단순히 읽히거나 청각적으로 전달되는 언어적 활동을 넘어서, 말해지기 이전의 ‘존재의 의지’에서 비롯된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슐라르는 호흡의 기쁨이 드러나는 외적 표현의 역동성으로 침묵을 통해 시를 감각과 호흡의 층위에서 조망하면서도, 그보다 더 깊은 층위에 시적 흐름을 드러낸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시는 발화되거나 조용히 읽히는 방식과 상관없이 단어를 실어 나르는 공기를 조율하며, 그 리듬은 구절의 부피감을 지닌 공기적 실체(pneumatic reality)를 형성한다. 시의 한 구절은 팽창하거나 수축하는 공기적 리듬에 따라 생명을 부여받으며, 이러한 리듬은 언어의 형식 안으로 스며들어 살아 움직이는 공기적 상상력(aerial imagination)에 순응하며 존재한다 [@bachelard_air_2011, 242]. 시 안에는 활력을 불어넣는 공기, 즉 용기의 물질이 흐르고 있으며, 이는 낭송되는 시뿐 아니라 조용히 읽히는 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모든 시는 기본적인 "호흡의 경제"의 영향을 받는다[@bachelard_air_2011, 239]. 시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구체적이며 감각적인 존재이며, [[Paul Valery|폴 발레리]]의 말처럼, 하나의 연속성 안에서 독자는 "미리 정해진 법칙에 따라 숨을 쉰다" [@valery_collected_1971, 3; quoted in @bachelard_air_2011, 243]. 다시 말해 시는 하나의 연속체로서 침묵 속에서도 호흡은 지속되며, 독자는 여기에 자신의 호흡과 목소리의 잠재력을 더함으로써 그 리듬에 참여한다. 이 참여는 발화 이전의 침묵과 조응하며, 시는 말해지기 이전부터 호흡하는 존재로 작동한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감각과 호흡의 리듬 속에서 시를 바라본 바슐라르는 ‘순수시 (Pure Poetry)’라는 개념을 통해 시의 기원을 더욱 근원적인 차원의 흐름으로 옮겨간다. 그는 특히 감각적 인상이나 단순한 언어 구조를 넘어서 ‘의지(will)’로부터 출발하는 시의 조건을 다시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순수 시는 재현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시는 감각이나 소리 이전에 존재하는 ‘말하려는 의지(will to logos)’에서 비롯되며, 언표 이전에 의지의 작동에 의해 형성된 것, 혹은 의지의 작용을 내포한 상태로 나타난다. 이는 오히려 행위가 발생하기 직전의 침묵 속에서 폭발적으로 솟아오르는 발화이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우리가 진정으로 되어가고자 하는 존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위를 하기 이전, 자기 존재의 침묵 속에서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 바슐라르는 “우리는 어떤 행위에 앞서, 자신의 존재의 침묵 속에서 스스로에게 우리가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지 말해야 한다”고 말한다[@bachelard_air_2011, 245]. 이는 시를 감각이나 재현의 표현으로 환원하지 않고, 보는 것이나 듣는 행위를 넘어서, 인간이 미래의 자아를 욕망하고 스스로를 창조하려는 원초적 흐름에서 발생한다. 시적 실천은 단지 언표에 그치지 않고, 되어감을 스스로 확신하는 행위임을 이야기한다 . 이 흐름 속에서 시는 시적 의지(poetic will)가 도약하거나 충동적으로 분출되던 순간의 에너지로 이해된다. 그는 의지 자체를 겨냥하여 의지의 필연적 표현으로 발생하는 실천이다라고 말하며 (Bachelard, 2011, 245), 이를 통해 시를 결과가 아닌, 일종의 시적 행위로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이처럼 시가 시적 의지의 도약을 통해 생성되는 실천이라면, 일기 또한 일상의 리듬 속에서 감각의 틈과 어긋남을 통해 주체를 재구성하는 일기적 실천으로 읽을 수 있다. 일상성은 흔히 ‘반복’과 ‘규칙성’의 동의어로 간주되지만, 일기 속에서 드러나는 일상성은 이러한 전형성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일기는 어떠한 규칙성을 만드는 질서로 향하지 않는다. 일기에서 쓰여지는 문장은 그날의 나를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여백 안에서 나는 조금씩 어긋나고 다시 쓰인다. 반복되는 일상은 자아를 고정시키기보다는, 파편화된 리듬을 통해 상상력이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을 생성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논의하는 일상성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생성이라는 리듬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동일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반복 속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감각적 차이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차이야말로 일기적 리듬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일기에 기록되는 분위기 또한 고정된 법칙을 따르지 않으며, 오히려 정형화되지 않은 감각의 흐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환경과 공간 속에서 감지되고, 반응하며, 그 감응을 통해 함께 구성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기에 기록되는 일상성은 일반성과 달리 하나의 특이점에서 다른 특이점으로, 하루에서 또 다른 하루로 옮겨 가면서 반복된다. 하루는 반복되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그 반복은 매번 새로운 결합을 통해 다른 형태의 일상을 빚어낸다. 이러한 반복과 변화는 일상성이라는 리듬을 형성하지만, 반드시 반복되어야 할 필연적 일상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성은 하나의 이미지 혹은 문장으로 완전히 묘사되거나 재현될 수 없으며, "일상성"이라는 단어는 지시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언표되기도 전에 망각되며, 망각은 이내 관념으로 치환된다. 일기 쓰기는 이처럼 일상성의 침묵, 그 사소함 속에 감춰진 리듬과 감각을 불러내는 실천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침묵 속에서 의지로 도약하는 반복의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동일성의 되풀이인가, 아니면 차이를 생성하는 감각의 리듬인가? 일기의 반복은 자아를 고정하는가, 아니면 익숙함 속에서 낯섦을 호출하는가? 우리는 그 미세한 파장과 운동성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일상의 의미를 다시 묻는 작업은, 들뢰즈의 습관 개념과 아감벤의 ‘삶의 형식’ 개념과 교차하며, 일기를 삶의 형태이자 시적 실천의 장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deleuze_difference_2021]에서 세계를 동일한 것들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차이가 스스로를 반복하는 역동적인 생성의 과정으로 이해하며, 이 과정에서 습관, 무의식, 그리고 궁극적으로 삶과 사유의 근본적인 의미를 재해석한다.
들뢰즈의 이러한 개념은 일상성이 기본적으로 반복과 수축을 통해 하나의 형태를 이루며, ‘습관을 수축한다(contracting a habit)’는 표현은, 관조하는 정신 속에서 연속적인 순간들이 융합되어 하나의 리듬으로 응축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렇게 그의 개념은 일상성과 일기 속에서 끝없이 형성되는 리듬의 종합, 그리고 그에 따른 주체성의 형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deleuze_difference_2021, 98]. 살아감을 느끼는 것, 일상을 감각하는 것은 하나의 순수한 관조이며, 그 리듬의 진동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운동이자 생성이다. 이는 일상의 감각들이 수축되며 리듬을 이루고, 이러한 수축과 리듬화의 반복이 일상성을 채움으로써 하나의 감각적 형태로 응고시키고, 일상성은 감각적 형태로 응고킴으로써, 주체가 그 안에서 감각의 리듬으로 스스로를 향유한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 들뢰즈는 데이비드 흄의 주장을 가져와, 반복이 반복되는 객체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지만 그것을 관조하는 정신 안에서는 변화를 일으켜 의식 속에 새로운 차이를 도입한다고 말한다 [@deleuze_difference_2021, 93]. 습관과 마찬가지로 일기 쓰기 역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행위로 이해된다. 겉보기에 그것은 '일기 쓰기'라는 행동의 되풀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들뢰즈는 “가장 기계적이고, 가장 상투적인 반복에 직면했을 때, 그 반복으로부터 끊임없이 작은 차이, 변형, 수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진정한 생성의 힘이라고 지적한다 [@deleuze_difference_2021, xvi]. 하루를 마무리하며 감정과 사유, 혹은 특정 순간을 직면하는 이 일기 쓰기의 행위는 관조 속에서 자신을 재형성하는 영혼의 실천이다. 이러한 반복적 실천은 감각과 정동을 축적하며, 시간과 존재를 재구성하는 관조의 수행으로 이어진다.
들뢰즈는 흄의 사유에서 차용한 수축(contraction)의 개념을 통해, 습관이 단순한 반복을 넘어 저항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반복이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경험이 ‘관조하는 상상’ 속에서 응축되고 증류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모든 것이 능동적 연결과 점진적인 통합을 통해 하나의 실험에서 다른 실험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각각의 발생이나 사례들은 여전히 지식이나 행위와는 구별되는 상상 속에서 관조적으로 수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deleuze_what_1994, 213]. 따라서 각각의 경험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상상하는 정신’ 속에서의 수축을 통해 반복은 감각적 차이를 응축하고 새로운 시간감을 생성한다. 이러한 수축은 인과성, 연상, 통합이라는 사유 작용 속에서 하나의 기대, 의견, 믿음을 형성하게 되며 (Deleuze and Guattari, 1991, p. 214), 이러한 과정은 반복된 경험이 단순히 쌓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은 버려지고 잊히는 과정을 포함한다. 일기를 통해 단절된 사건들과 유기적 단편들은 의식적 기억이나 반성을 넘어서, 수축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살아 있는 현재’로 형성되고, 이러한 현재는 관조 속에서 질적 인상으로 정립된다. 이러한 감각의 수축은 개별 경험을 살아있는 현재로 응축시키며, 일기장은 그러한 관조하는 영혼의 응축의 리듬을 담아내는 리듬의 장이 된다. 들뢰즈는 이를 ‘질적인 인상의 응축’이라고 부르며, 이 과정을 통해 주체는 단지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과 존재를 생성하는 리듬의 중추로 자리하게 된다. 따라서 습관은 단순한 반복적 행동이 아니라, 시간의 리듬을 구성하고 주체의 형성에 기여하는 사유의 조건이자 수동적 종합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기의 반복은 이 수동적 종합, 즉, 과거를 보유하고 미래를 예감하는 관조의 작용을 통해, 일상을 구성하는 새로운 형식이자 감각적 실천이 된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이 종합이 무수한 습관의 층위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deleuze_difference_2021, 98].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을 통해 습관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관조를 통해 습관을 '형성'하며, 우리 자신이 곧 습관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현재의 기반인 습관은 또한 모든 다른 정신적 현상들(예: 필요, 질문)이 파생되는 기반으로, 시간의 방향성을 부여하며 과거는 수축 안에 보유된 이전의 순간들로, 미래는 수축 안에서 예측되는 기대로 이야기된다 [@deleuze_difference_2021, 94]. 우리는 수축된 경험들의 응축된 결합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반복의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다 [@deleuze_difference_2021, 99]. 이러한 습관 개념은 들뢰즈에 의해 영국 경험론의 전통과 접속되며, 관조된 인상이 수축을 통해 형성되는 창조적 과정을 강조한다. 들뢰즈는 “식물은 물과 흙, 질소와 탄소, 염화물과 황산염을 조용히 응시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심스레 수축시키며, 자신만의 개념을 얻는다. 그리하여 자신을 그 개념으로 채우는 것—그것이 식물의 향유이다”라고 서술한다 [@deleuze_what_1994, 105]. 이때 ‘응시’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존재론적 감응의 상태를 의미한다. 식물은 외부 환경을 수축하며, 언어 이전의 방식으로 개념을 형성한다. 따라서 개념의 ‘획득’은 언어적 사유 이전에 존재 자체의 감응적 수축을 통해 발생하는 과정이며, 식물의 향유는 실존적 충만의 뉘앙스로 읽을 수 있다.
일기 쓰기의 반복은 매일의 경험에서 동시성과 연속성의 미묘한 어긋남을 통해, 통합과 분화의 리듬을 구성하며, 통합과 분화의 리듬 속에서 주체를 갱신하는 작용을 한다. 이 리듬은 아직 고정되지 않은 자아 이전의 감각적 상태에 내재한 긴장을 형식화하며, 감각의 층위에서 자아를 끊임없이 조율하고 변형하는 작용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긴장은, 예컨대 매일 쓰는 일기에서 감정이 한결같이 반복되지 않고 미묘하게 어긋나는 감각에서 드러난다. 반복의 지속적인 통합과 분화의 움직임은 관조와 공명하는 과정이며 현재 속에서 끊임 없이 일상의 리듬을 재조직하는 감각적 운동으로 작동한다. 들뢰즈는 자신의 반복과 생성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에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 시몽동은 개체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개체화의 작용’으로 보며, 이는 들뢰즈가 존재를 ‘생성’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존재를 지속적인 흐름과 배치(assemblage)의 결과로 이해하는 입장과 깊이 연결된다. 시몽동이 주장하는 개체화 과정은 완결된 개체의 정적 상태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오히려 전개체적(pre-individual) 상태에서 출발하여 계속해서 변형되는 과정이다. 이 전개체적 상태는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잠재성과 가능성으로 충만한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지평이다. 시몽동에게 개체화는 여러 이질적 힘들이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일직선적인 합성 과정보다, 끊임없이 잠재성 속에서 발생하고 변화하는 열린 운동으로 이해된다. 시몽동의 비대칭적이고 미완결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전도적 사유가 "합성"이 결코 달성되지 않고 "합성적 리듬"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simondon_individuation_2013, 111], 대신 비대칭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은 들뢰즈의 사유와도 깊게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완결된 조화나 일관된 리듬으로 수렴하는 개체 형성을 거부하며, 형식화되지 않은 리듬의 긴장 속에서 발생하는 생성적 과정에 “합성적 리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건과 경험, 감정과 생각은 처음부터 명료하게 정리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전개체적 상태에서 혼란스럽고 다층적이며, 아직 규정되지 않은 가능성들로 구성된 긴장 상태로 놓여 있다. 이러한 상태는 매일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변화하며, 일기를 기록하는 순간까지도 온전히 정의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따라서 일기 쓰기는 정태적 형식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전개체적 긴장의 순간들을 감각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응축하고, 존재를 생성하는 감각적 개체화의 리듬으로 작동한다.
들뢰즈가 말하듯, 반복은 과거의 환상들에 저항하고, 개념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며, “사물과 존재들로부터 사건을 추출하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사건을 설정하는 것—공간, 시간, 물질, 사유, 가능성 자체를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반복은 곧 생성의 조건이다 [@deleuze_what_1994, 33]. 따라서, 반복되는 일상은 단순한 기계적 재현이 아니라, 사소한 감각과 침묵 속에서 새로운 감응과 상상력의 틈을 여는 리듬적 구조로 드러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기 쓰기의 반복성은 매일 동일한 형식을 재현하는 폐쇄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전날의 감각적 잔여와 정서적 긴장을 사건으로 전환하고, 매일 다른 긴장과 여백 속에서 자아를 다시 차이의 흐름 속에서 감응시키고, 생성의 리듬을 여는 시적 실천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일상의 반복 그 자체가 일기 속에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시간의 구조이며, 일기는 바로 그 반복 속에서 감각의 리듬과 사유의 방향을 조율하며, 주체를 동일한 자아로 고정하지 않고, 생성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해 나간다. 이 반복은 관조적이며, 동시에 생성의 흐름을 열어가는 실천으로 작동한다. 즉, 일기의 반복성은 표면적인 동일성 아래에서 감각의 새로운 층위를 드러낸다. 일기장 위에 매일 반복적으로 기록되는 글들은 하나의 날에서 다음 날로 이어지며, 그 사이에는 전날 기록된 감정이나 생각의 긴장과 가능성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들은 매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구성되고 재해석되어 전개체적 상태의 새로운 형태를 형성한다. 따라서 일상성은 반복을 통해 매일의 차이를 감각적으로 배치하고, 주체성을 조율하며 생성하는 리듬의 장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개체화 과정을 통해 일기 쓰기의 반복은 지속적으로 주체성의 형성을 촉진하지만, 그 주체성은 결코 고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일상은 차이의 긴장과 습관의 수동적 종합을 통해 작동한다. 이러한 흐름은 주체성의 잠재성을 구체적이고 명료한 형태로 드러내며, 주체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접힘’을 경험하는 관조적 실천으로 자리 잡는다. 이 과정은 일기 쓰기를 하나의 관조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이처럼 반복되는 일기는 매번 차이를 조직하며, 주체를 감응적으로 재형성하는 감응적 실천이자 역동적 장으로 작용한다.
## 미완성적 주체와 일기적 작업들
이전 장에서 시와 시적인 것을 구분했듯, 이 글에서 일기와 일기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사고하는 것은 핵심적인 사유의 출발점이다. 일기는 하나의 형식이나 장르로서 존재하지만, 일기적인 것은 그 형식을 가로지르며 감각의 반복, 정동의 축적, 관조의 리듬 속에서 발생하는 미완성적 실천으로 드러난다. 일기 쓰기라는 행위는 자아를 재현하려는 목적에 곧장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과 침묵의 여백에서 자아는 감응하고 흔들리며, 그 과정은 생성의 흐름을 열어젖히는 행위로 작동한다. 이처럼 일기를 일기적 수행 행위로 이해하는 관점은, 일기를 일상성의 재현이나 생산의 수단이 아닌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의 표현으로 전환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 있는 것에게 존재란 곧 살아감이다”라고 썼고, 니체는 훗날 이를 “존재한다는 것은 곧 살아간다는 외에 다른 표상을 갖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아감벤은 이를 인용하며, 존재와 삶이 분리될 수 없는 얽힘을 드러내는 일이 사유(그리고 정치)의 과제라고 강조한다 [@agamben_use_2015, xix]. 한편, 일기를 쓰는 이는 단지 외부 세계에 어떤 작용을 가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 쓰기의 과정 속에 스스로를 포함시키며, 그 실천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아감벤이 말하듯, 습관적 사용은 삶의 형태(form-of-life)로 활동(*energeia*)이나 작업(*ergon*)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속에서 잠재태를 사색하고 비활동화함으로써 새로운 사용 가능성을 열어준다 [@agamben_use_2015, 63]. 일기는 일기를 쓰는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통제하거나 지시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 실천이 발생하는 구체적인 장소로 작동하며, 일기적 수행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장소이자 리듬의 지점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기적 작업은 사용의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매일의 반복 속에서 다시 살아보는 방식이며, 삶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용하는’ 글쓰기를 통해 살아감 그 자체의 변화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일상은 더 이상 고정된 형상이나 배경이 아니라, 감각의 반복, 몸의 습관, 정동의 미묘한 진동들이 긴밀히 얽힌 역동적인 경험의 층위로 드러난다. 이 안에서 일기를 쓰는 이는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열려 있는 불확정성의 지대에 위치되며, 하루를 행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하루 안에서 행해지는 존재가 된다. 그는 하루를 수행하는 동시에 수행되는 존재이며,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글을 써 내려간다. 이는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 개념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시간은 단지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습관과 반복, 정동의 미세한 흔적 속에서 수축되고 응축되며, 그 속에서 구성된다. 이처럼 아감벤과 들뢰즈는 서로 다른 철학적 경로를 통해, 행위와 수용, 능동과 수동의 고정된 이분법을 넘어서, 그 경계가 흔들리는 그 경계의 떨림 속에서 존재의 감응을 사유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기적 작업은 감각과 리듬을 담아내는 존재론적 장으로, 일상성은 반복되는 삶의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차이의 흐름, 혹은 아직 사유되지 않은 채 흘러가는 감각적 조건들의 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들뢰즈의 리듬 개념을 따라가면, 이러한 일상성은 수동적 종합으로서의 시간성에 의해 구성되며, 일기는 이 리듬을 통해 자아를 기억된 사건들의 압축된 시간으로 재구성한다. 일기는 매일 반복되는 감각을 통해 이러한 일상성과 접속하며, 그것을 포착하려는 감응의 실천으로 자리 잡는다. 일상은 결코 같은 얼굴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 순간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며, 아직 인식되지 않은 감각들,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가능성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비가시적 차이들은 감각의 층위에서 작동하며, 일기 쓰기는 이 일상성에 접속하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포착하려는 실천으로 작동한다. 이 리듬은 신체와 세계 사이에서 긴장 속에 형성되는 시간의 응축이며, 감각의 접속면에서 생성되는 응축된 시간의 형식이다. 반복과 차이를 매개하는 이 리듬은 감각적 습관, 기억, 정동적 반응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의 시간성을 형성한다. 일기적 수행은 완결된 구조로 고정되지 않으며, 매 순간 자신을 다시 쓰고 조율하는 비완결적 실천으로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일기적 실천, 혹은 실천적 일기라는 개념은 수행성과 생성성의 층위에서 사유된다. 그렇다면 일기적 작업을 통해 일기를 하나의 감각적 수행으로 다시 이해할 때, 예술 실천은 어떤 방식으로 이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아감벤은 『The Use of Bodies』 [-@agamben_use_2015]에서 ‘사용’ 개념을 통해 서구 존재론이 고착화시킨 본질/실존, 잠재성/현실성,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사용(chresthai)’은 단순히 도구처럼 쓰는 의미를 넘어, 주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 몸, 타자와 맺는 존재론적 관계를 가리킨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네르게이아(energeia)’ 개념과도 겹치지만, 아감벤에게 있어 ‘사용’은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존재와 그 과정에 ‘포함되는’ 존재가 분리되지 않는, 곧 실천 속에서 주체와 행위가 동시에 형성되는 흐름을 가리킨다. 주체는 어떤 대상에 작용하거나 외부에서 행동을 지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행동이 일어나는 과정과 장소 자체가 되며,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곧 삶의 형태(form-of-life)—를 그 안에서 구성해 나간다. 이러한 ‘사용’은 정해진 목적에 종속되지 않으며, 행위의 효율이나 결과보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성과 감응의 방식을 강조한다. 이는 푸코가 말한 “자기 돌봄”의 윤리와도 연결되며,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관계가 아니라, 자신과의 접촉면을 지속적으로 감각하는 실천으로 이해된다. 일기 쓰기는 바로 이러한 ‘사용’의 한 형태로, 삶을 고정된 구조로 정리하거나 결과로 환원하지 않고, 반복되는 감각의 리듬 속에서 삶을 ‘사용’하고, 존재를 재구성해 나가는 실천이다. 이는 단지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순간을 다시 살아보는 일이며, 정동의 여운 속에서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을 실험하는 행위다. 이처럼 ‘사용’은 행위와 장소, 감각과 접촉이 분리되지 않는 실천으로 나타나며,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이 몸과 세계를 잇는 감응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는 ‘공간의 사용(use of space)’이라는 감응적 실천으로 논의를 확장한다. 만약 일기 쓰기가 삶의 리듬을 감각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라면, 공간을 사용하는 행위 역시 특정 목적에 따라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감각, 몸의 흔적, 반복되는 경로를 통해 삶과 관계를 다시 구성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공간을 ‘점유’하거나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자신과 세계 사이의 감응적 접촉면을 열어두는 실천이다. 이처럼 공간의 사용은 기능적 소비가 아니라, 반복과 여백, 감각과 기억의 리듬을 통해 다시 살아내는 방식이며, 이는 서도호의 작업 속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DB91A6B2-ECAB-4305-90F7-5BEBDEFD2B24_1_201_a.jpeg]]
아감벤이 ‘사용’을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사유했듯이, 공간의 사용 또한 감각적 리듬이 발생하고 반복되는 일상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응적이고 수행적인 일기적 실천의 관점은 다양한 공간 작업들 안에서 감각의 리듬과 미완성적인 존재 형식들을 드러내는 예술 실천으로 확장된다. 서도호의 작업은 이러한 관점에서,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고 공간 속에 기억을 남기는 주체가 어떻게 반복과 이동, 재구성의 실천을 통해 자신을 다시 형성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천으로 된 가옥 구조물이나, 일상의 경계와 기억의 잔재를 담아낸 설치들은 모두 하나의 고정된 자아나 과거를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반복적인 감각과 이동의 궤적 속에서 주체와 공간을 함께 떠도는 흐름으로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일기적이면서도 비서사적이며, 감각과 리듬 속에서 기억과 주체를 감각적으로 조율하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특히 그의 《Staircase, 2016》은 평면화된 공간 구조를 통해, 우리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정적인 형상이 아니라 감각적 여백으로 다시 열어놓는다. 이 작업은 젤라틴 조직 위에 실로 계단을 1:1 스케일로 봉합한 후, 물에 적신 종이에 올려 조직이 부분적으로 용해되도록 하는 과정을 거쳐 3차원 공간의 구조를 평면적인 재료 위에 압착하듯 새기며, 감각의 깊이를 가진 얇은 입체 구조로 다시 펼쳐낸다. 그 결과 계단은 더 이상 기능적 구조물이 아니라, 축적된 감각과 기억의 리듬이 스며든 공간적 흔적으로 변모하며, 건축적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개인적 기억과 감각의 축적된 흔적을 공간적으로 펼쳐 보일 수 있는가 질문한다. 반투명한 직물로 재현된 계단은 기능적 통로가 아니라, 발의 흔들림과 손의 스침, 몸의 방향 감각과 정동적 긴장처럼, 주체가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접속했던 감각의 잔재들을 불러낸다. 계단의 반복성은 매일의 오르내림 속에서 체화된 감각의 응축이며, 익숙한 움직임 속에 지연된 시간성과 기억의 여백을 드러내고, 바라보는 사유의 표면이자 감응의 지형으로 작동한다. 정면에서 마주하는 이 작업은 쓰여지지 않은 채로 남겨진 일기의 한 장처럼 작동하며, 체화된 감각적 흔적들 속에서 기억과 감각을 다시 접속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작업은 완성된 건축이 아니라, 반복과 이동, 감응의 여백으로 이루어진 존재론적 장으로서 ‘집’과 ‘기억’을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 아감벤이 ‘몸의 사용’을 정동적이고 관계적인 실천으로 사유했듯, 주체를 수행하는 일기 쓰기 역시 특정 목적이나 형식에 종속되지 않은 감각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사용의 논리는 비단 글쓰기만이 아니라, 우리가 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에도 적용되며, 삶을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는 공간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과정 또한 반복과 리듬, 감각을 통한 수행의 형태를 띤다. 만약 일기 쓰기가 삶의 리듬을 감각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라면, 공간을 사용하는 행위 역시 그 안에서의 감각, 몸의 흔적, 반복되는 경로를 통해 삶과 관계를 다시 구성하는 실천으로 사유될 수 있다. 이는 단지 공간을 점유하거나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속에서 감각과 기억, 정동적 반응을 매개로 존재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서도호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공간의 사용’이라는 개념을, 감각적 리듬과 수행의 관점에서 구체화하고, 일기 쓰기가 고정된 자아를 재현하지 않고 매 순간 자신을 다시 조율하는 비완결적 실천인 것처럼, 공간 역시 감각과 기억 속에서 반복적으로 새롭게 경험되는 살아 있는 장소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서도호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들뢰즈가 말한 ‘습관’의 개념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들뢰즈에게 습관은 단순한 반복적 행위가 아니라, 감각적 경험이 시간 속에서 자신을 응축시키는 방식이며, 기억 이전의 수동적 종합으로서 신체에 각인된 시간의 형식이다. 《Perfect Home: London, Horsham, New York, Berlin, Providence, Seoul》 (2024)에서 트레이싱된 수많은 문 손잡이, 스위치, 전기 콘센트까지 이어지는 매일 반복되는 작은 접촉들, 불을 켜기 위해 손을 뻗는 동작, 문을 여는 손목의 회전, 창틀을 밀던 팔의 방향 등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는 방향, 익숙하게 몸이 반응하는 감각의 지층을 드러낸다. 감각은 반복의 흔적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과 시간을 구성하는 비서사적 작용으로 기능한다. 감각의 리듬으로 퇴적되고, 이러한 감각의 배열은 시각적 정보의 축적은 넘어 몸이 반복적으로 반응했던 감각의 습관이 새로 구조되어진 사각형의 공간 속에 다시 배치된 결과로 읽힌다. 이에 더 나아가 이 작업 속에서 그는 단순히 건축적 구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닿았던 사소한 지점들과 그 위치적 관계를 시각화함으로써, 공간을 ‘사는 법’에 대한 사유로 확장한다. 서도호는 이러한 퇴적된 "삶"의 감각을 하나로 재배치함으로써,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단지 회상이나 서사적 재현에 의존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체화된 감각의 리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습관은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매번 새로운 감각적 차이를 생성하며, 서도호의 작업은 바로 그 반복과 차이의 감각적 중첩의 장을 지형으로서 공간을 재구성한다. 이렇게 구성된 공간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다시 거주할 수 없는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기억되고 재배치될 수 있는 구성적 흔적들의 집합으로 삶의 흐름이 응축된 감각의 장이며, 시간의 흔적이 무의식적인 리듬으로 발현되는 일기적 표면이 된다. 《Perfect Home》이 감각의 흔적들을 입체 구조물의 벽면마다 분산적으로 배치하여, 몸의 반복적 제스처들이 구성한 감각의 리듬을 시각화하고 있다면, 《Rubbing/Loving Project: Unit 2, 348 West 22nd Street, New York, NY 10011, USA》(2014–2023)에서는 이러한 습관들이 감각적 접촉의 잔재들이 유리 액자 안에 나뉘어 배열되며, 이러한 수행은 감각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을 넘어서, 정서적 기억을 물리적으로 층위화하는 시도로 나타난다. 유리 액자 안에 나뉘어 배열된 표면들은 감각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구분하며, 감응의 리듬을 조직한다. 이러한 분류적 수행은 단지 감각을 보존하거나 기록하는 차원을 넘어, 기억을 다시 살피는 몸의 반복적 행위와 결합되며, 감응적 리듬의 공간을 구축해 나간다. 이 프로젝트에서 서도호는 20여 년간 거주했던 뉴욕의 임대 아파트 내부를 대상으로, 벽, 바닥, 환풍구, 조명 스위치, 욕실 설비 등 공간의 세부를 하나하나 종이에 떠내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작업은 건축적 기록을 넘어, 감각과 기억을 수행적으로 조직하는 실천이되며, 기억과 감각이 동시에 작동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마주하는 행위가 된다. 그는 표면을 마스킹한 순간 “그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하며, 오직 문지름이라는 촉각적 행위를 통해서만 망각된 기억이 불쑥 되살아난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떠낸 표면은 공간을 단순히 보존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접촉의 흔적과 퇴적된 감각을 종이 위에 물리적으로 각인하는 작업이다. 그는 각 영역마다 다른 색을 사용해 표면의 감각적 다층성을 드러내며,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 조각들을 차곡차곡 접어 이동 가능한 형태로 보관한다. 이때의 ‘집’은 더 이상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감각과 기억의 리듬이 축적된 이동 가능하고 수행적인 공간, 곧 개인의 일상적 행위가 남긴 감응의 지층으로 전환된다. 서도호는 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몸의 반복적 제스처들을 공간 위에 재배치하며, 공간의 사용을 일기적 기억의 수행으로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 결론
자아는 언제나 숨의 여백에 머문다. 우리는 이 여백 속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갈 수 있을까? 매일 매일 새롭게 만들어지는 혹은 연장되는 일기는 주체의 진실성과 어떻게 연결, 혹은 그것을 배반하는가? 일기란, 그 여백을 따라 흘러가는 감응의 선율이며, 마침내 말해지지 않는 것과 함께 머무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 지연된 자리에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과 채 이름 붙지 않은 상태들, 정주하지 않는 자아의 농도 속에서 살아 있는 사유를 맞이한다. 그것은 응고되거나 닫히지 않으며, 스스로를 드러내지만 선언하지는 않는다. 일기는 자아를 직접 서술하지도, 그 실루엣을 지우지도 않는다. 오히려 문장의 결, 침묵의 울림, 빛의 편차를 통해 자아라는 흔적을 감각적으로 지연시키며, 스쳐 지나가는 빛의 긴장, 문장의 절제, 정적의 무게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게 한다. 여기서 만일 어떤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형상화되지 않는 것에 대한 주의 깊은 머묾의 정치, 아직 형성 중인 것들과 함께 거주하는 태도일 것이다. 사유하고, 만들고, 써내려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명확히 밝히는 일이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않은 의미의 들판에 머무는 일이다. 그렇기에 일기는 서사로 닫히지 않고, 리듬으로 열려 있으며, 기억이라기보다 변조로 존재하고, 자아라기보다는 통과하는 분위기으로 남는다. 나는 일기를 반복과 침묵, 감각과 리듬의 비형식적 흐름 속에서, 고정된 형식이나 자아의 반영이 아닌 감응적 실천의 장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쓰여진 것과 쓰이는 것, 서술과 침묵 사이에서 일기는 감각의 접촉면이자 응답의 장소로 작동하며, 생성되고 있는 삶의 여백을 감각적으로 붙잡는다. 이처럼 일기는 미완성의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주체의 감응적 형식이며, 반복 속에서 차이를 생성하는 존재의 윤리적 제스처로서, 삶을 다시 구성하는 사유의 리듬이 된다.
일기의 역사적 위치를 시작으로 일기를 서사와의 대립을 통해 분석한 블랑쇼, 그리고 창조적 관조의 형태의 습관과 일상성의 연결을 통해 이 글은 일기를 단순한 회고적 기록이 아닌, 리듬과 상상력, 차이와 미완성성을 통해 구성되는 생성적 실천으로 재위치시킨다. 일기 쓰기는 ‘지연된 형식화’로서, 반복 속에서 차이를 생성하고, 서사 이전의 시적 충동과 삶의 형식을 조율하는 주체의 잠재성을 드러낸다. 들뢰즈는 반복 속에서 생성되는 차이를 통해 일기 쓰기를 감각적 리듬과 차이의 응축으로 이해한다. 이 반복은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미시적 생성의 자리다. 이 생성의 과정을 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확장하는 것이 시몽동이다. 그는 '개체'란 이미 완성된 자아가 아니라, 전개체적 상태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과정임을 보여주며, 일기의 파편적 반복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재조정되는지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아감벤은 이 반복과 생성의 흐름을 ‘삶의 윤리적 사용’이라는 차원으로 이끈다. 그는 습관, 사용, 잠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일기 쓰기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고유한 사용방식이자 형식화되지 않은 존재 방식임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나는 일기를 형성하는 일상성의 리듬은 단순한 시간적 반복이 아니라, 감각의 수축과 기억의 응축을 통해 삶의 구조를 구성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감응적 사유는 예술 실천 속에서도 또 다른 리듬으로 나타난다. 서도호의 작업은 일기 쓰기처럼, 정주하지 않는 감각의 흔적들을 반복과 이동 속에서 응축하며, 고정된 자아나 기억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생성적 여백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그의 공간적 구성들은 기능적 공간이 아니라, 몸이 스쳐간 감각의 흔들림과 습관의 궤적이 겹쳐진 리듬의 장소이며, 매번 다르게 구성되는 ‘살아 있는 집’이다. 여기서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배경이 아닌, 삶을 ‘사용’하는 감응의 면이자, 반복과 접촉, 시간의 수축이 발생하는 수행의 표면으로 펼쳐진다. 습관은 기억 이전의 수동적 종합으로서, 몸과 감각 속에 퇴적된 시간이며, 그의 작업은 이러한 미세한 반복의 리듬을 통해 공간을 감각적으로 다시 쓰고, 주체를 비형식적인 흐름 속에서 조율한다. 집의 표면을 문지르고, 공간의 요소들을 재배열하며 구성된 감각적 아카이브는 일기의 한 페이지처럼, 말해지지 않은 경험과 잠재된 정서를 담아내는 실천의 흔적이다. 반복되는 감각의 리듬은 공간과 쓰기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감응하는 몸의 흔적을 통해 존재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문장이 된다. 이러한 비완결적 형식 안에서 우리는 자아를 선언하지 않고 감응하는 존재, 살아 있는 여백 속에 거주하는 주체를 다시 상상하게 된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일기를 일기적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함으로 주체 개념 속에서 놓치기 쉬운 빈 공간을 채우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일기 쓰기의 반복은 동일한 자아의 확증이라기보다, 차이를 감각하는 주체의 리듬을 조율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하며, 이 반복은 특정한 리듬을 보존하거나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지 않은 감각적 강도와 정동적 긴장의 차이를 지각하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 개념이 보여주듯, 감각은 항상 어떤 과거와 접속되며, 그 지연된 응축의 층위에서 리듬은 형성된다. 반복은 기억과도, 시간과도, 몸과도 연결된 채 정동의 시간성을 조율하는데, 이러한 리듬은 외부로부터의 강제된 박자가 아니라, 지연되고 불균등한 감각의 두께에서 도출되는 비형식적 시간의 흐름이다. 일기란 이 감각적 리듬에 접속하는 쓰기이며, 이때 쓰기는 세계에 대한 응답 이전에, 자신이 형성되어가는 시간에 머무는 것이다. 아감벤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러한 쓰기는 어떤 삶의 ‘형식’을 복제하거나 증명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형식 없는 삶’을 지속하는 실천이다. 그는 ‘사용’(uso)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능이나 목적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방식들을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일기 쓰기는 그러한 ‘사용’의 방식에 속한다. 그것은 완결된 형식으로 봉인된 자아의 문장이 아니라, 사용되고 흐르며, 반복되고 열리는, 살아지는 삶의 시간 속에서 계속 쓰이는 어떤 것의 실천이다. 따라서 일기는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문서가 아니라, 사라지는 삶의 리듬에 반응하는 하나의 실천이 된다. 그것은 감각의 차이를 지각하는 방식이며, 반복 속에서 자아를 다시 구성하려는 손짓이다. 그리고 끝내, 쓰기를 통해 살아가는 삶의 리듬에 조용히 머무는 윤리적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