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omantic artists > 한마디로, 예술가란 자기가 만든 규칙에 복종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규칙을 고안하고, 창조할 대상들을 궁리한다. 소재는 자연이 제공할 수도 있지 만, 다른 모든 것은 그들이 만든다.” [@berlin_nangmanjuyiyi_2021, 168] 헬렌 몰즈워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50분 동안의 독서는 자아에 대한 탐색과 수행에 다름 아닙니다. 이 비디오는 우리 모두가 '자전적 소설'의 행위자이며, 우리는 책의 페이지를 통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책을 낭송함으로써 자신을 알고 발명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Helen Molesworth stresses the “excremental” reading of the Copperheads in “Long Life Cool White: An Introduction to Moyra Davey,” in Long Life Cool White: Photographs and Essays by Moyra Dave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Art Museums, 2008), p. 17.] 이것이 데이비의 비디오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수신자라고 피프티 미닛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진의 의미이거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데이비에게 가장 기초적인 또 다른 비유가 등장합니다. 멜랑콜리는 지식을 위해 세상을 배신합니다. 그러나 끈질긴 자기 몰입으로 죽은 사물을 관조하며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 포용합니다. Walter Benjamin, The Origin of German Tragic Drama 그녀의 시선은 어디엔가 움직이는 무엇인가에 고정되어 있는다. 그녀의 몸 위에, 숲 속의 땅 위에, 달리는 기차에, 그리고 움직이는 배 위에 고정되어있지만 흘러가는 그녀의 시선은 공간을 통해, 그리고 공간을 영토화하는 방식을 경계의 수호가 아닌 **공생과 교환의 가능성**으로 접근하는 그녀의 작업은 자아와 비자아 간의 관계를 확장한다. 여러 공간의 병렬적으로 배치를 통해 Prodger는 자아를 고정된 개념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간접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신체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카메라의 움직임,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녀의 shaky hands를 통해서만 엿볼 수 있다. 여러 목소리와 소리들이 서로 다른 공간들의 transition을 연결하고, 이를 통해 **위치성**(whereness)을 해체하며, 다층적인 대화를 형성합니다. 그녀의 대화는 어디엔가 존재하지만 프레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bodies는 geography를 통해 유동한다. 이러한 유동성은 *SaF05* (2019)에서 transportation에서 그녀의 신체로 transition한다. 그녀의 발은 끊임 없이 공간의 변화를 주도하며 lioness의 움직임과 빨라진 샷 change와 zoom change는 더욱 강렬한 공간의 분열을 주도한다. 프레임 속에 보여지는 것이 바닥인지 벽면인지 분명하지 않다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있는지 정면을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텍스처는 고정되었다가 빠르게 변화하고 비가 오는 물방을 자국을 통해서 잠시나마 현재 향하고 있는 것이 아래라는 것을 분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전작들에서 그녀 자신을 layers들과 흔적들, 카메라 움직임과 프레임 속으로 들어간 손가락, 을 통해서 점점 두껍게 쌓아갔듯이 lioness의 흔적과 감시카메라를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은 다시한번 그녀의 프레임 위로 두텁게 공간을 쌓아간다.